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물론 정력을 올려준다는 엄청난 장점을 가진 귀물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주노의 노력이 큰 성과를 가져온 것만은 사실이었다.
최소한 당분간은 혼 래빗 가죽을 판 돈 전부를 이쪽으로 메꿔야 할 줄 알았는데 고기 자체로 해결을 본 셈이니 정말 다행이었다.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주노. 든든하네요.”
“과찬의 말씀입니다, 영주님.”
그렇게 주노의 모험담을 듣고 크게 치하한 로빈은 다른 사람들에게 선박 제작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지시하기 시작했다.
주노가 빠르게 일을 처리한 것은 정말 다행이지만 적어도 올해 안에는 배를 완성하고 내년 첫 번째 분기에는 황실에 물건을 납품해야 했다. 물론 경매를 받은 귀족들에게도 물건을 넘겨야 했고.
“시간이 별로 없는 건 아실 거예요. 우선 백랑 님은 목재 때문에 불렀어요. 원래 배를 만들려고 모아놓은 목재는 신전 만드는 데 홀랑 써버렸잖아요? 우선 목재부터 좀 부탁드릴게요. 급한 일이니 좀 신경 써주세요. 아, 그리고 주술 숙성 창고를 만들어야 하니 주술사들도 좀 부탁드릴게요.”
“응, 영주님. 그래야지.”
“그리고 히센 님. 아무래도 마무리 조정은 히센 님이 해주셔야 하겠죠? 창고 건이 마무리되면 바로 이쪽으로 투입해 주세요.”
주술 숙성 창고와 배에 사용되는 마법 기구들을 위해 히센은 무조건 참여해야 했다. 마지막 조정을 그가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당분간 히센이 편히 쉴 일은 없어 보였다. 히센도 그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거고.
“지온도 알죠? 주노가 알아서 한 상 가득 차려왔으니까 문제 생기면 곤란해요.”
“네, 영주님. 우버 마을에서 다른 공사를 진행할 때 계속 살피겠습니다.”
역시 지온은 척하면 착이다.
“네. 좋아요. 그럼 빨리 시작하자고요.”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렸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할 시간이었다.
그렇게 다들 자신의 자리를 찾아 떠났다.
* * *
대수림에서 벌목 작업에 한창인 백랑, 각 지역을 돌며 공사를 총괄하는 지온, 영지에 보고하고 황도로 돌아가 귀족들과 세부 사항을 조율하는 주노.
온갖 잡무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히센.
심지어 폴도 기사들이 주술 문양에 적응할 수 있게 원정을 떠난 후였다.
저택에서 비글처럼 뛰어다니던 세이라도 어떻게 마리아나를 구워삶았는지 남쪽 마을로 떠나버렸다.
덕분에 저택에 남은 건 로빈과 실비아뿐이었는데, 실비아조차 무슨 새로운 발명품을 만든다며 두문불출이었다.
그렇게 되니 결국 가장 한가한 사람은 영주인 로빈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로빈은 이 한가한 시간을 대장간에서 보내고 있었다.
그간 별로 진척이 없는 무기 제작.
오늘도 스미스는 이 망할 뼈를 녹이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요 며칠은 로빈까지 출근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고.
하지만 상황을 보니 당분간은 답이 없어 보였다. 솔직히 이제는 차라리 그냥 황태자가 무기를 개발하기를 기다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때까지 영지 기사들이 맨손, 혹은 뼈 몽둥이를 들고 큐브 포털에서 고생할 걸 생각하니 다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최소한 영지를 위해 싸우는 기사들이나 전사들이 의미 없이 산화하는 건 막고 싶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래서야.
“어머, 영주님. 오늘도 오셨네요?”
“네, 도리아 여사님. 진척이 너무 없어서 답답하네요.”
“그런가요? 하긴… 쉬운 일이 아니죠.”
요즘은 실비아가 바빠서인지 그 스승인 도리아 여사도 종종 이곳에 들르고 있었다. 오히려 뭔가를 발명하려는 실비아 옆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닌지 궁금해 슬쩍 물어봤지만.
“지금이 고비예요. 처음에는 무조건 자신의 힘만으로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 명의 연금술사로서 바로 설 수 있는 거랍니다. 거기에 물건의 효용이나 가치 같은 건 무의미하죠.”
이렇게 말씀하시며 웃으셨다. 자신의 스승도 이때는 자신에게 절대 터치하지 않으셨다나?
