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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99화 (99/303)

99화

그야말로 집념의 천재 스토커 연금술사가 탄생한 격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로빈은 정말 기뻤다. 변변찮은 사제도 없는 영지에서 아무런 회복약도 없이 훗날을 맞이할 뻔했는데 예상치도 못하게 큰 선물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 급속 지혈제만 있어도 그곳에서 과다 출혈로 사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죽지만 않고 무사히 나오면 그때는 어떻게든 살아날 수 있는 거고.

자신에게 당당하게 이걸 내밀던 실비아가 얼마나 빛나 보이던지.

솔직히 그날만은 실비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귀염 터지는 꼬맹이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드디어 로빈이 열두 살이 되는 해가 밝아왔다.

올해는 정말 특별했다. 바로 황태자가 열다섯 살이 되어 원작이 시작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빈과 카인은 황태자의 성인식을 축하하고 로빈에게 영주 직과 작위를 정식으로 물려주기 위해 황도로 출발하게 되었다.

로빈이 영주가 된 지 벌써 2년이나 지났고 진작에 황도에 가 정식으로 작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지만, 굳이 그러지 않은 것은 어차피 올해 무조건 황도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황태자 전하의 성인식에는 무조건 모든 귀족이 참석해야 하지. 그런데 굳이 두 번이나 황도에 들를 필요 있겠니? 그냥 그때 가서 한 번에 해결하는 게 좋을 거 같구나.”

처음 로빈이 영주에 취임했을 때 황제의 재가가 필요하지 않으냐는 그의 질문에 카인이 이렇게 대답했었다.

너무나도 카인다운 말.

물론 로빈도 귀찮은 건 마찬가지였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리고 오늘이 와 드디어 황도행에 나서게 된 것이다.

로빈은 드디어 원작이 시작되고 성인이 된 황태자를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자신을 전혀 모르겠지만 어쨌든 주인공을 만나게 된다는 기대감이 반이었고, 앞으로 이어질 우울하고 짜증 나는 미래에 대한 걱정이 반이었다.

그리고 마음 한편에는 혹시 황태자가 주인공이 아니라 쩌리 황태자일지도 모른다는 걱정까지 안고 있었다. 물론 그렇진 않겠지만 이 세상이 어떤 미친 일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다 보니 새삼 불안한 거였다.

그렇게 로빈은 기대감과 불안감 그리고 묘한 감흥을 느끼며 검고 아름다운 그레이츠 호에 몸을 실었다.

【태동기】

물살을 가르며 경쾌하게 전진하는 그레이츠 호.

검은 동체가 매력적인 이 배 위 갑판 한쪽에서 카인과 로빈이 바다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둘 다 이렇게 배를 타고 나와 바다를 바라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영지에 이렇게 멋진 녀석이 있음에도 한 번도 항해에 나서지 않은 건 그야말로 슈퍼카를 뽑아놓고 시승조차 하지 않은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굳이 배를 타고 어딜 방문할 일은 없었지만 무심하긴 무심한 거였다. 이런 일이 없었으면 앞으로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굳이 일을 만드는 걸 꺼리는 로빈이었으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다.

어쨌든 배 위에서 내려다본 바다 풍경은 생각보다 더 볼만했다. 예전에 이런 경험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생각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솔직히 생각보다 더 승선감이 좋아 조금 놀라기도 했다. 자신의 예상보다 이곳의 조선 기술이 더 뛰어난 모양이었다.

전생에서 로빈도 한때나마 해적왕이 되고 싶다든지, 무적함대를 꾸리고 싶다든지 하는 치기 어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물론 상상으로만. 어쩌면 망상을 즐긴 것이었지만 그런 상상을 할 때면 잠시 답답한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나이가 들수록 그런 상상을 하는 것조차 사치인 상황이 이어져 이제는 잊고 있던 기억이기도 했다.

그래, 그런 날도 있었지. 유치하긴 해도 나쁘지 않은 추억이랄까?

그런 기억 때문인지 이렇게 범선 위에 올라 바다를 가르고 있자니 뭔가 묘한 기분이었다. 정말 배를 처음 뽑았을 때 시승이라도 해볼걸 그랬나 보다.

카인은 흐뭇하게 웃으며 그런 손자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주 직위를 물려준 지는 벌써 2년이나 지났지만 정작 황실에 정식으로 보고하고 작위까지 완벽하게 물려준다고 생각하니 대체 언제 저렇게까지 컸나 싶어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론 대견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언제나 의젓했던 손자가, 심지어 말을 떼자마자 의젓했던 놀라운 녀석이었는데 저렇게 바다를 내려다보며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제법 재미있는 볼거리였다. 아무래도 배를 타고 바다를 보는 것이 생각보다 더 즐거운 모양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이 모습을 계속 지켜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겠지만 어쨌든 황도에 가는 길이니 몇 가지 충고를 건네고 싶었다. 상당히 영특한 녀석이긴 하지만 황도 귀족들의 유치한 작태에 상처라도 받을까 걱정되어서였다.

