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그건 그렇지. 하지만 동부 쪽은 스승님께 완전히 맡길 생각이야. 양질의 기사들도 보충됐고 방어 태세도 굳건하니 아마 큰 문제는 없을 거야. 하지만 남부 쪽은 무주공산이지. 기껏해야 적은 무리의 도적단만 상대하던 자들이라 아마 이번 난리 때도 제 몫을 하지 못할 거야.”
페리안의 설명에도 젝트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 일이고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계획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네 생각도 충분히 이해는 간다. 그래, 남부는 그들의 세력권이야. 어차피 한 배를 타지 못할 자들이니 이번 기회에 아예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거지? 하지만 귀족들의 세계는 그렇게 적과 친구로 단순하게 나뉘는 건 아니야. 그리고 피해를 볼 백성들은?”
“하지만 주군께서 그들을 돕는다고 그들이 조금이라도 변할 거 같진 않군요.”
“변하지 않겠지. 하지만 자신이 은혜를 입었다는 자각은 있을 거다. 지금은 그걸로 충분해.”
“주군의 뜻이 그러시다면 더 이상 반대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주군의 적이라는 사실은 잊지 마시길.”
결국 자신의 뜻을 따르긴 하지만 이 녀석도 참 극단적인 녀석이었다. 이 기회에 아예 남부를 버려 그들에게 큰 타격을 주자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면이 참 이 녀석다웠다.
하긴 그런 녀석이라 안심하고 꿈과 희망의 교단과 교섭(?)하는 임무를 맡길 수 있었다.
만약 자신의 친우이자 또 다른 참모인 크라우라면 대사제와 주교의 가족들을 납치하고 협박하겠다는 자신의 계획을 결사반대할 것이 뻔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번 일은 크라우를 배제하고 오직 저 녀석하고만 일을 꾸몄다.
부하의 성격과 성향에 따라 맡기는 일이 달라져야 한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부하들에게도 모든 것을 공개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건 저번 생에서 뼈저리게 느낀 교훈 중 하나였다.
“레오니스 공작님이 동부를, 그리고 남부는 주군이 맡는다면 북부는 어쩔 생각이십니까? 주군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쪽도 상당한 격전지가 될 텐데요.”
“북부는…….”
잠시 지도를 바라보던 페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아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하는데.
“북부의 공은 온전히 그쪽에 넘긴다. 북쪽도 공훈을 쌓을 필요가 있어. 동부 쪽은 스승님이 챙겨갈 테니, 우리가 챙기는 건 결국 남쪽뿐이야.”
“…생각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는군요.”
“큰 그림이라, 그럴지도. 어쨌든 이제 너도 빨리 남쪽으로 내려가. 가서 크라우를 도와 남쪽의 방비를 서둘러라. 황제 폐하의 허락이 떨어졌으니 이제 그들이 멋대로 뻗댈 수는 없겠지.”
남쪽으로 내려가 크라우와 합류하라는 페리안의 명령에 젝트는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나이에 비해 대단히 꼬장꼬장한 그 인사와 같이 일하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 그분은 저랑 좀 안 맞는데요. 차라리 다른 임무를 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닥치고 내려가. 네놈도 정상적인 임무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어. 너랑 성격은 완전 딴판이지만 배울 점이 많은 녀석이니 크라우가 어떻게 귀족들을 다루고 일을 처리하는지 잘 보고 배우도록. 네가 진짜 대단한 참모가 되고 싶다면 채워야 할 게 많다.”
“후.”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한숨이 나왔지만, 주군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라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제법 시달려야 할 모양이다.
페리안은 한숨을 쉬며 물러가는 자신의 참모에게 작게 애도하며 계획을 다시 점검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젝트의 말대로 큰 그림을 한번 제대로 그려볼 수 있을 거 같았다.
* * *
황태자가 자신이 알면 기함할 혐오스러운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르는 로빈은 여전히 영지의 방비에 한창이었다.
어느 정도 준비가 완료된 요즘은 다수의 언데드를 상대하기 위해 낙석이나 철구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최대한 높이와 무게를 이용해 효율적으로 놈들을 제거할 수 있는 무기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준비는 그렇게 순조로웠지만 묘하게 껄끄러운 일들이 로빈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
“허, 그러니까 영주님이 신탁을 받았다고? 우리 여신님의 신탁인가?”
