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상한 소설 속 로빈-94화 (94/303)

94화

“주인! 나도 마을에 남아서 실전 훈련에 들어가겠어. 저 허약이가 불과 7개월 만에 저렇게 되다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야!”

로빈이 듀발을 치하하는 모습을 보고 다시 불이 붙었는지 린이 주먹을 움켜쥐며 분연하게 외쳤다.

“맞아! 나도!”

거기다 망둥이가 덩달아 뛰듯 세이라까지 저러고 있었는데.

린은 몰라도 일곱 살 세이라가 여기서 지내는 건 절대 무리였다. 말도 안 되고.

“응. 넌 안 돼, 세이. 얌전히 집으로 돌아가자. 린은 생각 있으면 백랑 님한테 물어봐. 확실히 넌 지금부터 실전에 들어가도 되긴 하겠다.”

“응, 주인. 최고가 돼서 돌아갈게.”

아니, 여기에 대전사라는 흑웅도 있는데 최고가 되는 건 어림도 없지. 적당히 하고 전사가 되면 돌아와. 넌 따로 대검 쓰는 법도 배워야 하잖아. 정작 중요한 대검에 관한 재능이 개화하지 않았다고.

당장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뭐, 그래. 잘해봐. 응원해 줄게.”

굳이 초를 치고 싶지는 않아서 좋게 대답하고 말았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녀석이니 서두를 필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굳이 사기를 꺾고 싶지도 않았고.

어쨌든 아무래도 린이 당분간 이곳에서 머물게 될 거 같았다. 듀발과 둘이 티격태격하는 것도 볼만은 하겠군.

훗날의 일이지만 집으로 돌아간 세이라는 결국 가족들을 설득해 남쪽 마을로 내려가고 말았다. 아들인 자신은 절대 남쪽 마을에 얼씬도 못 하게 하더니 대우가 너무 달라 당황스러울 정도였는데.

재능 꽝인 자신은 완전 폭망이지만 재능 충만한 세이라는 금방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을 거라나?

사랑스럽다는 딸내미를 너무 강하게 키우는 거 같아 어이가 없었지만,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남쪽 마을도 예전과 달리 이젠 제법 안전한 편이었고.

* * *

다음 날, 드디어 흑웅의 결혼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모야족 전통 혼례식.

솔직히 혼돈과 경악의 연속일 거로 생각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무난했다.

적어도 키스 대신 펠라티오를 하는 거처럼 말도 안 되는 이벤트는 없었다는 뜻이었다. 뭔가 파격적인 것을 기대하던 로빈이 자신도 모르게 살짝 실망하는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실망하는 자신의 모습에 깜짝 놀라 자괴감에 시달린 것은 덤이었지만 어쨌든 그랬다는 거다.

그나마 조금 다른 면은 신랑, 신부의 마지막 입맞춤이 상당히 농염했다는 정도였다.

깊은 입맞춤 중에 흑웅의 손이 세나의 몸 여기저기를 누비며…….

대체 어디까지 들어가는 거야? 여기서 신방이라도 차릴 생각입니까?

이런 생각이 들 때쯤 하객들이 거친 박수를 보냈고 흑웅은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세나에게서 겨우 떨어졌다. 물론 그 후에 세나에게 거친 응징을 당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고.

그리고 오늘 혼례를 치르는 커플은 흑웅만이 아니었다.

다른 전사 네 쌍이 그 후에 연달아 혼례를 치렀고 그 혼례를 모두 백랑이 주관했다.

여담이지만 저렇게 족장의 주관 아래 혼례를 치르는 것도 전사들만의 특권이란다. 자신 같으면 절대 백랑 따위(?)에게 혼례를 맡기지 않을 텐데 저들은 저게 영광스러운 일이라니 참 어이가 없었다.

하긴 백랑도 자신에게나 엉뚱한 아저씨지, 부족민들에게는 믿음직한 족장이었으니 그들의 마음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혼례를 치르는 동안 린은 월아와 적호에게 꼭 잡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특히 월아가 뭐라고 할 때마다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왠지 등골이 싸해지는 기분이었다.

엄마가 딸에게 건네는 단순한 당부나 그런 거겠지. 시집가는 여러 처자의 모습이 남의 일 같지 않아 저러는 게 분명했다.

분명 그럴 거다. 그래야만 한다.

고개를 저어 잡념을 쫓아버린 로빈은 결혼한 모든 커플을 모아놓고 간단한 축하를 전했다. 행복하게 잘 살고, 영지를 위해 아이들을 순풍순풍 잘 낳으라는 간단하고도 당연한 덕담이었다.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어른들을 데려다놓고 이런 이야기를 하려니 뭔가 미묘하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위치가 그랬으니 애써 참착함을 잃지는 않았다.

식을 마친 후에는 흑웅에게 지난 이야기와 앞으로의 계획을 들을 수 있었다.

흑웅의 말을 들어보니 아내인 세나와는 제법 오랫동안 연애를 즐긴 사이란다. 대전사가 되는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빌빌대자 결혼할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아 시간을 끌었을 뿐이었다는데.

