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게다가 지금까지 로빈이 뭐라고 한 일은 꼭 탈이 나지 않았던가. 그런데 로빈이 저렇게까지 나서면 찝찝해서라도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군요. 준비란 건 아무리 과해도 부족한 법이니까요. 좋습니다. 그런데 뭘, 어쩌실 생각이신지?”
“아무래도 창고를 좀 지어야 할 거 같아요. 히센 님이랑 모야족 주술사들까지 다 모아서 가능하면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는 놈으로요. 적어도 영지민들이 한 해를 넘길 수 있을 정도의 식량은 비축해 놔야 하지 않겠어요?”
“음……. 그 정도의 창고를 만들려면…….”
“네, 돈이 좀 들긴 하겠죠.”
몇 년 사이에 제법 많은 돈을 벌었지만 그만큼 많이 쓰기도 했다. 특히 공장은 돈을 잡아먹는 하마였으니 말이다. 미래를 생각하면 분명 있으면 좋은 녀석이지만 만들 때는 제법 힘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창고 몇 동을 짓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예비 자금은 얼마나 남았나요?”
“영주님이 빼놓으라고 했던 군비를 제외하면 그리 넉넉하진 않습니다. 만약 창고를 짓는다면 그쪽에서 끌어와야 하겠군요.”
“군비 쪽은 넉넉하죠?”
“네, 아무래도 그쪽으로 빼놓은 자금이 워낙 많아서요.”
“흠, 군비라…….”
앞으로 늘어난 기사들이나 전사들, 그리고 예비 전사들에게까지 모두 마수 갑옷으로 무장시킬 계획이던 로빈은 당연히 군비부터 넉넉하게 챙겨놓았다.
게다가 카인이 일선에서 살짝 물러난 상황에서 3년이나 미리 영지 일을 돌보았기 때문에 그쪽으로 예산을 편성하는 건 간단한 일이었고.
하지만 그건 어쨌거나 군비였기 때문에 쓰기가 꺼려졌다. 특히 훗날 마수의 뼈로 무기를 제작하기 시작하면 모든 무기를 마수제로 바꿀 생각이라 더욱 그랬다.
“고민이네. 우선 지금 있는 예비 전사들이나 기사들의 갑옷은 다 바꿨단 말이지. 창고라……. 아, 창고만 급한 게 아니었지. 안 되겠다. 우선 건물부터 올리고 보자.”
혼자 중얼거리며 계산을 마친 로빈은 지온에게 우선 창고부터 짓자고 이야기했다. 심지어 창고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하는지 다른 것마저 요구하기 시작했는데.
“우선 예비로 남겨둔 군비를 쓰죠. 어차피 팔려 나가는 물건도 있으니 허리띠 좀 졸라매면 다시 채울 수 있지 않겠어요?”
“네. 뭐, 그렇긴 하죠. 공장을 올리는 데 들어간 돈이 워낙 커서 그렇지 저희 영지의 수익이 적은 건 아니니까요.”
“그래요. 우선 창고를 몇 동 짓고, 남은 돈으로는 북쪽 방벽을 좀 만질 생각이에요. 제가 남쪽 요새랑 북쪽 방벽을 모두 다녀왔는데 북쪽이 뭐랄까, 좀 부족한 느낌? 아무튼 그렇더라고요. 아무래도 워낙 예전에 지은 관문이라서 그런가 봐요. 뼈대는 튼튼하니 그 위에 추가하는 형식으로 하면 될 거 같아요.”
지온도 로빈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최신 기법으로 많은 돈을 투자해 지은 남쪽 요새와 지은 지 거의 천 년은 된 북쪽 방벽이 비슷하다면 그건 그거대로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나마 그 당시에 황궁에서 지어준 방벽이기에 이 정도라도 튼튼한 거였다. 지금까지 큰 탈 없이 굳건히 자리를 지켜왔으니 그 정도면 충분히 할 바를 다 한 것이기도 했고.
“혼 래빗 사육장 마을의 수도 시설. 에보니 마을과 우버 마을의 공중목욕탕. 창고 몇 동에 북쪽 관문 보수 공사. 이렇게 하시겠다는 건데…….”
“그러면 또 완전 거지 되는 거죠?”
“네, 그렇군요. 흠…….”
하지만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라 웬만하면 지금 몰아서 처리하고 싶었다. 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마무리하려면 1년은 훨씬 넘게 걸릴 테니 말이다.
“돈이야, 뭐. 있을 땐 있는 거고 없을 땐 없는 거니 그냥 그렇게 해요.”
어쨌든 최대한 아껴 모은 예비 자금을 이렇게 또 홀랑 털어먹고 쿨한 표정을 짓는 로빈의 모습에 지온은 그저 한숨만 나왔다. 돈 쓰는 재미가 붙은 건지 뭐가 모일 틈을 안 주는 영주였으니 말이다.
