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관문에는 병사 150여 명과 기사와 전사가 뒤섞인 기사급 병력 70이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밤이 깊어져도 상대는 나타날 기미가 없었다. 아무래도 뭔가 계산이 어긋난 모양이다.
“이거… 아무래도 그 빠른 놈이 혼자서 막 달려왔나 본데?”
“역시 그건가요?”
로빈도 전혀 생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해골의 행군 속도와 미친 듯이 빠른 놈의 돌진 속도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만약 인간이라면 체력적인 문제로 행군 거리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을 수도 있지만, 체력의 한계가 없는 언데드이다 보니 생각보다 큰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로빈이 방비를 늦추지 않은 건 혹시 상당 거리를 같이 행군하다가 이곳 근처에서 속도를 올렸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혹시 그렇다면 어제 그놈들이 선발대고 오늘 바로 후발대인 본대가 들이닥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상황을 보니 당장 적이 들이닥치진 않을 모양이었다.
“기본적인 경계 병력만 남기고 오늘은 좀 쉬죠. 다 쉴 순 없고, 1조의 반 정도 남기면 되겠죠?”
“영주님, 차라리 전사 놈을 하나 보내서 산맥을 뒤져보라고 할까?”
“예? 아뇨,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괜히 밤중에 마수라도 만나면 더 피곤해질 수도 있어요. 오늘은 적당히 수비 병력을 남겨놓고 쉬는 거로 하죠. 그리고 날이 밝으면 그때나 한번 생각해 보자고요.”
아무리 그래도 밤중에 마수 산맥으로 들어가는 건 너무 극단적인 자살 행위였다. 낮이라면 그나마 마수들을 피해가며 언데드의 위치를 확인해 볼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로빈이 해산 명령을 내렸고 병사들은 예상치 못한 휴식에 즐거워하며 막사로 돌아갔다. 밤낮이 바뀐 상황이긴 하지만 그래도 피곤이 잔뜩 쌓여있을 테니 꿀맛 같은 휴식일 것이다.
그날 밤은 아무런 일 없이 그렇게 지나갔고 다시 날이 밝아왔다.
아침을 먹자마자 바로 회의가 있었고 서로 논의해 본 결과 백랑과 폴을 포함한 특공대 20인이 마수 산맥에 잠입해 들어가 언데드의 위치를 파악하기로 했다.
로빈은 이 수색을 말려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출동하는 인원들이 워낙 출중한 사람들이라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사실 저 정도면 상급 마수를 만났을 때 잡지는 못해도 적당히 도망치기에는 전혀 무리가 없는 전력이었다.
그리고 놀라운 건 린이 그 특공대의 한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한 것이다. 심지어 아버지 백랑의 백이나 그런 게 아니라 실력으로 차지한 거란다.
“주인, 기다려. 내가 상급 마수 한 마리 잡아다줄게.”
물론 자신들의 목적을 망각하고 엉뚱한 야망을 불태우는 건 역시 린나니답지만 말이다.
로빈은 이 와중에 상급 마수를 잡아오겠다는 엉뚱한 린의 포부에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내가 미쳤지. 저게 그날 밤에는 그렇게 예뻐 보였다니. 무슨 밤의 마법인가?
로빈은 자신이 그날 잠깐 귀신에 씌었던지 흔들다리 효과가 너무 강했을 거라고 애써 위안하고 있었다. 분명 거죽은 엄청 예쁜 게 맞으나 내용물이 린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린의 발전은 그야말로 놀라울 정도였다.
이름: 린
성향: 호전적. 도전적. 호색
타이틀: 흉포한 검은 야수(S). 마나의 사랑을 받는 자(L). 대검의 달인(R)
흑표범에 관련된 모든 타이틀이 저 검은 야수로 통합되고 대검에 관련된 타이틀까지 하나 얻었다. 확실히 저 정도면 다른 전사들을 제치고 특공대에 이름을 올릴 만하리라.
저게 진짜 일취월장이라는 걸까?
아무리 어렸을 때 마나를 깨우치고 성인이 되기 전에 훈련하는 게 잠재 능력을 폭발시키는 법이라지만 저 정도까지 발전하다니.
전생의 한국 축구 유망주들이 저 린의 반만큼만 포텐을 터트렸어도 우리나라가 월드컵을 정복하고 있었을 거다.
다만 걸리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니었다.
린의 대단한 성취는 정말 흡족했지만, 성향 창에 이상한 녀석이 추가되어 버렸다.
호색? 원래 순정 아니었나? 어떻게 하면 순정이 호색으로 넘어가?
