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좋아요. 우선 막고 보자고요. 솔직히 머릿수로 뚫을 수 있는 곳은 아니잖아요? 우리도 전력은 충분하죠. 하지만 무조건 피해를 최소화하는 게 중요해요. 명심하세요.”
폴과 백랑이 병사들을 정비하러 떠나고 회의장에는 지온과 로빈만 남았다.
로빈은 아까 너무 당황한 나머지 묻지 못했던 것들을 지온에게 물어보기 시작하는데. 아무래도 영지 외 다른 곳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가 가장 문제였다.
“중부 쪽은 대충 마무리되는 분위기라더군요. 제법 사상자를 내긴 했지만, 놈들이 낮에는 못 움직인다는 게 알려져서 낮에 대규모 수색을 벌여 놈들을 일소했다고 합니다.”
“괜찮은 방법이네요. 그쪽은 수도 그리 많지 않았을 테니.”
“문제는 동부와 남부인데…….”
동부 쪽 관문으로 몰려온 언데드의 수가 대략 15~20만 정도라고 한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수였는데 대부분 화장을 선택하는 제국민과 달리 동쪽 유목민들은 전통적으로 풍장이나 매장을 선택하기 때문에 들판에 숨겨진 시체들이 많아 규모가 늘어난 거였다.
“만약 그쪽도 마수 산맥처럼 터가 안 좋았으면 진짜 100만은 우스웠겠는데요.”
“천 년이라고 생각하면 적어도 천만은 넘지 않겠습니까?”
“하, 그건 진짜 끔찍하네요.”
어쨌든 그 많은 수를 상대하면서도 레오니스 공작령의 동쪽 관문은 굳건히 버티고 있단다.
“그래, 원작에서도 황태자 말을 못 믿는 바람에 얻어터진 거였지? 그건 그렇지만 뭔가 좀 이상하게 돌아가긴 하네.”
“네?”
“아, 아뇨. 그럼 남쪽은요? 지금쯤이면 황태자가 동쪽으로…….”
“네? 아니요. 황태자 전하는 아직도 남쪽에 계십니다. 아무래도 남쪽이 좀.”
“아직도요? 허.”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는 남부.
남부의 양상은 북부나 동부와는 조금 달랐다. 한곳을 향해 대규모 무리가 모여드는 두 곳과는 달리 수백에서 수천 단위의 언데드들이 평야 곳곳에서 마을을 습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곳처럼 한곳으로만 계속 모여들면 오히려 방어하기가 쉬울 텐데 산발적으로 움직이다 보니 규모보다 방어하기가 더 까다로운 것이다.
그리고 황도 다음으로 인구 밀도가 높은 곳이기 때문에 지켜야 할 곳도 너무 많았다.
만약 남부의 병사들이 자체적으로 적들을 방어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솔직히 그곳의 병사들은 실전과 너무 거리가 멀었다. 제국에서 가장 평안한 곳이라 영주들도 군사력에는 거의 신경을 쓰고 있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전통적으로 남부 전체가 모두 같은 파벌이라 영지전조차 일어나지 않으니 그들의 나태함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아마 남부에서 제대로 된 군사력을 갖춘 곳은 남쪽 끝 해안가에 위치한 몇 개의 영지뿐일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곳에서는 영주들이 자체적으로 병력을 꾸려 언데드를 다 토벌한 후였다.
남부 평야의 중요성과 취약한 방어 상황을 생각하면 황태자가 저곳의 방비에 집중하고 있는 것도 납득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런데 큰 무리는 모두 토벌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작은 무리 몇 개……. 물론 수천 정도를 작은 무리라고 하는 건 좀 그렇지만 어쨌든 그놈들은 남부 쪽에 맡겨놓는 게 오히려 좋은 그림일 텐데요. 정예병을 필요로 하는 곳은 사실 동부나 북부니까요.”
문제는 이거였다.
표면상으로는 남부의 방어를 위해 남쪽에 자리 잡고 있지만, 대규모 무리를 토벌한 이상 굳이 그곳에 남아있을 이유는 없었다.
당연히 남은 잔챙이(?)들은 남부 쪽에 맡겨놓고 수만 단위의 습격이 이어지는 동부나 북부 쪽으로 발길을 돌려야 정상인 것이다.
황태자의 성정을 생각해도 그게 너무 당연한 건데.
“확실히 그건 그렇습니다. 마치…….”
“일부러 남부 쪽에서 뭉그적거리는 거 같네요. 이쪽에서 만 단위가 넘는 습격이 이어지고 있다고 연락했죠?”
“네, 첫날 이미 상황을 전달했습니다.”
“흠…….”
이 양반이 대체 뭘 믿고 저러고 있을까?