이 말을 들은 로빈은 그 녀석이 너무 엉뚱한 것만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물질학에 일가견이 있는 도리아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작업하는 스미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고열에도 가메라의 뼛조각이 굳건히 제 모습을 드러내자 화가 나는지 그걸 집어 던지는 스미스의 모습에 헛웃음을 터트렸는데.
“상급 마수의 뼈는 저렇게 녹이는 것 자체도 문제인가 봐요.”
“그러니까… 촉매제가……. RN-7 레브라닌인가요? 금속 마법 무기를 만들 때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촉매제죠. 하지만 저렇게 녹는점이 높은 신물질을 녹일 때는 RK-2나 RK-6을 사용하는 게 더 나을 텐데요.”
무슨 외계어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도리아는 지금 사용하는 촉매제가 부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예산 문제로 다양한 촉매제를 모두 준비할 수는 없었다. 저게 뭔지는 모르지만 신물질을 녹이는 용도로 주로 사용하는 촉매제라면 상당히 고가임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역시 예산이 문제인 건가?
지금까지 대략 몇 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성과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중급 마수의 뼈들은 어떻게든 녹여 무기로 만들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것도 성과라면 성과지만 사실 큰 의미가 없었다. 진짜 실전에 쓸 무기들은 다 상급 마수의 뼈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이상의 성과가 나지 않는 것이다.
“영주님, 아무래도 히센이 본격적으로 여기에 매달려야 성과가 있겠는데요? 단순히 장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닌 거 같아요. 제가 며칠 동안 지켜본 바로는 말이에요.”
“아, 그런가요? 흠…….”
애당초 시작이 잘못되었다는 도리아의 이야기.
로빈도 혹시나 했던 부분이었다. 스미스가 계속 매달리는데도 성과가 없는 것에는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지난 3년간 영지에서 가장 바쁜 남자가 히센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건데.
만약 이번 일들까지 마무리되면 진짜 이번에는 무조건 이곳으로 모셔야 할 거 같았다. 웬만하면 장인의 손에서 해결되길 바랐는데 그게 아닌 거 같았으니 말이다.
로빈은 씩씩거리는 스미스에게 다가가 지금까지 고생했으니 차라리 당분간은 좀 쉬는 게 어떠냐고 조언했다. 그리고 영지의 크고 작은 일들이 마무리되면 아예 마법 공학자를 붙여준다는 확언도 덧붙였다.
스미스도 그간 쌓인 스트레스가 상당했는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는데 성과가 없다는 건 방향이 틀렸다는 의미였으니 당장은 어떤 성과도 없을 거란 걸 누구보다 스미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전문가는 다르네요, 도리아 여사님.”
“호호. 아니에요. 제가 실비아만 들여다보며 너무 영지 일에 무심했나 싶네요. 저런 게 있는 줄 알았으면 미리 나설 걸 그랬나 봐요.”
“그거야…….”
솔직히 로빈도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곳의 영지민도 아니었으며 실비아를 가르치기 위해 잠시 들른 이방인에 불과했다. 게다가 히센처럼 영지와 고용 계약을 맺지도 않았으며 이곳에 정착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니 그녀에게 섣불리 무언가를 부탁하는 건 매우 껄끄러운 일이었다.
물론 그녀가 상당한 인격의 소유자라는 건 같이 지내며 충분히 느꼈지만 그게 그녀에게 엉뚱한 일을 맡겨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사람이 은혜를 입었으면 최소한의 도리는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스스로 저렇게 나서준다면 그것보다 고마운 일이 없었다.
“도리아 여사, 여기 있었나. 왜 아직 여기에……. 엇, 로빈.”
“응? 할아버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데 부드러운 웃음을 가득 머금은 카인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게다가 손자인 로빈은 전혀 못 본 채 도리아만 바라보며 다가오다가 옆에 로빈이 있는 걸 발견하고 흠칫 놀라기까지 했다.
로빈도 자신의 할아버지가 대체 왜 저러나 싶어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고.
“어머, 카인 님.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어서 가요.”
“으…음. 그래요, 도리아 여사. 갑시다.”
“영주님, 그럼 나중에 뵐게요. 아, 이 일은 제가 한번 같이 연구해 볼게요. 히센도 일이 마무리되면 불러주세요. 호호. 그럼…….”
“흠흠. 그럼 나중에 보자, 로빈.”
그렇게 상큼하게 인사를 건넨 도리아는 슬쩍 카인의 손을 잡고 나란히 걸어 다른 곳으로 떠나버렸다. 로빈은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고.
와. 뭐야, 저거. 저 투샷, 실화냐?
대체 어떻게 저런 투샷이…….
아무리 할아버지가 내 가족이라지만 너무 후달리는데. 가족 프리미엄이 붙어도 저건 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네.
