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어차피 사람 목숨은 하늘에 달려있다고 하니 운명대로 흐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다음으로 접근한 사람 역시 로빈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같은 5대 방벽에 속한 자이트 자작령의 휴레이 자이트 자작이었으니 말이다.
“하하. 카인 님, 결국 오셨군요. 언제까지 버티시나 제법 궁금했는데요.”
“원, 사람도. 늙은이의 거동에 무슨 관심이 이리 많은 게야? 그러는 자네야말로 황도 방문이 오랜만이지 않나?”
“아무래도 영지 때문에 그렇긴 하죠. 하지만 전 역시 여기보다 영지가 좋군요. 가끔은… 저치들이 마수들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카인과 한껏 친밀감을 내비치는 듬직한 중년의 남성 자이트 자작.
그런 그의 마지막 한마디는 조금 씁쓸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작년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그에게는 충분히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다. 아니, 오히려 저 정도면 온건하게 표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작년 겨울은 예상보다 마수의 습격이 빈번하고 격렬한 계절이었다.
특히 그동안 잠잠했던 마수 산맥 쪽에서 대단위 습격이 계속되었는데, 미리 북쪽 방벽까지 점검한 그레이츠 영지는 별 피해가 없었지만 5대 방벽에 속하는 다른 영지들은 기습적인 대규모 습격에 제법 큰 피해를 보기도 했다.
그리고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이 저 자이트 자작의 영지였다.
자이트 자작은 처음 습격이 시작되었을 때 올해 마수 산맥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고 보고하며 황실에 지원을 요청했다. 물론 흔한 일도 아니었고 자이트 자작 딴에는 자존심 따위보다는 영지민의 안전을 선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황실 근위대가 출동하기 위해서는 제법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물론 국가 위급 시에는 특별한 절차 없이 출동할 수 있게 되어있지만, 귀족 회의에서 동의하지 않는 이상 국가적인 위기라고 볼 수 없어 모든 절차를 지켜야 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귀족 회의에서는 이 사태를 긴급 상황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황실 근위대의 출동이 너무 늦어지고 말았다.
그들이 이런저런 이유를 대고는 있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냥 파벌 싸움이었다. 정통적으로 황제를 지지하는 5대 방벽에 대한 견제라고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들도 진짜 마수 때문에 자이트 자작령이 큰 피해를 입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이트 자작령이 멸망하면 그 피해가 자신들에게까지 올 수 있다는 생각도 절대 못 했을 테고.
지금까지 5대 방벽이 천 년을 굳건히 지켜왔으니 그런 안이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결론만 말하자면 피해를 보았지만 자이트 자작령을 무사히 지키긴 했다.
아마 저들은 자이트 자작령의 상황을 전해 듣고 생각대로 됐다고 쾌재를 불렀을지도 모르겠다. 황제파에 가까운 5대 방벽이 적당히 피해만 입고 중앙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들의 최종 목적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자신들을 지켜주길 바라고 있었겠지.
하지만 정작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볼 수도 있었던 자이트 자작령을 구원한 것은 황도보다 한발 먼저 움직인 그레이츠 자작령이었다.
작년 겨울, 제법 잦은 습격에도 그레이츠 영지는 굳건했다.
가장 큰 요인은 역시 방어 병력이 충분하다는 거였다. 마수 산맥은 요동치고 있었지만, 그에 비해 몇 년간 소란스러웠던 대수림은 오히려 잠잠해 모야족 전사들이 북쪽 방벽으로 지원 올 수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워낙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데다가 충실한 장비까지 지급받아서인지 새로 임관한 기사들도 다 제 몫을 해주고 있었다.
병력이 넉넉해 여유가 생기자 폴은 이 위기를 주술 문양에 익숙해지기 위한 기회로 삼았다.
주술 문양은 파괴력이 굉장하지만, 체력 소모가 심한 것이 단점이었는데 몇 교대로 방어에 투입할 수 있는 상황이다 보니 그 단점마저 무색할 지경이었고, 기사들이 본격적으로 주술 문양을 사용하자 전선은 더 빠르게 정리되었다.
게다가 로빈이 미리 정비한 북쪽 방벽은 너무나도 튼튼했다.
물론 로빈이 이런 일이 일어날 걸 미리 알고 방벽을 보강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훗날 있을 난리를 대비한 것뿐이었는데 그 시기가 일러 오히려 덕을 보게 된 셈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겨울에 습격한 마수들은 그레이츠 자작령의 기사들 그리고 전사들의 경험치(?)가 되어 장렬히 산화하고 말았는데.
그레이츠 자작령이 황실의 지원 권고를 받은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황실 근위병의 출동이 지연되자 황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근처 지방 영지로 서둘러 지원 요청을 보내기 시작한 것인데.
