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특별히 머리가 있는 것도 아니요, 몸통의 두께만 해도 사람 몇을 합쳐놓은 거같이 두꺼웠다.
물론 골렘 같은 놈을 처리할 때는 몸 어딘가에 있는 핵을 파괴하면 된다지만 저건 사실 골렘이 맞는지도 의심스러운 흉측한 무언가였고, 그래서 놈의 약점 따위는 전혀 짐작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놈을 처치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저걸 잡아야 해? 저놈 저기서 그냥 바둥거리기만 하는데?”
“응?”
뜬금없는 린의 말에 사람들의 눈이 다시 놈에게 향했다.
마수 산맥에서 기어 나와 공격하는 해골들 사이에 합류한 놈은 그녀의 말대로 앞에 가득한 해골들 때문에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놈의 덩치가 워낙 큰데다가 관문 앞은 해골로 거의 들어차다시피 해서 사이에 끼어버린 것이다.
만약 이대로 해가 뜨기만 하면…….
“어. 저놈, 저거…….”
하지만 역시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는 없었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해골들에게 분노한 놈이 주변의 해골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먹기 시작했다. 심지어 해골을 잡아먹으며 점점 몸집을 더 불리고 있었으니.
만약 놈이 주변 놈들을 다 잡아먹고 더 커지게 되면 상대하기만 껄끄러워질 것이다.
“저게 입이야? 몸통에 있네?”
“윽, 끔찍해!”
린의 말대로 배 가운데에 입 같은 게 열리고 해골을 집어삼키는 모습은 그야말로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답이 없는 건 마찬가지.
로빈도 머리를 굴리고는 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영주님!”
그때 줄리에타 대사제가 뛰어와 로빈을 찾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전장을 찾지 않았던 대사제의 등장에 모두 의아해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서둘러 용건부터 밝혔다.
“저… 저놈을 빨리 물리쳐야 합니다!”
아니, 누가 그걸 모르나? 이 사람도 참.
로빈이 허탈한 한숨을 터트리는데도 줄리에타 대사제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는 로빈도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저놈은 신의 뜻에 정면으로 반하는 끔찍한 창조물이니 성수를… 성수를 사용하세요. 분명히 효과가 있을 겁니다.”
“…언데드 자체가 신을 반하는 존재 아닌가요? 대체 그게 무슨……. 게다가 성수라니.”
“설명하자면 좀 복잡합니다. 하지만 분명 성수를 사용하면 효과가 있을 겁니다.”
“끙.”
성수라.
그래, 그게 있긴 했지.
너무 황당한 물건이라 잠시 잊고 있었지만 줄리에타가 건네준 성수가 있긴 했다. 하지만 그게 효과가 있다고?
쉽게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그녀가 워낙 완강하게 이야기하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로빈은 큰맘 먹고 자신의 품속에서 성수 병을 꺼내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음?”
뭔가 꺼림칙할 거란 예상과는 달리 병에서는 부드러우면서도 달콤한 향이 은은하게 퍼져 나왔다.
이거 무슨 향수야? 뭐 이래?
하지만 상당히 의외인 것이 이게 뭔가 해줄 거 같기도 했다.
로빈은 서둘러 뚜껑을 닫은 후 일행을 바라보았다.
“성수로… 놈을 제압합니다.”
로빈은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믿을 만한 건 이제 이 성수뿐.
물론 제조 과정을 생각하면 어이없기만 했고 이딴 건 절대 쓰고 싶지 않지만, 저놈을 그냥 상대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만약 이대로 지켜보기만 하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을 거 같았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일행도 로빈의 마음을 이해했는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아직도 해골이 쌓인 한가운데서 식사(?)에 열중하고 있었다.
하, 진짜 끔찍한 자식.
그러니 저놈을 상대하기 위해선 저 가운데로 들어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까딱 잘못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특공대의 인원들은 모두 꺼리는 기색 없이 임무를 전달받았다.
성수를 최종적으로 사용할 사람으로는 폴이 낙점되었다.
백랑과 흑웅 그리고 폴이 끝까지 경합했으나 백랑은 왠지 성수가 든 병을 들고 가다가 깨 먹을 거 같아 불안했고, 흑웅은 놈의 시선을 끄는 게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폴은 굳은 표정으로 성수 병을 품 안에 넣고 로빈에게 군례를 올렸다.
“영주님, 태어나신 날이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장성하신 모습을 보니 여한이 없군요.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하, 이분이 또 왜 이러실까? 불안하게. 또 이런 식으로 데드 플래그를.
“그래요. 저도 폴 경이 언제나 존경스러워요. 그러니 꼭 살아서 돌아오세요. 세이라가 안겨줄 폴 경의 자손도 안아보셔야죠.”
