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예전부터 중립파라 함은 그냥 떨거지들의 집합이요, 정국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그야말로 있으나 마나 한 집단이었다.
그나마 자신들의 권익에 큰 문제만 없으면 자리만 지키는 존재들이란 의미였는데 대부분의 지방 영주들이 여기에 속했고, 로빈도 정확히 따지자면 이쪽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중앙 정치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에 무슨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런데 그 중립파에 중앙 귀족의 거두인 리아넨 공작이 합류하고, 그를 뒤따르는 그의 추종자들, 그리고 어이없게 황태자파 귀족도 몇이 뒤따라 중립파로 넘어가게 되었단다.
“예? 그럼… 세력 비는 대충 어떻게 되요?”
“지금 상황에서 대충 황태자파가 35%, 3황자파가 45%, 중립파가 20% 정도랍니다.”
“하하. 미치겠네. 원래 황태자파가 40%, 3황자파 55% 중립파 5% 정도였잖아요? 와, 리아넨 공작이 대단하긴 하네요. 그냥 호구인 줄 알았더니…….”
로빈이 웃어넘기긴 했지만, 저 수치는 상당히 의미가 있었다. 아무런 힘도 없던 중립파가 어느 쪽에 붙느냐에 따라 정국을 흔들 수 있는 위치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셉 공작의 입장에서는 리아넨 공작이 황태자파에 가세한 것보다 더 엿 같은 상황이 되어버렸다. 황태자파로 넘어가버렸으면 그냥 적으로 치부하면 간단했는데, 이건 중립이라 앞으로도 사사건건 협조를 구해야 할 판이었으니 말이다.
그냥 머릿속에서 지우면 된다지만 과연 그게 가능할까?
저 세력 그대로 중립파가 황태자파에 가세하면 황태자파만으로 과반수가 넘어버리는데.
물론 귀족들의 세력도가 차기 황제의 결정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3황자는 이미 불리한 시작을 하고 있었다. 1황자인 페리안이 황태자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현 상황에서 정통성 있는 후계자는 황태자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나마 압도하고 있던 귀족의 세력 싸움마저 지게 되면 이미 황태자라는 지위로 유리한 위치에 있는 페리안이 자연스럽게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는 그림이 나올 수도 있었다.
“당분간 조셉 공작이 제대로 엿 먹을 거 같은데요. 와, 진짜 지독하네. 만약 처음부터 황태자파로 붙었으면 당장 과반수로 넘어가진 않았을 거 같은데요. 중립파 떨거지들까지 끌어안았다라. 리아넨 공작 쪽에 괜찮은 참모가 있나 봐요.”
대충 상황 파악은 되었는데 의문은 여전했다.
“그런데 그 사건이 조셉 공작의 짓이라는 건 도대체 어떻게 안 거죠? 무슨 증거가 있을 리가 없잖아요? 조셉 공작이 그런 물렁한 사람도 아니고요. 그냥 심증만으로 저렇게 움직이고 은연중에 소문까지 난 건 좀 이상하네요.”
하지만 이 부분은 주노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솔직히 저도 좀 궁금합니다. 하지만 뭔가 있으니 리아넨 공작이 저렇게 움직이는 게 아닐까요?”
“흠……. 진짜 신기하긴 하네요.”
로빈이 머릿속으로 지금 이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한지 계산해 봤는데 솔직히 나쁘지 않아 보였다. 외가의 힘이 미천해서인지 정치적 입지는 별로 좋지 않았던 황태자가 더 수월하게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이 좀 더 빨리 마련되었으니 말이다.
저 상황에서 리아넨 공작이 3황자파 쪽으로 손을 들어줄 거 같지도 않았고.
다만 중립파가 그냥 가운데에서 가만히 있으면 이대로 큰 굴곡 없이 당파 싸움이 정체될 수도 있었다.
“당파 싸움이… 정체된다? 오, 이게 진짜 대박이네.”
지금 황태자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당파 싸움 따위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준비를 갖출 시간 말이다.
그런데 정국이 저렇게 안정되면 황태자는 제법 많은 시간을 벌 수 있게 된다.
“예?”
“아, 아니에요. 우선 앞으로도 정국이 어떤 식으로 흐르는지만 알아두세요.”
“예. 영주님. 아, 그리고…….”
“그건 또 무슨…….”
주노는 단순히 황도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영주 성에 온 것이 아니었다. 뭔가 이상한 혹을 하나를 달고 왔는데.
“그러니까 흑마법사 전 협회장이자, 최고 원로라고요? 그분이?”
