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물론 너무 비약이 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방향으로는 이 세계가 또 워낙 미러클하지 않은가?
게다가 만약 영지 곳곳에서 같은 일이 발생한다면?
솔직히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흠, 굳이 그럴 이유가 있을까요? 아시다시피 저희 영지의 규모를 생각하면 다른 마을에 신전이 꼭 필요할까 싶네요. 기껏해야 외지인이 드나드는 곳도 우버 마을뿐이고요. 그럼 결국 봉사 대상이 영지의 청년들이란 건데. 아무래도 좀 걱정되네요. 아시다시피 사제님들이 워낙 대단한 분들이라서요.”
로빈이 애써 돌려 말하자 줄리에타도 대충 무슨 말인지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말의 첫 부분에서는 상당히 우울해하다가 마지막 부분에서는 조금 밝아지는 것이 무슨 다른 방안이 있나 보다.
“호호, 저희 사제들이 그런 면이 좀 있죠. 하지만 이번에 신전을 짓는 것은 사실 봉사보다는 영지의 여성들에게 도움을 드리고 싶어서예요.”
“여성들에게요?”
예전에도 한 번 언급되었지만, 봉사의 교단의 주 수입원은 봉사와 교육이었다.
봉사는 알다시피 주로 남성을 대상으로 성적 봉사를 베푸는 것이고, 교육이란 귀족 영애들이나 젊은 부인들에게 교단의 비법(?)들을 전수해 주고 기부금을 받는 것이었다.
지금 줄리에타의 말은 영지에서 그 교육을 진행하고 싶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그 계기조차 로빈의 예상을 빗나가고 있었다.
“사실 영지에 너무 신세를 지는 기분이에요. 영지의 지원금으로 어린 자매들을 걱정 없이 돌볼 수 있는데다가 여신상에 기도하러 와주시는 분들의 정성으로 사제들도 평안하게 생활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희가 뭐라도 해 드릴 게 없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부부 관계에 애로 사항이 있는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죠.”
요지는 영지에 은혜를 갚고 싶은 마음에 여성들을 위한 교육을 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당연히 여성들이 그 교육을 받는 게, 즉 남성을 위한 일이기도 하니 결국 서로에게 좋은 일이었는데.
교세나 금전적인 이유가 아니라 순수한 보답이라는 부분이 로빈에게는 조금 충격이었다. 자신이 너무 세상을 삐딱하게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까지 들었으니 말이다.
로빈은 스스로를 반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면 충분히 도와줄 의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특별히 신전도 필요하지 않죠. 우버 마을이야 아무래도 외지인을 상대해야 하니 괜찮은 건물이 필요했지만, 마을의 여성들과 소소하게 상담하고 노하우를 지도하는 일이라 빈 건물만 있으면 충분해요. 아, 물론 같이 기도하며 신성력을 받을 수 있는 기도실은 있어야겠군요.”
게다가 굳이 신전을 새로 세울 필요 없이 빈집이 있으면 충분하다는 줄리에타.
하지만 이왕에 시작하는 건데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이 기회에 일을 벌여 많은 영지 여성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제대로 홍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만약 여성들의 수준이 높아진다면 훗날 봉사의 사제들에게 매달리며 갈등을 빚는 일이 많이 줄어들거나 거의 없어질 거 같았다.
“크게는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번듯하게 신전을 짓도록 하죠. 그래도 여신의 말씀을 전하는 곳인데 그렇게 대충 할 수야 있나요. 가능하면 빠르게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로빈이 짐짓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줄리에타 대신관의 표정이 급격히 밝아진다. 아무래도 로빈의 태도에 적잖이 감동을 받은 분위기였다.
“역시 영주님은 여신님의 은총이 깃든 분입니다. 그럼 감사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로빈을 위해 여신께 기도 올리겠다며 신전으로 돌아간 줄리에타.
그냥 영지의 분란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 이런 결정을 한 건데 저렇게 나오니 또 좀 찔리는 기분이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로빈은 지온에게 마을마다 적당히 신전을 지어달라고 지시하고 바로 다음 상대인 백랑부터 찾았다. 자이트 영지로 파견 나갈 모야족 주술사와 전사들에 대하여 논의하기 위함이었다.
“오, 영주님. 황도 구경을 잘하고 오셨나?”
“끙, 구경은요. 사람 구경만 잔뜩 하고 왔죠. 어쨌든 소식은 들으셨죠? 저번에 얘기했던 파견을 가야 할 거 같아요.”
“응. 그쪽 영지에서 결국 부탁했다지? 하긴 그때 보니까 농지 쪽은 마수 놈들이 날뛰어서 좀 심각하더라고. 그쪽도 결국 가장 큰 목적은 식량 아니겠어?”
