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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97화 (97/303)

97화

지온은 한창 마을을 떠돌며 공사 점검 중인데 로빈은 여기서 이렇게 혼자 변명하고 있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어떻게 이 상황을 자연스럽게 설명할지 연습하는 것이었다.

“아 참, 그런데 대체 정력에 좋다는 고기를 왜 황실에서 그렇게 대량 구입하는 거지? 물론 맛도 좋긴 하지만 이상한 일이네. 설마 황제 폐하가… 늦둥이라도 보실 생각인가?”

하지만 변명 거리 연습도 잠시 로빈은 실없는 생각을 이어가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이미 머릿속에선 대출에 대한 생각 따위는 모두 잊은 후였다.

그 시간 황도에서 로빈과 통화를 마친 주노는 눈을 감고 돈을 마련할 방법을 계산하고 있었다.

주노는 자신의 체면을 깎으면서까지 영지를 위해 대출을 받겠다는 로빈의 굳은 의지에 적잖이 감동한 상황이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영주란 말인가.

하지만 자신은 절대 그럴 수 없었다.

“그래, 어떻게든 돈을 만들어낸다. 대출이라니, 어림도 없지!”

만약 로빈이 알았다면 그냥 대출이나 받으면 되지 왜 쓸데없이 고생하냐고 하겠지만, 여기에는 그저 주노만이 있을 뿐이었으니 참 애석한 일이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주노는 배를 제작할 다양한 재료와 조선공들을 데리고 영지에 도착했다. 자신이 말한 대로 대출 따위 없이 배를 만들 준비를 모두 갖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주노가 어깨를 쫙 펴고 영지로 돌아온 날, 영주 성에서 다시 회의가 열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로빈도 주노가 대출 없이 배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해서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하고, 감탄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회의를 시작하자마자 주노의 공을 치하하며 대체 어떻게 한 것인지부터 물어보았다. 전혀 짐작되는 방법이 없었으니 말이다.

회의에 참석한 지온과 백랑, 그리고 히센 역시 호기심이 동한 듯 주노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하하. 이거 다들 이렇게 뜨겁게 쳐다보시니… 흠흠.”

“거, 뜸은 적당히 들이고 어서 보따리부터 풀어보게나.”

“예예. 알겠습니다, 히센 님. 그러니까…….”

그렇게 주노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는데.

주노는 우선 돈을 구하기 위해 다른 상인들부터 찾아갔단다. 아무리 많은 물량을 떼어오더라도 황도에 지부가 하나뿐인 주노 상단이다 보니 마땅히 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럴 바에는 몇몇 상인과 거래를 해 그쪽으로 넘기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방법이다. 그리고 그 계약을 빌미로 상인들에게 많은 계약금을 뜯어낼 생각이었다. 물건 자체가 확실하니 이런 식으로 계약을 체결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잘 풀리지는 않았습니다. 다들 난처한 얼굴로 거부하더군요. 영주님의 이름을 걸어도 난색을 표하니 방법이 없었죠.”

“흠… 이상하군요. 그게 그럴 일이 아닌 거 같은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놈들이 딴생각을 하고 있더라고요.”

의아한 생각에 몇 군데의 상단을 돌아다녀본 주노는 힘깨나 쓰는 상단이 뒤에서 이 상황을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돈이 될 것이 확실한 물건을 꺼리는 이유가 대형 상단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된 주노는 그 길로 그들부터 찾아갔다.

무슨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러는 이유도 궁금했고, 어차피 거래 상대가 누구라도 상관없으니 만약 그들이 원한다면 그들에게 물건을 넘길 생각이었다. 지금 중요한 건 거래를 따내 배를 만들 돈을 확보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로빈은 이야기를 들으며 벌써 황도의 대형 상단들이 카르텔 단계에 들어섰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다른 상단들을 은근히 압박까지 하고 있는 모양이었고.

그렇다면 중형 상단들이 빠르게 몰락하며 종국에는 대형 상단만 남게 될 것이다. 아마 황태자가 모조리 뭉개버리기 전에는 계속 그런 상태일 것이 분명했다.

상단의 카르텔이라, 당장은 문제가 없겠지만 혼 래빗 고기를 제대로 팔기 시작하면 그들과 충돌하며 귀찮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황도는 그들의 홈그라운드였기 때문에 자신들로선 불리한 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로빈이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주노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이놈들이 맹랑한 제의를 하는 겁니다.”

“맹랑한 제의요?”

말인즉슨, 황도의 거상 중 하나가 확실한 신뢰를 위해 영주인 로빈과 혈연이 되기를 원한다는 거였다.