물론 황태자가 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더라도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할 수 있는 건 아니라 남부의 일을 처리하자마자 달려와도 북부나 동부 모두를 완벽하게 지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쪽으로 가도 주인공답게 막바지에 도착해 가장 달콤한 과실 정도는 따 먹을 수 있을 텐데 지금 저렇게 늦장을 피우고 있다.
원작에서도 황태자가 남부의 큰 무리를 물리치고 바로 동부로 출동한다. 그리고 동부의 큰 무리까지 제거하며 그 용명을 떨치기 시작했는데.
물론 죽어야 할 리아넨 공작이 버젓이 살아있고 황태자가 신탁을 들먹이며 대대적으로 언론 플레이를 한 거로 이미 원작은 어느 정도 날아간 거 같긴 했다.
하지만 동부 쪽이 안전하다면 바로 북부로 달려와야 할 사람이 저러고 있으면 어쩐단 말인가?
우리 형, 설마 북부 버린 거야? 내가 분명 구슬도 잔뜩 던져줬는데 이러기임?
“지온, 지금 황태자의 행동을 정치적인 시각에서 한번 분석해 보세요. 제가 그런 거에는 너무 약해서 잘 이해가 안 가거든요.”
“정치적으로요?”
잠시 생각하던 지온은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부분을 몇 군데 지적하기 시작했다.
“가장 단순한 건 남부에 근거지를 둔 3황자파 귀족들에게 공을 양보하지 않겠다는 거겠군요.”
“음, 공이라.”
황태자가 큰 무리를 해치우고 뒤를 맡기게 되면 남은 작은 무리는 남부의 귀족들이 처리해야 한다. 그러면 비록 자신들의 근거지를 정리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것도 분명 공은 공.
하지만 지금처럼 저렇게 황태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정리하게 되면 남쪽의 공은 오로지 황태자의 것이 된다.
지온이 지적한 부분은 바로 이거였다.
하지만 이번 재앙이 만만치 않다는 걸 가장 잘 알고 있을 황태자가 과연 그럴까?
공에 눈이 먼 스타일도 아니고 제국을 가장 아끼는 사람이 황태자인데 단순히 공을 독점하기 위해서 저러는 거 같지는 않았다.
“허, 그러고 보니 진짜 웃기네. 이게 이렇게 되나?”
소설에서 황태자는 급한 나머지 뒷일을 귀족들에게 부탁하고 동부로 달려간다. 하지만 그 귀족들이 욕심을 부려 무리하게 토벌을 강행하는 바람에 병사들만 잃고 적의 수만 늘려주고 말았다.
남부 쪽이 큰 피해를 보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흐르더니 황태자가 남부에 자리를 잡고 모든 언데드를 토벌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남부는 원작보다 더 피해가 적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황태자가 이런 것까지 알 리가 없었다.
결국 황태자가 남쪽에 남은 건 남부를 완벽하게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럼 지금 이 상황에서 북부나 동부 쪽에 지원을 보내지 않은 건 무슨 뜻일까요?”
“그거야 둘 중 하나 아니겠습니까? 이쪽을 완벽하게 믿든지, 아니면 버렸든지. 다른 의미를 생각하는 건 아무래도 쉽지 않군요.”
“흠, 역시 그런가요?”
믿음과 방관이라. 역시 지온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가.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럼 북부는 과연 둘 중 어느 쪽에 해당하는 걸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황태자가 원작보다 레오니스 공작을 잘 구워삶은 거 같았다. 아니면 그분이 의외로 종교에 심취한 분이라 신탁의 존재를 완전히 믿었다거나.
원래 황태자의 말을 반신반의하다가 선빵을 얻어맞아 빌빌대고, 심지어 황태자의 구원을 받아 겨우 영지를 지켜야 하는데 아직까지 굳건히 관문을 지키고 있다니 말이다.
물론 레오니스 공작이 무능한 인물이라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솔직히 누구라도 미리 알고 방비하지 않으면 한꺼번에 10만이나 몰아치는 선빵을 완벽하게 방어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미리 알고만 있으면 충분히 할 만하다는 의미였다.
레오니스 공작령의 인구수만 해도 이곳의 열 배는 되고 기사급 전력만 500명이 넘는다. 그러니 관문만 지켜내면 아무리 많은 수라도 방어하는 게 불가능은 아닌 것이다.
물론 그쪽의 방벽이 여기보다 더 넓고 위치상 방어하기도 조금 까다롭지만, 상대 역시 단순하게 돌진하기만 하는 언데드였으니 제법 할 만했을 거다.
“동부를 믿는 건 이해할 수 있죠. 둘은 사제 관계고, 서로 모종의 합의가 있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북부는 전혀 아니잖아요? 이곳의 중요성을 모를 정도로 무모한 분은 아니니 버린 거 같진 않은데, 신뢰의 근거는 없고. 영문을 모르겠네요.”
