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같은 시간, 연회장 한쪽에서 자이트 자작과 대화를 나누는 로빈과 카인을 지켜보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바로 레오니스 공작과 레니아 공녀, 그리고 황태자 페리안이었다.
“자이트와 그레이츠군. 인사는 하지 않을 생각이냐?”
“굳이 그럴 이유가 있겠습니까, 스승님? 5대 방벽은 중앙에서 바보짓만 하지 않으면 알아서 잘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냥 두는 편이 가장 좋을 겁니다.”
“흠.”
“다만 어느 정도의 지원은 필요하겠군요. 저들이 기세가 좀 죽었으니 게거품을 물기 전에 지원책부터 마련해야죠. 저들에게 필요한 건 친목질이 아니라 실질적인 도움일 테니까요. 만약 저쪽에서 당근을 들고 5대 방벽을 회유하기 시작하면 더 피곤해질 수 있습니다.”
“당근이라…….”
“평소라면 신경도 안 쓰겠지만 근래 몇 번의 난리로 5대 방벽의 사정이 많이 안 좋아졌을 겁니다. 영지 방위가 최우선인 자들이니 지금이 가장 심적으로 취약할 시기인 거죠. 그러니 귀족들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게 중요합니다.”
“폐하께 그렇게 상신 드리도록 하마.”
“예. 부탁드립니다, 스승님.”
“전하께서 직접 상신 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시기가…….”
상정된 의견 하나하나가 모두 공이요, 식견을 자랑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상황이니 차라리 직접 간언하라는 레니아.
하지만 페리안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내가 아바마마께 요청하면 분명 이 일을 나한테 맡기실 거야.”
“그러니까요.”
레니아는 이번 일로 조금이라도 점수를 더 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페리안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지금 자신이 이런 일에 매달려 있을 때는 아니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지금은 할 일이 있어. 그 뒤로는 바로 아카데미에 들어가야 하고.”
“무슨 일을 할 생각이냐?”
“몇 가지 있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건 저들의 허점을 파고드는 거겠죠. 저들은 저번 실책으로 지금 한껏 움츠린 상태입니다. 게다가 책임 추궁 문제로 아직 자신들끼리도 정리가 되지 않았고요. 그 허점을 파고들어 몇을 포섭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가장 아픈 곳부터 찔러 들어가야죠.”
“가장 아픈 곳이라…….”
“돈줄부터 끊을 생각입니다. 첫 타깃은 힐데 후작. 조셉 공작의 자금책인 그 작자부터 처리할 생각입니다.”
“힐데 후작은 만만한 인사가 아니야. 뭔가 꺼림칙해도 아직까지 폐하께서 어쩌지 못한 건 무슨 이유가 있는 거란다.”
레오니스 공작의 걱정스러운 조언에 페리안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에는 냉정함만 가득한 기묘한 모습이었다.
자신의 제자가 그간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냉소적인 반응을 내비치자 레오니스 공작도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죠. 쉽지 않을 겁니다. 시간도 제법 많이 필요할 테고요. 하지만 그래서 가능하면 빨리 시작할 생각입니다.”
“흠, 그래. 한번 지켜보마.”
사석에서는 말을 놓을 정도로 깊은 관계인 레오니스 공작이었지만 현재 페리안의 입장에선 모든 일을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이 당황스러움, 희열, 그리고 끓어오르는 분노.
이 복잡한 감정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아니, 이 상황을 남이 이해할 수나 있을까?
“네. 걱정하지 마세요, 스승님. 제국은 반드시 지켜내겠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이죠.”
하지만 이것만은 맹세할 수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전부와 마찬가지인 제국을 반드시 지켜내겠다고.
한기마저 느껴지는 페리안의 각오에 레오니스 공작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무슨 계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드디어 자신의 제자가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자, 그럼 우선 재무관부터 만나볼 생각입니다. 가시죠, 스승님.”
레오니스 공작을 앞세워 재무관이 있는 곳으로 떠나는 페리안.
떠나기 전 슬쩍 로빈을 바라보다 발걸음을 돌리는 페리안의 입가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잠시 맺혔다 사라졌다.
* * *
다음 날, 로빈과 카인은 계획대로 오늘 영지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황제를 알현하고 황태자를 확인한다는 모든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에 굳이 더 남아있을 이유도 없었다. 특히 지금처럼 황도가 묘하게 어수선한 상황에서는 더욱더 그랬고.
“아깝지 않으냐, 로빈? 모처럼 힘든 걸음 했는데 말이야. 제대로 연회를 즐기지도 못하지 않았느냐. 특히 영애들이랑은 마땅히 대화조차 해보지 못했고.”
