93화
“글쎄. 허약이 녀석이 제법 늘긴 했는데 말이야. 린 녀석이 좀 유별나다 보니.”
“음…….”
틈틈이 영주 성에 들를 때마다 린을 살펴보던 백랑은 최근에 듀발과 린 모두를 옆에서 지켜본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승부의 결과를 가장 정확하게 예측할 만한 사람인데 아무래도 그는 린의 우세를 점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와라! 마녀!”
“헤헤. 그래, 간다. 허약이! 얼마나 늘었나 한번 보자고.”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바로 몸을 날려 거병인 린지애로 강하게 내려치는 린.
공중에서 내려치는 일격은 파괴력이 상당하지만, 허공에 떠있는 상황에서는 상대의 공격을 피하기 힘들고 무거운 일격을 내리친 후에도 허점을 드러내기 쉬워 대부분 꺼리는 공격이었다.
게다가 저렇게 상대의 키보다 더 높은 곳으로 뛰어버리면 찌르기 공격에 취약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기세만은 정말 엄청났다.
와, 쟤 뭐야? 어떻게 저 거리에서 저런 점프를? 대체 어떻게 돼먹은……. 진짜 미친 피지컬이네.
듀발은 이미 여러 번 겪은 일인지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것은 찌르기 공격이 아니라 방패로 막는 거였다.
“차라리 찌르기가 낫지 않았나. 흠, 너무 소극적인데.”
“에이, 오빠. 예전에 저 상태에서 찌르기 하다가 린 언니가 검날을 차고 다시 뛰어오르는 바람에 완전 망한 적이 있었거든.”
어느새 로빈에게 다가온 세이라가 둘의 대결을 설명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같이 어울리던 세이라는 그 둘의 대결을 자주 지켜봐왔기 때문에 로빈보다 둘의 성향을 더 잘 알고 있었다.
“응? 검날을 찬다고? 그게 말이나……. 아아, 저거 목검이지. 아니, 그래도 그렇지. 공중에서 그게 된다고?”
물론 진검이면 거의 할 수 없는 기예인데다 잘못하면 더 위험할 수 있는 무모한 퍼포먼스였지만 목검이라도 그런 걸 할 수 있다는 말에 로빈은 그저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착지점에서 강한 일격이 들어갔다.
물론 듀발은 침착하게 방패로 막아냈고.
하지만 일격이 너무나 강력해서인지 방패로 막아낸 듀발이 충격에 허덕이고 있었다.
“음……. 확실히 듀발 오빠가 많이 늘었나 봐. 예전에는 저걸 얻어맞고 뒤로 넘어가기도 했거든? 지금은 그래도 안정적으로 막았잖아?”
“…저게?”
안정적으로 막은 것치고는 제법 흔들리던데 안정적으로 막은 거란다.
대체 평소에는 어떻게 대결했던 거니, 듀발? 설마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건 아니겠지?
“헤~ 허약이, 제법인데! 좋아!”
“큭! 이 마녀!”
린은 최초의 일격으로 듀발의 균형을 살짝 무너트린 후 뒤이어 이격과 삼격을 연달아 날렸다.
세이라의 단검이면 방패로 막기만 해도 전혀 피해가 없었지만 린의 거병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듀발이 분명 최대한 침착하게 잘 방어하고 있지만, 충돌에서 오는 피해 누적도 생각해야 했으니 말이다.
지금 딱 봐도 린의 무지막지한 공격을 계속 막아내는 듀발의 표정이 상당히 일그러져 있었다. 저래서야 막아도 막은 게 아니네.
린. 진짜 뭐, 저런 괴수 같은 녀석이 다 있어?
저러면서 나한테 한 판 뜨자는 건 정말 미친 거 아니야? 혹시 영주 암살이냐? 도대체 누구에게 사주를…….
로빈이 당황하는 동안에도 대결은 계속되었다.
미친 듯이 공격하는 린과 이를 바득 갈면서 어떻게든 막아내는 듀발.
하지만 듀발의 상황이 더 안 좋아 보였다. 대충 버티면 알아서 체력이 떨어질 세이라와 달리 린은 기본적으로 체력과 근력이 더 대단한 상대였기 때문이었다.
저렇게 계속 진행되면 막다가 쓰러지는 상황이 연출될 것이 분명했다.
“오호, 허약이 녀석…….”
백랑이 작게 중얼거리는 순간 변화가 시작되었다. 린의 무식한 공격을 겨우겨우 막아내던 듀발이 그녀의 공격을 조금씩 흘려내기 시작한 것이다.
방패에 직격하는 경우에는 누적되는 피해가 커지지만 저렇게 흘려내면 최소한의 피해로 공격을 막을 수 있게 된다. 몇 번의 방어 끝에 듀발이 드디어 그녀의 공격 템포를 완전히 읽어낼 수 있게 된 거 같았다.
저렇게 되면 결국 먼저 지치는 것도 린이 될 가능성이 컸다.
“오! 듀발 오빠. 완전 달라졌어!”