그리고 최근에 드디어 대전사가 되었고 다시 여유를 되찾자 결혼을 결심할 수 있었단다.

몇 년이나 기다려온 세나는 사과도 없이 당당하게 결혼하자는 흑웅의 말에 뭔가 속이 뒤틀려 거절해 버렸는데 흑웅은 그녀가 거절하자마자 가타부타 말없이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들고 와버렸단다.

이런 미친 상남자 같으니라고. 갑자기 사라져버린 여동생 때문에 속을 끓였을 하워드가 왠지 불쌍해지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며칠 동안 본의 아니게 감금되어 지내던 세나는 허락하기 전에는 절대 못 나간다는 흑웅의 강짜에 기가 막히면서도 오죽하면 저럴까 싶어 결혼을 허락했단다.

물론 예전부터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으니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무작정 여자를 납치해서 강간하면 당연히 사형이니 절대 그러면 안 된다.

“아후, 진짜 단장만 아니면…….”

그때의 일을 떠올리는지 하워드가 이를 바득 갈았다.

“그 기회에 계급장 떼고 한 판 하지 그랬어요? 쌓인 게 많았을 텐데요.”

그 모습이 재미있어 로빈이 슬쩍 말을 걸어봤는데 하워드는 뭔가 생각하더니 얼굴이 하얘지며 고개를 저었다.

“아휴. 안됩니다, 영주님. 저 인간이 처남이라고 봐줄 리가 없죠. 세나도 사실……. 저보다는 지 남편 편이나 들 몹쓸 녀석이고요. 에이, 더러워서 진짜.”

하긴 모야족치고는 융통성이 부족한 흑웅이 하극상하는 하워드를 용서할 리가 없었다.

아마 엄청 두들겨 맞겠지. 그걸 알기 때문에 하워드만 속상했던 것이고.

억울하면 출세해라, 하워드. 아니면 흑웅보다 더 강해지든지.

“그래서, 흑웅 님. 앞으로 검은 곰들은 다 이곳에 남는다고요?”

“예. 저희 기사단의 특성상 폴 경의 영지 기사단이랑 호흡을 맞추는 건 조금 불편했습니다. 북쪽 방벽은 영지 기사단만으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으니 인력이 더 많이 필요한 이곳이 저희의 자리가 맞는 거 같습니다.”

솔직히 맞는 말이었다.

사실 영지 기사단의 특수성과 특성이 너무 두드러져 모야족의 전사들이나 검은 곰이랑 호흡을 맞추기는 쉽지 않았다. 제대로 된 사냥을 나갈 때면 자기네들끼리 착착 맞춰서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움직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고.

“음……. 그건 그렇죠? 그쪽 기사단은 아무래도……. 하지만 오히려 나쁘지 않네요. 지킬 곳은 여기가 더 많으니까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앞으로도 아예 이곳에 자리를 잡으세요. 짝도 다 찾아주시고요. 아직 모야족 쪽은 처녀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거 아닌가요?”

“하하. 그거야, 뭐. 각자 알아서 하겠죠. 그런 일을 참견할 수야 있겠습니까?”

로빈은 이해가 안 됐다.

검은 곰 기사단이 이곳에 정착한 것도 벌써 몇 년이다. 게다가 여기는 기사, 그러니까 전사라면 최고의 남편감으로 인정받는 곳이고.

그런데 왜 아직까지 짝을 못 찾은 기사들이 저렇게 많을까? 설마 미인이 즐비한 모야족 마을에서조차 짝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높은 건가?

“뒤에 빠져 계시지 말고 무조건 올해 안에 다들 장가보내세요. 설마 검은 곰 남자들의 눈에 모야족 처녀가 마음에 안 차는 건가요? 그런 거면 따로 특별 교육에 들어가야 하잖아요? 앞으로 영원히 혼자 살 테니까요.”

“아~ 뭐, 그런 건 아닙니다. 이 녀석들이 그러니까……. 허허. 이걸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흑웅의 말을 들어보니 상황이 좀 달랐다.

기사급 능력자인 건 맞지만 뜨내기 인생으로 살다 보니 변변찮은 연애 경험은 없었고 창녀들만 상대해 왔던 이 검은 곰 인간들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천국이라는 생각에 희희낙락이었단다. 그래서 다들 이곳에 뿌리내릴 생각만 가득하였고.

하지만 이곳 여자들이 너무 적극적으로 나오는데다가 은근슬쩍 유혹까지 하니 움츠러들고 말았는데.

저렇게 예쁜 여자들이 자신을? 대체 왜?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원래 그렇잖습니까? 이유 없이 잘해주는 사람이 더 위험하고 꽃뱀이 아닌 이상 용병들에게 들러붙지 않으니까요.”

“끙.”

결국 사회 경험이 너무 많아 생긴 본능적인 경각심 때문에 제대로 된 연애를 못 한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좀 적응할 만하니 마을 이전이다, 혼 래빗 사육장 증축이다, 하면서 좀 바빴거든요. 겨울에는 당연히 대수림 쪽을 신경 써야 했고요.”