“그렇겠죠? 물론 적당히 팔아서 돈으로 다른 걸 살 생각일 수도 있고요. 뭐, 그건 그쪽에서 알아서 하겠고. 인원은 선별해 놓으셨어요?”
예전에 한 번 논의가 있었을 때 혹시 모르니 인원을 선별해 달라고 지시해 놓았었다.
파견이라 봤자 1년 정도만 머물면서 혼 래빗 육성의 노하우, 그리고 주술 숙성 창고의 관리 요령 정도를 가르치면 되었으니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 마법적 재능이 뛰어나다는 둘째와 셋째 모두 주술 숙성 창고에 대하여 배우겠다니 그쪽의 열의도 대단한 셈이었다. 열의가 대단하니 결국 익히는 것도 빠를 것이다.
“응. 그런데 영주님, 이놈들이 잘 안 가려고 해. 아주 그곳으로 이주시키는 거 아니냐면서.”
“끙.”
사실 모야족 마을도 아이들이 커감에 따라 조금씩 북적이고 있었다. 당장은 괜찮지만 이대로 계속 수가 늘어날 경우 남쪽 요새에서 다 수용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이주에 대하여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는데.
문제는 이 사람들이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는 거였다. 풀장이 있는 시원한 마을에서 절대 벗어나고 싶지 않다나.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잖아요. 제국은 거주와 이전이 자유롭다고요. 영지 추방령이 아닌 이상 이곳에서 계속 살아도 된다고 꼭 주지시켜 주세요.”
“응. 그래야지. 자꾸 말 안 들으면 쥐어박아서라도 보낼 테니까 걱정 마.”
“그래도 때리지는 마시고요.”
분위기를 보니 이 사람들이 갔다가 거기에 눌러앉을 걱정은 전혀 할 필요가 없을 거 같았다.
그리고 이주는…….
아무래도 영지 내에서 해결하든지 마을이 포화 상태가 되면 그때 가서 생각해 봐야겠다.
* * *
적당히 두 가지 일을 처리한 로빈은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본가에서는 감동(?)적인 선물 증정식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예전의 경험으로 외부에 나들이를 다녀올 때는 선물이 필수적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로빈은 이번엔 잊지 않고 선물을 준비했다.
선물의 대상은 역시 어머니 마리아나와 작은어머니 세릴, 그리고 실비아였다.
아버지 윌리엄의 선물은 그의 취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 말은 두 어머니의 선물을 지극히 윌리엄의 취향대로 준비했다는 뜻이었는데, 사전에 출발하기 전부터 부자 사이에 모종의 딜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준비한 두 어머니의 선물은 가리는 부분을 더 찾기 어려울 정도로 화끈한 란제리.
아들이 선물하는 란제리라니, 뭔가 좀 오묘하긴 하지만 촌스럽게 그런 부분을 지적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아버지의 취향이 참……. 점잖은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뜨거운 남자였다.
덕분에 로빈은 원하지는 않았지만 두 모친의 사이즈를 정확히 알게 되었다.
주로 얌전한 옷을 선호하는 편이라 전혀 몰랐는데 두 분 마님께서 생각보다 대단하시더라. 역시 이런 건 겉으로 봐선 전혀 알 수 없는 건가 보다.
“어머, 로빈. 너무 예뻐! 정말……. 이건.”
“마음에 드세요?”
“응. 역시 내 아들!”
그리고 로빈의 선물을 건네받으신 마리아나 여사님은 감동하며 그를 꽉 끌어안아주셨다. 물론 세릴 역시 마찬가지의 반응이었고.
역시 오고 가는 선물 속에 싹트는 감동과 사랑.
이건 진리였다.
그렇게 한참이나 로빈을 안고 감사를 표한 마리아나와 세릴은 윌리엄에게 실실 눈웃음을 보낸 후 주방으로 들어갔다. 물론 저녁상을 차리기 위함이었다.
저 사인은 아무래도 오늘 당장 이 란제리의 성능을 시험해 보자는 의도인 거 같았다.
다 좋은데 거실에서 3P를 즐기시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아직도 지나가다가 깜짝깜짝 놀라는 경우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시작된 식사 시간이었지만 특정한 메뉴가 아버지 쪽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혼 래빗 고환과 그걸 다 아버지 쪽으로만…….
우리 마리아나 여사님, 이건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닌가요?
저게 그래도 나름 별미인데 세상 참 야속하다.
아니, 야속함은 할아버지가 더 절실하게 느끼고 계시려나?
