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물론 저렇게 서로 틱틱대는 건 각자의 천성이었다. 어쩌면 저것도 저들에게는 애정의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호호.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마음 편히 계세요. 여기도 제법 괜찮은 곳이거든요.”
도리아가 둘의 모습에 웃음 지으며 한마디 거들었다.
“거 보슈.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으면 진작에 내려왔으면 좀 좋았겠어요?”
“흥, 황도에서 내 가르침을 기다리는 아해들이 몇이나 되는 줄 아느냐? 어딜 아이 하나 때문에 날 오라 가라 해? 게다가 그 녀석은 이제 겨우 열세 살이 되는 꼬맹이 아니더냐?”
“그래서 안 오려고 하셨다?”
“오긴 오려고 했어. 네놈들이 그렇게 괜찮다니 나도 궁금하긴 했다고. 나중에 녀석이 성인이 되고 나의 심오한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그때 생각해 보려고 했단 말이야.”
영지의 천재 실비아.
그녀는 지금 혼자 독학으로 의학 부분을 공부하고 있었다. 로빈이 진작에 스승을 모시려고 했지만 그녀의 수준에 맞는 스승을 구하기 어려워 지켜보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적당한 흑마법사나 치료사는 그녀에게 가르침을 베풀 능력이 없었고, 제대로 된 명사들은 이런 시골에 들어오는 걸 꺼리는 분위기라 적당한 인물을 찾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천재성을 충분히 실감한 히센과 도리아는 자신이 아는 가장 대단한 흑마법사인 알버스에게 이미 몇 번 요청을 보낸 후였다. 물론 로빈이 실망할까 일이 확실해진 후에 알릴 생각이었고.
사실 지금까지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내심으론 포기한 상태이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나타나다니. 솔직히 히센과 도리아 모두 많이 놀란 상황이었다.
“그게 그렇지 않아요, 어르신. 그 아이는 이미 벌써 독학으로 공부하고 있답니다. 물질학이면 제가 더 가르칠 게 있지만, 그 아이가 가장 흥미 있는 분야가 하필이면 의학이라서요. 그쪽으론 제가 가르칠 수 있는 건 다 가르쳤거든요.”
“허, 그 정도라고? 자네 수준도 만만치가 않은데.”
“네, 요즘 제가 하는 일은 틈틈이 물질학을 가르치는 거뿐이에요. 의학은 아예 혼자 공부하고 있죠. 요즘은 말렝의 『의학 집대성』이랑, 탄투레의 『신약의 분석과 이해』를 보고 있을 거예요.”
“벌써? 그런 책을 보고 있다고? 그것도 독학으로? 그 무슨…….”
알버스가 놀라 눈이 휘둥그레지자 제자 자랑에 신난 도리아가 품에서 약이 담긴 작은 약병을 꺼내 내밀었다.
“이게 이번에 그 아이가 혼자서 만든 지혈제예요. 첫 작품이죠.”
알버스가 약병을 열고 손가락으로 찍어 조심스럽게 맛을 봤다.
“이건……. 혼 래빗의 뿔로 만든 지혈제가 아니냐? 그런데 시중의 것과는 좀 다른 거 같은데?”
“이건 순수하게 마수의 부산물로만 만든 거예요. 그 아이가 개량한 거죠.”
“허… 마수 부산물로만 지혈제를 만들었다고? 대체 왜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하긴 하구나. 지혈 작용의 요체를 완벽하게 이해한 거 아니냐? 게다가 이런 혼종이라니…….”
마수학과 연금술 그리고 의학에 물질학까지, 네 가지 학문의 정수가 담긴 지혈제에 알버스도 감탄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마수학은 저 망나니 놈이 가르쳤겠지? 그런 구닥다리 학문을 아직도 배우려는 아이가 있었다니 참 신기하구나. 참, 말세긴 말세야.”
“끙, 무슨 말을 해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마수학을 폄하하는 알버스의 말에도 히센은 그냥 볼멘소리를 남길 뿐이었다. 원래 말을 저렇게 하는 어른이란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이없게도 저 말을 알버스어로 통역한다면, 이미 사장되기 직전인 마수학을 배우는 아이가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구나, 정도였다.
말을 삐딱하게 꼬아서 이리저리 비튼 후에 표정과 눈빛까지 같이 해석하는 건데, 정말 친한 사람이 아니면 절대 저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알버스가 괴짜에 상종 못 할 작자라는 오해 아닌 오해를 받는 거였고.
“그런 아이가 있다니 한번 보긴 해야겠구나. 어쩌면…….”
그때 마침 로빈이 작업실로 들어섰다.
로빈은 알버스의 모습에 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흰 눈썹에 하얗게 센 긴 머리, 그리고 덥수룩한 하얀 수염, 심지어 작은 안경까지.
