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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113화 (113/303)

113화

하지만 기껏 만든 둔기 중 상당수를 다른 영지로 운반해 보관하고 있으라는 명령은 정말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판다는데 저게 정말 팔릴 지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다른 영지에 창고를 대여하느라 추가적인 자본이 들어가기도 했으니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될 무렵, 드디어 자이트 영지의 혼 래빗 사육장이 그들 자력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떠났던 모야족 식구들이 돌아오고 영지에 머무르던 레닌이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남쪽 마을에서도 자신의 사랑을 찾지 못한 사랑꾼 레닌은 씁쓸한 표정으로 돌아가는 배편에 몸을 실었다.

“후, 남쪽에서 미치도록 쌔끈한 미녀를 발견했는데 걔도 네 첩이라더라? 로빈, 넌 대체…….”

“끙, 누굴 만났는지 알 만하네.”

쌔끈하다니, 대충 분위기를 보니 망나니 린을 만난 모양인데 그 녀석이 쌔끈하던가? 키는 제법 자랐지만 어려서 볼륨감은 엉망이었는데.

아, 그것도 벌써 2년, 아니 거의 3년 전인가? 이제 린이 열네 살 반에 올해만 지나면 완전히 성인이니 볼륨감이 적당히 추가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이 녀석도 참, 헛발질만 그렇게……. 거기에 미녀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이면 찍은 게 린이냐?

“이걸 가지고 가. 잘 보관해 놓으면 쓸 데가 있을 거야.”

자이트 영지에는 특별히 레닌을 통해 둔기를 보내기로 했다.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사용처를 설명하기 어려운 둔기를 알아서 만들라고 하기는 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른 영지처럼 급할 때 팔아먹는 것도 마음에 내키지 않았고.

하지만 로빈의 의도를 전혀 모르는 레닌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이게 다 뭐야? 망치? 철퇴? 이런 게 왜 필요해?”

“그런 게 있다, 꼬맹아. 이거 녹여서 엉뚱한 거 만들지 말고 올해 딱 1년만 잘 보관해. 내년에는 이걸로 뭘 만들어도 별말 안 할 테니까.”

“끙, 꼬맹이라니. 로빈, 너 너무한 거 아니야? 그새 대체 얼마나 큰 거야?”

처음 만났을 때는 둘의 키 차이가 그리 많이 나지 않았다. 물론 자신이 좀 더 크긴 했지만, 동갑이었고 같이 성장기에 들어간 상황이라 그 차이가 근소했던 건데 그가 이곳에서 머무는 1년 동안 차이가 좀 벌어졌다.

로빈이 올해 급격하게 자라버렸기 때문이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통에 로빈 자신도 좀 당황하긴 했다. 그야말로 성장기라고 이름 붙을 만한 대단한 성장이었으니 말이다.

덕분에 남몰래 성장통에 삐걱대기도 했는데 이게 은근히 괴롭더라.

그 결과 이미 전생의 자신보다 조금 더 커진 상황이었다. 솔직히 그때는 상당히 작은 축에 속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윌리엄이나 카인을 봐도 자신이 얼마나 자랄 지 대충 예상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분명 좀 더 자랄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키 차이가 좀 나다 보니 꼬맹이란 말이 속상했는지 레닌이 입을 삐죽이 내밀었다.

하지만 자이트 자작을 봤을 때 저 녀석도 이 정도에서 멈추진 않을 것이다. 원래 성장 시기도 개인차란 게 존재하고 성년이 되려면 1년도 넘게 남았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부담 없이 놀릴 수도 있는 거고.

“시끄러워. 뭐, 좋아. 조건을 걸지. 만약 저걸 잘 가지고 있다면 나중에 내가 진짜 괜찮은 애로 하나 소개해 주지. 이 정도면 충분히 마음에 드는 조건일걸?”

“무… 뭐? 진짜? 진짜지? 좋아. 나중에 딴소리하지 마.”

역시 통하는군.

저런 놈에겐 이게 직방이지. 나중에 진짜 소개해 줄지는 그때 가서 생각해 보면 될 일이다. 그때는 오히려 자신에게 고맙다고 고개를 숙일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어쨌든 저 녀석의 반응을 보니 확실히 저걸 함부로 처분할 거 같진 않았다. 자신이 한 말 정도는 지킬 녀석이니 아마 안심해도 될 것이다.

녀석이 돌아가고 모야족 역시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1년 넘게 풀장을 떠나있던 것이 억울했는지 그들은 돌아오자마자 바로 풀장으로 뛰어들었단다. 하긴 이제 막 더위가 시작된 상황이니 덥긴 했을 것이다.

그리고 추가적인 훈련이 한창일 때 황실에서 이해하기 힘든 공문이 날아왔다. 로빈이 예상했던 공문은 이게 아니었기 때문에 그도 상당히 충격이었다.