어머니의 극단적인 편애에 할아버지 카인 쪽을 슬쩍 바라봤는데 할아버지는 이미 달관한 표정이었다. 원래 딸자식이 뭐 그렇지, 하는 얼굴이랄까?
뭐, 어쩌겠는가. 억울하면 도리아 여사님이나 찾아가시겠지.
물론 아버지 윌리엄도 좀 머쓱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거부하지는 않으시는 걸 보니, 아무래도 오늘 밤 뜨거운 무언가가 화끈하게 벌어질 거 같았다. 밤낮을 가리시는 분들은 아니지만, 밤에는 더욱더 화끈한 분들이니 말이다.
오늘 밤에는 무조건 일찍 자고 절대 방에서 나오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실비아의 선물.
실비아에게도 같은 걸 선물할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솔직히 이런 선물은 너무 이르다는 생각에 다른 걸 준비했다.
그것은 바로 회심의 상급 연금술 키트.
여러 촉매제가 포함되어 있어 상당히 고가의 물건이었는데 이걸로 실비아가 더 좋은 무언가를 만들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
하지만 왠지 선물을 받은 실비아의 표정이 좀 미묘했다. 그리고 마리아나의 선물을 바라보며 침울해하는데.
와, 진짜. 이게 저 란제리보다 수십 배는 더 비싼데 이런 반응은.
좀 좋아하는 척이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아무래도 실비아의 선물은 실패인 모양이었다.
효용성은 이게 몇 배는 높은 거 같은데 저런 반응이라니. 이게 저 남사스러운 천 쪼가리보다 못하다는 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가족들과 따뜻한 시간을 보낸 로빈은 다음 날 공방부터 찾았다. 히센과 스미스에게 그간의 연구 성과를 보고 받기 위해서였는데 아무래도 황도에 가서 황태자를 보고 나니 마음이 좀 급해졌다.
정말 시작되었다는 걸 실감하기 때문일까?
아직 시간이 제법 남았는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소설의 초반부는 역시 성장의 장이었다.
황태자는 아카데미로 가 자신의 구미에 맞는 여러 인재를 헤드헌팅하고, 아카데미 기숙사에 몸을 숨긴 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런저런 물밑 작업을 시작한다. 그 과정에는 물론 환락가를 완전히 지배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헤드헌팅이라. 다른 귀족이나 세력권에 들어갔을 인재들을 미리 가로채는 걸 헤드헌팅이 아니면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하지만 아무리 황태자가 상대의 능력치를 확인할 수 있다지만 아카데미에 그렇게 적당한 인재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는 건 정말 소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 10년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한 귀한 인재가 이 시기에만 몇 명씩 있는 게 말이나 되나? 황태자 형이 아카데미에서 지낸 시간은 기껏해야 1년밖에 안 되는데?
세상이 원래 될놈될이지만 솔직히 좀 너무하긴 했다.
“그러고 보니……. 아카데미에서 마법 공학자랑 연금술사도 만나던가? 둘의 시너지가 제법이었는데. 아, 그래. 이제 곧 협조 공문도 날아오겠네.”
그리고 그렇게 아카데미에서 1년을 보내며 인재를 싹쓸이해 간 후에 이제 그 인재들로 스노우 볼을 굴릴 것이다.
“그리고 재앙도 다가오겠지. 이거 때문에 마음이 영…….”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 나가다 보니 벌써 공방에 도착했다.
과연 조금의 성과라도 있었을까?
2년 전에는 여러 가지 일들을 벌여놓는 바람에 솔직히 이곳에 대한 지원이 미진했다. 우선 돈도 없어서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상황이기도 했고 히센조차 엄청 바빴으니 말이다.
하지만 작년부터는 제대로 지원하고 있었다. 히센과 도리아가 연구에 합류했고 제법 많은 자금이 이쪽으로 투자된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제법 성과가 있어 여러 가지 촉매제를 조합해 드디어 가메라의 뼈를 녹이는 데에는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제 반 이상은 왔다는 의미였다.
공방 안에는 좀 더 효율적으로 뼈를 녹이기 위해 새로운 조합을 찾는 도리아와 히센, 그리고 가까스로 녹인 뼈를 어떻게든 담금질해 보려는 스미스가 작업에 한창이었다.
특히 도리아와 히센의 연구는 차후 대량으로 무기를 제작할 때를 대비해 제작 단가를 낮추기 위한 연구이다 보니 로빈의 관심이 많은 부분이었다. 아무래도 한두 자루를 제작할 것이 아니다 보니 이 부분도 제법 신경이 쓰였으니 말이다.
“성과는 좀 있나요?”
“호호. 그럭저럭 진척이 있답니다. 몇 가지 촉매를 추가하니 효율이 좀 올라갔어요.”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