정말 둘이 사귀기라도 하는 거야? 정말?
멘붕에 빠져 고개를 흔들던 로빈은 한참 만에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래, 그건 그거고 일은 일이지.
어쨌든 영문은 모르겠지만 한가한 도리아가 일을 도와준다니 조금이나마 진척이 될 것도 같았다. 그리고 예산이 확충되는 대로 이곳에도 상당한 투자를 해야겠다.
* * *
그렇게 1년 몇 개월의 시간이 흘러갔다.
처음 몇 개월은 모두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특히 영지 차원에서 진행된 여러 공사 때문에 부산스러웠는데, 첫해에 배를 완성해 황실에 바칠 혼 래빗 고기를 싣고 출발할 때까지는 그야말로 비상 그 자체였다.
이번에 완성된 배의 이름은 단순하게 그레이츠 호라고 정했다.
예전에 그 카르낙보다도 1.5배는 더 큰 이 배는 대수림에서만 자생하는 흑목으로 만들어 그 위용이 제법이었다.
자신의 로망을 제대로 충족시켜 준 녀석이라 로빈도 크게 기뻐하며 이 선박을 자랑스러워했다. 우버 마을 사람들이 탄성을 내뱉는 모습이 얼마나 짜릿하던지. 사람들이 이래서 슈퍼카에 목을 매나 보다.
그리고 영지의 슈퍼카가 황도를 오가며 혼 래빗을 실어 날라 지난 1년간 영지도 매우 윤택해졌다.
구멍이 났던 군비를 다시 채우고, 여분의 돈으로 식량을 사 모아 차곡차곡 창고에 쌓아 올렸다. 그만큼 혼 래빗 고기가 황도에서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배가 완성된 후 각 마을에서 진행 중이던 공사도 하나둘씩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여섯 개의 창고가 완성되며 영지 대공사는 성공적으로 종료.
영지는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계속된 공사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생스러운 시간을 보낸 결과였다.
특히 지온과 히센.
여러 곳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공사를 책임진 지온이나 마법이 가미된 모든 건물을 점검한 히센의 고생은 정말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지경이었다.
게다가 히센은 그 뒤로 바로 작업장으로 끌려가 지금도 고생하고 있었다. 진짜 히센에게는 좋은 약이라도 한 첩 지어줘야 할 거 같았다.
남쪽 마을로 떠난 망나니 원, 투는 아직도 특별한 소식이 없었다. 듀발만 가끔 소식을 전해왔는데 그 스스로가 만족할 만한 수준이 될 때까지는 영주인 저를 만날 생각이 없다는 말만 전해왔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하려는지 모르겠다.
물론 자신이 직접 내려가서 그들을 확인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저렇게 단호하게 말하는데 굳이 내려가서 산통을 깨고 싶지는 않았다. 이럴 때는 그저 내버려두는 것이 바로 도와주는 거다.
그리고 실비아.
실비아가 드디어 처음으로 무언가를 만들어왔다.
그녀가 만든 건 바로 급속 지혈제.
혼 래빗 뿔을 재료로 한 지혈제였다.
물론 지금까지도 혼 래빗 지혈제를 잘 사용하고 있었다. 이 약은 영지의 기사들뿐만 아니라 황도로도 팔려 나가는 효자 같은 물건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실비아가 만든 지혈제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혼 래빗 뿔과 약초들을 조합해 만든 지혈제와는 달리 이 지혈제는 순수하게 마수의 부산물과 실비아의 고유 마나만으로 만든 지혈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혈제는 용기만 잘 선택하면 훗날 큐브 포털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기물이었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실비아의 마나로 가공해야 하는 물건이라 대량 생산이 불가능하다는 거였다. 그래서 돈이 전혀 안 된다는 건데, 미래를 생각하면 이 정도만 해도 정말 대단한 거였다.
그리고 왜 굳이 이런 걸 만들었냐는 로빈의 질문에.
“도련님은 이상하게 마수 부산물에 집착하세요. 모든 물건을 그걸로만 만들려고 하시고요. 그래서 저도 한번 그렇게 해봤어요. 왠지 도움이 될 거 같아서요. 헤헤.”
이렇게 말해 그를 소름 돋게 했다.
자신의 별거 아닌 행동을 분석해 목적을 정확하게 이해한 그녀의 분석력에 한 번 소름이. 그렇게 자주 만난 것도 아닌데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꾸준히 관찰해 왔다는 것에 또 한 번 소름이. 게다가 그걸 결국 만들어낸 그녀의 능력에 마지막으로 소름이 돋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