“네, 알버스 더블도어 명예 백작님이십니다. 이 방면의 최고 권위자이신데 왜 이곳으로 오셨는지……. 그분의 말씀대로라면 황태자님의 명이라고 하시는데, 좀 이상하긴 합니다.”
이 세계에서 흑마법사는 현대의 외과의와 비슷한 위치였다. 인간의 몸과 생명에 대하여 연구하고 의학적 지식이 높은데다가 때에 따라서는 외과 수술까지 집도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예전에 한 번 언급한 대로 치료사, 신관과 함께 이쪽 세계의 의료계를 이끌어가는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분은 흑마법사 쪽으로는 최고 권위자, 게다가 말을 들어보니 단순히 흑마법사가 아니라 치료학과 신약 개발 부분에서도 상당한 권위자라고 한다.
다만 나이가 나이이다 보니 실제로 수술을 집도할 수는 없어 지금은 이론 연구와 후진 양성에 매진하는 중이었다는데.
이런 분을 대체 왜 이곳으로…….
게다가 이름도 뭔가 좀 묘하게 입에 익었다. 이 세계에서 흑마법사의 이름을 따로 들은 기억이 없는데 왜 그런 건지 모르겠다.
어? 이거 설마.
흠. 에이, 아니겠지.
“그래서 그분은 지금 어디 계시는데요?”
“우선 히센 님과 도리아 님을 만나신다고 해서 그쪽으로 안내해 드렸습니다. 그 후에 영주님이 원하는 시간에 한번 보자고 하시더군요.”
“아, 그분들을요?”
은근히 좁은 바닥인 저 바닥에서 최고 권위자로 이름 높은 알버스 백작과 히센, 그리고 도리아 여사가 안면이 없을 리는 없고 우선 지인부터 만나러 간 모양이었다.
솔직히 로빈도 저분이 왜 이곳에 왔는지 궁금했다. 대체 왜일까?
“음, 그래요? 따로 더 보고할 건 없죠?”
“네. 우선은 그렇습니다. 아, 그리고 조만간 협조 공문이 하나 내려올 거라는군요. 저희 영지뿐만 아니라 5대 방벽 모든 곳에 들어가는 공문인데 별건 아니니 그렇게만 알고 있으랍니다.”
“아, 그건 좀 알 것 같네요. 알았어요, 주노. 앞으로도 수고 좀 해주세요.”
“네, 영주님.”
로빈은 주노를 뒤로하고 바로 히센의 작업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우선 그 알버스라는 분의 외모도 궁금했고, 무슨 일인지 한번 들어보고 싶어서였다.
공방으로 가면서도 로빈은 계속 생각했다.
황태자가 쓸데없는 짓을 할 리는 없으니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왜 저 권위자를 이곳에 보냈을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뚜렷한 답이 보이지 않았다. 사실 5대 방벽이긴 하지만 이곳 영지는 황태자랑 아무런 접점도 없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저번 황도행 때도 황태자랑 대화조차 못 해보지 않았던가.
그래서 방향을 좀 바꿔 보기로 했다.
이곳에 보낸 게 아니라 황도에서 내보낸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황태자가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지 반년이 넘었다. 그렇다는 건 이미 많은 인재를 수집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중에는 물론 흑마법사도 하나 있었다.
평민 출신 흑마법사 보인스.
훗날 갓 핸드 보인스라고 불리는 그는 외과 수술의 천재였다.
신성력으로 모든 상처를 치료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특히 몸에 칼날이나 이물질이 파고든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외과 수술을 선행해 그 조각을 제거한 후, 신성력으로 치료해야 했다.
그리고 황태자 역시 모든 부상을 피해갈 수는 없었는데 레이드 중 큰 상처를 입고 몸에 수십 조각의 파편이 박힌 걸 저 보인스가 성공적으로 수술해 황태자를 살리게 된다.
“그리고 보인스의 스승이 흑마법사 협회의 2인자인 제이영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는 건…….”
아마 황태자는 보인스의 스승인 제이영을 차기 흑마법사 협회의 수장으로 밀 생각인가 보다. 그런데 제이영보다 더 권위 있는 저 알버스 백작이 황도에 남아있게 되면 좀 거북하겠지.
실제로도 소설에서 제이영이 흑마법사 협회의 수장이 되긴 했다. 덕분에 보인스 역시 스승을 등에 업고 더 좋은 환경에서 교육받을 수 있었고.
“하긴 보인스의 실력이 늘어나는 건 중요한 일이지. 재수 없으면 황태자 형이 급사할 수도 있는 거잖아? 그건 그런데…….”
다만 알버스 백작이 파견된 곳이 이곳이라는 건 좀 의아했다. 이곳이 최전선인 건 맞지만, 꼭 여기여야 했을까? 또 다른 최전선으로 자신의 스승이 다스리는 레오니스 공작령도 있었으니 말이다.