카인도 은근히 그러더니 로빈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어떻게든 배를 만들겠다고 눈치만 보는 주노에게는 또 어떻게 말해야 할지 답답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모든 상황이 안 좋은 것은 아니었다.
“이제 가을이 되면 본격적으로 옷감 생산에 들어갑니다. 식량 구매량도 줄었고 그다음으로 많은 지출인 옷감 구매 비용까지 줄어들면 영지 지출은 눈에 띌 정도로 줄어들 겁니다.”
“그렇죠? 그럼 대충 비누 같은 소비재나 향신료, 그 밖에 잡동사니 정도가 되겠네요. 지출이 적어서 허리띠 졸라맬 맛이 나겠는데요. 한두 해만 졸라매죠, 뭐.”
자신의 결정이 마음에 드는지 방실방실 웃음 짓는 로빈의 모습에 지온은 그저 작게 한숨만 연발할 뿐이었다. 왠지 당분간 다시 바쁜 나날이 이어질 거 같은 확신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로빈이 명령하고 지온이 주도하는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돈도 써본 놈이 잘 쓴다고, 이미 여러 번의 공사로 이골이 난 지온의 일 처리 속도는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다. 공사가 시작된 지 한 달 만에 모든 자재를 들여와 본격적으로 공사가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우선 사육장 근처의 마을을 정비한 후 두 마을에 대형 목욕탕을 짓고, 북쪽 관문까지 손본 다음 마지막으로 창고를 짓기로 했다.
특히 창고나 북쪽 관문에는 따로 마법적 처리가 필요했기 때문에 히센과 주술사들까지 참여하게 되었다.
“하. 나도 좀 쉬자, 이 녀석아. 어떻게 쉴 틈을 안 주냐?”
특히 히센의 불만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로빈이 끊임없이 일감을 던져줬고 이제 겨우 기사들에게 주술 문양을 다 새겨주고 한숨을 돌리려는 찰나였기 때문이다.
한숨 돌린 후 마수 뼈를 녹일 연구나 도우면서 한가롭게 지낼 생각이었는데 그 타이밍에 딱 새로운 일감을 던져주니 환장할 수밖에.
“에이, 뭘 이런 걸 가지고 그러세요? 어차피 주술 문양도 쌍둥이들이랑 놀면서 하신 거잖아요? 신혼 즐기시라고 제가 다른 일은 전혀 안 맡긴 거였거든요. 솔직히 주술 문양 새기는 시간보다 쌍둥이들이랑 헐벗고 뒹군 시간이 더 길다는 거, 제가 모를 줄 아세요?”
“끙, 그거야…….”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지만, 주술 문양을 새기는 건 쌍둥이들이랑 같이 하는 일이었고 자연스럽게 업무가 지연된 것도 사실이라 뭐라고 변명하기는 힘들었다.
로빈의 팩트 공격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알았다, 알았어. 원, 녀석도…….”
“그리고 너무 그러시면 뼈 삭아요. 적당히 하셔야죠. 이래서 늦바람이 무섭다니까.”
“알았어, 이놈아! 적당히 해!”
“넵. 그럼 부탁드릴게요.”
완전히 격침당한 히센은 로빈이 룰루랄라 노래를 부르며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만 쉬고 있었다.
“아후, 앓느니 죽지. 일이나 하자. 얘들아, 일 들어왔다. 어서 준비해!”
처음에는 마수와 관련된 일만 하겠다던 히센도 어느새 온갖 영지 일을 도맡아 하는 영지의 일꾼이 되어있었다. 물론 그 자신도 자신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 * *
본격적으로 공사가 시작된 지 얼마 후.
통신구를 담당하던 관리 하나가 번개 같은 속도로 달려와 로빈을 찾았다.
“영주님, 주노 님인데 급하게 찾으십니다.”
“응? 주노가요? 그 양반 지금 황도에 계시죠? 또 무슨 일이람. 사람 불안하게.”
로빈은 관리가 가져온 수정구에 대고 주노를 불렀다. 물론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은근히 불안한 마음을 안은 채였다.
[영주님! 하하하! 터졌습니다!]
“그게 느닷없이 무슨 소리예요? 무슨 금광이라도 캐고 있었어요?”
[아뇨, 그게 아니라요. 저희 빨리 배를 만들어야 할 거 같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데 딴소리만 하는 주노.
로빈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좀 알아듣게 말해주세요. 대체 배는 또 왜요?”
[연금술 학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했습니다. 저희 혼 래빗 고기가 정력 증진에 도움이 되는 게 확실하답니다.]
응?
이건 또 무슨……. 고기가 천연 정력제라고? 이게 말이나 되나?
연금술 학회는 정말 새로운 것에 목마른 자들이었다. 그래서 뭔가 이슈가 되기만 하면 그걸 직접 조사해 그 효용을 조사하는 사람들이었고.