세이라의 말을 들어봐도 지금까지 듀발이 저런 모습을 보여준 것은 처음인 모양이다.
예전에는 그나마 방어에는 성공하지만 결국 충격이 누적되어 실신해 버리는 형태로 마무리되지 않았을까?
“에잇! 허약이 녀석!”
린도 상황을 파악했는지 인상이 구겨져 들어갔다. 그리고 뭔가 결심한 듯 한 발 물러서더니.
“어?”
아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듀발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마치 아까 세이라가 듀발을 공격한 거처럼 폭발적인 속도였다.
“저거……. 마나죠? 마나를 이용한 가속 같은데요?”
“그러네. 오, 린 저 녀석…….”
발군의 신체 능력을 갖춘 린이지만 마나를 다루는 것에는 조금 미숙했다.
단적으로 마나를 느끼는 것만 생각해도 그랬다.
실비아와 거의 같은 시기에 마나를 느껴 둘의 마나적 재능이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때 이미 린은 실비아보다 한 살 많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책만 읽은 실비아에 비해 린은 어렸을 때부터 대수림을 뛰어다니며 부족 아이들과 몸을 단련했다.
결국 린이 실비아보다 마나적 재능이 많이 부족하다는 거였다. 물론 완전 노답인 로빈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이 뛰어났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런 마나적 재능을 커버한 것이 빼어난 신체 능력과 검을 다루는 센스였다.
그런데 대체 언제 저런 마나 제어 능력을 길렀는지.
“어? 와……. 미친.”
“응? 영주님, 무슨 일이야?”
“아뇨, 아니에요.”
하. 진짜 더러운 세상이네, 정말. 허허허. 저게 저런 거였어? 진짜 미쳤나?
이름: 린
성향: 호전적. 도전적. 순정
타이틀: 마나의 사랑을 받는 자(L). 흑표범의 강인한 육체(R). 흑표범의 놀라운 탄력성(SR)
린의 타이틀 재능의 탐닉(O)이 마나의 사랑을 받는 자(L)로 변해버렸다.
아마 원래 저런 타이틀인가 본데, 이게 저렇게 되면…….
전천후 최종 병기의 탄생인가?
미친 신체 능력에 세이라급으로 마나를 다루는 괴물이라고?
저건 정말 답이 없었다.
로빈은 린이 각성(?)한 순간 듀발에게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듀발은 그 와중에도 죽을힘을 다해 버티고 있었다. ‘와, 저게 저렇게 돼?’라고 생각할 정도로 불합리한 상황이었지만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듀발에게는 다행히도 이제 갓 진짜 마나의 세계로 발을 내디딘 린은 폭발적인 공격을 계속 쏟아부을 순 없었다.
결국 폭풍같이 몰아치는 린의 공격을 죽을힘을 다해 모두 막아낸 듀발은.
이름: 듀발
성향: 충직. 보은. 독기
타이틀: 노력도 재능(U). 방패술의 달인(R). 철벽같은 의지(U)
진짜 제대로 된 타이틀 두 가지를 개방.
그 뒤로는 더 수월하게 린의 공격을 막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치열한 공방은 잠시 후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고 듀발은 겨우 버텨 선 상태로 간신히 방패만 들고 헐떡이고 있었다. 물론 온 힘을 쥐어짜 공격을 퍼부은 린도 실신 직전이긴 마찬가지였고.
결국 이렇게 대결이 마무리되는 분위기였다.
아니, 이게 뭐라고 저렇게까지 하는 거야?
아우… 이 녀석들……. 정말 사랑한다!
전력 상승은 언제나 옳은 거지! 그럼그럼.
하지만 자신이 이기지 못했기 때문인지 린은 울먹이며 로빈에게 달려왔다.
아니, 저렇게 듀발을 떡실신시켜 놓고 이러면…….
대체 뭘, 어쩌라는 거냐, 요 녀석아?
로빈도 당황했지만 어쨌든 울먹이며 달려드는 린을 안고 머리를 쓰다듬어줄 수밖에 없었다.
“흑. 못 이겼어! 주인. 허약이 따위도 쓰러트리지 못하다니……. 난 쓸모없는 거야? 주인 옆에 있으면 안 되는 거야? 우리 부족은 다 쫓겨나고?”
이건 또 무슨 신박한 개소리야?
쓸모는 또 뭐고, 부족이 어딜 가? 모야족이 없으면 영지가 망하는구만.
당황한 로빈이 그나마 유일한 어른인 백랑에게 어떻게 하냐는 눈빛을 보냈는데 백랑이 움찔하고 눈길을 피한다.
저건 분명 뭔가 잘못이 있는 사람이나 보이는 반응인데?
어? 설마……?
“저, 백랑 님. 내가 무슨 오해를 한 게 아니라면 누가 린에게 이상한 소리를 한 거 같은데요. 흠. 무슨 남쪽 마을의 족장님이라든지, 아니면 린의 아버지라든지, 어쩌면 월아 님 남편이라든지 하는 사람이 말이에요. 그 사람 말고는 린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사람은 없는 거 같거든요?”