로빈이 알고 있던 어떤 마법 학교의 교장 선생님이랑 너무나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미친, 설마 했는데……. 봉구, 너 진짜 미쳤나? 히센 간다프 하나로는 만족 못 한 거야?
아니지, 아니야. 그렇게 생각할 일이 아니야.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둘 다 정작 소설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잖아? 그저 상상하는 것만으로 잘못이라고 할 순 없지.
물론 그건 그런데, 뭔가 기분이 참…….
로빈이 자신을 보자마자 혼란에 빠져있자 어이가 없던 알버스는 헛기침하며 주위를 환기했다.
“흠흠, 알버스 더블도어 명예 백작이요. 알버스라고 부르시구려.”
“아, 예. 어르신, 로빈 그레이츠 자작입니다. 이곳의 영주로 있습니다.”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가다듬던 로빈은 알버스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애써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명예직이긴 해도 직위가 백작이었고, 나이도 자신의 할아버지보다 훨씬 윗대였으니 나름대로 예의를 다한 것이다.
이름 : 알버스 더블도어
성향 : 외골수. 학구열. 교육열. 직설적
타이틀 : 의학의 집대성(S). 지도의 대가(SR). 천재적인 수술 실력(S, 비활성). 괴짜(UC)
허… 후덜덜하네, 이분도. 역시 한 시대를 풍미한 전문가라는 건가? 아마 저 천재적인 수술 실력이 비활성화된 건 나이 때문에 현역에서 물러나서겠지?
하지만 정말 가르치는 것에는 특화된 분이었다. 딱 이미지도 마법사 수백쯤은 양성한 거 같은 분위기였고.
하지만 이런 상념도 오래가지 못했다. 도리아가 느닷없이 기습 공격을 날렸기 때문이었다. 로빈의 귀가 쫑긋해질 수밖에 없는 그런 기습 공격 말이다.
“영주님, 알버스 님이 실비아를 한번 보고 싶다고 하시네요. 호호.”
“네? 실비아를……. 아, 와! 정말요?”
이게 웬 떡이야? 설마 저분이 독학 중인 실비를 봐주신다는 건가? 어떻게 일이 이렇게 되지?
실비아의 습득 속도가 빨라 도리아 여사가 더 이상 가르치기 힘들 거라는 이야기는 이미 여러 번 들어왔다. 도리아가 몇 년 전에 이런 상황을 미리 예견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첫 작품의 완성도가 워낙 대단해 도리아 여사도 의학 쪽은 손을 놓아야 할 거 같다고 했었다.
하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어서 걱정이었는데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야 정말 더 바랄 게 없었다.
오, 이게 이런 식으로? 은근히 짬 처리당한 거 같아서 기분이 묘했는데…….
와, 형님.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진짜 사랑합니다!
그렇게 알버스는 실비아를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어떤 명사가 실비아의 명석함에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게다가 이 녀석은 지금 더 발전해 있었다.
이름: 실비아 루페시
성향: 맹목적. 헌신적. 밝힘
타이틀: 연금술 탐구자(SR). 신의 경지에 달한 이해력(O). 치료학 전문가(R)
연금 꿈나무가 연금술 탐구자로 발전했다. 물론 등급은 예전 그대로지만 명칭을 봤을 때 발전한 것이 맞는 거 같다.
게다가 저 치료학 전문가는 도리아에게 있던 타이틀인데, 도리아가 자신의 의학적 지식은 모두 전수했다고 한 게 빈말이 아닌 것이다.
문제는 저 성향이었는데.
아무래도 우리가 좀 잘못 키운 게 아닌지 모르겠다. 뭔가 한쪽으로 치우친 기분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로빈도 할 말은 있었는데 저게 ??? 상태에서 갑자기 저렇게 된 거였다. 그 뒤로는 변화가 전혀 없었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둘 수밖에 없었는데 그냥 저렇게 굳어지다시피 한 모양이다.
게다가 저 밝힘.
밝힌다는 건 사전적 의미로는 아마 무엇은 대단히 좋아한다는 뜻일 것이다.
과연 무엇일까? 솔직히 뭔지 알 거 같아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게 정말 자신의 잘못일까?
문득 가슴이 답답해졌다. 분명 처음 만났을 때는 꼬물꼬물 귀엽기만 한 녀석이었는데. 후…….
대화를 나누는 실비아와 알버스.
둘 사이에서 로빈이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의학 용어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그놈의 의학 용어는 이곳이나 저곳이나 알아들을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좀 쉬운 말로 할 수는 없는 건가?
그리고 둘이 대화하는 동안 예전에 도리아와 히센이 몇 번이나 알버스에게 편지를 넣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하긴 도리아가 저렇게 실비아를 그냥 방치하고만 있을 리는 없지. 그래도 저런 명사한테까지 연락을 넣었었다니 참 고마운 일이었다.