그자들이 은연중에 떠도는 소문을 듣고 혼 래빗 육포를 직접 조사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정력 증진에 효과가 있다니.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게다가 황궁에서 바로 오더가 들어왔습니다. 혼 래빗 고기를 영지 특산물로 인정하니 분기마다 500kg씩 공급하랍니다. 5년 계약이고요.]
“허, 영지 특산물이라고요? 그것도 5년이나?”
영지 특산물로 인정되고 그걸 황궁에 공급한다는 건 영지의 세금을 그걸로 대신 받겠다는 의미였다. 일종의 공납 같은 형태로 말이다.
그리고 이 공납이 기존의 세금보다 훨씬 가벼움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황도에서 구입하는 가격을 기준으로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가볍게 생각해 봐도 혼 래빗 고기 500kg이면 기껏해야 여덟 마리 정도를 잡으면 나오는 양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걸로 분기의 세금을 대신한다면 정말 거저먹는 장사였다. 게다가 특산물로 인정받고 황실에 공납한다는 사실만으로 이 혼 래빗의 인기가 어디까지 올라갈지 예상하기 힘들 정도였다.
“미친 떡상. 이게 이렇게 또 떡상한다고?”
안 그래도 폭등하기 시작한 혼 래빗 코인이 그야말로 미친 듯이 떡상한 격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상한가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오르는 코인에는 한계가 없었다.
하지만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는데 당장 혼 래빗 고기를 황도까지 수송할 방법이 없다는 거였다. 주노가 신이 나서 배를 이야기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런데 주노, 지금 저희가 배를 만들 돈이 없어요. 새로 공사를 시작했거든요.”
[하~ 공사요? 또 무슨……. 아니지. 잠시만요.]
로빈의 말에 놀라 생각에 잠기는가 싶던 주노가 잠깐의 침묵 후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건 무조건 해야 하는 겁니다. 황실에서 명령으로 내려온 거니까요.]
“네, 저도 알죠. 이건 안 하면 바보인 거잖아요. 그런데 사정이 좀…….”
[하, 이런 낭패가 있나.]
“그러게요. 혹시 지금 빌린 배를 개조하는 건 무리겠죠?”
[네, 아무래도 빌린 배니까요.]
그렇게 둘은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겨들었다.
배를 만들어야 하는 건 분명한데 돈이 없어 배를 만들 수 없다니. 게다가 배가 없어서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물론 운송선을 대여해 시간을 벌 수는 있었다.
하지만 운송선을 이용해 냉동 배달한다면 아무래도 품질을 장담하기 힘들었다. 최고급 물건을 공급해도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는 게 황궁과의 계약인데 최고급도 아닌 물건을 공급한다는 건 너무 무모한 일이었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괘씸죄에 걸릴 수도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억울하고 답도 없다는 그 괘씸죄 말이다.
어쨌든 황실에 최고급 고기를 납품하기 위해서는 주술 창고가 필수적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배가 반드시 필요했다.
“어쩔 수 없네요. 무리를 좀 해봐요. 대출받죠.”
물론 이 세계의 은행에서도 대출을 해주었다. 다만 귀족의 체면상 웬만하면 대출을 받지 않을 뿐이었다. 자신의 재력에 문제가 생겨 대출까지 받는 건 귀족들 사이에서는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빈은 그딴 것 따위 당연히 안중에도 없었다. 원래 사업은 빚을 내서 하는 법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대출을요?]
“네, 예전이면 몰라도 이젠 우리도 담보 잡힐 게 있잖아요? 어차피 황실에서 명령한 거니까 제국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지금 상황에서 혼 래빗 한 2천 마리 정도를 담보로 잡히면 돈을 빌릴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니면 군부와의 거래를 담보로 잡든지요. 그건 주노가 알아서 해주세요.”
로빈의 말에 주노가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무슨 말씀인지 알았습니다. 우선 돈을 융통해 보겠습니다. 되도록이면 대출을 받지 않는 방법으로 말입니다.]
“그래요, 주노. 뭐든 다 해보세요. 다만 최악의 경우 그냥 담보를 잡으면 되니까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네. 알겠습니다, 영주님.]
주노와의 통신구 연결을 끊은 로빈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물론 좋은 일이긴 한데 대출까지 받는다고 하면 가족들이나 지온이 어떻게 반응할까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게다가 이제 당분간 허리띠를 졸라매기로 했는데 또 돈 쓸 일이 생긴 거라 당황스럽기도 했고.
하지만 이 위기만 넘기면 떡상한 혼 래빗 덕분에 당분간 돈 걱정할 일이 없어진다.
“하. 지온, 우리는 허리띠를 졸라맬 팔자가 아닌가 봐요. 또 돈을 쓸 일이 생겨버렸어요. 이건 저랑 상관없는 일이니까 저한테 뭐라고 하지는 마세요.”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