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각 진영 간 세력 비가 미묘하게 조정되면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던 아귀다툼이 다시 표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계시를 신뢰하는 황태자파와 계시는 허구에 불과하다는 3황자파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중립파는 입장 표명을 자제하고 있었다.
다만 중립파의 거두 리아넨 공작은 쓸데없는 중상모략으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앞으로의 정책 방향에 대해서만 논의하자며 양쪽 모두에 촉구하고 나섰다.
리아넨 공작이 한쪽으로 완전히 쏠리는 것은 두 진영 모두가 바라지 않는 일이라 잠시 다툼이 사그라들었고 덕분에 각자 자신의 진영을 추스르고 자신들의 의견을 냉정하게 정리할 여유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며칠 후.
중앙 귀족 회의를 통해 이 명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계시라니, 그건 까마득히 먼 옛날에 전설로만 남은 이야기에 불과하잖습니까?”
“글쎄요. 그게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일일까요? 계시가 전해진 건 말씀대로 까마득한 먼 옛날이지만 그 후로도 신성력은 계속 존재해 왔습니다. 그러니 언제 갑자기 계시가 다시 내려와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죠.”
건국 이후 한 번도 계시가 내려온 적이 없다는 이유로 허구임을 주장하는 3황자파에 맞서 황태자파는 세상에 신성력이 남아있음을 이유로 계시가 내려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님을 피력하고 있었다.
어쨌든 신성력이라는 것이 현실로 존재하기 때문에 황태자파의 주장을 쉽게 논파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은 3황자파는 이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바로 다른 교단의 사제들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절제와 관용의 여신을 섬기는 교단은 오히려 꿈과 희망을 그리는 여신의 교단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거짓 계시로 교세를 부풀리려 한다고요.”
“전쟁의 교단, 생명의 교단은 특별히 계시를 받은 적이 없다는군요.”
“행운의 교단, 법과 규율의 교단 역시 계시의 허구성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교세가 대단한 전쟁의 교단과 생명의 교단은 중립적인 입장을, 교세가 약한 중소 교단들은 꿈과 희망의 교단을 비난하는 입장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꿈과 희망의 교단이 교세를 확장하는 것을 염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 모두 같은 것이 아닌 것처럼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하고자 하는 교단도 있었다.
“풍요의 교단 역시 이와 비슷한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앞으로의 재난을 대비해야 한다고요.”
새로 계시를 받았다는 교단까지 나타나자 일방적으로 흘러가던 분위기가 다시 반전되었다.
황태자도 계시를 받았다는 다른 교단이 나타났다는 말에는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계시 자체가 철저하게 날조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풍요의 교단이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발표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이런 호재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회의가 다시 난장판이 되자 룩센 대제는 피곤하다는 얼굴로 황태자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저렇다는군. 황태자, 이번 안건의 발안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제국이 건국한 이래 계시가 내려온 것이 처음이니 귀족들의 황망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저 역시 계시가 허구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하지만 제국을 경영하는 입장에서 일말의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설령 재앙에 대비했다가 계시가 허구라면 그저 약간의 손해를 보는 거로 끝날 일이지만, 만약 계시가 사실인데 대비하지 않으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큰 피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계시의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우선 대비해야 한다?”
“네, 그게 위정자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군. 황태자의 생각은 이렇다는데. 어떤가, 조셉 공작?”
“이번 일이 거짓으로 판명되면 단순히 금전적 손해로 마무리되는 건 아닙니다. 말도 안 되는 거짓 계시에 놀아났다는 이유로 황실의 위엄을 실추시킬 수도 있는 일입니다. 이게 어찌 작은 손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둘 다 틀린 말은 아니군. 그렇다면 이 일을 어쩐다.”
룩센 대제가 의뭉스러운 태도를 보이자 황태자가 다시 나섰다.
“그렇다면 이 일은 제가 홀로 나서 준비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그 오명은 제가 홀로 감당하게 되겠죠.”
“호~ 혼자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 황태자는 지금 그게 무슨 의미인 줄 알고 있는가?”
“예. 제 황태자 지위를 걸겠습니다.”
단호한 어조로 대답하는 황태자의 모습을 본 룩센 대제의 눈가에 짙은 호기심이 깃들었다. 조셉 공작 역시 묘한 표정으로 황태자를 바라보고 있었고.