지금까지 살면서 호색 성향을 몇 명 봐오긴 했지만 린의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딱 하나뿐이었다.
바로 린의 아버지 백랑.
아무래도 백랑이 무슨 짓을 저지른 모양이다. 이래서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가 보다. 물론 제 딸을 지가 가르치겠다는 거면 뭐라고 할 말은 없지만…….
이거 설마 엉뚱하게 피해는 내가 보는 건 아니겠지?
그리고 듀발 역시 특공대에 끼어있었다.
저 녀석까지 실력이 늘었다고? 물론 그날 보니 방패 쓰는 건 확실히 제법이긴 했다만.
이름: 듀발
성향: 충직. 보은. 독기. 린 혐오
타이틀: 노력도 재능(U). 방패술의 대가(SR). 철벽같은 의지(U)
듀발을 확인해 봤는데 방패술은 제법 발전한 거 같지만 다른 건 크게 변하지 않았다.
더러운 세상. 역시 노력만으로는 재능을 이겨낼 수 없단 건가?
하지만 따지고 보면 진짜 개털이던 듀발이 저 정도까지 발전한 건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저 린 혐오는 뭐야? 성향에 저런 것도 붙을 수 있는 건가?
하, 린나니 진짜. 대체 듀발을 얼마나 괴롭힌 거냐? 설마 대련을 핑계로 맨날 듀발의 방패를 두들겨댄 건가?
하지만 린이라면 왠지 당연히 그랬을 거 같았다.
“허약이는 허약하지만 도망칠 때 버리기는 딱 좋아. 엄청 오래 잘 버티거든. 허약이를 버리고 우리는 본진으로 도망 와 지원군을 데리고 가는 거지.”
“…처음부터 대놓고 버릴 생각이냐?”
린의 한마디만 들어봐도 평소에 듀발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충분히 알 만했다. 대체 왜 저런 성향이 생겼는지도 알 거 같았고.
아무래도 남쪽 마을에서 생활하면서 린나니의 빌런력이 한층 업그레이드된 모양이다.
설마 진짜 대수림에서 듀발을 버리고 도망친 경험이 있는 건 아니겠지? 제발 인간적으로 그건 아니라고 해줘라.
“무조건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알죠?”
“응. 걱정 마, 영주님. 한 명도 안 다칠 테니까.”
“백랑, 마수 산맥에서는 폴 경의 말을 귀담아들으세요. 여긴 대수림이 아니에요.”
“안심하십시오, 영주님. 제가 알아서 잘 데려오겠습니다.”
“그래요, 폴 경. 믿을게요.”
솔직히 제멋대로인 백랑이지만 폴의 말은 그래도 귀담아듣는 편이다. 그러니 저렇게 폴까지 따라가면 아마 돌발 사고가 발생하진 않을 것이다.
로빈은 마수 산맥으로 들어가는 특공대의 안전을 기원하며 잠시 기도를 올린 후 다시 막사로 돌아갔다. 여신님에게도 양심이란 게 있다면 저들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 * *
정찰대는 저녁이 거의 다 되어서야 관문으로 복귀했다. 아무래도 제법 먼 거리까지 살펴보고 온 모양이다.
그리고 그들의 복귀 시간이 이만큼 늦어졌다는 건 최소한 근처에는 언데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영주님, 최소한 오늘 내일은 쉬어도 되겠던데? 근처에는 전혀 없더라고.”
“그래요? 그놈들은 대체 어디에서 그렇게 뛰어온 건지 모르겠네요.”
“그러게.”
“기록을 찾아보니 히라세이 왕국이 마수 산맥 제법 깊숙한 곳에 전진 기지까지 만들었다는 구절이 있더군요. 학자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만 그 기록이 허구가 아니라면…….”
“생각보다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겠네요. 사실 제국의 토벌군이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초입 부분에서 빌빌댄 거였으니…….”
초반에 몰려나온 언데드는 제국 시절 마수를 토벌하기 위해 들어간 토벌군이나 용병으로 추측되고 있었다.
그들이 언데드가 되자마자 그날 바로 이곳을 습격할 수 있었던 건 분명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사망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정도 깊이 들어가서 마수를 토벌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들은 적당히 사냥하고 알아서 살아 나왔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상대한 느린 언데드는 그야말로 어중이들이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깊이 들어가서 전진 기지까지 세운 병력이라면 언데드로 변했다고 해도 그렇게 만만하지만은 않겠네요. 각오를 단단히 해야겠어요.”
언데드의 능력이 살아생전의 무위에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확실히 생각해 볼 문제였다.