“하하. 그렇군요.”
크게 웃음을 터트린 폴과 특공대는 준비를 갖추고 바로 전장에 투입했다.
묘한 불안함을 느낀 로빈은 특공대가 출발하자마자 바로 대기 중이던 기사들을 집합시켰다. 하지만 이들을 바로 투입하지 못한 건 역시 너무나도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최고의 전력인 특공대는 저 아수라장에서도 적당히 몸을 뺄 능력이 있지만 보통 기사들은 그렇지 못했고, 이들을 투입하면 분명 상당한 사상자를 낼 것이 분명했다. 이런 점이 로빈을 망설이게 만든 것이다.
로빈이 고민하는 사이에도 특공대는 빠르게 놈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특공대의 임무 분담은 간단했다.
우선 백랑과 하워드, 루이 그리고 모야족 전사 셋이 최대한 주변을 정리해 공간을 만든다.
해골이 밀집하다시피 쌓여있는 곳이라 조금의 공간이라도 내려면 모두 미친 듯이 무기를 휘둘러야 할 것이다. 어쩌면 투입한 특공대 인원 중, 이들이 가장 힘든 임무를 맡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놈의 시선을 끌면서 견제하는 것에는 흑웅과 린 그리고 기사단의 에이스라는 제필 경이 맡았다. 셋은 놈의 시선을 끊임없이 교란해 순간의 빈틈을 만드는 역할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폴.
폴은 빈틈을 포착해 놈의 입 부분에 강한 일격을 먹이고, 그곳에 성수를 쑤셔 박는 임무를 맡았다.
줄리에타 대사제의 말이 틀리지 않다면 성수를 쑤셔 박는 순간 뭔가 큰 변화가 일어날 테고, 그 틈을 타 모두 공격해 놈을 완벽하게 침묵시키겠다는 게 이번 작전의 개요.
만약 성수가 놈에게 효과가 없다면 우선 모두 퇴각해 다음 작전을 논의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 천 년 동안 이곳을 굳건히 지켜온 북쪽 방벽을 잠시 포기해야 할 수도 있었다.
드디어 특공대가 산처럼 쌓인 해골들을 돌파해 놈에게 도달했을 때 놈은 알아들을 수 없는 기괴한 노성을 터트리며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그야말로 꿈에 나올까 두려울 정도로 끔찍한 몰골.
하지만 일행은 침착하게 계획된 대로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최대한 놈과 거리를 벌리며 주변의 해골들을 정리하는 백랑과 다섯 용사들.
그들이 진공청소기처럼 놈들을 빨아들이다시피 해 어느 정도 공간이 만들어지고 그 공간에서 린과 흑웅이 춤추듯이 놈을 상대하고 있었다.
질량에서부터 압도적인 차이를 보이는 적과 맞상대하는 건 무조건 손해 보는 일이었다.
그래서 둘은 처음부터 철저하게 회피로 일관했고, 큰 대검을 든 주제에 유연하게 놈의 손길을 피하는 린의 모습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린과 흑웅이 만든 틈새를 파고든 제필은 순간순간 강한 일격을 퍼부으며 놈의 신경을 자극했다.
놈은 자신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셋의 공격 때문인지 그 뒤에 숨어있는 폴의 존재까지는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톱니바퀴처럼 유기적으로 잘 돌아가는 거 같지만 시간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놈들 사이에서 분전하는 여섯 명의 용사가 적들에게 밀려 조금씩 공간을 잃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렇게 시간이 더 지체되면 결국 고립된 6인을 시작으로 거리가 안 나와 놈의 공격을 피할 수 없게 된 3인까지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 기회를 살피던 폴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배 속에 밀어 넣은 해골을 소화하기 위함인지 놈은 계속 입가를 실룩이고 있었다. 폴이 노리고 있는 건 바로 그 틈새였고.
온몸의 마나를 끝까지 쥐어짜 에셋에 모두 몰아넣은 폴은 놈의 양팔이 린과 흑웅 쪽으로 휘둘러진 틈을 파고들어 놈의 입을 향해 빠르게 뛰어들었다.
하지만 놈을 너무 얕본 것일까? 폴이 접근하자 기다렸다는 듯 입을 크게 벌려 그를 덮치고 말았는데.
주변의 해골을 삼킬 때보다 두 배는 크게 벌린 입으로 폴을 통째로 씹어 먹을 기세였다.
“안 돼!”
상황을 지켜보던 로빈도 예상치 못한 놈의 반격에 대경하며 외마디 비명을 질러댔고, 대기하던 기사들도 모두 놀라 어깨를 들썩이며 몸을 떨었다.
그러나 폴은 놈의 영악한 움직임에도 끝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바로 에셋을 세로로 세워 놈의 입 안에 끼워 넣은 것인데.