“이곳의 방비를 믿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우리 영지는 아니지만 살림이 어려웠던 자이트 자작령이나 다른 5대 방벽은 상당한 군비를 지원받았다고 하더군요.”
그건 그래도 예상대로인가?
이 형님이 좀 쪼잔하시네. 줄 거면 다 같이 줘야지. 우리만 쏙 빼놓은 건 또 무슨 경우야?
이 양반, 이거이거.
“그리고 저번에 온 그 기사가 북부의 방벽을 살펴보고 가더군요. 아무래도 방비가 어떤지 확인하고 간 모양입니다.”
“아, 그러네요.”
사실 로빈은 책으로 본 게 있다 보니 황태자의 주목적이 구슬이라고 단정 짓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황태자가 사람을 보내놓고 딱 구슬만 가져갔을 거 같지는 않았다.
만약 지온의 말이 맞다면 황태자가 이미 이곳의 방비를 확인했고, 북부 자력으로 이번 난리를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황태자의 저 여유 만만한 태도도 조금은 이해가 되는데.
“그리고 굳이 황태자 전하의 힘을 빌릴 이유가 있겠습니까? 황태자 전하의 손을 타면 아무래도 공훈이…….”
그래, 공훈. 저 공훈도 문제다.
로빈이 늦게라도 황태자가 이곳에 오기를 내심 바라는 이유.
그건 바로 공훈과 보험 때문이었다.
잘 생각해 보면 이런 큰일이 벌어졌을 때 꼭 막판에 무슨 문제가 생기곤 한다. 그런데 만약 그때 해결사인 주인공이 떡하니 버티고 있으면 얼마나 든든한가?
분명 그 어떤 보험보다 가장 확실한 보험이 아마 주인공이라는 놈일 것이다.
물론 가끔 쓸데없이 사건을 크게 만들거나 불필요한 사건을 불러오기도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럴 일도 없지 않은가.
그리고 이 공훈이라는 놈도 문제는 문제였다.
몇몇 귀족은 못 가져 안달인 게 바로 이 공훈이지만 로빈에게 이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공훈이 쌓였을 때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보상은 승작하는 정도일 텐데 승작하면 그야말로 의무만 늘어나게 된다. 심지어 백작부터는 무려 고위 귀족이라 때에 따라서는 귀족 회의에 들어가야 할 수도 있으니 그야말로 로빈이 경기를 일으킬 일이었다.
게다가 승작할 정도의 공훈이 쌓일 때까지 공을 세우는 걸 다른 귀족들이 보고만 있을 리도 없었다. 분명 별 희한한 견제들이 쏟아져 들어올 게 뻔했다.
정말 생각할수록 끔찍한 일이었다.
그래서 로빈은 이번 난리가 무사히 마무리되면 공훈을 최소화하거나 아예 보고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만약 황태자가 이곳에 오게 되면 어차피 그냥 날릴 아까운 공훈을 그에게 밀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쌓인 공훈으로 황태자의 입지가 더 밝아진다면?
그건 그거대로 충분히 이득이었다. 이런 게 진짜 제대로 된 뇌물 아니겠는가?
처음에는 소설의 내용 때문에 황태자가 이곳으로 온다는 건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변해 동부 쪽이 선전하면서 그곳을 들를 필요가 없어지자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돌아가는 꼴을 보니 황태자가 이쪽으로 오는 건 아무래도 글러버린 거 같았다. 예상치도 못한 남부 쪽에 아예 궁둥이를 붙이고 들어앉았다니 말이다.
“하, 왜 공을 주겠다는데 먹지를 못하니?”
“예?”
“아, 아니에요. 어쨌든 지금 남쪽은 그렇다는 거죠? 우리는 무조건 자력으로 막아내야 하는 거네요.”
“예. 하지만 저희 전력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병력이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다 이곳에 모여있으니 이 정도면…….”
“관문을 등지고 언데드 10만 정도는 막을 수 있다는 거죠? 그건 확실히 그렇네요.”
모야족 전사들까지 모두 모인 이상 확실히 가장 힘든 고비는 넘겼다고 보면 된다.
수가 너무 많다는 거에 위축되어 우리 쪽 전력을 정확하게 점검하지 못한 것이다. 까놓고 말하면 상대의 숫자에 쫄았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백랑이나 지온의 말을 들어보니 굳이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 동부도 막았다는데 우리가 못 할 이유가 없지.
“좋아요. 이제 가봐야겠군요. 시간이 다 된 거 같으니까요. 황태자 전하는… 뭐, 알아서 하시겠죠. 솔직히 딱 뭐라고 감이 잡히진 않네요.”
오지도 못하는 황태자의 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해가 져버렸다.
이제 다시 전장에 설 시간이 된 것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