“그렇다니까. 다들 그렇다고 하더라고.”
“역시 그랬군. 영주님이 여신님의 용사였어. 하긴 영지에 저런 위대한 여신상까지 있으니 당연하겠지.”
이런 식으로 자신이 영지 주요 인사들을 설득하기 위해 회의에서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영지민들 사이로 점점 퍼져 나가더니.
“영주님이 여신님의 용사니 이번만은 우리 기사들도 여신님을 받드는 성기사구만.”
“그래, 이게 바로 성전이지! 상대가 언데드라니 성전이 아니면 뭐겠나?”
이런 식으로 묘하게 각색되기 시작했고.
“언데드들이 여신님의 성물을 노리고 영지로 진격한다는구만.”
“뭐? 그 여신상을? 그건 안 되지. 그건 우리의 보물이야!”
“모두 여신상을 지켜야지! 매일 아침 그 여신상에 기도하지 않으면 발기가 안 된다고!”
이젠 아주 소설을 쓰고 앉았다.
아니, 그게 어떻게 우리 영지의 보물이야? 봉사의 교단의 성물이지.
물론 이상하게 와전된 이야기로 영지민들의 사기가 점점 올라가고 있어 좋긴 한데 뭔가 묘하고 껄끄러운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어쨌든 그런 이야기가 은근히 퍼져 나가더니 결국 줄리에타 대사제의 귀에까지 들어갔는지 그녀가 면담을 요청했다.
로빈은 씁쓸한 표정으로 그녀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는데. 솔직히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스럽기만 했다.
“영주님, 영주님께서 여신님의 계시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역시 이 이야기부터 나왔다.
“아, 그게요.”
어쨌든 여신을 섬기는 가장 충실한 종인 줄리에타 대사제에게까지 여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거짓말을 하긴 좀 그래서 솔직히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줄리에타의 말이 한발 빨랐다.
“역시 영주님이시군요. 다른 사람도 아닌 영주님이라면 인정할 수 있죠. 물론 여신님의 첫 번째 종인 제가 계시를 받지 못한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분명 여신님의 큰 뜻이 숨어있을 겁니다.”
아니. 인정하지 마. 솔직히 대사제를 두고 나한테 계시가 내려왔다는 게 말이나 되냐? 그리고 그 변태 겟츄 여신님이 무슨 큰 뜻을 품고 계실 거 같지는 않은데.
당신, 너무 환상 속에서 사는 거 아닐까?
“하, 그게요.”
“그리고 이번 재앙이 여신님의 성물을 노린 어둠과 악의 습격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예? 아, 그건…….”
솔직히 그건 아니지. 악의 무리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쳐도 미용 외에는 별 능력도 없는 저 여신상을 왜 공격하겠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원래 악당이 더 바쁜 법이야.
“그러니 어찌 저희가 손 놓고 구경만 하겠습니까? 저희를 아끼는 영주님의 마음은 감사하나 저희도 분연히 일어나 영지 방어에 일조하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이 사람은 지금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다.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저 하고 싶은 말만 쏟아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도대체 병력 하나 없는 교단이 어떻게 방어에 일조할 생각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줄리에타는 로빈이 고민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영주님, 성전의 그날을 기다리며 저희도 단단히 준비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아?”
이렇게 자신의 말만 남기고 분연히 일어나 굳은 표정으로 집무실을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얼마나 빠른지 로빈이 제지할 틈도 없을 정도였다.
“와, 미치겠네. 뭐야? 사람 말 좀 들으라고! 아 씨, 모르겠다. 그래도 명색이 신전인데 준비한다니 뭐라도 하겠지.”
줄리에타의 행동에 맥이 빠져버린 로빈은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기로 했다. 어쨌든 이런 분위기였으니 숨겨진 뭐라도 있으면 내놓을 거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전혀 기대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거, 생각보다 심각한 건가? 대체 왜 다 그런 이야기를 믿는 거야? 말이 안 되잖아?”
처음에는 사기가 올라간다는 점이 마음에 들어 적당히 이용할 생각도 있었는데 모든 사람이 저렇게 나오니 순간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반박할 타이밍을 놓친 탓에 자신이 여신님의 계시를 직접 받은 용사로 확정되고 말았으니 말이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경솔하게 한마디 했다가 영지민들에게 여신님의 용사로 각인되어 버린 로빈은 이제 생각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래, 차라리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이용하자. 나중에 누가 뭐라고 하면 그냥 꿈에서 들었다고 얼버무리면 될 거야. 내가 구라 치는 것도 아니고 분명 언데드의 습격이 있을 테니 이 일만 마무리되면 적당히 넘어가겠지.”