누구보다 정보가 빠른 상인들이 영지의 약진과 사육장의 규모를 대략이나마 파악하지 못할 리는 없었고 어린 나이에 영지를 이어받은 영주의 처, 게다가 확실한 물건까지 가진 그레이츠 영지의 안주인 자리를 탐내고 있었던 모양인데…….

“이런 미친놈들! 감히!”

“뭐 하는 새끼들인지 낯짝을 한번 확인해 보고 싶군요.”

“음?”

당사자인 자신은 놈들이 제법 머리를 잘 썼다는 생각에 감탄하고 있는데 제3자인 두 남자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전혀 안 그러던 사람들이 저러니 솔직히 어안이 벙벙했다.

먼저, 지온.

언제나 냉정하게 지켜보다 가장 중요한 맥락을 짚으며 회의를 이끌어가는 지온은 항상 객관성을 잃지 않아 로빈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지금 격분하며 상대의 안부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마치 상대가 평안하지 못하면 안녕할 때까지 두드려 패주겠다는 패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항상 무표정하게 회의를 정리하던 그 침착한 지온은 대체 어디 간 건지.

그리고 백랑.

항상 회의는 뒷전이요, 멍하니 다른 곳만 보다가 가끔 뜬금없는 말을 던지는 백랑은 사실 병풍 같은 존재였다. 로빈이 물어보는 말 이외에는 아무런 의견도 내지 않기 때문이었다.

가끔 혼 래빗에 대한 몇 가지 의견을 내는 것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남자가 바로 백랑이었는데, 지금은 대로하며 당장 놈을 때려죽일 기세였다.

회의 시간에 저렇게 활기찬 백랑은 또 처음이었다.

뭐야, 이 사람들. 왜 이렇게 흥분을…….

“흥, 영주님의 첩실 자리는 이미 가득 찼지. 어딜 넘보는 거야?”

“어이없는 일이군요. 감히 실비의 자리를……. 정실부인을 밀어 넣지도 못할 놈들이 혈연을 들먹이다니, 불쾌하기 그지없습니다.”

엥? 아아. 이 사람들, 그러고 보니…….

로빈은 자신이 잠시 착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영주의 정실은 무조건 귀족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그러니 상단주가 혈연을 맺자고 해도 결국 자신의 혈육을 첩실로 밀어 넣는 거였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불행히도(?) 확실한 첩실 후보가 둘이나 있었다.

에휴, 그럼 그렇지. 난 또 대체 왜 저러나 했다.

하지만 백랑이라면 몰라도 지온까지 저러는 건 솔직히 의외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고 할까? 지금까지 직접적으로 말은 안 했지만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거 같아 슬쩍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지온마저 백랑이랑 동급이었다. 게다가 지온의 딸인 실비아의 새엄마가 월아의 큰 언니인 월령이었고, 린은 월아의 딸이었다.

따지고 보면 전혀 혈연이 아니지만, 얼핏 보기에는 엄청난 개족보라고나 할까?

뭔가 난감한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정실로 넣지도 못하는데 왜 굳이 혈연을 맺자고 한 거지? 그냥 첩실인 거면 별 의미가 없지 않나? 어차피 물건은 계약을 통해 그쪽으로 넘기려고 했던 건데.

아아, 그렇구나. 인적 카르텔이 카르텔 중 가장 기본적이면서 강력한 것이었지.

그쪽에서 생각하기에도 혼 래빗 고기는 상당히 유망한 녀석이었나 보다. 그러니 아예 혈연을 맺은 후 이 녀석을 끝까지 독점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만약 영구적으로 계약을 유지할 수 있다면 딸 하나 정도는 그냥 넘겨줄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마음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이것과 크게 다르진 않을 거 같았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너무 욕심내다 개망한 각인데?

“그래서, 그런 제안을 받아들인 건 아니겠죠, 주노 님?”

“아무리 주노 님이라도 용서하지 못할 거 같은데, 그건.”

서슬 퍼런 두 남자의 으르렁거림에 주노는 식은땀이 나는지 손끝으로 이마를 훔친 후 그럴 리가 있겠냐고 고개를 저었다.

“저한테 그런 권리가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혈연이라니요. 그런 걸 제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라…….”

난데없이 혈연을 맺자는 제의가 들어오자 주노도 고민에 빠졌다. 자신에게 승낙할 권리도 없을뿐더러 당장 거절하면 상대의 기분만 상하게 하는 고약한 제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선 생각해 보겠다고 말한 후 자리를 피했다고 한다.

고민 끝에 주노는 우선 이 일을 영주 성에 알린 후 지시를 받기로 했다. 그래서 바로 통신을 날렸는데…….

“응? 전 전혀 못 받았는데요. 누가 받은 거예요?”