“재미있군. 좋아. 황태자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니 두말하지 않겠다. 이 일은 전적으로 황태자에게 맡긴다. 조셉 공작, 다른 의견 있나?”
“하지만 폐하.”
“대신 황태자의 뜻대로 이 계시가 허구일 경우, 황실의 위엄을 실추시킨 황자 페리안에게 책임을 물어 황태자 직위를 거두겠다. 이 정도면 불만 없겠지, 조셉 공작?”
조셉 공작은 한 번의 도박으로 황태자를 실각시킬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주어지는 대가가 너무나 탐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일이 성공해도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손해날 일은 없어 보였다.
물론 황태자의 명망이 조금 높아지긴 하겠지만 그게 이득으로 남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재앙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도 아니었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방비할 거며, 얼마나 많은 자금이 투입될지도 미지수였으니 말이다.
만약 계시가 사실이라도 황태자가 재앙을 제대로 막지 못하면 오히려 명망만 깎아 먹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 계산해 봐도 이건 무조건 가야 하는 도박이었다.
“영명하신 황제 폐하의 뜻을 따르겠나이다.”
순간적으로 모든 계산을 마친 듯한 조셉 공작의 모습에 실소를 머금은 룩센 대제는 다시 한 번 선언했다.
“이 일은 황태자가 맡는다. 책임도 그가 모두 지기로 한다. 하지만 모든 책임을 황태자가 지는 만큼 이 일에 대한 모든 공 역시 황태자가 가져간다.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무리 짓겠다.”
“명을 따르겠나이다, 폐하!”
회의를 마친 후, 황태자의 집무실.
레오니스 공작은 불만 어린 얼굴로 자신의 제자이자 주군인 페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 페리안? 사실 여부도 파악할 수 없는 계시에 황태자 직위를 걸다니. 네 녀석에게는 그게 그리도 가볍단 말이냐?”
화가 잔뜩 난 듯한 스승의 모습을 페리안은 그저 담담한 미소로 응대할 뿐이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스승님? 하지만 이번 일은 정말 믿을 수 있는 일입니다. 제가 황태자 자리에서 내려갈 일은 없다는 거죠.”
“끙. 하지만 계시라니, 그런 허황한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스승님, 제가 믿는 건 계시가 아니라 제 자신입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 그리고 제가 말씀드린 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건 다 준비해 뒀다. 충성스럽고 잠재력이 뛰어난 예비 기사들에게 그 약을 복용시켰지. 허허. 세상에 그런 귀물이 존재할 줄이야.”
“역시 효과가 있었군요.”
“그래, 정말 대단하더구나. 그리고 네 말대로 동쪽 관문에 따로 투석기와 대형 발리스타까지 설치했다. 도대체 이걸 어디다 쓸 생각이냐?”
동쪽 관문은 주로 말을 타고 빠르게 이동하는 약탈자들을 상대하기 위해 비교적 가벼우며 날카로운 관통형 투척 무기를 배치해 두곤 했다. 대형 석궁이나 연노 같은 그런 무기 말이다.
그런데 황태자가 느닷없이 공성에서나 사용하는 질량형 투척 무기를 요구하는 통에 여간 난감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일의 중요성을 몇 번이나 강조한 황태자의 뜻을 거부할 수 없어 이것들을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쇠망치는 대체 어디다 쓰겠다고…….”
“금방 아시게 될 겁니다, 스승님. 이번 일은 동부 쪽이 가장 중요합니다. 스승님께서 동부를 안전하게 지켜주십시오.”
“동부는 걱정하지 말거라. 내 지금까지 한 번도 적에게 내 땅을 내어준 일이 없으니.”
“예. 스승님. 하지만 전력을 보전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저희는 아직 적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 피해가 누적되면 이겨도 이긴 게 아닌 거죠.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나도 절대 놀라시면 안 됩니다.”
“그리하마. 이번에 늘어난 기사들을 생각하면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이는구나.”
동부의 준비 상태를 점검한 페리안은 앞으로의 계획도 조금씩 언급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제가 큰 공을 세우면 감찰권을 요구할 겁니다. 그리고 조셉 공작의 한쪽 팔을 날려버리는 거죠.”