만약 적의 수준이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면 병사들 위주로 머릿수를 채워 놓은 게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실제로 싸워 봐야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첫날은 기사들이 더 수고를 해줘야겠네요. 상대가 저렇게 깊은 곳에서 기어 나오고 있다니.”
“네, 영주님. 새로 로테이션을 짜보겠습니다.”
“그래요, 폴 경. 부탁드릴게요.”
우선 로테이션을 새로 짜고 적을 발견할 때까지 특공대는 계속 마수 산맥을 정찰하기로 했다. 오늘 수색해 본 결과 그리 어려울 게 없었다니 계속 맡겨도 될 거 같았다. 백랑뿐만 아니라 폴도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문제가 없는 게 확실한 모양이다.
그렇게 며칠간 뜻하지 않는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휴식으로 인해 병사들과 기사들의 상태는 그야말로 만전. 심지어 사제들까지 신성력을 모두 회복한 상황이었다.
비록 폭풍 전의 고요 같은 상태였지만 최상의 컨디션으로 적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기뻐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로빈은 묘하게 흘러가는 이 상황이 그리 달갑진 않았다. 적의 행군이 길어진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강군이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은 다른 의미로 아주 이상한 보고까지 올라왔는데.
“그러니까 없다고요? 마수가 아예 없어요?”
“네. 지금 마수 산맥 초입 부분에는 마수가 아예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저희가 발견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처음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게 아닌 거 같더라고. 우리가 아무리 운이 좋아도 3일 내내 마수를 만나지 않은 건 말이 안 되잖아?”
물론 마수를 못 만났다고 해도 그들이 아예 사라진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그건 그야말로 망상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예상할 수 있는 건 아마 그들이 이번 난리를 본능적으로 느끼고 깊숙한 곳으로 다 도망갔다는 거였다.
하지만 만약 그것도 아니라면…….
“설마, 저 마수들에게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명령권자, 혹은 지배자라도? 에이, 내 망상이겠지? 하지만…….”
하급 마수와 중급 마수.
이놈들은 충분히 본능적으로 도망갈 수 있었다. 하지만 특공대의 수색 범위를 생각하면 그 안에 상급 마수 몇 마리는 충분히 있을 만한 거리였다.
과연 상급 마수가 해골 따위를 두려워해 자신의 구역을 떠날까?
상급 마수 정도 되면 그야말로 해골과 극상성이었다. 해골의 빈약한 공격력은 마수의 두꺼운 가죽 아래 완전 무용지물인데다 거대한 덩치로 해골들을 깔고 지나가면 그들은 먼지만 남을 게 뻔했으니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예전에 그 가메라 한 마리면 해골들 수만은 그냥 찜 쪄 먹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런 상급 마수가 미리 자리를 피했다? 자신의 영역에 집착이 강한 상급 마수의 성향을 생각하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 뭔가 좀 복잡해진 기분인데요.”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어 머리가 아프긴 했지만, 이 일이 당장 자신들에게 손해로 다가오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익이 된다면 몰라도. 주변에 마수들이 아예 없다는 건 낮에 더 넓은 곳까지 나가 해골을 처리할 수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좋은 정보를 얻게 되긴 했네요. 아직 적은 발견 못 하셨고요?”
“응, 영주님. 그래서 말인데 내일은 좀 더 멀리 나가볼 생각이야. 최소한 1박 2일 정도로. 마수들도 없으니까 위험할 일도 없잖아? 역시 적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아보는 게 낫지 않겠어?”
“확실히 나쁜 생각은 아니네요.”
마수까지 없다면 좀 더 멀리 나가서 적의 동태를 확인하는 것도 불가능은 아닐 것이다. 마수가 없는 마수 산맥은 저들에겐 그저 캠핑장과 다를 바 없을 테니 말이다.
결국 로빈도 대승적 차원에서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하, 이건 또 뭐야? 왜 언데드가 날뛴 후에 마수까지 설치나 했더니 이거였어?”
혼자 남은 로빈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대충 상황을 알 만했다.
저렇게 한 번 영역이 뒤섞였으니 당연히 고위 마수 간의 투쟁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하급 마수들이나 중급 마수들은 상급 마수, 혹은 그 이상에게 쫓겨 밖으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물론 소설에도 마수들이 난동을 피운다는 언급이 있었기에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게 직접 현실로 다가오니 참 거지 같았다.
“그래, 알긴 알았는데. 직접 확인하니 더 엿 같네. 가을에는 언데드가 설치고 겨울에는 또 마수랑 드잡이질해야 한다는 거잖아?”
물론 그때는 자신까지 출동할 필요가 없겠지만 짜증 나는 건 짜증 나는 거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