물론 저분이 이곳에 내려오게 된 건 어쨌든 황태자의 명령 때문이라지만 미리 도리아나 히센이 저분께 편지를 넣지 않았으면 저렇게 실비아를 만날 생각도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냥 적당히 몇 년 쉬다 황도로 돌아가셨겠지.
그러니 둘의 공도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잠시 동안 대화를 나누던 알버스의 표정은 화색이 만연했다. 마치 처음 실비아를 만났던 도리아를 보는 듯했다. 그리고 다음 말을 안 들어도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허허. 이 아이를 한번 가르쳐보고 싶구려, 영주. 허락해 주시겠소?”
그래, 저거지.
“어휴. 저희야 감사하죠, 어르신. 잘 부탁드립니다.”
현역이 아니라는 이유로 짬 처리 정도로만 생각했던 알버스의 체류는 생각보다 큰 도움이 될 거 같았다. 실비아가 의학에 매진한다면 훗날 영지의 위기 시에 큰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이게 이렇게 되다니. 아무래도 운이 좀 따르는 모양이다.
그렇게 실비아는 알버스가 가르치는 거로 결정이 났다.
그렇게 또 한 명이 그레이츠 자작령의 식객 대열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얼마나 이곳에 머물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자신이 만족할 만큼은 머물지 않을까 싶었다.
“이 녀석은 그야말로 제국 의학계에 새로운 역사를 쓸 녀석이지. 그리고 이 녀석의 스승으로 나 알버스 더블도어의 이름이 역사에 같이 기록될 것이오.”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이분이 쉽게 이곳을 떠날 거 같지는 않았다. 실비아가 황도로 떠나게 된다면 몰라도 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지켜본 이 녀석의 성향을 생각하면 글쎄, 황도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좋은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그럴 리가.
하지만 역사를 새로 쓴다니, 이분도 참 과장이 심하긴 했다.
어쨌든 그렇게 사제 간의 상견례를 마치고 나온 실비아의 표정은 조금 뚱해 보였다.
새로운 스승을 만나 학구열에 불타 있어야 할 녀석이 뚱하다니. 로빈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영주님, 너무해요.”
“응?”
“맨날 공부만 시키고. 난 공부하는 기계가 아니라고요.”
음, 솔직히 좀 찔리긴 한다.
그녀의 성장세가 워낙 좋아서 기세를 놓치고 싶지 않은데다가 제법 괜찮은 지혈제를 만드는 바람에 기대감이 더 올라가 은근히 닦달한 바가 없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군말 없이 잘 따르던 녀석이 저런 반항이라니. 설마 반항기라도 온 것인가?
“선물도 이상한 것만 주고.”
“야, 그건 솔직히…….”
갑자기 튀어나온 선물에 대한 불평.
솔직히 자신이 준 연금술 키트가 그 란제리보다 훨씬 정상적인 거 같은데 이상하다니, 이건 정말 뭔가 잘못된 거 아닌가?
“흥, 됐어요. 히센 선생님은 저번에 작업 성공하면서 특별한 그걸 받았다는데요? 전 뭐 없어요? 저도 상 주셔야죠.”
“야, 그때 충분히 칭찬해 준 거 같은데.”
잠시 잊고 있었지만, 이 녀석은 상 집착녀다. 뭔가를 하면 꼭 그에 상응하는 상을 받길 원하는 녀석이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처음 황도에 갔을 때도 도리아 여사님과의 면담을 마친 후 바로 상을 원했었다. 그 뒤로도 꾸준히 그랬고.
하지만 그날 너무 기쁜 나머지 폭풍 칭찬과 더불어 쓰담쓰담과 꼬옥의 연계 콤보까지 들어갔는데 이제 와서 저렇게 나오면 곤란하다.
이제 좀 컸다고 그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거야?
“후후, 이젠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있는 몸이 아니랍니다.”
“흠.”
끙, 설마 정답이었냐?
좀 억지스럽긴 하지만 우쭈쭈해 주면 알아서 잘하는 실비아의 마음을 상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떠오르는 영지의 참 일꾼이 아니던가.
“뭐, 좋아. 그래서 뭘 원해? 혹시 너도 히센 님처럼 그걸 원하는 건 아니잖아?”
로빈이 승낙하자 실비아가 득의의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요구 사항을 나열하는데.
“우선, 제가 드리는 체질 개선제는 꾸준히 드실 것. 예전에는 잘 드셨지만, 요즘은 자꾸 피하시는 경향이 있으시더라고요. 그게 적어도 5년은 꾸준히 드셔야 하는 거거든요?”
“음……. 그거?”
어릴 때부터 정체를 밝히지 않은 체질 개선제를 계속 먹어왔다. 도리아 여사와 실비아가 처음으로 함께 만든 합작이었지, 그게.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