“로빈, 황도에서 귀족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굳이 귀담아들을 필요 없단다. 그네들은 그네들이고, 우린 우리니 말이야.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앞으로 나아갈 길도 완전히 달라.”

“음, 그런가요?”

할아버지의 말은 갑작스러웠지만, 충분히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하긴, 원래 변방 소귀족이 중앙에 발을 내디디면 어느 정도의 괄시는 당연한 법이었다. 실제로 겪은 적은 없지만 어떤 소설을 봐도 지방 귀족을 하하 호호, 웃으며 반겨주는 중앙 귀족은 드물었으니 아마 자신의 예상이 크게 틀리진 않을 것이다.

물론 영지의 위상이 예전보다 좋아져서 그렇게 개무시당할 정도는 아니지만 좋은 대우도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영지에 공장이 있는 건 그럭저럭 인정받을 요소가 되긴 하려나? 변방 끝자락에 위치한 영지치고는 제법이라 할 만했으니 말이다.

아, 나 열두 살이지.

비록 2년 동안 적당히 자라 이제는 제법 아이 태를 벗었지만 그래도 이 나이에 영주라고 하면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할지 짐작하기조차 힘들었다. 당연히 그리 좋은 반응을 보이진 않을 테고.

이거, 진짜 개무시당하는 거 아냐? 역시 이번에는 최대한 자중하며 구경이나 잘 하고 가야 할 거 같았다.

“음. 뭐, 알겠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네들이 뭐라고 해도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요.”

당연히 별로 신경 쓰지는 않겠지만 로빈도 이번 황도행에 얻고 싶은 것이 분명히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역시 황태자를 확인하는 거였다.

성인식 날 회귀한 황태자는 죽은 자신이 갑자기 회귀했다는 사실에 당황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끔찍한 일을 겪지는 않겠다고 다짐하며 완전히 달라지는데.

어차피 소설을 기준으로 본다면 도입부에 불과한 시기라 특별한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그의 존재를 제대로 확인하는 건 생각보다 의미 있는 일이었다.

또 3황자나 그의 세력권에 속하는 리아넨 공작, 그리고 조셉 공작이 어떤 사람들인지 확인하고 싶기도 했다.

조셉 공작은 현 황후의 오빠로 사적으로는 3황자의 삼촌이 된다. 그래서 무조건 3황자와 같은 배를 탈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고.

결국 3황자가 황좌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않는 이상 황태자와 계속 대립하는 인물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리아넨 공작.

로빈은 개인적으로 이 인물이 너무 궁금했다. 자신과 생각이 너무 달라서인지 은근히 호구 짓만 하는 리아넨 공작가인데 공작 본인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그레이츠 영지의 명예 영지민(?) 그릭스 대공자도 궁금한 건 마찬가지였고.

이 사람이 언제 죽더라?

원래대로라면 이번 황태자의 성인식을 마치고 돌아가다가 마차 전복 사고로 리아넨 공작이 사망한다. 그 후 자연스럽게 지카스 리아넨이 공작위에 오르게 되고.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좀 이상하게 됐다.

리아넨 공작이 사고로 사망할지는 알 수 없지만 이미 죽어서 없어야 할 그릭스 리아넨이 아직도 멀쩡히 살아있었으니 말이다.

만약 지금 상황에서 리아넨 공작이 사망하면 그 뒤는 그릭스 대공자가 이어받게 될 것이다. 그러면 소설의 흐름이 또 완전히 바뀌게 되는 건데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소설에서 보면 지카스는 양아치 중의 양아치였다. 하는 짓은 또 얼마나 영악한지.

결국 황태자 형님이 휘두른 분노의 철퇴에 떡실신하긴 하지만 밥맛없는 짓을 참 많이 하기도 했다. 저놈이 죽었을 때 사람들이 죽을 놈이 잘 죽었다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또 웬만하면 둘 다 살아서 지카스가 공작이 되지 않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어쨌든 상당히 복잡한 기분이었다.

며칠이 지나고 드디어 황도에 도착했다.

물론 정확히 말하자면 황도 근처 항구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마차를 타고 황도에 진입하게 된다.

로빈 일행은 황도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주노 상단의 황도 지부를 찾아갔다.

원래 황도를 자주 방문하는 귀족들은 이곳에 따로 저택을 사들이는 경우도 많은데 지금까지 어떤 그레이츠 자작도 황도에 오래 머문 적이 없어 황도에 저택을 소유한 적이 한 번도 없단다.

가난할 때야 그렇다 치지만 한창 잘나갈 때도 그랬다니 참 알 만한 사람들이었다.

