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그래서 병사들에게 명령해 바로 방패부터 찾아왔다. 북쪽 방벽은 당연히 온갖 물자들이 보관되어 있었고, 마수를 대비해 방패도 충분히 구비되어 있었다.
“방패를 들고 방진을 구성하세요. 놈들이 달려들 때를 대비해야 해요.”
언데드의 습성상 바로 눈앞에 있는 생자들을 외면하고 다른 곳으로 달려갈 가능성은 적었다. 그러니 이렇게 뭉쳐서 방진을 구성하고 있으면 놈들도 분명 이쪽을 먼저 공격할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무조건 여기에서 아침까지 버텨내야 했다.
로빈이 병사들을 방패로 재무장시키고 다시 전장에 합류할 무렵, 전투의 양상은 많이 변해있었다.
우선, 단순한 공격으로는 놈들에게 타격을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기사들은 풀 플레이트 메일의 관절 부분 이음새를 집요하게 노리고 들어갔다.
하지만 정교한 공격보다는 강한 일격에 익숙한 기사들이 날쌘 놈들에게 유효타를 넣는 건 쉽지 않은지 상대의 피해는 미미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가끔 정타가 들어가 놈들의 관절 부분을 끊어 놓아도 효과가 조금 애매하긴 마찬가지였다. 적들은 대퇴부가 잘려 다리 하나가 떨어져 나가도 계속 공격을 이어 나갔으니 말이다.
어이없게도 놈들은 한쪽 다리만으로도 엄청 빨랐다. 아무래도 두 팔이나 두 다리를 모두 잘라버려야 겨우 효과를 볼 수 있는 모양이다. 아니면 머리가 연결된 목 부분을 정확하게 잘라버리든지.
반면 기사들은 놈들의 대검에 두들겨 맞아 제법 많은 수가 줄어들었다. 한쪽에 쓰러져 있는 기사들을 보니 가벼운 마나 탈진부터 시작해 제법 심각한 상처를 입고 헐떡이는 기사들도 있었다.
아무래도 저들부터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켜야 할 거 같았다. 기사들도 쓰러진 동료들 때문에 신경이 분산되고 있었으니 말이다.
로빈은 방패를 든 병사들을 이끌고 쓰러진 기사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한 무리의 병사들로 방진을 구성한 후 바로 기사들을 후방으로 옮겨 나르기 시작했는데.
다행히 격한 전투 중이라 그런지 놈들도 쓰러져 있는 기사들까지 신경 쓰고 있지는 않은 거 같았다.
그렇게 다친 기사들을 모두 후방으로 나르고 로빈과 병사들까지 뒤로 후퇴하려던 순간.
기사 하나가 대검에 얻어맞고 로빈 쪽으로 굴러왔다.
그리고 기사를 공격했던 해골 하나가 같이 날아와 대검으로 내리찍는데 기사는 방금 일격으로 기절했는지 부들거리고 있을 뿐 피할 여유가 없어 보였다.
그때 로빈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한 가닥의 밧줄이었다.
기사의 허리에 연결되어 있는 긴 밧줄.
미처 풀 여유가 없어 허리에 감아놓았던 밧줄이 방금 일격을 맞고 나뒹굴며 풀려 나온 것이다.
로빈은 생각할 새도 없이 바로 튀어 나가 그 밧줄을 잡아당겼다. 온몸이 근육이라 제법 무거운 기사였지만 로빈 역시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는지 기사가 이쪽으로 쭉 당겨져오며 놈의 대검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와. X발, 미치겠네.”
놈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로빈은 놈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걸 보며 자신답지 않은 오지랖에 헛웃음과 욕설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놈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건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한없이 느리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런 기묘한 현상 덕분에 오히려 죽음을 체감할 수 있었다.
진짜 죽는 게 아니라면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바로 그때, 로빈의 앞을 가로막는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듬직한 등과 큰 방패. 그리고 왠지 익숙한 뒤통수.
익숙한 뒤통수? 이거 설마…….
그리고 남자가 큰 방패로 적의 대검을 막아내자마자 또 하나의 그림자가 튀어나와 놈의 목덜미를 후려쳐 머리를 아예 날려버렸다.
“허약이 미쳤냐? 감히 너 따위가 내 첫 등장을…….”
“닥쳐, 마녀야. 빨리 도련님이나 챙겨 드려.”
“아, 그렇지. 주인, 괜찮아?”
방패로 공격을 막은 듀발은 바로 전장으로 몸을 돌렸고 린은 웃으며 로빈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뒤이어 거친 함성이 울려 퍼지며 도끼를 든 모야족 전사들이 전장에 합류했다.
린이라고? 여기서 망나린(망나니 린)이?
목소리는 딱 린나니(린 망나니)인데 저 모습은 내가 알던 그 린나니가 아니었다. 3년 새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자신도 꽤 컸다고 생각했는데 린의 변화는 상상 이상이었다. 170은 되어 보이는 큰 키도 그렇지만 갑옷 사이로 느껴지는 볼륨감. 그리고 단정하게 뒤로 묶은 포니테일과 등에 살짝 걸친 검은 대검.