게다가 황도에서도 이미 계시의 존재를 인정하는 공문을 날렸으니 자신이 숟가락을 하나 얹는다고 문제 될 일도 아니었다. 세간의 시선도 꿈과 희망의 교단 쪽으로 집중될 테니 말이다.
누가 이런 변방 구석에만 자리 잡고 있는 봉사의 교단 따위를 신경 쓰겠어?
로빈은 이렇게 생각하며 애써 마음을 추슬렀다.
“어머, 로빈. 우리 여신님의 사자 로빈이잖아? 호호. 역시 내 아들이라니까~”
“아들, 여신님이 진짜 그렇게 예쁘시니? 여신상을 보면 대단한 미인이시던데.”
“헤헤. 영주님, 영주님이 꿈속에서 계시를 받으며 여신님께 봉사했다던데요. 혹시, 여신님이 가장 즐기셨다는 그 애널 섹스로 봉사한 건가요?”
가족들의 반응은 조금 난감했다. 그저 쓴웃음을 지으며 넘어갈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솔직히 그냥 다 개뻥이라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특히 마지막 실비아의 저 오해는 정말…….
어쨌든 교단의 교리가 그렇다 보니 점점 묘한 오해들이 덩치를 부풀려가고 있었다.
이래서 내가 뭔가 찝찝했는데.
어쨌든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 모든 것들이 재앙만 마무리되면 결국 잠잠해질 이야기들이었다.
게다가 자신도 왠지 그 여신이면 그럴 법하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라 딱히 변명할 말도 없었다.
그랬는데.
“하, 영주님이 애널 섹스의 달인이시라더군. 그래서 여신님의 선택을 받으신 게야!”
“그야말로 신의 테크닉이라고 하시던데?”
“테크닉이 아니라 정력이라는군. 도대체 얼마나 대단하신 걸까?”
“내가 들은 말인데, 사실 기둥이 두 개래. 그래서 한 번에…….”
잘 참던 로빈도 이 부분에서는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무슨 괴물이냐! 다 때려치워!”
그때부터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나섰지만, 사람들은 전혀 믿지 않았다. 이미 늦어도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결국 로빈은 눈물을 머금고 참아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로 공권력을 사용하기에는 너무 치졸하고 구차했다.
하지만 의외의 수확도 있었다.
주변 5대 방벽의 영주들이 그레이츠 영지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전령을 보내온 것이다.
황도에서 신탁을 받았다는 엉뚱한 공문이 날아오더니, 주변 영지에서조차 신탁을 들먹이며 재앙에 대비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오자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건데.
이것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로빈은 그들에게 당당하게 계시를 받았음을 인정하고 재앙에 대비하기 위해 자신의 영지에서 만든 둔기들을 구입하라고 권유했다.
혹시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전령들에게 둔기를 각 영지의 창고에 보관 중이며 일이 벌어지면 즉시 구입해 가라고 알렸으니, 첫날 터무니없이 밀리지만 않는다면 언데드를 막는 데 제법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더 효율적으로 적을 막아낸다면 겨울에 마수 습격으로 입는 피해도 자연스럽게 줄어들겠지. 게다가 이번 일이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을 테니 적어도 예전보다는 더 신중하게 대비할 것은 분명했다.
어쨌든 로빈의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을 일이었다.
* * *
시간은 착실하게 흘렀고 드디어 그날이 도래하고 말았다.
몇 년을 간격으로 간간이 일어나던 개기 월식이었지만 그날은 분위기가 좀 달랐다. 오싹함과 불길함. 검게 물든 달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것을 느꼈다. 오늘은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나고 말 거라고.
소설에서 설명했던 대로 가을에 접어드는 시기에 개기 월식이 돌아왔고, 그게 바로 오늘이었다.
“하, 진짜 기분 더럽네. 원래 개기 월식이 저런 느낌은 아니었는데.”
그리고 로빈도 봉구가 설명했던 오싹함과 불길함이 어떤 감각인지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정말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날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각 마을에서 빠르게 전언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