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이거 어쩌면 생각보다 좋은 체력 회복제에 버프 셔틀이 되어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혹시 몰라 성수를 좀 모아왔습니다. 옛 기록을 살펴보니 언데드에게 생각보다 큰 효과가 있다고 하더군요. 부디 좋은 곳에 써주시길.”
“아……. 예.”
성수라면 그때 설명한 그거? 그런데 그걸 저런 병에 모아오다니. 그 짧은 시간에 저만큼의 성수를 모으기 위해 사제들이 고생깨나 했을 거 같았다.
순간 입에서 거절의 말이 튀어 나갈 뻔했지만 이를 꽉 다물고 겨우 참아냈다.
그래, 쓸 수 있는 건 무조건 다 쓰기로 했잖아?
좀 꺼림칙한 물건이긴 하지만 그래도 효과가 있다니 잘 가지고 있기로 했다. 혹시 밀봉이 풀릴까 봐 몇 번이나 확인해 보긴 했지만 말이다.
“그럼 저희는 바로 봉사에 들어가겠습니다.”
로빈에게 인사하고 막사를 나선 줄리에타는 사제들을 이끌고 바로 기사들이 쉬는 곳으로 향했다.
“음, 이거 기사들이 완전 제대로 쉬겠구만. 밤새 쌓인 긴장이나 피로도 풀고, 버프도 받아 최상의 컨디션으로 다시 전장에 설 수도 있겠군. 여기 남자들은 또 은근히 그런 걸 즐겼으니. 아니, 남자라면 뭐 당연한가? 합법적 꽁씹이라. 뭔가 좀 부러운 기분도……. 아니지.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로빈은 고개를 저은 후 바로 지온에게 연락했다.
마수 산맥에 얼마나 많은 언데드가 존재할지 대충 추산해 보기 위해 옛 기록을 찾아봐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여러 곳으로 퍼진다면 별로 의미 있는 자료가 아니지만 대부분 우리 쪽으로 쏠린다면 생각보다 가치 있는 자료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언데드가 이쪽으로 몰리는 덕분에 다른 영지에 여유가 생긴다면 바로 지원을 보내달라고 요청할 생각이었다.
이 상황에서 다른 영지에 직접 다녀올 수도 없었으니 중앙을 통해 연락을 넣어야 했다.
자신이 보내준 둔기도 어쨌든 잘 쓰고 있을 테니 그 정도는 거절하지 않을 거 같았다. 그들도 양심이란 게 있다면 말이다.
[네? 이제 와서 무슨……. 어쨌든 알았습니다. 제가 바로 조사해 보겠습니다.]
지온의 반응을 보니 이 사람도 성물을 지키기 위한 성전이라는 개소리를 믿고 있었나 보다.
하, 진짜 나만 몰랐어? 일이 어떻게 그렇게 됐지?
이게 진정한 소통의 부재인가?
아무래도 진짜 참모 한 명 정도는 있어야겠다. 이곳에서 제법 오래 살았는데도 아직까지 가끔 뭔가 서로 핀트가 어긋나는 느낌을 받고 있었으니 말이다. 적어도 옆에서 이런 것 하나하나 세세히 체크하고 조언해 줄 그런 참모 말이다.
지온과 히센은 아는 게 참 많았지만 그야말로 관료, 학자 스타일이라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굳이 이야기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은근히 내가 웬만한 건 당연히 알고 있을 거로 생각하는 거 같았다.
내가 어렸을 때 너무 나대서 그런 모양이다. 이래서 조상들이 중간만 가라고 그렇게 강조했나 보다.
현재 상황이 기가 막혀 고개를 저으며 한숨짓던 로빈은 다시 막사 밖으로 나가 작업 상황을 살피고 어떻게 하면 더 적은 피해로 놈들을 막을 수 있을지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아직도 관문 아래에는 밤새 수북이 쌓인 뼈들과 그들의 몸에 매달려 있던 온갖 잡동사니를 치우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무기를 다루는 장정들은 근처에 널브러져 있는 뼈들 사이에서 두개골을 찾아 부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고 결국 어쩔 수 없이 뼈들을 다른 곳으로 치우는 작업은 여성들의 몫이었다.
여성들은 섬세한 손놀림으로 뼈들과 잡동사니를 분리해 종류별로 모았는데 마치 그 모습이 재활용품을 따로 정리해 놓은 분리수거 현장 같았다.
“썩지 않은 것들이라 그런지 철로 만든 물건이 대부분이네. 저걸 나중에 재활용할 수 있으려나?”
철도 100년 이상이 지나면 웬만하면 썩는 거로 알고 있는데 분리해 놓은 걸 보니 생각보다 더 멀쩡했다. 하긴 뼈도 수백 년 동안 안 썩는 곳인데 철이 썩을 리가 없겠지.
