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산술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 정도 수가 죽었다면 어제 그리고 그제 처리한 수로 대부분이 마무리됐다고 볼 수 있었다.
로빈은 다른 영지의 상황을 확인해 현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생각으로 지온에게 다시 물었다.
“그래서 다른 영지는 어때요? 이제 얼추 정보가 들어오지 않았나요?”
[각 영지마다 지금까지 대략 2~3천 정도의 언데드를 상대했다는 전언입니다.]
영지가 모두 넷, 그들이 수천씩 상대했으면 대략 1만을 상대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 우리가 상대한 것을 더하면 얼추 수가 맞아떨어지긴 한다. 그럼 이제 거의 끝물이란 건가?
하지만 마수 산맥 쪽으로 쭉 늘어선 뼈들의 향연을 보면 그냥 이렇게 끝날 거 같지가 않았다.
“혹시 그 시기에 토벌대가 들어간 것 외에 그 전후로 마수 산맥에 대규모의 병사들이 투입된 적이 있던가요?”
[대규모 토벌은 없었지만 그 전부터 소수의 용병들이 계속 토벌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오히려 그 이후로는 아예 잠잠했고요. 아무래도 마수의 가치가 낮아져서 그런 거 같습니다.]
“흠, 소규모 토벌대라.”
물론 그들이 적당히 죽어 나자빠지긴 했겠지만, 그 수가 수천에 이를 거 같진 않았다.
설마 진짜 끝물? 하지만 왠지 좀…….
“지온, 혹시 말이에요. 제국 시대 이전에도 마수는 있었잖아요? 그럼 그 시절에도 마수를 토벌하지 않았을까요?”
[네? 아……. 예. 물론 그랬을 겁니다. 제국 이전에 이 위치에 존재했던 국가가 히라세이 왕국이었습니다. 비록 그곳이 무리한 마수 산맥 토벌로 결국 멸망하긴 했지만……. 하지만 이미 천 년도 넘은 일인데 그 시체들의 뼈가 남아나 있겠습니까?]
“상식적으론 당연히 그렇죠? 그런데 왠지 좀 껄끄럽네요. 지온, 혹시 역사서를 찾아서 그 이전 시대의 토벌까지 한번 알아봐주실래요?”
[네, 영주님.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지온은 그럴 리가 없다고 하면서도 우선 알아보겠다고 했다.
솔직히 로빈도 그건 아니겠다 싶긴 했는데 일이 계속 이상하게 흐르니 확인 차 부탁한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밤이 되면 대충 윤곽이 나오긴 할 것이다. 저 마수 산맥이 대체 언제 적 시체까지 품고 있었는지 말이다.
그날 저녁이 다 될 무렵, 백랑이 보내준 예비 전사들 100여 명과 에테와 우버, 두 마을 주변을 수색하던 치안대 200여 명이 관문에 도착했다. 일이 마무리되자마자 각지에서 바로 지원병을 보낸 것이다.
“족장이 우선 투입을 명령했습니다. 되도록 빨리 정리하고 합류하신다는데 대수림 안에도 아직 해골이 많아서…….”
예비 전사에게 전해 들은 남쪽 요새의 상황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아직도 기어 나올 언데드가 더 남았다는 소식이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백랑과 전사들이 이곳까지 지원 오려면 시간이 더 걸릴 모양이다.
하지만 예비 전사라도 미리 보내준 건 참 고마운 일이었다. 물론 낮 동안 바쁘게 활동했을 그들을 바로 전장에 투입할 수는 없겠지만 우선 쉬다가 막판쯤에는 충분히 동원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로빈은 그들에게 보고를 받고 우선 휴식하라고 명했다.
그리고 어제, 그러니까 오늘 새벽 난전으로 다친 병사와 기사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전장에 합류했다. 전혀 다치지 않았다는 듯 멀쩡한 모습이라 로빈도 얼떨떨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들이 건재하단 건 좋은 소식이었다.
지금 쉬고 있는 예비 전사들과 치안대를 마지막 타임에 투입할 계획이기 때문에 3교대를 2교대로 줄이고 우선 일선의 병력을 늘리기로 했다. 혹시 어제 같은 인해 전술이 다시 나올 때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모든 용사가 진용을 갖추자 그 기세가 사뭇 대단했다.
“그나저나, 이상한 부작용은 있지만 진짜 외상 치료 부분에서는 최고네. 저게 저렇게 된다고? 섹스가 위대한 거냐? 아니면 우리 여신님이 대단한 거냐?”
로빈은 그 와중에도 봉사의 교단의 탁월한 성 치료 효과에 감탄을 터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버프가 없다는 건 조금 우울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대부분의 사제가 2~3일 정도는 신성력을 쓰지 못할 거 같습니다. 남은 인원들은 혹시 모를 내일 부상자를 위해 남겨놓았는데 그 인원들에게라도 신성력을 받으시겠습니까?”