결국 계속 이쪽에 일을 맡긴 자신의 책임도 없진 않다는 말인데.

“그거야 그렇지만……. 하, 어쨌든 지금은 아니잖아요? 이쪽 분위기도 적응했을 테니 알아서 해결하라고 하세요. 무조건 올해 안에요. 등이라도 떠밀지 않으면 될 일도 안 되겠네요.”

“네. 알겠습니다, 영주님. 이제 슬슬 조금 한가한 가을이 되니 본격적으로 추진해 보겠습니다.”

아마 당분간은 크게 바쁜 일이 없으니 문제없이 가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적당히 연애를 즐기는 녀석들도 제법 있을 테니 문제없겠지. 등을 떠밀면 적당히 간만 보던 녀석들도 행동에 옮길 거 같았다.

몇 년이 지나면 더 바빠서 연애를 생각할 여유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그때 가서 무슨 큰일을 앞두고 ‘이번 원정을 마무리하면 꼭 그녀에게 청혼하겠어’ 같은 사망 플래그 따위를 던지는 놈은 정말 사양이었다.

죽기 전에 즐길 건 알아서 미리 다 즐겨야지 그게 무슨 웃긴 짓인가? 물론 다들 무사하면 가장 좋겠지만 말이다.

“그래요. 어쨌든 결혼 축하해요. 앞으로 잘 사세요.”

그렇게 흑웅에게 축하 인사와 검은 곰 친구들에 대한 몇 가지 당부를 남기고 그날의 대화를 끝마쳤다.

그리고 다음 날, 드디어 로빈은 꿈에도 그리던 모야족 풀장을 방문할 수 있었다.

무슨 워터파크 같은 특별함은 없었지만 넓은 풀장이 여러 개 붙어있는 것만 해도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게다가 저렇게 야릇한 수영복(?)을 입은 모야족 여성들이라니.

솔직히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도련님!”

“오빠!”

“주인!”

그리고 꼬맹이 3인방도 당연히 가죽 내의만 장착한 채 로빈을 따랐다.

자신에게 자랑하듯이 한 바퀴 돌며 평가를 기다리는 꼬맹이들.

물론 린은 조금 자라 꼬맹이라고 하긴 그랬지만, 뭐 다들 거기서 거기였다. 린조차 아직 어려 볼륨감이 전멸이었으니 말이다.

“음…….”

가장 서비스 신이 많을 만한 곳이 수영장이라지만 등장인물들이 다 이래서야, 원.

하지만 잔뜩 기대하고 있는 듯한 세 꼬맹이에게 사실대로 말해 분란을 일으키기보다 그냥 립 서비스를 날리기로 했다.

“귀엽네, 다들. 미래가 기대되는 모습이야.”

하지만 그것도 이 정도가 한계였다. 그래도 로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자 다들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그렇게 수영복을 자랑한 세 꼬맹이는 각자 수영을 즐기러 풀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가장 활동적이지 않은 실비아마저 두 녀석을 따라가는 걸 보니 어지간히 기분이 좋긴 한 모양이다.

자, 이제 빌런들을 해치웠으니 본격적으로 사심을 채워 보실까?

오우, 저 누님(?)은 정말…….

기본적으로 헐벗은 스타일의 모야족 여성들과 이곳 수영장의 시너지는 정말 대단했다. 이래서 모야족, 모야족 하는 거지.

이날 로빈은 오랜만에 사심을 잔뜩 채울 수 있었다. 그야말로 마음이 풍성한 하루였다.

벗은 몸보다 가린 몸이 더 자극적이란 기본적인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달은 날이었으니 말이다.

* * *

그렇게 모야족 마을에서 하루를 더 즐긴 로빈은 다음 날 영주 성으로 돌아가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물론 린은 마을에 남겨둔 채였다.

“린, 다치지 않게 조심해. 듀발도 마찬가지고. 백랑 님, 잘 부탁드릴게요.”

“응. 주인. 걱정 마.”

“네, 영주님.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응, 영주님. 내가 알아서 잘 조절할게.”

물론 린과 듀발을 남겨두고 가는 것이 마음 편하기만 한 건 아니었지만 그들에게는 지금 실전이 필요했다. 한창 성장할 수 있는 녀석들이기도 했고.

“뿌. 세이도 남고 싶었는데.”

“응, 좀 더 크고 나면. 최소한 대수림에서 살아남을 정도의 체력은 길러놔야 하지 않겠니? 대련 때 봐도 넌 지속력이 너무 떨어졌어. 그냥 조루라고. 아마 혼 래빗도 너보다는 더 잘 버틸걸?”

“힝.”

팩트로 후려치자 세이라가 입을 삐죽이 내밀었다. 그 모습이 제법 귀엽긴 했지만 어쨌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헤… 린이 이곳에 남으면…….”

실비아는 실실 웃으며 자신만의 계산을 시작한 듯 보였다. 그리고 이내 어떤 결론에 도달한 듯 얼굴이 환해지는데……. 출발할 때 책을 빼앗기고 조금 시무룩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