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책을 빼앗긴 후부터는 마차에 탈 때마다 은근히 우울해 보였거늘, 이 녀석도 참…….
불과 며칠이었지만 가족들은 로빈과 일행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공무라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보내긴 했지만, 완전히 안심하지는 못한 것이다. 물론 그 와중에 세이라와 실비아, 그리고 린이라는 짐짝을 더 늘려버린 건 참 아이러니했지만 말이다.
어쩌면 로빈 혼자 보내는 거보다는 다 같이 가는 게 더 안전하고 엉뚱한 짓하는 것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어머니, 다녀왔습니다!”
“어머, 로빈. 재미있게 다녀왔니?”
“에이, 재미는요. 어쨌든 일하러 다녀온 건데요.”
“호호. 떠나기 전에는 엄청 흥분했잖니. 당연히 남쪽 마을의 명물이라는 풀장도 다녀왔을 테고. 하긴, 우리 로빈도 이제 남자니 당연히 관심이 갔겠지.”
“뭐, 그건 그렇지만요.”
어머니 마리아나는 웃으며 로빈을 반겨주었는데 린이 마을에 남았다는 말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린의 안전을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남았다라……. 하긴 가족의 품에서 너무 오래 떠나있기도 했지. 로빈, 혹시 린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건 아니겠지? 실비아도 물론 귀엽지만 린은 정말 대단한 미녀가 될 텐데 너무 아깝잖니. 나중에 무조건 다시 데려오도록 하렴.”
끙. 걱정하는 게 그거였습니까, 어머니?
“뭐, 린이 알아서 하겠죠. 예전이라면 몰라도 이제는 제가 강제할 필요도 없고요.”
사실 모야족이 영지에 완전히 자리를 잡았고 지금은 매우 안전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굳이 린을 영주 성에서 보호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 더는 강제할 필요도 없는 거고.
오히려 린이 그냥 거기에 남아주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어머, 남자가 그러면 못써. 제 것은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법이잖니.”
남들이 들으면 제가 무슨 몹쓸 짓이라도 한 줄 알겠네요. 짝짜꿍이 되었다고 해도 기껏해야 소꿉장난이나 할 나이인데 어머니도 참 너무 진지하다.
이건 뭐라고 반론을 하긴 해야겠지?
“마리, 로빈의 일은 로빈이 알아서 하게 내버려둬요. 어련히 알아서 할까.”
“어머, 그렇네요. 로빈, 미안. 엄마가 좀 걱정돼서 그랬어.”
“끙. 예, 뭐.”
아버지가 저렇게 말하니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버려 뭔가 변명하기도 좀 궁색한 느낌이다.
이게 이런 식으로 흘러가면…….
하지만 마리아나는 로빈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아 참, 로빈. 그래도 여행을 갔다 왔는데 선물은 없니?”
아니, 여행이 아니라 업무상 출장이라니까요. 선물이라니…….
하지만 어머니의 얼굴을 보니 정말 기대하고 있는 거 같았다. 마치 첫 월급을 탄 아들이 뭔가를 들고 오길 바라는 눈빛이라고나 할까?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로빈은 그 진지하고 기대 가득한 눈빛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는데.
“마님, 선물이에요.”
로빈이 당황하자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실비아가 슬쩍 나서서 무언가를 마리아나에게 건넸다.
“오, 실비. 실비가 준비했니? 어머, 고마워라~”
예상치 못한 실비아의 준비성 덕분에 로빈도 겨우 곤란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하지만 로빈도 실비아가 저걸 언제 준비했고, 대체 무얼 준비했는지 궁금하긴 했다.
생글생글 웃으며 선물을 풀어보는 마리아나.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건 에보니 마을에서 보았던 그 진동 가죽 막대였다.
엥? 제게 왜 있어? 도대체 언제 저걸…….
로빈은 순간 자신이 북쪽 관문을 확인하러 올라갔을 때 꼬맹이 삼인방이 마을에 남았다는 걸 떠올릴 수 있었다.
아마 그때 저 흉물을 샀던 모양인데.
그걸 막지 못한 기사들을 엄벌에 처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이 될 지경이었다.
아니, 저것 때문에 위기(?)를 넘겼으니 오히려 칭찬해 줘야 하려나?
“어머, 이건 그거네. 요즘 부인들 사이에서 인기 만점이라는……. 호호. 고마워, 실비. 잘 사용할게~”
하지만 마리아나는 오히려 실비아의 센스를 칭찬하고만 있었다. 아무래도 저 흉측한 것이 상당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에 맞춰 세이라 역시 같은 물건을 어머니 세릴에게 선물했다. 당연히 세릴도 웃으며 기뻐했고.
