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 * *
특공대가 다시 정찰을 나선 지 2일째.
드디어 놈들의 위치를 알아냈다. 관문과는 제법 떨어진 거리에서 놈들을 발견한 것이다.
백랑은 놈들이 오늘 밤까지 진군하면 대략 근처까지 이르게 되고 내일 밤에는 관문과 조우하게 될 거라고 예상했다.
드디어 내일 격전이 재개될 모양이다.
그리고 백랑은 맨손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게 다…….”
“이 붉은 갑주는 영주님도 알지? 그때 그놈이 입고 있던 거랑 비슷하니까. 그리고 이건 병사들이 입고 있는 거 같은데 생각보다 견고해 보이더라고. 이 무기도 그렇고. 혹시나 해서 가져와봤어.”
요전에 관문을 공격했던 그 빠른 놈의 것과 거의 비슷한 플레이트 메일, 좀 더 허름하지만 그런대로 형체를 갖춘 브레스트 아머와 투구, 그리고 마찬가지로 제법 낡았지만 날이 살아있는 장검과 창을 챙겨 들고 온 것이다.
아무래도 날이 밝아와 무방비로 있던 놈들의 것을 들고 온 거 같았다.
“이런 무장을 갖추고 있다고요?”
“다는 아닌데 생각보다 많았어. 우리도 심상치 않아서 들고 온 거야.”
“하…….”
기껏해야 수백 년 전에 죽은 자들의 것도 거의 다 삭아버려 거의 맨손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어떻게 천 년도 넘은 놈들이 이렇게 제대로 된 무장을 갖추고 있단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던 로빈은 폴에게 지시해 이 무기나 방어구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제법 놀라웠다. 천 년 이상이나 지난 것임에도 웬만한 강철보다 더 단단했기 때문이다. 특히 저 방어구에 투구까지 포함되어 있는 건 생각보다 심각한 일이었다.
“일반적인 철이면 이미 삭고도 남을 시간이에요. 그런데 저렇게까지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데다가 강도까지 대단한 걸 보면 뭔가 특별한 무구인가 보네요.”
“영주님, 혹시 전에 본 그 붉은 놈이 입은 갑옷처럼 그 뭐냐? 미스릴? 그걸로 만든 게 아닐까? 통짜는 아니더라도 합금이란 게 있잖아? 뭔가 딱 느낌이 그렇던데.”
“아, 미스릴이요. 흠……. 확실히.”
감이 좋은 백랑이 뭔가 느낀 게 있는지 제법 그럴듯한 의견을 냈다.
확실히 철과는 좀 다른데 그보다 더 뛰어난 금속이면 미스릴일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전혀 다른 새로운 금속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것의 정체보다 더 중요한 건 역시 대책이었다.
“아무래도 방어 체계를 다시 점검해야겠는데요? 지금까지처럼 일방적인 공격으로 놈들을 처리하지는 못하겠어요.”
“그럼 차라리 선두에 방패병을 섞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좀 힘들긴 해도 공격조를 기사들로만 채우고 병사들은 방패로 놈들의 공격을 방어하는 겁니다.”
“그럴듯하네요. 다만 그랬다가는 기사들의 체력이 못 버틸 텐데요. 아,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요. 짧고 굵게 가는 거예요. 폴 경, 기사들을 2개 조로 돌려도 며칠 정도는 버틸 수 있겠죠?”
“물론입니다, 영주님.”
“당연하지, 영주님. 우리도 그렇게 물렁한 놈들은 아니야.”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둘의 모습을 보니 조금 기운이 났다.
상대의 숫자와 규모를 생각했을 때 우리도 총력전에 임해야 하는 것이다. 웬만하면 영지민들까지 동원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상대가 생각보다 강적이니 쓸 수 있는 건 다 써야겠다.
“아 참, 그리고 저 붉은 갑주요. 저건 많던가요?”
“응? 아아, 저건 거의 안 보이더라고. 우리가 발견한 건 놈들의 선발대 같은 건데 거기엔 저거 하나뿐이었어.”
“그런가요? 역시 저건 지휘관용인가?”
“그런 거 같습니다, 영주님. 갑주의 모양도 그렇고 실전용은 아닌 거 같군요. 뭔가 좀 더 화려하고 거추장스러운 것이.”
“네. 실용성이 좀 떨어져 보이죠? 전에 그놈들이 입고 있는 건 딱 실전용인데 저건 의전용 같은 느낌이고요.”
“아무래도 그 빠른 놈들은 그게 전부였던 모양입니다.”
“만약 있었어도 다른 곳으로 갔겠죠. 여기에 꿀 발라놓은 것도 아닌데.”
물론 꿀이 아니라 성물을 발라놓긴 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언데드가 이쪽으로만 오는 건 아니었다. 일부는 다른 곳으로 새기도 했으니 말이다.
