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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100화 (100/303)

100화

그리고 그 옆에 있는 그릭스 공자는 거의 기사 같은 느낌이었다. 무턱대고 대수림에 따라올 만큼 생각이 깊은 사람은 아니지만 좀 담백한 느낌이랄까? 이곳저곳에 빠르게 소문 낼 수 있을 만큼 교우 관계도 괜찮은 듯하니 아마 성품 자체도 그리 모나진 않은 모양이었다.

역시 지카스랑은 좀 다른 건가?

이곳에 참석하지 않아 지카스를 확인하지 못한 건 좀 아쉬운 일이었다. 사악한 놈은 또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그걸 확인 못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연회장을 슬쩍 훑어보던 로빈은 우연히 한 인물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름: 다이앤 트와이드

성향: 외강내유. 다정. 내조

타이틀: 황실의 숨겨진 보석(U). 절색(R)

황실 특유의 허니 블론드에 살짝 올라간 눈매가 도도해 보이는 여성.

이제 갓 성인이 된 듯 성숙하면서도 앳된 이 여성은 연회장 구석에서 조용히 연회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로빈이 이 여성에게 눈이 갈 수밖에 없었던 건 이 여성이 그만큼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다이앤… 누구지?

머리 색이나 성을 봤을 땐 황족임이 분명한데 이름이 너무 생소했다.

가만있어보자, 황실에 황녀가……. 아.

소설에서 황실에 대하여 잠시 설명한 부분이 떠올랐다.

황실에는 두 명의 황녀가 있는데 2황녀는 현 황후의 출생이자, 3황자의 동생이었다.

그 말은 3황자보다 어리다는 뜻이었으니 저 여성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저 여인은 1황녀라는 의미였다. 1황녀는 아마 2황자와 같은 핏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2황자의 동복누이라.

저 여성이 왜 생소할 수밖에 없는지 대충 이해가 갔다. 2황자가 죽고 한 줄로밖에 설명되지 않은 여성이니 그럴 수밖에.

그런데 예쁘긴 더럽게 예뻤다. 하긴, 절색에 보석이란 타이틀까지 달고 있으니 예쁘긴 하겠지.

하지만 단순히 예쁜 것보다 로빈이 평소에 가장 좋아하던 스타일이라는 게 너무 컸다.

저 황녀가 훗날 2황자가 죽은 후에 다른 나라로 팔리듯이 시집을 가던가?

로빈은 왠지 좀 아깝다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간섭하기에는 너무나 큰 문제였다. 어차피 한 번 보고 말 사람인데 감상이 쓸데없이 너무 길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시종의 소개와 함께 황족들이 하나둘씩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3황자였다.

“위대한 황금 독수리의 자손, 3황자 페루 엡솔루트 트와이드 전하. 황금 독수리의 아름다운 작은 꽃, 2황녀 우에나 트와이드 전하 입실이옵니다.”

그렇지.

황족이 연회장에 들어설 때는 저렇게 시종이 큰 소리로 입장을 알리게 된다. 어떤 소설에서는 직위가 높은 귀족이 등장할 때도 저렇게 하는데 이곳에서는 저런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건 오로지 황족뿐이었다.

가만, 그런데 왜 1황녀는 아무런 말도 없이 나타나 구석에 자리 잡은 거지? 아무리 황비나 2황자의 입지가 미약하기로서니…….

생각보다 더 안 좋은 건가? 3황자 쪽은 몰라도 황태자와는 그럭저럭 잘 지내는 거로 알고 있는데.

하긴 2황자도 지금 계속 변방을 돌며 기사로 활동하고 있으니 마땅히 에스코트할 사람도 없어서 그런 건가?

잠시 자기도 모르게 1황녀를 생각하던 로빈은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낸 3황자 덕분에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물론 정신을 차리기 위해 잠시 고개를 저으며 주위를 환기하기도 했다. 하, 1황녀 포스 정말…….

3황자.

이 소설의 대표적인 악역 중 하나인 3황자 페루 트와이드는 생각보다 더 잘생긴 미소년이었다. 황실의 마스코트 같은 허니 블론드 역시 너무나 잘 어울렸고.

씨 도둑질은 못 한다더니 황제 자체가 대단한 미남이라 그 피를 이어받은 황태자나 다른 황자들도 상당히 뛰어난 용모를 자랑하는 것이다.

조금 오만해 보이긴 하지만 그건 그저 지위가 높은 자들의 패시브 스킬 같은 것에 불과했다.

생각보다 산뜻하게 생겨서 솔직히 좀 놀랐다. 제법 망나니로 나오던데 역시 생긴 것만 보고 성품을 파악할 수는 없는 일인가 보다.

저 녀석이 나랑 동갑이었지?

나이는 같았지만 자신보다는 조금 작아 보였는데 아무래도 사람마다 성장 속도가 조금씩 차이가 나 그런 거 같았다.