게다가 분위기까지 완전 변해 예전의 미숙함이 아니라 잘 단련된 전사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겼다. 심지어 젖살이 빠지며 얼굴까지 엄청 예뻐졌다.
이거 내 눈이 잘못된 건 아니지? 혹시 내가 미쳤나?
“주인?”
로빈이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자 고개를 갸웃거리는 린.
그제야 정신이 든 로빈은 살짝 붉어진 얼굴을 돌려 린을 외면한 후 모야족이 날뛰고 있는 전장 쪽으로 아예 눈을 돌려버렸다.
로빈이 별말 없이 고개를 돌려버리자 뽀로통해진 린은 작게 투덜거리며 전장에 합류하는데.
“아씨, 이게 다 허약이 때문이야. 임팩트를 뺏겨버려서 그렇다고!”
린은 로빈이 자신에게 싱거운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듀발 때문이라고 단언하고 이를 갈고 있었다.
그리고 빨리 저 빨간 놈들을 처리해 로빈의 인정을 받을 생각으로 만만이었다.
극적으로 등장한 모야족 전사들은 전장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서로에게 도끼를 휘두르며 계속 단련했던 전사들은 그야말로 대인전의 전문가들.
대련보다는 마수 사냥에만 집중했던 기사들보다 인간형인 해골을 상대하는 것에 더 익숙했다.
몇씩 짝을 지어 기사들과 함께 놈들을 포위한 후 바로 달려들어 팔다리를 다 끊어버리는데, 정확히 타격하지 못해 갑옷만 후려치던 기사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런 게 아니라도 90여 명이던 기사들에 150명가량 되는 전사들이 추가되었으니 놈들을 포위해 섬멸하는 것에 무리가 없었다. 정상적인 놈들이라도 충분히 상대할 만한데 이미 격전으로 팔이나 다리 하나를 잃은 놈들도 많아 더욱 쉽게 상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중 특히 백랑과 흑웅, 린과 듀발의 활약이 발군이었다.
아예 혼자서 해골 하나와 자웅을 겨루는 백랑과 흑웅.
그들은 자신이 왜 모야족 최고의 전사인지를 행동으로 확인시켜 주었다.
폴과 백중세를 이룬 저 붉은 놈을 바로 압도하다니, 이제 단순한 무력으론 폴의 수준을 뛰어넘은 거 같았다.
그리고 린과 듀발.
저 콤비는 호흡이 잘 맞는 건지, 아니면 사이가 엉망인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허약아, 잘해라. 너 때문에 주인이 나 외면하잖아. 진짜 죽는 수가 있다.”
“닥쳐, 마녀야. 네년이 그 모양이니까 그렇지. 내가 도련님이었으면 넌 옛날에 쫓겨났어. 닥치고 검이나 휘둘러. 진짜 쫓겨나기 전에.”
“이씨.”
이딴 식으로 서로를 욕하면서 싸우는데, 듀발이 해골의 검을 튕겨내면 바로 린이 뛰어들어 놈의 손목을 끊어버린다. 그리고 2타로 바로 목을 날려버리기까지.
자신이 선물한 대검 린지애MK-2(로빈 명명. 혼자 그렇게 부름)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스텝을 밟는 린의 모습은 정말 우아하기까지 했다.
정말 겨우 3년 사이에 저 정도까지 발전할 수 있다니. 세상은 역시 지나치게 불합리했다.
“하,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살았네. 솔직히 상성이 너무 거지 같았어.”
로빈은 전사들이 하나둘씩 해골을 처리하자 깊게 한숨을 들이쉬며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 태양이 떠오르자 길게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뭐 하나 생각대로 되는 게 없었던 끔찍한 하루였다.
* * *
해골 한 마리를 철저히 부숴 버린 백랑은 웃으며 로빈에게 다가왔다.
“오, 영주님. 다행이야. 우리가 늦지 않았지? 엄청 서둘렀는데.”
“네, 백랑. 딱 좋은 시기에 오셨어요.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하하. 아무래도 이쪽이 너무 급한 거 같아서 말이야.”
모야족 전사들은 오늘 낮부터 대수림에 들어가 놈들의 두개골을 부수고 밤까지 계속 작업했단다.
그리고 밤이 되자 다시 일어나는 놈들을 그 자리에서 요격.
한 마리도 남지 않을 때까지 모조리 처리하고 바로 말을 달려 이곳으로 온 거였다.
하지만 밤까지 대수림에 남아 해골을 처리했다는 말에는 로빈도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적들과 수성전이 아니라 야전을 벌였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허, 그건 너무 위험하잖아요.”
“에이, 별로 남은 것도 없어서 그랬어. 마음도 급하고.”
“아…….”
그래, 솔직히 자신이 좀 보채긴 했다. 어제 상황이 좀 급박했어야지.