“아, 연회요? 글쎄요.”
연회 첫날은 묵직한 행사들 때문에 아무래도 분위기가 좀 무겁기 마련이고 참석하는 영애들도 몸가짐을 가지런히 하는 법이었다. 그러니 그녀들의 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건 오늘부터이리라.
로빈은 어린 나이에 벌써 영주가 되어 자리를 잡은데다가 용모까지 준수하다 보니 달콤한 어프로치를 받을 가능성도 제법 있었지만, 왠지 끌리지 않았다.
어제 몇몇 귀족들과 잡담을 나누며 곁눈질로 스캔해 본 결과 역시 귀족 영애들의 수준은 상당히 높았다. 게다가 중세풍의 치렁치렁한 드레스가 아니라 현대적 감각이 엿보이는 드레스나 미니드레스를 입고 있어서 그런지 은근히 향수를 자극하는 맛도 있었고.
아마 전생이었으면 자신 주제에 저 정도 외모의 미소녀들을 만날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흥미가 떨어지는데 어쩔 수 있나.
아무래도 귀족 영애와 정식으로 연애를 하는 것도 마땅치 않고, 결혼은 그 시기조차 기약할 수 없는데다가 정략으로 해야 할 가능성이 높아서 그런 것 같았다.
그리고 솔직히 외모만 놓고 본다면 오히려 영주 저택에서 같이 지내는 실비아나 모야족의 귀염둥이들이 더 나은 면도 많았다.
다만 최고의 미인 중 하나라는 레니아 공녀를 직접 확인하지 못한 건 좀 아쉬운 일이었다.
황제와의 대면을 앞둔 상황에서는 긴장해서 주위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고, 그 후에는 자리를 옮겼는지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말이다. 레오니스 공작과 황태자도 보이지 않았던 걸 보니 아마 다 같이 돌아가거나 다른 일정을 소화한 거 같았다.
진짜 미인이라고 했는데 말이야. 역시 1황녀랑 비슷한 수준이거나 그 이상이려나?
어쨌든 그것 외에는 별로 아쉬운 게 없었다.
“영주님, 손님이 오셨는데요?”
“예? 손님이요?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그렇게 어제의 연회를 생각하며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찾을 사람이 없는 이곳에서 자신에게 손님이 방문한 것이다.
로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 손님은 놀랍게도 리아넨 공작가의 그릭스 대공자였다.
아니, 이 사람이 왜?
“그레이츠 자작. 잘 지냈나?”
가볍게 인사를 건네는 그릭스 대공자의 표정이 웬일인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묘한 느낌이긴 했지만 로빈도 특별한 의미 없이 안부 인사를 건넸다.
“네, 뭐. 하루 사이에 별일이야 있었겠습니까? 공자님도 잘 지내셨나요?”
“하하. 그러게 말이야, 겨우 하룻밤 사이인데.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별일이 있을 수 있더라고.”
“예?”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하긴 좀 그렇고, 우선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온 거네. 물론 자네는 그냥 별 뜻 없이 건넨 얘기였겠지만 큰 도움이 되었지.”
“아, 네.”
“예전 일도 그렇지만 자네에게 묘하게 신세를 지는군. 혹시나 나중에 무슨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나한테 연락하게나. 내 가능하면 거절하지 않을 생각이니.”
아무래도 예전의 일이라면 그릭스 대공자가 상급 마수를 상대로 용맹하게 싸웠다고 보고한 그 보고서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솔직히 너무 받아먹은 게 많은데다가 괜히 대공자가 다치기까지 해 뒷말이 나올까 싶어 과장한 거였는데 그것 때문에 대공자의 체면이 좀 섰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적이 있었다.
좀 지난 일인데 아직 그걸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혹시 이상하게 호의적인 것도 그거 때문이었나?
“말씀만 들어도 감사하군요.”
“그래, 그럼.”
묘한 말을 남기고 바로 떠난 그릭스 대공자. 뭔가 느낌이 싸한 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거 같은 분위기였다.
역시 그냥 얼빠진 놈은 아니라는 건가?
하긴, 그래도 공작가의 대공자인데 저런 면이 없을 순 없겠지.
자신에게 저렇게 감사 인사까지 남기는 걸 보니 어제 분명 무슨 일이 있긴 한 모양이었다.
짐작할 수 있는 건 진짜 마차 사고가 일어났다는 것 정도인데.