동갑이라… 어쩌면 훗날 아카데미에서 마주칠 지도 모르겠다. 황족도 의무적으로 아카데미에서 수학해야 하니 그럴 가능성도 없진 않으리라.

물론 황족은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입학하는 게 관례라지만 과연 3황자도 그 관례를 지킬지는 의문이었으니 말이다. 괜히 귀찮은 일이나 없었으면 좋겠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 나가고 있을 때쯤 다시 시종의 외침이 들려왔다.

“위대한 황금 독수리의 자손, 황태자 페리안 엡솔루트 트와이드 전하 입실이옵니다!”

드디어 오늘 연회의 주인공이 등장하나 보다.

페리안 엡솔루트 트와이드.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오늘 연회의 주인공이었다.

이름과 성 사이에 들어간 엡솔루트는 황실의 직계 중에서도 황위 계승권이 있는 황자들에게만 추가되는 일종의 존칭이나 상징 같은 거였다. 제국에서 가장 완벽하고 순수한 혈통이라는 의미라나.

그런 거면 황녀들에게도 붙여야 할 텐데 그건 또 아니었다.

어쨌든 그렇게 황태자 페리안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음…….”

페리안의 모습을 확인한 로빈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이름: 페리안 엡솔루트 트와이드

성향: ???

타이틀: 주인공(O). 아수라장의 파괴자(S, 비활성). 마스터(S, 비활성). 신검합일(L, 비활성)

우선 지금까지 린이나 세이라를 보며 소설의 주인공이나 주요 조연들과 비벼볼 만한 거 아니냐고 생각했던 자신의 오만함을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저 정도는 돼줘야 주인공이라고 어깨에 힘 좀 줄 수 있는 모양이니 말이다.

아마 저 타이틀이 아직 비활성인 건 오늘 회귀하는 바람에 아직 예전 수준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해서인 거 같은데, 그건 아마 시간문제일 것이다.

O, S, S, L이라. 타이틀이 네 개나 되는 것도 처음 보는데, 그 수준이 참……. 게다가 성향 창이 가려져 있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하, 진짜 꼭 중요한 부분에서 이러기냐? 진짜 양심 좀.

하지만 그것들과는 별개로 황태자의 분위기가 너무나 오묘했다.

소설에서는 이 장면을 ‘자신을 배신한 자들에게 의연한 미소를 보내며 굳은 의지를 다진다.’라고 표현했던 거 같은데 지금 저 모습은 의연한 미소라기보다는 뭐랄까, 염세적? 달관? 그런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특히 놀라운 미남인 황태자가 저런 염세적인 미소를 짓고 있으니 뭔가 퇴폐적이며 몽환적인 느낌까지 들었다.

솔직히 지금까지 자신의 아버지 윌리엄보다 잘생긴 남자는 처음 봤다. 역시 주인공이라고 해야 하나?

연회의 주인공까지 등장하자 그 뒤로 바로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가 입장했고, 황태자가 둘에게 인사를 건넨 후 바로 황태자의 성년을 알리는 황제의 선언이 이어졌다.

성년이 된 황태자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황후와 그런 황후에게 냉혹한 살소를 머금는 황태자의 모습도 정말 신기한 볼거리였다.

하지만 대놓고 저럴 정도라니 개판은 개판인 모양이었다.

전생의 황태자는 이 분위기에서도 좋은 사람으로 남았는데 대체 무슨 정신머리로 살았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사람 좋은 것도 정도껏이지.

다만 황제도 갑자기 변한 황태자의 분위기가 의아하긴 한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하긴 그렇겠지. 항상 희희낙락이라 걱정스러웠던 황태자가 하루아침에 완전 다른 사람이 되었으니 놀랄 수밖에.

어쨌든 그렇게 황태자의 성년 선언까지 마친 후에는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되기 전 귀족들이 황제에게 인사를 올리는 시간이 있었다.

물론 모든 귀족이 인사를 올리는 건 아니었고 특별한 일이 있는 자들만 인사를 올리는데, 대단한 공을 세우거나 세대교체가 일어난 귀족들은 특별히 황제에게 인사를 올릴 수 있었다.

당연히 로빈과 카인도 지금 인사를 올리고 다음 날 바로 영지로 복귀할 생각이었다. 굳이 3일이나 지속하는 연회에 계속 참가할 생각은 없었으니 말이다.

몇몇 귀족의 인사가 마무리되고 드디어 로빈의 차례가 되었다.

“그레이츠 자작령의 카인 그레이츠, 폐하께 문안 인사드리옵니다.”

“로빈 그레이츠이옵니다, 폐하. 만수무강하소서.”

카인이 자신을 소개하자 연회장 한쪽이 작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수십 년이나 황도에 등장하지 않았던 레어(?)한 인물이 등장했기 때문인 모양인데.