5대 방벽 모두가 마수의 습격을 받은 상황이다 보니 근방의 영주들도 자신들의 안위를 걱정해 쉽게 파병을 결정할 수 없었다.
5대 방벽이 무너지면 자신들의 영지도 위험하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지만 한쪽으로 지원 병력을 보냈다가 다른 곳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낭패를 볼 수도 있는데다가 괜히 파병했다가 병력만 상하면 훗날 황실의 보상금을 받는다고 해도 쉽게 만회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돈이 늘어나도 바로 전력을 상승시킬 수 있는 건 아니었고 그 공백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일단 전력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어쨌든 황실에서 권고가 나왔으니 듣는 척이라도 해야 했던 주변의 영주들은 우선 간을 보는 차원에서 약간의 병력을 보내는 정도로 생색을 낼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그레이츠 영지에서 상당한 전력이 자이트 영지로 출동하게 된다.
무슨 특별한 사명감이나 대단한 충성심으로 병력을 낸 것은 아니었다.
우선 5대 방벽은 모두 유기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에 한쪽이 무너지면 마수 산맥의 상태계가 크게 요동칠 수도 있다는 우려, 그리고 이 기회에 충분한 실전 경험을 더 쌓는 것이 좋겠다는 계산, 상급 마수가 기어 나온 것이 아닌 이상 절대 피해를 보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요약하자면 마수 산맥의 변화를 걱정한 로빈이 더 큰일이 일어나기 전에 실전 경험을 충분히 쌓을 목적으로 병력을 출동시킨 것이다.
그렇게 그레이츠 영지에서 지원한 병력은 기사가 20, 모야족 전사가 30에, 정예 병사가 200이었다.
특히 그레이츠 영지의 기사급 병력 50은 전황을 완전히 뒤집는 위력을 보이며 자이트 영지 방어에 큰 공을 세우게 된다.
그 결과 자이트 영지는 제법 피해를 보았지만 결국 무사히 영지를 방어할 수 있었고, 로빈은 의도했던 대로 명망과 충분한 경험을 얻게 되었다.
이 일은 시간이 흐른 뒤 결국 고위 귀족들의 실책으로 남았다. 북부에서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며 자이트 영지는 무사했지만 그 피해는 상당했고 황실 근위병의 출동을 지연시킨 것이 결국 그들의 발목을 잡게 된 것이다.
어느 정도 피해는 있더라도 충분히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3황자파 귀족들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 같은 일이었는데, 이는 이들이 지난 마수 범람 때 5대 방벽 모두 상당한 피해를 보았고 이번 습격이 자이트 영지 쪽에 집중되었다는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었다.
어쨌든 황제를 그럭저럭 잘 압박하고 있던 고위 귀족들은 이 일로 계기가 다시 기세가 꺾였다.
황제의 미묘한 환영과 덕담. 그리고 귀족들이 은근히 거북한 반응을 보이던 것도 대충 그런 맥락이었다.
특히 일부 귀족들의 반응은 좀 어이없었는데 만약 자신들이 더 빨리 출동했으면 자이트 영지에 피해가 없었을 거란다.
아마 자신들이 황실 근위대 출동을 막은 걸 어떻게든 정당화하기 위해 그렇게 말한 모양인데, 좀 미친 거 같았다. 아무리 정치가 그런 거라지만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내가 무슨 궁예냐? 내 집 지키기도 바빠 죽겠는데 남의 집에 도둑이 드는 걸 어떻게 알아?
하여간 이놈이나 저놈이나.
그러고 보면 아까 자신에게 친근하게 인사를 건넨 그릭스 대공자가 오히려 대단하다. 본의는 아니었고 거의 자업자득 수준이지만 어쨌든, 자신들에게 정치적 피해를 준 잠재적 정적에게 그런 태도를 보인 게 아닌가.
생각이 없는 건지, 아니면 너무나 대범한 건지.
어떤 의미에서든 인물은 인물임이 확실했다.
로빈이 은근히 당황하며 놀랐던 것도 기본적으로는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 호의와 호감이 진심으로 느껴지기 까지 했으니 말이다.
“흥, 아마 저치들 중에 변방 전선이 어떤 식으로 굴러가는지 아는 분은 레오니스 공작 각하뿐일 겁니다. 나머지는 그냥 탁상공론이죠. 5대 방벽에서 날아온 지원 요청을 그런 식으로 묵살하는 귀족 회의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건 그렇구먼. 이쪽에서 날아가는 지원 요청은 진짜 심각한 건데 그걸 그렇게 처리하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긴 해.”
확실히 이 부분은 그쪽도 할 말이 없을 거다. 웬만한 일은 그럭저럭 잘 처리하면서 왜 마수와 관련된 일은 그따위로 처리하는 건지 로빈도 이해하기 힘들었으니까.