그나마 가죽이나 이런 것들은 다 썩어서 저 해골들이 제대로 된 무장을 갖추고 있지 않아 다행이었다. 만약 철제 투구라도 쓰고 있었으면 어떻게 두개골을 처리했을지 암담하니 말이다.
놈들이 한두 마리도 아닌데 한 번에 파괴할 수 있는 녀석을 투구 때문에 두 번, 세 번 내리쳐 처리하게 되면 그만큼 부담이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게 하나둘씩 쌓이면 결국 전선이 점점 뒤로 밀려날 것이다.
다행히 제국 병사나 기사들은 철로 된 통짜 투구는 거의 쓰지 않는 추세였다. 타격 시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다나? 그러니 아마 투구로 무장해 처치 곤란한 해골은 등장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영주님.”
모든 기사들이 꿀 같은 휴식 시간을 보낼 때 폴은 이곳에 남아 모든 작업을 총괄하고 있었다. 적어도 남쪽에서 지원 병력이 올 때까지는 쉴 수 없다는데 역시 대단한 책임감이었다.
하지만 로빈으로서는 전혀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폴 경, 왜 아직까지…….”
“영주님, 아무래도 튼튼한 밧줄을 준비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폴에게 당장 들어가서 휴식을 취하라고 명령하려던 로빈은 그가 먼저 다른 이야기를 꺼내자 잠시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밧줄이요?”
“아무래도 전사한 병사들을 보니…….”
전사자들은 대부분 해골의 손에 끌려 내려간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만약 낙하만 막을 수 있으면 분명 많은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로빈도 전사자의 시신을 살펴보다 갑옷이 보호하고 있는 부분은 거의 상처가 없는 걸 보고 떨어지더라도 빨리 건져 올릴 수만 있으면 살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마법 갑옷 덕분에 해골의 빈약한 공격력으로 겨우 몇 차례 타격으로는 치명상을 줄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만약 밧줄을 달고 있다가 떨어지자마자 뒤에서 당기게 되면 어쨌든 기어 올라와 목숨을 건질 수도 있다.
“물론 강하게 당기다 보면 성벽에 부딪혀 큰 상처를 입을 수도 있지만…….”
“죽는 거보다는 낫죠. 정신만 차리면 크게 다치진 않을 테고요.”
일선에서 싸우는 병사들은 대부분 정예병이거나 기사였는데 평범한 장정이면 몰라도 마나까지 다루는 그들이 끌려 올라오면서 성벽에 부딪힌다고 죽을 거 같진 않았다.
물론 허리에 상당한 힘이 가해지겠지만 튼튼한 마법 갑옷도 있고 이미 알고 있으면 그것도 마나로 어느 정도 보호할 수 있으리라.
기껏해야 골절 정도? 그렇게 되면 전력 외 판정을 받겠지만 우선 살아만 있으면 준비의 대가로는 충분히 만족스러울 것이다.
만약 전선이 이딴 식으로 흘러갈 것을 알았으면 미리 요새 위로 수백 개의 도르래를 설치해 놨을 것이다. 떨어지자마자 당기면 바로 위로 튀어 올라올 수 있게 말이다.
하지만 로빈도 이런 무자비한 해골 디펜스가 펼쳐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지, 그렇게 도르래를 설치해 버리면 움직임이 제한돼 오히려 상황이 안 좋아지려나?”
어쨌든 지금 당장 급하게 쓰기에는 나쁜 방법이 아니었다. 놈들이 지능이 있다면 떨어져 내릴 때 밧줄부터 끊어버리겠지만 놈들은 아메바보다도 못한 놈들이니 충분히 통할 것이다.
물론 떨어진 병사를 붙잡고 있던 해골 몇몇이 같이 딸려 올라오겠지만 그건 그거대로 빨리 처리하면 충분했다.
“괜찮네요. 100% 완벽하진 않겠지만 희생을 줄일 순 있을 거 같아요. 바로 준비해야겠어요.”
당장 돌아가 마을에서 튼튼한 밧줄을 구하려던 로빈은 발길을 멈추고 다시 폴을 불렀다.
“폴 경, 의견은 고맙지만 지금 당장 들어가 휴식을 취하세요. 오늘 밤에도 사투를 벌여야 한다고요.”
“흠. 네, 영주님.”
폴은 뭐라고 반발하려다 로빈의 표정이 너무 단호하자 어쩔 수 없이 수긍하고 기사들이 쉬고 있는 막사로 들어갔다.
로빈은 그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획대로 마을로 돌아가 밧줄부터 찾았다.
그리고 다시 날이 저물어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제 한 번 난리를 겪었던 병사들과 기사들은 상대가 어떤 식으로 공격하는지 알고 있어서인지 제법 침착한 분위기였다. 뼈들이 움직이는 걸 보고 놀라는 것도 처음에나 그렇지 앞으로 지겹게 보게 될 해골의 모습에 이제 와서 놀랄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낮에 잘 쉬었는지 오히려 어제보다 더 팔팔한 녀석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무래도 줄리에타 대신관이 자부했던 그 놀라운 버프 덕분인 거 같았다.