그런데 아들의 잠정적 여자 친구(10세)와 어린 딸(7세)이 어머니에게 진동 딜도를 선물하는 장면은 너무 패륜적인 거 아닌가?
물론 당사자가 마음에 든다면 딱히 지적할 생각은 없지만 참 미묘하긴 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선물 대신 생생한 경험담을 선물받길 원하셨다.
특히 남쪽 마을 풀장의 그 아찔한 절경과 봉사의 사제들 이야기를 궁금해하셨는데 풀장의 아찔함은 두 분의 호기심을 제대로 자극하고 말았다. 몇 달 동안 영주의 업무에서 완전히 벗어나 화색이 완전히 달라진 카인은 당장이라도 그곳으로 뛰어갈 기세였으니 말이다.
“그게 진짜 빵빵하더라고요. 완전 죽여주죠. 그냥 대놓고 손바닥을 부르는 엉덩이였는데…….”
이 세계가 좋은 점이 또 하나 있다면 어린 아들이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섹드립, 혹은 음담패설을 늘어놓으며 정을 쌓아도 별문제가 없다는 거였다. 지금 로빈이 풀장의 장면을 적절히 묘사하는 거처럼 말이다.
오히려 둘은 은근히 상기된 로빈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항상 애늙은이 같은 로빈이 밝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모습 자체가 보기 좋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영주 직을 넘겨주는 건 너무 이른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없지 않았는데 너무나 잘 적응하고 지내는 거 같아서 마음이 가벼워지기도 했다.
“그래, 나중에는 꼭 한번 같이 가자꾸나.”
“내년 여름에는 그쪽으로 휴가 일정을 잡죠, 아버님. 저도 한번 가보고 싶네요. 당장 이번 주에 한번 답사를 가볼까요?”
“어머, 그럼 저도요. 아직 여름이 한창인데 굳이 미룰 필요 있나요?”
로빈의 경험담이 호기심을 자극했는지 모든 가족이 당장 그곳으로 여행을 떠날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솔직히 다들 한가한 분들이라 시간을 내 쉬고 온다고 해도 나쁠 게 없었다.
밝게 웃으며 갑작스레 결정된 여름휴가를 기대하는 모습들이 참 행복해 보였다.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 가족들의 살가운 모습은 언제나 로빈의 마음을 따듯하게 해준다. 그가 영지 일에 더 집중하는 것도 다 가족들을 위해서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제 로빈은 다시 일터(?)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간 여기저기 돌아보며 잘 쉬었으니 할 땐 해야 했으니 말이다.
지난 며칠간의 순방으로 영지가 어느 정도 잘 돌아가고 있음은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개선해야 할 사항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 * *
오랜만에 집무실로 돌아온 로빈은 지온과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며칠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참 오랜만인 거 같네요.”
“그러십니까? 사실, 저도 좀 그렇군요.”
“무슨 큰일이 있지는 않았죠? 따로 보고할 사항은 있나요?”
“특별한 건 아닌데, 줄리에타 대사제님이 봉사의 교단 사제들을 다시 모으신다고 하시더군요.”
“사제들을 모은다라……. 그 제국 곳곳을 순례 중인 사제들을 말하는 건가요?”
봉사의 교단 사제들은 본단에만 있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지부를 세울 수 있는 영지를 찾아 여기저기를 떠돌며 봉사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보내오는 사제들도 그들이었고.
그런데 그들이 다시 돌아온다는 거였다.
“여신상이 자리를 잡았고 여신상을 배알하기 위해 사제들이 돌아오는 거라는데, 아마 성물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이상 외부로 순례 나가는 사제들이 거의 없을 거랍니다.”
“그게 또 그렇게 되나요? 흠. 뭐, 별거 있어요? 그러라고 하세요. 어차피 본단이 이곳인 이상 이곳으로 모이는 것도 당연한 거겠죠.”
“네, 영주님.”
대수롭지 않게 허락한 로빈은 교단에 대한 지원책까지 마련하기 시작했다.
황도에서 영업할 때는 교단의 수입이 상당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부유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만큼 씀씀이도 컸을 테니 말이다.
정확한 가격을 받고 봉사하는 게 아니라 기부금에 의존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이곳과 그곳의 차이가 극명함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봉사의 교단이 딱히 사치하거나 씀씀이가 큰 곳은 아니었지만 딸린 식구가 너무 많았다. 그 많은 아이를 키우는 것만 해도 제법 많은 돈이 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교단 말인데, 그쪽에 인력이랑 아이들을 돌볼 보조금을 지원하는 건 어떻게 되었나요?”
“우선, 보육원 자체를 교단 내로 옮겨 병합시켰습니다. 그리고 보조금은 다 교단으로 돌렸고요. 그 정도면 얼추 될 거 같긴 한데…….”