예전 대수림 건도 그렇고, 정말 얘들은 이쪽으로는 전혀 감이 없는 거 같았다. 아무리 자꾸 북방 쪽에 힘을 실으려는 룩센 대제의 정책이 불안했기로서니 근위대의 출진을 막다니.
그건 대체 무슨 깡인지 모르겠다. 도대체 어떻게 책임을 지려는 걸까?
이번 일이 있기 전까지는 남부 연합국과의 관세 협정, 새로운 가축 치료제 발견, 라룬 반도의 해적 토벌 등 여러 가지 부분에서 좋은 성과를 보여 제법 기세를 올렸던 3황자파였는데 이번 실수가 제법 커 한 방에 모두 깎여 나갔다고 한다.
결국 돌고 돌아 제자리라는 건데 자신들의 치적을 3황자 쪽으로 돌려 차기 황제감은 3황자임을 어필하던 3황자파 입장에서는 좀 난감하게 되긴 했다.
공을 모두 3황자 쪽으로 돌렸으니 이제 책임은 어쩌겠는가? 3황자에게 돌리든지 아니면 자신들이 독박 쓰든지 해야 할 텐데, 그 부분에서는 아직도 확실하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어쩌면 황제가 나서서 대놓고 추궁하지 않고 있는 것도 저들이 자기네들끼리 책임 소재를 놓고 우왕좌왕하며 시간을 낭비하는 걸 지켜보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쪽 세상은 전생의 세상과는 달리 자신의 정치적인 행동에 대하여 무조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거였다.
이러쿵저러쿵 어떤 정책을 주장하든지 밀어붙이든지 하는 건 자유지만, 그 정책이 잘못되면 그게 실각이든 실형이든 뭔가가 뒤따른다는 뜻이었다. 성공적인 정책에 대한 공도 확실히 인정받는 곳이니 잘못되면 책임을 지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결국 잘된 것만 자신의 치적으로 남기고 잘못된 건 그냥 얌체같이 모른 척할 수는 없다는 건데.
봉구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정치가 그래서 그런 건지 어쨌든 그런 점은 명확해서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자이트 자작의 말을 들어보니 이번 일로 완전히 황태자 쪽으로 마음이 기운 거 같았다. 황실 근위대의 출동이 저지되자 바로 인근 영지에 연락을 넣어 지원을 받게 해준 황제의 판단력도 높이 사는 거 같고.
특히 황태자 쪽에 레오니스 공작이 있다는 것도 한몫했겠지.
훗날 황태자의 장인이 되는 레오니스 공작은 동부 끝자락에 큰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는 유목 부족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놈들이 또 골치 아픈 놈들이었다. 마치 여진족 같은 녀석들이라고 할까?
귀신같이 들어와서 약탈하고 도망치는 놈들 때문에 레오니스 공작의 영지도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잦은 약탈에 골치가 아프지만 이놈들을 완전히 소탕하러 깊숙이 들어가는 것도 꺼림칙하긴 마찬가지다. 집도 절도 근거지도 없는 놈들을 잡으러 들어가 봤자 보급선만 길어지고 워낙 재빠르게 도망쳐 완벽하게 다 처단하기도 힘들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런 곳에 영지를 가진 영주가 레오니스 공작이다 보니 그나마 군사적 식견이나 변방의 사정에 밝은 편이었다. 그 개인의 무력 또한 황태자의 검술 스승이 될 정도로 대단했고 말이다.
“그리고, 그레이츠 자작님. 예전에 말씀하신 거 말인데요. 흠흠. 혹시 지금이라도 가능한가요?”
“네? 아아, 그거요. 네, 뭐. 사정이 많이 안 좋으신가 보네요.”
“후~ 좀 그렇습니다. 중앙에서 대충 지원이 나오긴 했는데, 이번에 망가진 방벽을 보수하면 별로 남는 게 없군요. 생각보다 민간 쪽에 피해가 커서 가을까지 버틸 수나 있을지…….”
“음……. 그래요? 그 마음 제가 잘 알죠. 어쨌든 그럼 예전에 정한 대로 그렇게 해 드리면 될까요?”
“네, 그렇게 해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둘째랑 셋째가 다른 건 몰라도 마법적 재능만은 제법입니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럼 돌아가자마자 출발시키도록 할게요.”
아무래도 본격적인 목적은 이거였나 보다.
물론 영지의 큰 어른이신 할아버지께 감사와 안부 인사를 건네는 것도 중요한 목적 중 하나였겠지만 꼭 그것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작년 겨울에도 그렇지만 무조건 영지민부터 생각하는 걸 보니 확실히 이 사람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제법 자존심이 상할 텐데 저렇게 손을 내밀다니.
아마 제안한 당시에 바로 승낙하지 못한 건 마지막 남은 귀족적 자존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원래 이곳의 귀족들은 그런 존재였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스스로 해보려다가 도저히 안 된다는 걸 깨닫게 된 모양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