“아, 이건 미리 보고해야겠네요. 혹시 일부가 다른 곳으로 샜는데 전혀 모르고 있다가 당할 수도 있잖아요? 대충 보아하니 10~20%는 다른 쪽으로 가는 거 같은데 그것만 해도 엄청 많으니까요.”
“네, 영주님. 바로 황실에 보고부터 하겠습니다.”
“그래요, 지온. 그건 맡길게요. 그리고 바로 제 명령을 각 마을에 전달하세요. 총동원령이에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백랑이 빨리 정찰을 다녀와 하루의 시간을 더 번 것이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 각 마을의 주민들을 불러 모을 시간을 벌었으니 말이다.
그날 병사들과 기사들은 다시 방어진을 짜고 손발을 맞춰 보고 있었다.
병사들이 선두에서 방패로 막고 순간 뒤에서 기사들이 망치로 공격하는 단순한 포메이션.
하지만 이것도 미리 호흡을 맞추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이번 방어전은 좁은 지역에 생각보다 많은 병사와 언데드가 밀집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물론 하루 만에 완벽해질 수는 없었다. 그러니 대충 익숙해진 후 실전을 통해 통달하는 것이 그나마 최선일 것이다.
상대를 파악해 본 결과 특공대의 필요성은 다소 줄어들었다. 하지만 세상에 장담할 수 있는 일은 드문 법이라 특공대를 아예 해산할 순 없었다.
다만 수는 제법 줄였는데 정말 정예라고 할 수 있는 인원으로 열 명만 남겨놓은 것이다. 이 인원은 정말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 일을 수습할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도 린이 끼어있었다.
“안심해, 주인. 내가 다 없애주겠어!”
역시 오늘도 활발하고 건강한 린나니 되시겠다.
이 녀석도 언젠가는 철이 들긴 할까?
방패를 쓰는 듀발은 선두의 방패병들과 함께하기로 했다. 혹시 방패병들이 막지 못할 거 같은 거물이 올라오면 바로 상대하겠다는데 솔직히 난전에서 그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가장 격전지라고 할 수 있는 중앙에 자리 잡았으니 꽤나 힘든 밤을 보내긴 할 것이다. 물론 방패를 쓰는 그 누구보다 가장 강한 사람이 듀발이기 때문에 그가 가장 위험한 곳에 서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녀석. 다치지나 않았으면 좋겠는데.
기사들의 피로가 가중될 거란 소식을 전해 들은 줄리에타 대사제는 피로를 풀어주는 건 자신들의 전문이라며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치료나 신성 버프를 주는 건 자신들의 전문은 아니었다나?
하긴 첫날 봉사를 받고 사기충천했던 기사들을 생각하면 이해 못 할 자신감도 아니었다.
전투가 며칠 계속되면 서로 눈이라도 맞는 거 아니야?
뭐, 나쁘지 않은 일이긴 하지. 어차피 결혼을 장려하는 교단이기도 하니까.
만약 진짜 눈이 맞는다면 영지 차원에서 기부금을 내줄 의향도 있었다.
이젠 그런 거로 벌벌 떨 로빈이 아니란 말씀.
* * *
그렇게 차근차근 준비하는 사이 하루가 지나고 드디어 격전의 밤이 다가왔다. 처음 난리가 벌어진 후 대략 열흘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오네요.”
“오는군요.”
드디어 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해골인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절반 정도가 제법 방어구를 갖추고 있었다. 심지어 숫자조차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물론 지금까지도 숫자가 많은 건 마찬가지였으니 저들이 더 많게 느껴지는 건 순전히 기분 탓일 수도 있었다.
“하, 진짜 중공군도 저거보다 많진 않았겠다. 게다가 저 움직임은…….”
로빈이 한탄하는 사이에도 놈들은 꾸역꾸역 다가오고 있었다.
놈들의 움직임은 지금까지 상대한 놈들보다 더 부드럽고 역동적이었다. 아무래도 전에 만난 놈들보다 더 뛰어난 놈들인 건 분명한가 보다.
하지만 아무리 생전의 무위에 따라 수준이 달라진다고 해도 죽은 시기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다고 했는데 저게 말이 되나 싶었다.
“고대의 병사들, 그러니까 저 시기에는 마법이 별로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구의 도움보다는 스스로를 연마하는 데 더 집중했다는군요. 무구의 도움 없이 마수를 상대하던 병사들이니 이 시대의 병사들보다 더 뛰어났을 겁니다.”
로빈이 기가 막혀 한탄하자 지온이 슬쩍 덧붙였다.
역시 아는 것도 많은 지온.
일순 이해가 가는 해설이지만 어이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미스릴에 집착해서 마수 산맥에 들어간 것만으로도 이미 에러 아냐? 좋은 무구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면 그런 바보짓을 했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일개 왕국에 서른이 넘는 마스터가 존재했다는 것만 봐도 확실히 단련에 집중하긴 한 거 같았다.