“아, 그렇게요? 그런데 봉사의 교단은 여자아이만 받는다고 하던데 그건 괜찮은가요?”
“네. 교리상 그렇긴 한데, 보육원과 예비 사제를 아예 분리하겠답니다. 자신들의 봉사를 필요로 하는 어린 양들을 외면할 수는 없다고…….”
“그분이 오버하셨네요. 어차피 그분들이 안 받아줘도 보육원이 없어지는 건 아닌데 말이죠.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합병되어 버리면 관리하기는 편하죠.”
아예 보육원을 운영하며 그 안에서 예비 사제를 골라 따로 교육하겠다는 생각은 나쁘지 않았다. 물론 그 아이들을 본단에서 키운다는 건 교리의 허점을 교묘하게 찌르는 면이 있었지만, 목적 자체가 선량하니 그야말로 생각하기 나름일 것이다.
“다른 사제들까지 돌아온다니 지원을 조금 확대하세요. 아마 교단도 그리 넉넉하지 않을 테니까요.”
“네.”
“그리고 아예 아이들에게 다른 걸 가르칠 방법도 생각해 보는 게 좋겠군요. 물론 그들을 돌보는 건 사제님들이지만 너무 그쪽으로만 치우치면 좀 그렇잖아요? 여자아이들이 다들 사제가 된다고 해도 좀 그렇고요.”
“네, 하지만 교리 자체가 온건하기 때문에 봉사의 교단이 세력을 확장해도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더 좋아지면 몰라도요.”
“뭐, 그건 그렇죠. 기부금을 모으는 방법은 좀 어이없지만, 교리 자체는 타인과 자신을 모두 사랑하고 남들에게 베푸는 삶을 살자는 거니까요.”
물론 참 좋은 교단인데, 뭐랄까? 어딘가 미묘하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교단만 생각하면 좀 그렇다.
“뭐, 교단의 이야기는 이쯤하고 이제 마을 이야기들을 좀 하죠.”
“네, 무슨 문제라도 있던가요?”
“아뇨. 당장 큰 문제는 없었죠. 시장으로 일하는 지온의 친구들도 다 잘해주고 있고요.”
“그건 다행이군요.”
“네, 그런데 좀 걸리는 부분이 있었어요.”
로빈은 지온에게 혼 래빗 사육장 근처에 있는 마을에 수도 시설을 확충하고 에보니 마을과 우버 마을에 목욕탕을 추가할 것을 주문했다.
“그 마을이 그 정도까지 커졌습니까? 음……. 그럼 그렇게 하긴 해야겠군요. 보고에 올라온 게 없어서 저도 몰랐군요.”
“그렇겠죠. 백랑 님이 릭스터한테 부탁해서 알아서 만든 마을이거든요. 하지만 혼 래빗과 관련된 작업량을 생각해 보면 그쪽에 작은 마을이라도 하나 있는 게 나쁘지 않겠더라고요.”
“그건 그렇습니다. 그리고 마을에 목욕 시설을 늘리는 것도 중요하긴 하겠군요. 두 마을은 알아서 잘 굴러가는 편이라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네, 그러니 그 건은 그렇게 해주시고요. 그리고 마을마다 아주 어린 아이들이 참 많던데요. 출생률이 엄청 높아졌다고 했었죠?”
예전 보고에서 점점 아이들이 많이 태어난다고 했었다. 물론 무작정 계속 늘어나진 않겠지만 지금 있는 수만 생각해도 적절한 대비가 필요했다.
특히 그 아이들이 본격적으로 자라는 시기가 제국이 전체적으로 어려운 시기일 가능성이 커 더욱더 그랬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문제가 있는 건 아니죠. 다만 음……. 훗날 식량 수급 사정에 문제가 생기면 심각하겠다 싶어서요. 아무래도 준비를 좀 해야겠어요.”
“식량 수급이라…….”
“네. 지금은 제국 남부의 곡창 지대가 호황이지만 뜬금없이 가뭄이 몇 년이나 이어지든지 하면 곤란해지잖아요?”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너무 뜬금없는 이야기라 지온도 선뜻 동의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하긴 그건 그렇지. 갑자기 식량 문제를 대비하자고 하면 어이없기도 할 거다. 게다가 영지 내에서 식량을 생산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이곳 영지조차 농경지를 망치게 될 가능성이 있었으니 대비는 필수적이었다.
“사실 좀 과한 걱정이긴 하죠. 하지만 원래 풍작이 이어지면 갑작스러운 흉작이 오는 법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혼 래빗 사육장도 언제까지 저렇게 잘되기만 할 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아이들이 저렇게 늘어났으니 잘못하면 문제가 커질 수 있겠다고 생각한 거죠.”
아이들을 위해 미리 대비하자는 로빈의 말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 지온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