[꿈과 희망의 교단이 신의 계시를 받고 공표함. 각 영지는 차후 있을 밤의 재앙을 대비해 만전을 기해주길 바람.]

“하, 계시라고? 신의 계시? 이게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야? 제국의 역사상 지금까지 한 번도 계시가 내려진 적이 없었는데 이제 와서 계시라고?”

저 계시가 뻥이라는 데 자신의 손목을 걸 수 있었다.

물론 예전에도 한 번 걸었다가 혼 래빗이 진짜 정력제인 바람에 조금 꼴이 우스워졌지만 이번에는 진짜 자신 있었다.

거기다 꿈과 희망의 교단이라니.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교단이었다. 저런 작은 교단에 계시가 내렸다니, 이거야말로 무슨 수작이 숨어있는 게 분명한데 지금 저런 짓을 할 사람은 황태자뿐이었다.

원래 영지 내에 있는 가묘들을 정리하라는 권고가 와야 할 시기에 저런 폭탄을 던지다니. 상황 자체는 더 좋아졌지만, 자신의 예상 그리고 소설과 너무 다른 황태자의 행동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어떻게 했을까? 협박? 거래? 사제가 신탁과 계시를 거짓으로 발표하는 일이야. 분명 쉽게 허락하진 않았을 거야. 아무래도 협박이겠지? 어떻게 했든 내가 아는 황태자 형이랑 너무 다르잖아? 이렇게 저돌적이고 막 나가는 사람이었어?”

소설 속의 황태자는 배신을 겪으며 많이 단단해지긴 했지만, 극단적인 계략을 지향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변하긴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라는 거였다.

사제를 겁박 혹은 협박하다니.

특히 그의 참모인 크라우 백작 영식이 정석적인 전략을 선호하는 사람임을 생각해 보면 저건 정말 황태자의 독단이 분명했다. 아니면 크라우 백작 영식 말고 자신이 모르는 또 다른 참모가 붙었든지.

“하, 뭔가 복잡해지네. 아니, 그보다 우선 이걸 알리고 잘 이용해야겠다. 이런 것까지 왔으니 여름에 훈련 좀 하자고 해도 거부하진 못하겠지. 다 좋은데 백랑 그 양반이 여름에는 은근히 게을러진단 말이야. 더운 건 이해하지만 지금은 그래선 안 되지.”

로빈은 바로 영주 회의를 개최했다. 이 공문을 알리고 이에 대하여 토론하기 위함이었다.

영지의 인사들도 황실에서 날아온 이 공문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뜬금없이 신탁이라니.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였다. 특히 날씨가 더워지면서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마누라 엉덩이만 두드리던 백랑이 가장 놀란 기색이었다.

“뭐야. 이거였어? 영주님이 굳이 여름에도 훈련하라고 했던 게?”

“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계속 훈련하고 각종 물자를 점검한 것도.”

“허, 설마 그럼 그 망치들도 이 일을 대비해서…….”

“정말 대단하군.”

“역시 영주님이시군요.”

기본적으로 자신을 믿고 따르는 지온과 폴은 그렇다 치지만 뭔가 좀 삐딱한 히센까지 놀라고 있었다.

이거 분위기가 또 뭔가 묘한 방향으로 흐르는 건가?

“그랬군. 영주님, 영주님도 무슨 계시를 받은 게 틀림없어. 설마 여신님의 계시라도 받은 거야? 영지에 저런 여신님의 농염한 성물까지 있으니 분명 여신님이겠지?”

“오, 여신님이. 역시 여신님은 은혜롭군요.”

“은혜로운 여신님이죠.”

영지의 중요 인사들 중 여신을 가장 신봉하는 인물은 의외로 전혀 안 그럴 거 같은 루이와 지온이었다.

예전에 성수를 문의하러 갔다가 끔찍한 콰트로 형성에 충격받아 은밀히 뒤로 알아봤는데 영지 식구들 중 루이의 부인 월연과 지온의 부인 월령이 신전에서 가장 열심히 교육받는 자매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결과 둘에게 큰 변화가 생겼는데 월아에게만 있던 그 희대의 명기(U)가 그들에게도 생겨난 것이다.

생겨났다기보다는 개화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은데 어쨌든 그렇게 되었고, 좀 뻣뻣하던 둘이 교육까지 받으면서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단다. 덕분에 그녀들의 남편인 루이와 지온까지 그 혜택을 받고 있었고.

그 후 교단에 대한 믿음이 충만해진 둘이기 때문에 로빈이 여신의 계시를 받은 듯 보이자 더 감격하고 있는 것이다.

하, 진짜. 저건 뭐.

안 그럴 거 같은 사람들이 저러고 있으니 은근히 웃기는 짜장이었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훗날 나올 뒷말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이용할 건 이용해 줘야겠다.

“그래요. 제가 여신님의 계시를 받았죠. 여신님의 은총이 서린 이 땅을 잘 지켜달라고 하시더군요.”