“캬, 이번 전투 마치고 신전에 기부금을 넣어야겠어.”
“큭큭. 그게 아니라도 당장 오늘만 버티면 또 봉사를 받을 수 있지.”
“후후. 좋아, 힘내자고. 해골 100마리 잡을 때마다 봉사 수준이 한 단계 올라간다는 말 들었지? 한 500마리 잡으면 초초스페셜 봉사를 받을 수 있는 건가?”
“그런 걸 받았다가는 해골을 잡기 전에 네놈 뼈가 먼저 녹아버릴걸?”
“그래도 좋으니 받고 싶은데. 뼈가 녹는. 후후.”
심지어 이상한 이유로 사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아니, 이 상황에서 저런……. 아니지. 저런 게 다 긴장을 푸는 방법일 거야. 저들도 프로인데 전투를 앞두고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겠어?
“가자! 100마리!”
“100마리 가즈아!!”
있…나? 왠지 느낌이 좀…….
어떤 이유든 사기만은 정말 대단했다.
하, 교단이 이런 식으로 또 다른 버프를…….
그리고 일선에 선 모든 병사와 기사들의 허리에 두꺼운 밧줄이 묶여있었다. 조금 뒤쪽에는 그 밧줄을 움켜쥐고 장정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만약 누군가가 해골의 손에 바닥으로 떨어지면 바로 당겨 올릴 것이다. 당겨져 올라오는 충격을 버티는 건 본인의 능력이겠지만 해골들 사이에서 시체가 되는 것보다야 이게 훨씬 나았다.
이미 모든 병사와 기사들에게 설명했으니 떨어져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기어 올라올 거라고 믿었다.
사실 저 장정들도 지금은 쉬어야 할 시간이었다. 밤에 쉬어야 다시 내일 온갖 잡무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밤은 그냥 참기로 했다. 만약 계획대로 내일부터 다른 마을에서 장정들이 도착하면 저 사람들은 그때 충분히 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달이… 떠오르는군요.”
“그러네요. 오늘도 부디 무사히 잘 막아낼 수 있길…….”
해가 지고도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해골들의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요새 근처의 해골들을 미리 다 처리해 놓은 게 주효했던 모양이다.
“하, 저건 또 왜 저렇게 많아?”
대수림 안으로 들어가 상대의 규모를 대충이나마 파악한 남쪽 요새와는 달리 이곳은 마수 산맥이라 깊이까지 들어가 상대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나마 방벽 근처의 해골들을 해결한 것도 큰 모험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저쪽에서 몰려오는 걸 보니 정말 엄청난 숫자가 몰려나오고 있었다. 심지어 끔찍했던 어제보다도 압도적으로 많은 수였다.
“미친, 해골 디펜스 진짜! 설마 내일도 더 늘어나는 거야?!”
터져 나온 로빈의 절규를 기점으로 다시 해골 무리와 병사들이 거칠게 충돌하기 시작했다.
이건 그야말로 살려는 자와 죽이려는 자의 처절한 투쟁, 그 자체였다.
전투의 양상은 어제와 비슷했다.
빼곡하게 끝없이 몰려오는 해골과 그들을 깨부수는 영지의 용사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아래로 떨어진 병사들이 어떻게든 바락바락 다시 기어 올라온다는 것과 상대의 숫자가 미친 듯이 많다는 거뿐이었다.
“악! 당겨!”
전투가 격해지면서 기사들까지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마나를 능숙하게 다루는 기사들이라 위에서 당기는 탄력을 이용해 자연스럽게 성벽 위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게다가 그 모습을 보고 뭔가 떠올랐는지 기사 몇이 자의적으로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아마 성벽 위에서 방어만 하는 게 답답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자신의 마나를 쏟아부어 문신까지 발동시켰는지 자신의 발아래 있는 해골부터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놈들을 한 번에 분쇄하고 밧줄을 타고 돌아왔다.
워낙 많은 수의 해골이 뒤에 버티고 있어 한두 번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지만 수십 명의 기사가 번갈아가며 놈들을 분쇄하자 잠시 공격에 공백이 생겼고, 병사들은 그 틈에 교대하거나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하, 저건 말려야 하지 않나요? 저러면 빨리 지칠 거 같은데요.”
“기사들은 그렇게 물렁하게 훈련하지 않았습니다, 영주님. 마나가 없어도 적어도 서너 시간은 검을 휘두를 수 있습니다. 무거운 둔기라 시간이 좀 줄어들긴 하겠지만 교대까지는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겁니다.”
“흠.”
당황하던 로빈도 폴의 설명을 듣고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강도 높은 훈련을 받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인 줄은 몰랐는데 생각보다 더 대단했다. 덕분에 상대적으로 약한 병사들이 여유를 찾아 상황이 더 괜찮아졌다.
아무래도 그런 목적으로 저렇게 호흡을 맞춘 거겠지.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