줄리에타 대사제의 물음에 로빈은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수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한 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다면 사제들이 신성력을 아끼고 있는 게 차라리 더 나았다.
어쨌든 당장 버프는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아니, 오히려 훗날 있을 위대한 부작용을 걱정해야 할 상황이려나?
그렇게 다시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로빈은 어느 정도 자신 있었다.
적을 상대할 병력도 늘렸고, 어제처럼 언덕이 쌓이면 바로 부숴 버릴 수 있게 철구도 미리 준비해 놓았다. 그러니 만약 어제 같은 상황이 이어진다면 오늘은 무조건 피해 없이 막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사제들의 버프가 없어진 건 조금 안타깝지만, 어차피 해골을 상대하는 데 버프가 꼭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적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시작은 어제처럼 무수히 많은 해골의 돌진이었다.
“최대한 체력을 아껴. 정확하게 타격해 놈들을 떨어트려라!”
경험이 쌓인 탓에 병사들이나 기사들의 대처도 한결 부드러웠다.
가능하면 최대한 체력을 아끼면서 정확히 상대의 머리만을 가격해 파괴하는 것.
많은 언데드를 상대하는 정석 중의 정석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계속 달려드는 놈들을 상대하고 있는데 뭔가 좀 이상했다.
원래대로라면 적들이 점점 더 늘어나 관문 앞을 가득 메워야 하는데 소강상태에 들어간 듯 좀처럼 수가 늘어나지 않았다.
물론 어제보다 많은 병력이 더 빠르게 적을 처리하고 있어 그렇게 보이는 걸 수도 있겠지만 어제보다 그 수가 적은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수가 조금 적죠?”
“네, 영주님. 어제보다는 좀 줄어든 거 같습니다. 첫날과 비슷한 느낌이군요.”
언덕이 쌓여 올라오는 속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어제는 이 시간쯤에는 이미 반 넘게 차 올라왔는데 지금은 아직 한참 남았다.
지온의 말대로 진짜 끝물에 들어간 건가? 정말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시간이 계속 흘러갔다.
때리고, 부수고, 적이 쌓이면 기사들이 내려가 한바탕 휩쓸기도 하고.
방어 작전은 순조롭게 착착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대부분의 해골이 처리돼 대략 수백에서 기천 정도의 수만 남은 상황.
어쩌면 오늘은 저 해골들을 모조리 처리하고 편안한 아침을 맞이할 수도 있을 거 같았다.
그리고 그때.
“정체불명의… 기사? 해골인 거 같은데, 뭔가…….”
산맥 쪽을 유심히 살피던 폴이 뭔가를 발견한 듯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했다.
로빈도 눈앞의 해골들만 살피다가 고개를 들어 폴이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그곳에서는 처음 보는 디자인의 풀 플레이트 메일에 거대한 대검을 든 해골이 달려오고…….
아니, 저게 달려오는 거라고? 날아오는 게 아니라?
로빈이 당황하는 사이 놈은 벌써 관문에 도달해 그 즉시 관문 위로 뛰어올랐다.
“맙소사.”
높은 관문을 한 번에 뛰어오른 놈은 지체 없이 병사에게 대검을 휘둘렀다.
이제는 습관적으로 해골의 머리를 부수고 있던 병사도 순간 놈을 발견하고 멈칫했지만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라 제대로 대처하지는 못했다.
“비켜!”
“챙!”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만약 놈을 발견하자마자 폴이 바로 그쪽으로 뛰어가 놈의 검을 막아내지 않았으면 정말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부딪친 두 자루의 대검과 터져 나온 충돌음.
폴은 상대의 검격을 막아낸 후 안간힘을 다해 버텨내고 있었다. 부들거리는 두 팔과 이마에 솟아오른 힘줄만 봐도 저놈의 힘이 생각 이상인 거 같았다.
그리고 그런 대치전은 뒤에 있던 병사가 정신을 차리고 완전히 빠져나간 뒤에야 겨우 마무리되었다. 폴이 놈의 검을 옆으로 밀어내며 공간을 벌렸기 때문이다.
“하, 갑옷 언데드라고? 분명 데스 나이트 같은 건 없다고…….”
저 갑옷 입은 놈은 다른 해골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우선 무장 상태가 풀 플레이트 메일이고, 거기다가 제대로 된 대검을 들었다. 심지어 투구까지 갖추고 있는데다가 투구 사이로는 귀화 같은 붉은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었는데.
저런 게 데스 나이트가 아니면 도대체 뭔데?
로빈이 한탄하는 사이에 놈이 다시 폴에게 달려들었다.
아까도 느꼈지만, 놈은 정말 빨랐다.
“챙! 챙!”