어쨌든 감사 인사인 걸 생각해 보면 리아넨 공작에게 큰 탈이 생긴 건 아닌 거 같았다. 만약 그랬으면 저렇게 인사를 하러 올 심적 여유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혹시 리아넨 공작가 쪽에 무슨 일이 생기면 빠르게 보고해 주시겠어요?”
황도에 무슨 정보 조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주노에게 당부하는 정도였다.
나중에 무슨 큰일이 생기면 알 수는 있겠지.
무슨 일이 일어나긴 한 거 같은데 어차피 남의 일이라 딱히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그런 거 하라고(?) 우리 주인공 형님이 계시는 거였으니 말이다.
힘내세요! 전하!
게다가 일이 이렇게 되니 그릭스에게 뭔가 신세 진 듯한 껄끄러움도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오히려 가벼운 마음으로 처음의 계획대로 카인과 함께 영지로 돌아가는 배편에 몸을 맡길 수 있었다.
* * *
그 시각, 황도.
황태자 페리안은 어제 일어났던 묘한 사건에 대하여 보고받고 있었다.
“습격? 황도 환락가에서 습격이라고?”
“예. 전하. 리아넨 공작과 그릭스 대공자가 정체불명의 무리에게 습격당했답니다.”
페리안은 보고를 듣자마자 아차 하는 기분이었다. 회귀 전 리아넨 공작이 큰 부상을 당하고, 그릭스 대공자가 암살당하는 게 바로 어제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중요한 일을 잊고 있었다니.
하지만 워낙 경황이 없기도 했고, 혼재된 기억이 완벽하게 정리되지 않아 그 일이 어제 일어났다는 걸 미처 떠올릴 수 없었다.
원래 리아넨 공작이라고 하면 자신과 절대 어울릴 수 없는 지카스밖에 생각나지 않아 당장 상종할 필요성도 못 느꼈으니 말이다.
“잠깐, 리아넨 공작과 대공자라고? 리아넨 공작도 그곳에 있었나?”
“네, 공작의 마차에 문제가 있어서 그릭스 대공자랑 같이 퇴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작의 비밀 호위가 무리를 모두 퇴치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모두 자결하는 바람에 흉수의 정체는 파악할 수 없었다고…….”
“너구리 같은 작자가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은 거군.”
“네?”
“아니, 아니다. 자네는 이만 돌아가 보게.”
“넵!”
기사가 경례를 올리고 돌아가자 페리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예전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리아넨 공작이 마차 사고로 큰 상처를 입고 그릭스 대공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에게 공격을 당해 사망하게 된다. 덕분에 공작의 자리는 자연스럽게 지카스 2공자에게 넘어갔고.
물론 갑작스러운 사고에 대하여 뒷말이 분분했지만, 남은 후계자라고는 지카스뿐인데다가 리아넨 공작마저 인사불성인 상황이라 가신들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공작의 자리에 오른 지카스는 이번 사건을 황태자파의 만행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을 몰아붙였었다.
물론 황도에서 그런 무모한 짓을 할 황태자파 귀족은 아무도 없었지만, 장소가 하필이면 황실이 보호하는 환락가였기 때문에 자신들도 뭐라고 반박할 말이 없었다.
이 일이 워낙 큰 사건이다 보니 결국 작년 겨울에 있었던 3황자파의 실책마저 뒷전으로 밀렸고 자신들만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다소 즉흥적이며 자신만만해 호위마저 대동하지 않던 그릭스 대공자가 지카스 2공자의 암수에 목숨을 잃었고 공작의 자리마저 빼앗기고 말았다.작가님, 현재 문장도 83쪽 코멘트와 연계해 같이 확인 부탁드립니다. 그 후 물 흐르듯이 황태자파를 공격한 것을 봤을 때 3황자파의 중요 인물이 이 사건에 관여했을 수도 있다.
훗날 황태자파 귀족들은 이 사건을 이렇게 결론지었다.
“그런데 그릭스가 살았단 말이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리아넨 공작이 자신의 마차에 문제가 생긴 걸 눈치채고 그릭스 대공자와 같이 퇴궐했고, 예전처럼 습격이 있었지만 몰래 호위하던 공작의 호위 기사가 가까스로 그걸 막았다.
그 결과 둘 다 횡액을 피할 수 있었고.
“예상할 수 있는 건 이 정도인가? 그런데 흉수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렇다는 건 결국 알아버린 거군.”
바로 흉수를 황태자파 귀족쯤으로 꾸민다면 자신들을 핀치로 몰아놓을 수 있다는 걸 리아넨 공작쯤 되는 인사가 모를 리가 없는데 저렇게 나오는 걸 보면 뭔가 눈치를 챈 게 분명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