하긴 저택이 있었으면 저번에 방문했을 때 그렇게 여관에서 지내진 않았겠지. 물론 이제 제법 넉넉하긴 하지만 로빈 역시 황도에 저택을 구입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딱히 장소를 가리는 편이 아니었던 카인과 로빈 모두 주노 상단에서 마련해 준 잠자리에 그럭저럭 만족할 수 있었다.

이번 행사가 범제국적 규모로 진행되는 만큼 지방의 귀족들도 대부분 참석하게 되는데 덕분에 고급 여관들 역시 북새통을 이룰 것이 분명했다. 황도에 따로 저택을 구입하지 못하는 귀족들도 상당히 많았으니 당연한 일이리라.

그렇게 고만고만한 귀족들이 한곳에 모이면 충돌은 당연한 수순이었으니 그런 충돌을 겪는 것보다는 그냥 주노 상단에서 속 편하게 지내는 것이 훨씬 나았다. 고급 여관보다야 조금 불편한 면이 있지만, 몸이 편한 것보다 마음이 편한 걸 선택한 것이다.

그렇게 황도 여기저기를 구경하며 지내는 동안, 황태자의 성인식 행사가 진행되는 날이 밝았고 로빈과 카인 모두 조금 긴장된 얼굴로 입궁하게 되었다.

물론 이미 작위 인계에 대한 서류를 황실에 넘긴 지 오래였다. 그러니 오늘은 황제에게 얼굴을 비치고 작위를 넘겨줬음을 확인받으면 족했다.

사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요식 행위에 불과해 굳이 황제 폐하를 뵐 필요까지는 없는 건데 그레이츠 영지는 항상 그렇게 해왔다. 황제 폐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나 뭐라나.

오늘 로빈과 카인이 입은 옷은 정장과 거의 비슷한 신사복이었다.

전생의 정장과 너무 흡사한 연회복.

항상 현대식에 가까운 원피스나 반바지를 즐겨 입는 어머니들의 모습도 그렇고, 소설에서 묘사했던 캐릭터들의 외형을 생각했을 때 이곳 귀족들이 현대의 복식과 거의 비슷하게 입는다는 건 대충 알고 있었지만, 그 실체를 직접 확인하고 나니 또 오묘한 기분이었다.

“잘 어울리는구나, 로빈. 사위를 닮아서 참 훤칠해. 허허.”

“그래요? 할아버지도 멋있으세요. 도리아 여사님이 반할 만한 남자죠.”

“뭐? 원, 녀석도.”

서로 웃는 낯으로 칭찬을 건네는 두 조손.

하지만 말뿐만이 아니라 둘의 모습은 제법 준수했다. 특히 윌리엄의 우월한 유전자를 이어받은 로빈은 눈에 확 띄었는데 나이보다 훤칠한 키와 그 특유의 성숙한 분위기 때문인지 좀 작은 성인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새삼 꾸며놓으니 더 괜찮다고 해야 할까? 그러니 그 모습에 카인 역시 기꺼울 수밖에 없었다.

행사의 규모가 그렇다 보니 황실의 대연회장은 역시 여러 사람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이곳에 익숙한 사람들은 서로 아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지만, 로빈과 카인 모두 초행이라 멀뚱멀뚱 사람들만 구경하고 있었다.

물론 따지고 보면 카인은 초행이 아니긴 했다. 수십 년 전 이곳에 한 번 들른 것도 경험한 것이 맞긴 했으니 말이다.

친분을 쌓으려고 한다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통성명을 하고 인사를 나누면 되지만 둘 다 그럴 생각은 별로 없어서 그냥 멀뚱히 지켜보기만 하는 거였다. 둘은 그저 귀족들이 황제에게 인사하는 시간이 되면 황제 폐하에게만 인사를 올리고 물러날 생각이었다.

그 막간의 시간에 로빈은 빠르게 이곳저곳을 훑어보며 누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있었다. 특히 여러 귀족들 사이에서 진지하게 대화 중인 리아넨 공작과 대공자 그릭스를 발견한 것은 제법 괜찮은 성과였다.

그들은 오늘 황태자의 성인식을 이렇게까지 거국적으로 벌인 황제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자신들이 지지하는 3황자의 성인식은 이보다 더 거창하게 치러야 한다는 이야기가 오고 갈 수도 있었고.

음, 리아넨 공작이라.

리아넨 공작은 생각보다 더 멀쩡한 사람이었다. 다소 거만한 느낌이 있긴 했지만 그건 자신의 위치와 지위에 대한 자신감 정도로 보였으니 말이다.

성향도 크게 모나지 않았는데 자존심과 명예, 허례허식을 중요시하지만 특별히 이중적이거나 음흉, 사악한 사람은 아닌 거 같았다. 힐데 후작처럼 진성 양아치는 아니라는 거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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