하지만 어쨌든 그 덕분에 목숨을 건진 셈이었다.
“하루 종일 싸우고 또 여기서 다시 싸웠으니 엄청 피곤하시겠네요. 우선 쉬세요. 전사들도 쉬게 하시고요. 정리는 제가 할게요.”
“응. 그건 그런데 영주님부터 쉬어야 하는 거 아냐? 3일 동안 잠도 자지 않은 거잖아?”
“아. 뭐, 그렇긴 한데요.”
사실 로빈도 밤에는 전장에 서고 낮에는 상황을 정리하느라 거의 잘 수 없었다. 전장을 다 정리한 후 다시 해가 지기까지 대략 한 시간 정도가 로빈이 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은 직접 싸우지 않기 때문에 전장에 직접 선 병사들이나 기사들에 비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뭐, 이따가 쉴게요. 지금은 또 할 일이 급해서요.”
“끙. 그래, 영주님. 우선 전사들부터 쉬게 할게.”
백랑이 물러가고 모야족 전사들과 밤새 고생한 기사들이 모두 휴식을 위해 전장을 벗어났다.
그리고 다친 기사들은 교단의 사제들이 돌보고 있는데 심하게 다친 기사 셋이 결국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치열했던 전투의 양상을 생각하면 희생이 거의 없는 셈이지만 그래도 누군가의 부고를 전해 들을 때면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래. 이 정도면 진짜 잘 막은 거야. 모야족이 조금만 늦었어도…….”
지금보다 더 많은 기사가 죽거나 다치고, 심지어 자신까지 죽을 뻔했다.
그리고 이곳이 뚫렸으면 그 뒤는 더욱더 끔찍했겠지.
그나마 마음에 위안이 되는 건 이런 점이었다.
로빈은 막사에 앉아 장정들이 옮겨놓은 플레이트 메일과 대검을 살펴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대체 뭐냐고?”
놈들의 뼈와 혼연일체처럼 되어있던 붉은 플레이트 메일은 놈들의 머리가 잘리고 두개골이 부서지자 놈들과 떨어져 본연의 모습을 보였다.
덕분에 형태가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은은하게 고풍스러웠던 붉은 빛깔만은 그대로였다. 이게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빛깔만 봐도 대단히 가치가 있는 물건 같았다.
“하, 모르겠다. 이런 건 그냥 전문가에게 맡겨야지. 할 일도 많은데.”
로빈은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이 물건을 바로 영주 성에 있는 히센에게 배달시켰다. 히센이 뭔가 알게 되면 아마 바로 자신에게 연락할 것이다.
그리고 영주 성에서 반가운 물건을 보내왔다.
그건 바로 뼈 분해제로, 예전에 마수 범람 시 하급 마수의 시체를 분해해 버린 그 처리제의 해골 버전이었다. 첫날 예상보다 언데드의 수가 월등히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실비아와 도리아가 저번처럼 연구해 새로운 분해제를 만들어 보낸 것이다.
로빈도 계속 무식하게 쌓이는 뼈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이었는데 덕분에 고민 하나는 덜게 되었다.
“이거, 팔리겠는데?”
산처럼 쌓여있는 뼈들이 단번에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걸 보고 로빈도 이 물건의 효과를 실감할 수 있었다.
다른 곳이면 몰라도 한 번에 엄청난 수의 언데드가 튀어나온 북부나 동부 정도는 이 물건을 간절히 원하리라. 게다가 이 물건의 근간이 되는 약품의 권위자가 도리아이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비슷한 물건을 즉각 생산해 낼 수 있을 거 같지는 않았다.
“아니지, 괜히 위기를 이용해 물건이나 팔아먹는다는 오해를 사면 곤란하니 차라리 돈 말고 다른 가치 있는 걸 받아내는 게 나으려나? 분명 수천이 넘는 뼈를 처리하는 것도 엄청 곤란하긴 할 거란 말이야.”
이건 아무래도 좀 더 생각해 봐야겠다.
그리고 그렇게 전후 처리와 물자 정비에 한창인 시간.
생각보다 빠르게 연락이 왔다.
아니, 연락이 온 정도가 아니라 히센과 지온이 직접 이곳까지 달려온 것이다.
“로빈, 대체… 이걸 어디서 구한 게냐?”
달려오자마자 다짜고짜 묻는 히센의 얼굴은 경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니, 이 사람이 이게 뭐라고 느닷없이…….
아무래도 자신의 안위보다 저 물건에 더 집착하는 걸 보니 꽤나 대단한 물건인 모양이다.
하지만 이래선 곤란하지. 불알 보급을 확 중단해 버릴까 보다.
“우선 진정하세요. 여기 아직 전장이거든요.”
“흠흠, 미안하다. 내가 너무 놀라서…….”
로빈이 한마디 하자 이제야 상황이 다시 떠올랐는지 히센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아무래도 무안함과 부끄러움 때문인 거 같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