그 인물이 전혀 쓸데없는 인물이면 또 몰라도 나름 5대 방벽이라는 명성과 최근에 핫한 혼 래빗의 주인이 아닌가.

“그레이츠라, 5대 방벽의 그 그레이츠인가?”

“저들이 작년에…….”

“아무리 저치들이라도 이런 행사를 무시할 순 없었나 보군. 하긴 신년 연회의 초대장은 거절해도 이건 거절할 수 없었겠지.”

“그래도 혼 래빗인가 하는 거로 제법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하더이다.”

“그것도 웃긴 일이지. 영주가 푸줏간을 운영하는 꼴이 아닌가? 체면 따위는 얻다 팔아먹었는지 모르겠군. 상단에 맡기는 것도 아니고 자신들이 직접 관리한다지?”

“하하. 그것도 그렇군요. 순혈을 자랑하는 그레이츠가 제법 우습게 되었습니다.”

다른 부분은 다 넘어가겠는데 푸줏간이란 말에는 로빈도 살짝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지들도 잠정적 포주인 주제에 별걸 다 차별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눈앞에 황제가 있어서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내색하지는 않았다.

“격조했군, 그레이츠 자작. 아니, 이젠 그레이츠 전대 자작이라고 해야 하나? 매년 초대장을 보내도 계속 고사하기만 하더니 드디어 입궁했군 그래. 이번에 영주 직을 인계했다지? 그간 수고가 많았군.”

“황송하옵니다, 폐하.”

장난스러운 힐난조에 카인이 슬쩍 고개를 숙이자 룩센 대제는 웃음을 머금으며 로빈을 바라보았다.

“귀공이 로빈 그레이츠 자작이군. 헌앙하니 보기가 좋아. 작년에 보여준 자네의 충정을 내 잊지 않겠네.”

“황공하옵니다, 폐하.”

“그래, 어린 나이에 영주 직에 올라 고생이 많겠지만 영지민들을 위해 더 노력해 주게나.”

“명을 따르겠사옵니다, 폐하.”

원래 이쯤에서 인사를 마무리하고 물러나야 했지만 뒤에 황제가 한마디 덧붙이는 바람에 인사가 조금 길어지고 있었다.

“앞으로는 종종 황궁에 들러주게나. 전대 자작처럼 너무 물러나 있지만 말고. 매년 초대장을 보내는 사람의 성의도 생각해야지. 하하.”

“…명심하겠사옵니다, 폐하.”

로빈은 도대체 저 황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황제 앞에서 무슨 소리냐고 물을 순 없어 얌전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이게 무슨 말인지는 이따가 자신의 조부를 추궁(?)해 보면 알 수 있으리라.

다만 갑작스러운 황제의 말에 정신이 팔려 옆에서 자신을 묘하게 바라보는 황태자의 눈빛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말았다. 만약 알았다면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 정도는 알아챘을 텐데 말이다.

황제와의 대담을 마무리 짓고 다시 연회장으로 내려오자 로빈에게 접근하는 귀족이 몇 있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그릭스 대공자였다. 일부 귀족들은 못마땅해 하고 있었지만, 그릭스 대공자는 그야말로 혼 래빗 고기의 신봉자였으니 말이다.

“자네가 로빈 그레이츠군. 반갑네. 그릭스 리아넨이라고 하네.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지?”

“예, 공자님. 반갑습니다. 로빈 그레이츠입니다.”

“하하. 그래. 자네가 이렇게 훤칠한 인물인지는 몰랐지 뭔가.”

“말씀 감사합니다, 공자님.”

로빈은 대놓고 호감을 표하는 그릭스 공자의 모습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얘네들이 황태자와 대립하는 인물이긴 한데, 저러고 있으니 뭔가 부담스럽다고나 할까?

물론 아직까지 중립적인 입장인 그레이츠 영지였지만 잠정적인 황태자파에 가깝기 때문이었는데 꼼수 없이 호감을 표하는 사람에게는 좀 약한 로빈이 상대의 호의에 마땅히 대처할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신세 진 일도 있어 더 그런 거 같았다.

“어쨌든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내 그걸 안 먹으면 참 개운치가 않아. 그리고 종종 보세나. 배를 타면 영지와 황도가 그리 먼 것도 아니지 않나.”

“네, 뭐…….”

그렇게 인사하고 떠나려는 그릭스 공자에게 로빈이 무의식적으로 한마디 하고 말았다. 자신의 입이 뇌가 제지할 틈도 없이 열려버린 거라 로빈 스스로도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요즘… 이상하게 마차 사고가 잦다고 하더군요. 공자님도 조심하십시오.”

“응? 마차 사고? 아, 그런가? 하하. 그래, 내 조심하도록 하지.”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길.”

뭐, 이 정도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이게 무슨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말을 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은 좀 편해졌으니 말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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