폴이 놈의 검격을 쳐내자마자 다시 파고들어 이번에는 체술로 다리를 공격, 폴이 그걸 뛰어넘고 에셋을 내리치자 검을 들어 바로 막아낸다.
그렇게 공방이 계속되는 사이, 몰래 접근한 다른 기사가 놈의 머리를 망치로 후려쳐 날려버렸지만, 그 정도는 끄떡없다는 듯 다시 멀쩡하게 일어섰다.
아무래도 망치로는 저 투구를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하, 무슨 방어력이……. 게다가 저 정도면 그냥 빠른 정도가 아니라 X나 빠르잖아? 설마 여기도 빨간 놈은 세 배 빠른 거야?”
남쪽 요새에서 등장했다는 빠른 놈은 전사가 신중하게 대처하면 충분히 잡을 수 있다고 했었다.
하지만 저놈은 단순히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게다가 은은하게 빛나는 붉은 풀 플레이트가 주는 묘한 위압감.
아무래도 두 눈에서 이글거리는 붉은 귀화 때문에 더 그렇게 보이는 거 같았다.
“저거……. 설마 알버스가 말하던 마스터급 해골인가? 아니, 대체 왜 마스터가 마수 산맥에서…….”
“영주님! 저… 저기!”
폴이 놈을 쉽게 제압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한 병사가 큰 소리로 로빈을 불렀고, 병사가 가리킨 방향에서는 이놈과 같은 갑옷으로 무장한 해골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하나, 둘, 셋… 스물? 저런 놈이 스물이나 된다고?
로빈이 당황하는 사이에도 놈들은 빠른 속도로 관문에 접근했다.
“와, 미치겠네. 저걸 어쩌지?”
로빈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당장 폴조차 바로 처리할 수 없는 강력한 놈이 무려 스물.
저놈들을 상대로 병사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병사들이 떨어지지 않게 보조하던 장정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그나마 기어 올라오던 해골들을 거의 다 처리했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리라. 바로 병사들을 후퇴시킬 수 있었으니 말이다.
“병사들은 당장 후퇴! 예비 기사들 모두 투입! 다들 도망쳐!”
로빈의 선택은 당연히 방해만 되는 병사와 나머지 인원들을 대피시키는 거였다.
결국 저들은 무조건 기사들이 막아줘야 했다.
“하, 이게 이렇게 된다고?”
로빈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어이없었다.
엄청난 수로 몰아붙이더니 그에 대비해 인원을 확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소수 정예를 투입.
결국 인원 확충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방해만 되는 병사들은 바로 뒤로 빼야 했다.
그야말로 농락당한 기분이었다.
“미친, 이게 무슨 공명의 계략이야?”
그리고 로빈도 병사들과 함께 뒤쪽으로 도망쳤다. 자신이 거기 있어봤자 기사들의 신경만 분산시킨다는 생각에서였다.
적은 어차피 이상한 놈들뿐이고 남은 잔챙이들은 거의 처리해 따로 지휘할 것도 없었다. 그저 기사들이 무사히 놈들을 해치우길 바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쨌든 대기하던 기사들까지 모두 뛰어나와 기사들의 수는 100여 명이고 놈들은 스물하나라 기사들이 대열을 갖추고 놈들을 상대할 수 있었다. 마치 마수를 상대할 때 대열을 짜고 막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나치게 튼튼한 저 갑주와 해골의 조합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이었다.
평범한 타격은 갑옷을 뚫지 못했기 때문에 마나를 집중한 일격을 놈의 머리 쪽으로 날려야 하는데 지치지 않는 해골이 그야말로 미친 듯이 빠른 속도로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는 바람에 타이밍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놈들이 마나를 다루는 건 아니라 우리 기사들도 쉽게 치명타를 허용하진 않는다는 거였다. 우리의 마법 갑옷도 만만치 않게 튼튼한 놈이었기 때문이다.
“하, 이렇게 되나? 만약 시간을 오래 끌 수만 있으면…….”
그나마 놈들이 멍청한 언데드라서 다행이었다. 덕분에 기사들이 계속 저들을 잡고 있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만약 저들이 이성이라도 있었으면 기사들을 버려두고 다른 곳으로 뛰어가 병사들이나 주민들을 공격했을 것이다.
하지만 쉴 새 없이 빠르게 움직이는 해골과 대치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닌지 기사들이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하, 이게 이렇게 되니까 또 버프가…….”
결과론적인 말이지만 일이 이렇게 되니 해골을 상대하는 데에는 필요 없을 거로 생각했던 버프가 몹시 그리워졌다.
하지만 이미 버스는 떠났는데 어쩌겠는가.
로빈은 기사들이 저 해골을 막지 못했을 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사들이 저놈들을 놓치면 그야말로 참극이 일어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