아무리 수술을 못 한다지만 그 지식과 식견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충분히 도움이 될 만한 분이라는 의미였다. 물론 아까 말을 들어보니 대단한 괴짜라고는 했지만…….
괴짜……. 설마 진짜 괴짜라서?
와, 이거 설마…….
황태자 형, 혹시 나한테 짬 처리한 거야?
대단한 식견을 가졌지만 실제로 수술을 할 수 없어 전력 외인 원로.
게다가 대단히 괴짜라고 소문난 인물.
그렇다고 함부로 하긴 좀 꺼려지는 명사.
그런 사람이 자신의 스승이 다스리는 영지로 가 무슨 문제라도 일으킨다면 황태자도 꽤나 피곤할 것이다.
물론 룩센 대제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해 황족인 황태자의 명령 같은 부탁을 거부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아무 명분도 없으면 당장 황도를 나가라는 그런 부탁을 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알버스 백작은 생각보다 더 대단한 명성을 갖춘 명사였으니 말이다.
최전선 쪽으로 나가 그쪽의 흑마법사나 치료사에게 자신의 지식을 전수해 줘라.
작년에 또 한 번 난리가 크게 났으니 이건 나름 먹히는 명분이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또 다른 전선인 동부 쪽도 피할 수 있었고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로빈의 머리로는 이 정도밖에 떠오르는 게 없었다. 자세한 건 역시 만나봐서 이야기를 나눠 봐야 할 거 같았다.
로빈이 주노에게 보고를 받는 사이.
알버스는 느긋하게 걸어 히센의 작업장을 찾았다. 영주 저 구석에 대놓고 자리 잡고 있어 대충의 설명만으로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이놈이, 아주 느긋한 곳에 살고 있었군. 게다가 몇 년이나 연락도 없다가 갑자기 보채기나 하고. 이런 괘씸한 녀석 같으니.”
오는 길에 그레이츠 자작령을 대충 살펴볼 수 있었던 알버스는 이곳이 제법 살기 좋은 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근심을 찾아보기 힘들었고 아이들이 밝게 뛰어놀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이제 열세 살 된다는 어린 영주가 제법 영지를 잘 다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 밑에 괜찮은 행정관이 보조하고 있든지.
알버스는 황태자의 부탁으로 이곳에 오면서도 대체 자신이 왜 이런 촌구석까지 들어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현역이면 몰라도 이미 수술대에서 메스를 놓은 지가 한참이나 지나지 않았던가.
그런데 굳이 최전방에서 몇 년이나 보내라니.
“가보면 알게 될 거야. 분명 자네가 해야 할 일이 있어.”
자신은 황태자의 저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이제 갓 성인이라는 황태자의 눈에서 지배자에게서나 풍겨진다는 그 위압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알버스는 대체 왜 차기 황권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중앙 귀족 놈들이 다 눈이 삐었나? 저런 본 투비 지배자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대체 왜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불만은 여전했다. 만약 협회를 완전히 지배하는 게 목적이라면 자신이 황태자가 미는 인재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방법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냥 자신은 황도에서 느긋하게 후진이나 좀 더 양성하고 싶었거늘.
히센과 도리아의 요청이 있었던 만큼 이곳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게 지금은 절대 아니었다.
알버스는 투덜거리며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가 작업장에 들어서자 한창 작업에 열중이던 히센과 도리아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벌떡 일어났다.
“어? 알버스 어르신?”
“흠흠, 오랜만이군. 망나니 히센, 그리고 도리아.”
“어르신, 갑자기 어쩐 일이세요?”
“끙. 뭐, 그렇게 됐어.”
셋은 그렇게 반가운 해후를 나눈 후 서로 간의 근황과 대체 왜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는데.
“큭큭. 어르신, 쫓겨났네요. 그래서 내가 진작에 잘 좀 하라고 그랬잖아요. 그렇게 성질만 부리니 결국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된 거죠.”
“에잉, 이래서 내가 여기에 오기 싫었는데. 저 무례한 놈이 아직까지 여기에 잘 붙어있는 걸 보니 이곳 영주도 참 성격이 좋은가 보구나.”
“나야 아직 팔팔한 현역 아니오. 어르신이랑은 좀 다르죠.”
“저저…….”
저렇게 서로를 디스하고는 있지만 둘의 사이는 제법 괜찮았다. 알버스는 히센의 스승과 같은 연배의 친구였는데 스승을 일찍 여의고 흔들리던 히센을 옆에서 잡아준 것도 알버스였으니 말이다.
전공은 다르지만 히센도 알버스를 제2의 스승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