“흠흠. 아니, 영주님. 그게……. 사실 그렇잖아. 모야족 계집을 소영주가 왜 데리고 가겠어? 훗날 침상 호위 겸 노리개로 쓰려고 데려가는 거겠지. 몸매도 죽이고 침대에서는 더 죽이고, 적은 더 잘 죽이는 여자가 되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경고한 거였는데. 아, 물론 처음에는 그랬다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그러니까 이야기는 로빈이 처음 린을 데려가겠다고 한 날로부터 시작된다.
백랑은 로빈의 말을 오해해 린에게 몇 가지 당부를 했단다.
네가 최고가 아니라면 로빈의 곁에 있을 가치가 없고, 그러면 당연히 우리 모야족도 대수림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니 여자로서도, 전사로서도 최고가 되어야 한다.
뭐, 이런 내용이었다.
린은 아버지 백랑이 월아를 침대 위에서 어떻게 가지고 노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인 월아가 얼마나 백랑을 즐겁게 해주는지도.
결국 린은 자신이 월아를 똑 닮아 노리갯감으로는 당연 최고일 테니 그냥 전사로서 강해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거였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했던 그녀가 시간이 지난 후 자신의 성격대로 편하게 다가올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이 또래 중 가장 강하고 그렇기 때문에 쓸모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 자신감이 깨어진 것인데.
솔직히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그게 벌써 몇 년인데 아직까지 그걸 믿고 있었나?
덩치만 커졌지 정신 연령은 여섯 살 그대로였다. 이건 뭐…….
“하, 그럼 수정을 좀 해주셨어야죠. 요 녀석은 계속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잖아요.”
“하하. 잊었어. 워낙 일들이 많았잖아.”
“…그래도 최소한 침대 노리개란 말 정도는 빼주셨어야죠.”
“응? 그걸 왜 빼? 그건 그냥 확정된 사실인데. 내가 맨날 그걸 부족들에게 자랑하는데 그걸 빼면 안 되지. 하하.”
잡았다! 요놈. 부족민들이 왜 아직까지 이상한 소리를 하는가 했더니 당신이 범인이었구만!
대체 그게 뭐라고 자랑까지 해?
로빈은 어이가 가출한 상황에서도 우선 린을 달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가능하면 이 기회에 쓸데없는 오해도 좀 없앨 생각으로 말이다.
울먹이는 린을 달래는 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쓰고 말았다.
듀발과 린의 나이를 들먹이며 같은 나이였으면 상대도 안 됐을 거라든지, 듀발이 더 지쳤으니 네가 이긴 거라든지, 지금도 네가 최고라는 둥의 이야기에다가 넌 여자로서도 최고라 맛깔(?)나게 잘 자라고 있다는 이야기, 좀 더 크면 미끈하게 뻗은 허벅지만 봐도 발딱 설 거라는 둥의 낯 뜨거운 아무 말 대잔치까지 한 후에야 겨우 정상으로 돌아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처음의 의도와 달리 저런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기 전에는 자신의 말을 전혀 들을 생각도 안 하는 린 덕분에 결국 오해를 푸는 것은 실패하고 말았다.
하, 우울하다. 그냥 될 대로 돼라.
이젠 그냥 무념무상이었다.
모든 건 백랑의 잘못된 교육 탓인데 대체 왜 자괴감은 내 몫인 건지 정말 어이가 없었다.
게다가 저 아저씨는 당황스럽게도 내가 린에게 성희롱 조의 음담패설을 내뱉을 때마다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대체 뭐야?
아우, 저걸 진짜. 언젠가 한 번은 명치를 X나 세게 때리고 말리라.
그렇게 린을 달래준 후 지쳐있는 듀발에게 다가가 찬사를 보냈다.
“오, 듀발. 이젠 진짜 뒤를 맡길 수 있겠는데. 멋있어졌네.”
“하하. 과찬의 말씀입니다. 아직 멀었죠. 언젠가는 저 마녀를…….”
쑥스러운 듯 웃으며 다시 각오를 다지는 듀발.
하지만 왠지 오늘 이후 듀발의 선전을 다시 볼 수는 없을 거 같았다.
린이 각성해 진(眞)린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마나적 재능이 부족한 린이 세이라의 재능을 탐해 저런 타이틀을 얻어버렸으니 뭐, 이젠 진짜 괴수 탄생이었다.
아마 소설에 악역으로 나왔던 그 암살자 린보다 더 강한 존재가 되지 않을까?
하지만 굳이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괜히 벌써부터 전의를 상실시킬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몸소 겪으면 알게 되겠지.
훗날에 듀발을 정말 진지하게 달래줄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혹시나 해 세이라를 살펴봤는데 재능의 탐닉(O)이 상대의 재능을 약탈하는 타이틀은 아니었는지 세이라도 자신의 재능을 얌전히 잘 가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가장 갈구하는 어떤 재능을 복사해 습득하는 타이틀인 모양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