“감찰권이라…….”
회귀하자마자 힐데 후작 쪽을 계속 후벼 판 황태자는 최근에 몇 가지 의미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다만 확실한 물증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만약 한 가지 물증이라도 찾게 되는 순간 힐데 후작의 실각은 당연한 일이었고, 조셉 공작 일당의 기세도 한 번 꺾고 들어갈 수 있었다.
“폐하께서도 널 유심히 살펴보고 계신다. 그러니… 절대 실수하지 말거라. 그리고 황위는 너의 것이다. 너무 서둘지 않아도 좋아.”
노파심에 한마디 덧붙인 레오니스 공작.
그는 페리안이 완전히 변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지금 페리안은 예전의 사람 좋기만 하고 유약한 황태자가 아니었다. 진중함과 과감함, 그리고 적을 한 번에 물어뜯을 수 있는 거친 공격성까지.
룩센 대제가 원하는 황제감,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이런 무리수를 두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이기만 해도 룩센 대제의 마음이 페리안 쪽으로 자연스럽게 기울어갈 텐데 확실하지 않은 일로 괜한 모험을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혹시나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기도 했다. 조급함은 실수를 부르고 지금 페리안이 실수하는 걸 조셉 공작 쪽이 그냥 보고만 있을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렇게 자신 있어 하니 뭐라고 말리기도 힘들었다. 자신이 황태자파의 거두이긴 하지만 3황자를 조종하려는 저 조셉 공작과는 달리 황태자를 진심으로 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걸 다 떠나서 힐데 후작에 대한 공작을 계획하고 있다는 건 흐뭇한 일이었다. 3황자나 황태자 중 누가 황제가 되어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힐데 후작 건에서 황태자는 정말 많은 모습을 보여줬다.
견고한 힐데 후작의 작은 구멍을 어떻게든 찾아낸 놀라온 정보력.
그 작은 구멍을 미친 듯이 파고드는 집념과 집요함.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신중함.
어떻게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얻기 위해 자신의 자리를 걸고 베팅하는 과감함까지.
그리고 이런 모습들이 황제에게 가감 없이 전해지고 있었다.
만약 페리안의 뜻대로 재앙을 막고 이어서 힐데 후작까지 처단할 수만 있다면 황제의 마음속에서 황태자의 입지는 더욱 공고해질 것이 분명했다.
레오니스 공작이 돌아간 후에는 참모인 젝트와의 면담이 계획되어 있었다. 본격적인 지원 계획도 확정 지어야 했고.
“풍요의 교단은 정말 의외군요.”
젝트는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오늘 회의에서 언급된 풍요의 교단 이야기부터 꺼냈다. 둘 모두에게 당황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황당했지. 난 자네가 뒤에서 작업했을 거로 생각했는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꿈과 희망의 교단에 은밀히 작업하는 것도 벅찬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요. 전 오히려 주군을 생각했는데요.”
결국 서로를 생각했지만, 자신들의 작업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고 헛웃음을 터트린 둘은 그저 풍요의 교단이 시류를 잘 탔다는 것 정도로 정리하고 다른 안건으로 넘어갔다.
“그래. 뭐, 아무래도 좋겠지. 꿈과 희망 쪽은 문제없겠지?”
“네.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습니다. 대우가 좋아 상대도 도주하거나 그럴 생각은 없어 보입니다. 일을 마친 후에 적당히 보상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좋아. 잘 관리해 줘. 잡음이 들어가면 좀 곤란해질 수 있어.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만 관리하면 되니 그리 멀지 않았군.”
“예.”
이번 일을 처리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모셔놓은 꿈과 희망의 교단 대사제와 주교들의 가족들까지 단속한 페리안은 지도를 편 후 앞으로의 계획을 지시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주 격전지는 남부다. 이곳은 제국 제일의 곡창 지대지. 남부 쪽이 큰 피해를 보면 추후 제국의 기틀이 무너질 수도 있어. 그리고 그건 결국 나의 실정으로 남게 되겠지.”
“남부라……. 차라리 남부 쪽은 방치하고 주군의 기틀이라고 할 수 있는 동부나, 북부 쪽에 집중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동부 쪽에서 생산하는 식량도 적은 양이 아닌데요.”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