“아무래도 가문의 어른이신 전대 영주님께 연락을 드렸죠. 영주님은 즉흥적으로 판단하실 거 같아서요. 혼인에 대하여 판단하기에는 좀 어리시기도 하니…….”

“음.”

맞는 말이지만 또 이럴 때는 어린애 취급이라 기가 막힌다. 게다가 자신이 신중하지 못한 편인 건 맞지만 그걸 그렇게 대놓고?

솔직히 이젠 내가 영주인데 내 혼사 정도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다행히 할아버지 카인도 혈연을 맺는 것에는 대단히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엄청 화를 내시더군요. 그딴 조건으로 혈연을 맺을 순 없다고요. 그래서 당연히 그쪽은 물 건너갔는데…….”

카인이 격하게 화를 내며 거절했다는 이야기에 지온과 백랑, 두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카인의 단호한 태도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나 보다. 아무래도 저 사람들은 자신의 딸도 그렇게 단호한 거절을 한번 당해봐야 정신을 차릴 거 같았다.

어쨌든 상대가 너무 욕심을 부려 상단 쪽과 일을 같이 하는 건 이미 물 건너간 상황에서 고민에 빠진 주노가 선택한 건 바로 귀족들이었다. 그중에서도 허영심이 가득한 귀족들 말이다.

“우선, 혼 래빗 육포를 수면 위로 올린 일등 공신, 그릭스 공자를 찾아갔습니다. 아무래도 혼 래빗 고기의 가장 큰 신봉자니까요.”

그릭스를 찾아간 주노는 우선 혼 래빗 육포를 황도에 소개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앞으로는 육포가 아닌 신선한 생육이 황도에 들어올 거라는 소식을 넌지시 알렸다.

당연히 혼 래빗 마니아인 그릭스는 크게 기뻐했고, 그때를 틈타 주노가 은근슬쩍 딜을 걸었단다.

“황제 폐하 다음으로 두 번째로 고기를 보내주는 조건으로 계약하며 프리미엄을 얹을 생각이었습니다. 역시 그릭스 공자가 솔깃해하더군요.”

그렇게 그릭스 공자에게 상당히 많은 돈을 뜯어낼 수 있었단다.

하, 리아넨 공작가. 이거 진짜 괜찮은 건가? 그런대로 비중 있는 악역인데 이건 뭐, 맨날 호구 짓만…….

물론 물건보다 먼저 계약금을 치르는 건 흔하디흔한 일이었다. 어찌 보면 계약의 정석이라고 할 수도 있었고.

하지만 선 지급 계약을 하면서 물건 값을 모두 치르는데다가 거기에 프리미엄까지 얹는 건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아마 황제 폐하 다음이라는 말이 그의 허영심을 제대로 자극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릭스 공자는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니더군요. 계약 사실을 사방에 떠들고 다니는 바람에 다른 귀족들도 모두 그 소식을 알게 된 거죠.”

그릭스 공자가 여기저기 자랑이라도 했는지 그날부터 귀족들의 문의가 끊이지 않았단다. 그래서 결국 우선권을 놓고 경매까지 벌어졌다는데.

귀족들은 누구보다 먼저라는 메리트에 혹해 기꺼이 지갑을 풀었단다.

하, 이건 거의 사기 아닌가? 역시 상인들이란 합법적인 사기꾼이라니까.

기껏해야 별 차이도 나지 않는 걸 기어코 경매까지 붙였다는 소리에 로빈은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솔직히 순서라는 점을 교묘히 자극해 프리미엄을 얹은 것도 기가 막힌 일이었고.

하지만 그 결과에는 ‘비바!’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이놈의 귀족들은 보면 볼수록 군대에서 컵라면 물 붓는 순서에 기분 나빠 집합시키는 병장 놈들이랑 비슷하다. 사소하고 미묘한 것에서 우월감을 느끼는 족속들이라는 뜻이었는데.

그러니 황제 폐하 다음으로 얼마나 빨리 고기를 받을 수 있느냐가 제법 중요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귀족들의 서열이 단순히 작위만으로 확실히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오묘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더 그런 거 같았다.

어쨌든 그런 성향 덕분에 이번에는 제법 이익을 본 셈이었다.

그리고 그릭스 공자.

이 녀석은 육포 때도 그러더니 정말 소문내는 거 하나만은 최고라 불릴 만했다. 게다가 항상 영지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일이 벌어지니 우리 영지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정말 명예 영지민(?) 표창이라도 하나 건네줘야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결국 황제에게까지 들어가는 최고급 고기를 조금 먼저 받아보겠다는 허영심을 자극해 돈을 구했다는 이야기.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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