놈의 몸이 비록 딱딱한 뼈와 무구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단단한 에셋을 단번에 부러뜨릴 수는 없었다.
그 순간 고이 품고 있던 성수 병을 놈의 입 안에 던져 넣는 것에 성공한 폴.
하지만 에셋이 놈의 무게를 못 버티고 부러지면서 미처 탈출하지 못한 폴까지 입 안으로 같이 쓸려 들어가고 말았다.
“이런 미친!”
로빈의 한탄과 함께 기사들까지 분노에 몸을 떨었고 명령만 떨어지면 바로 달려들어 폴을 구해오겠다는 듯 거칠게 기세를 피우기 시작했다.
하, 어쩌지? 그냥 두고 본다? 폴이 저렇게 죽는다고?
하지만 기사들을 투입하면 그 희생은?
그러나 길게 고민할 틈도 없었다.
로빈이 고민하는 사이 특공대가 바로 놈에게 달려든 것이다. 어떻게든 놈의 배를 가르고 폴을 구하기 위함이었는데, 그렇게 놈에게 마구잡이로 달려들자 대열이 무너지면서 상황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남은 특공대까지 위험해지자 로빈도 고민을 이어갈 수 없었다.
“모두! 돌격! 영지의 용사들을 구하고 저놈을 뭉개버려!”
로빈의 명령이 떨어지자 대기하던 기사들, 그리고 전선을 유지하던 기사들까지 모조리 뛰쳐나갔다.
바로 영지의 정신적 지주인 폴을 구하기 위함이었는데.
그리고 그 공백을 듀발을 중심으로 한 방패병이 죽을힘을 다해 버텨내고 있었다.
“하… 진짜 미치겠네. 어? 저건 또 뭐야?”
뛰쳐나간 기사들과 폴에 대한 염려로 가슴이 답답해진 로빈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거대한 은빛 늑대가 전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몸길이만 어림잡아 수십 미터가 넘는 거대한 은빛 늑대.
저런 놈이 도대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도 어이없었지만, 놈은 놀랍게도 하늘 위에 떠있기까지 했다.
놈의 존재를 눈치채자마자 로빈의 온몸에 소름이 쫙 올라왔다.
왜 저걸 몰랐지?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거야?
하지만 전황이 워낙 급하게 돌아가서인지 누구도 저놈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거 같았다.
이름: 멸망의 시작과 끝. 루-디제스티
성향: ???
타이틀: ???
분명 마수 같긴 한데 상태창이 보인다.
물론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마수에게 저런 게 보이는 것만으로 기가 막힌 일이었다.
뭐, 이런 미친…….
아니,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지.
폴 경! 폴 경을 구해야 해!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놈은 저 멀리에서 우리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러면 당장 눈앞에 직면한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옳을 것이다.
솔직히 만약 저놈이 여기로 내려오면 영지 자체가 멸망할 거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으니 말이다.
로빈의 본능은 저놈이 무조건 멸망급 혹은 그 이상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로빈이 잠시 당황한 사이에도 상황은 빠르게 변해갔다.
이제야 성수가 효과를 발휘하는지 놈의 몸은 거칠게 떨려왔고 기사들은 죽을힘을 다해 주변을 정리해 특공대를 지원. 특공대는 마나를 잔뜩 머금은 무기로 놈의 몸통을 후려치고 있었다.
하지만 놈도 쉽게 죽을 생각은 없는지 미친 듯이 팔다리를 휘저어댔는데 냉정을 잃어서인지 피하지 못하고 얻어맞은 특공대 인원들은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그리고 뒤쪽으로 튕겨 나간 린은 대검을 지팡이 삼아 다시 일어나 놈에게 달려드는데.
돌진하는 린에게서 범상치 않은 기세가 느껴졌다.
로빈이 있는 곳까지 느껴지는 묘한 압박감과 박력.
심지어 모습조차 평소와는 전혀 달랐다.
붉게 변해버린 눈으로 놈을 노려보며 육안으로도 확실히 느껴질 정도로 마나가 일렁이는 대검을 움켜쥔 린.
놈에게 달려가 높게 뛰어오른 린은 자신의 대검을 내려찍어 그대로 놈을 갈라버렸다.
“하, 저건… 또 뭐야?”
마치 글로만 봤던 오러 블레이드처럼 마나가 대검을 휘감았고 놈의 단단한 몸도 유형화된 마나를 버텨내지는 못하는지 서서히 갈라져 내렸다.
그리고 성수의 영향인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렇게 쓰러져갔는데.
“사부!!”
그제야 정신이 든 듯 정상으로 돌아온 린은 거칠게 놈의 몸속을 뒤져 폴을 끄집어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