“저거 은근히 골격도 좀 큰 거 같은데요. 제가 잘못 본 건 아니죠?”
“그렇군요. 처음에 온 놈들보다 좀 큰 거 같습니다.”
큰 차이가 있는 건 아니지만 자세히 보면 인식할 수 있을 만큼은 더 컸다.
대략 5~6센티미터 정도는 더 크다고 할까? 게다가 어깨도 좀 넓은 것이 그 당시 병사들은 지금 시절보다 덩치도 더 좋았던 모양이다. 하긴 무려 천 년도 더 전의 시절이니 어느 정도 차이가 있어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선두에서 적을 기다리던 방패병들도 적의 모습에 조금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바로 시작된 공격.
중앙에 있는 듀발은 기어오르는 해골의 머리를 방패로 날려버렸다. 딱 봐도 마나까지 쓴 거 같은데 아무래도 사기를 생각해서 저러는 거 같았다.
“별거 아니야! 다 방패 들고 집중해!”
“어차피 해골은 해골이지!”
“푸가와 비교하면 이건 그냥 뼈다귀라고!”
“그래! 우린 중급 마수와도 맞짱 뜨는 치안대란 말이야!”
듀발의 외침을 시작으로 곳곳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아마 자신에게 최면을 걸듯 악을 쓰며 긴장을 푸는 모양이다.
그런데 방패병이 푸가랑도 맞짱 뜨나? 중급 마수는 기사들이 맡는 거로 알고 있는데.
어쨌든 방패병의 사기가 올라가서 그런지 생각보다 적을 수월하게 막아내고 있었다.
“윽!”
“조심해!”
하지만 예전보다 좀 더 빠르다는 건 그만큼 빠르게 관문을 기어 올라온다는 의미도 되었다.
그건 상대의 수가 더 빠르게 늘어난다는 의미이며, 같은 시간 동안 더 많은 적을 상대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셋째 날에는 별 의미가 없었던 밧줄이 더 큰 효과를 발휘했다. 떨어지는 병사들이 그만큼 늘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사들이랑 조를 짜서 투입되어서인지 떨어지는 병사들을 기사 선에서 구조하는 경우도 제법 있었다.
“이거, 좋지 않네요.”
그러나 적을 상대하는 시간이 늘어난 것도 사실이었다. 예전에는 한 방에 바로 날려버렸을 놈들이랑 적어도 몇 합은 겨루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결국 성벽 위로 올라오는 숫자 역시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백랑, 우선 출동해야 할 거 같아요. 성벽 위로 올라 온 놈들만 우선적으로 처리해 주세요. 잘못하면 진영이 엉망이 되겠어요.”
“응. 영주님. 자! 간다! 돌격!”
좀 이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특공대를 출동시켰다. 공격조를 맡은 기사들이 성벽 위로 기어오르는 놈들을 신경 쓰게 되면 더 많은 놈이 기어 올라오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결국 예비조까지 투입해야 하는데 체력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러니 결국 특공대가 휩쓸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장에 투입된 10인의 용사(?)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놈들을 휩쓸어버리기 시작했다. 관문 위로 올라온 놈들을 다 처리한 후 바로 아래로 내려가 대기하던 놈들까지 분쇄해 버린 것이다.
“허, 진짜 에이스는 에이스네. 영지의 최정예는 저 정도란 말이지?”
로빈도 말로만 들었지 진짜 강한 기사들의 활약을 눈으로 본 경험은 거의 없었다. 있다면 예전에 가메라를 해치운 폴의 활약 정도일까?
하지만 그것도 거의 8년 전 일이다. 그리고 영지의 전사들, 기사들은 지난 8년간 더욱 연마하고 발전했다.
“잠깐, 그럼 폴은 대체 몇 살이지? 이거 너무 혹사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어쨌든 그 폴도 지금 저 특공대에 들어가 있었다. 웬만하면 그냥 남아서 기사들을 통솔하길 원했는데 자신이 굳이 자청해서 들어간 것이다.
뭐라더라? 피가 끓어오른다나? 자신의 외할아버지 카인과 비슷한 연배로 알고 있는데 참 혈기 왕성하신 분이다.
로빈이 감탄하는 사이에도 특공대는 끊임없이 움직였다. 정말 열 명으로 저게 되냐? 할 정도로 엄청난 전공이었다. 그들이 한 번 휩쓸고 지나가니 순간적으로 적의 공세가 둔화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적은 끊임없이 몰아치는 언데드였고, 이미 죽은 놈들이라 공포심이나 두려움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렇게 특공대가 한바탕 신나게 깨부수며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관문 위에 올라왔던 놈들을 대충 처리하고 다시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이런 과정을 계속 반복해야 할 거 같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