“역시…….”

그리고 이 기회에 영지의 브레인들에게 재앙의 사실을 밝히고 조언도 구해야겠다.

황태자 형이 알아서 판을 벌이는 바람에 자신도 행동하기 좀 편해졌다. 자신이 무슨 대단한 천재도 아니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도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진짜 의심 한 번 없이 바로 믿는 건가?

이 사람들이 이럴 땐 또 은근히 순진하다니까. 나야 좋지만… 이거야, 원.

나, 이 사람들을 계속 믿고 가도 되는 걸까? 좋은 게 좋은 거라지만 이건 또 뭔가 우울하네.

“어쨌든 그런 상황이에요. 그리고 밤의 재앙 말인데요. 그건 아무래도 언데드 같아요.”

“언데드요? 요즘에도 그런 게 있나요?”

“그래서 둔기를…….”

“자, 그리고 예상되는 재앙의 시기는 가을에 들어설 무렵이에요. 특별한 의견이나, 혹시 염려되는 점이 있으면 말해보세요. 제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잖아요?”

“아무래도 가을이라 문제가 생기겠군요.”

지온이 지적한 것은 시기.

가을에 재앙이 일어난다면 아무래도 추수에 지장을 줄 수 있었다. 재앙이 얼마나 지속될 지 알 수 없지만 가을이 짧은 이곳의 특성상 그 시기를 놓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대부분 격전지인 북쪽 마수 산맥과 남쪽 대수림에서 문제가 생기겠지만 자신들이 모르는 무언가가 주민들이 밀집해 있는 에테 마을과 영주 성 쪽에서 튀어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추수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건 그렇죠? 그래서 식량을 비축해 놓은 거예요. 물론 그럴 가능성은 적지만 만약 마을 쪽에 언데드가 많이 돌아다니게 되면 추수를 아예 포기할 수도 있어요. 무조건 영지민부터 지키고 갑시다. 농사는 내년에 다시 지으면 돼요.”

“예, 영주님.”

“흠, 가을이라. 만약 재앙이 길어지면 이게 겨울의 마수 습격까지 계속 이어질 수도 있겠군요. 그렇게 되면 기사들의 피로도가 극심해질 겁니다.”

폴이 지적한 건 재앙이 길어져 겨울의 마수 습격이 겹칠 수도 있다는 거였다.

확실히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소설에서도 재앙을 수습하기도 전에 마수가 튀어나와 큰 피해를 보았다고 했으니 말이다.

확실한 건 재앙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수들도 난리를 피운다는 거였다.

“그렇군요. 흠, 이건 어쩐다. 이건 무슨 대책이 없네요. 최대한 잘 막아보는 수밖에요. 하지만 이게 장기전으로 들어가고, 겨울의 습격까지 이어진다는 가정하에 병력을 관리해야 할 거 같아요. 폴 경도 그렇게 생각하고 준비해 주세요. 기사들의 체력도 세심하게 관리해 주시고요.”

“네, 영주님.”

“그런데 영주님, 그놈들이 살아있는 자들에게 증오를 느낀다는데 마수는 상관없어? 마수들도 일단은 살아있는 놈들이잖아?”

마수와 언데드가 서로 싸운다라. 이건 또 신선한 발상이었다.

마수도 살아있는 놈들이긴 한데 그게 그렇게 될까? 언데드가 마수들이랑 싸우면…….

“그건 그렇네요. 그런데 그런 건 기대하지 마세요. 아마 실망만 커질 거예요.”

“그런가?”

정말 그랬으면 좋겠지만 별로 그럴 거 같진 않았다.

만약 그랬으면 겨울에 마수들이 마을까지 내려올 일도 없었겠지. 언데드가 하급 마수들의 수를 엄청 줄여 산에도 먹을 게 많을 텐데 굳이 인간들을 습격할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거지 같은 마수들은 언데드의 눈길마저 피하는 모양이었다. 인간이나 마수나 같은 생명체인데 그런 차별이라니. 정말 더럽고 불합리한 세상이다.

그 밖에 소소한 의견들이 오고 갔다.

특히 적이 언데드라면 본능적인 공포감을 이겨내기 위해 사전 교육이 필요할 거란 이야기는 조금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그 사전 교육은 신전 쪽에 맡기기로 했다. 아무래도 그 부분에서만큼은 신전 쪽이 좀 더 나을 거 같아서였다.

그렇게 그레이츠 영지는 재앙에 착실히 대비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최소한의 피해로 재앙을 넘어설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 * *

시간을 잠시 돌려 얼마 전.

황도는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였다.

원인은 당연히 꿈과 희망의 교단이 공표한 신의 계시, 신탁이었는데.

계시의 진위나 앞으로의 대책에 대한 논의는 그나마 생산적이지만 이 일의 신뢰성을 놓고 서로 간에 원색적인 비방과 고성까지 오가고 있는 게 문제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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