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물론 황태자의 행동을 강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제 뜻대로 이곳에 서있는 게 분명한데다가 자기가 먼저 이곳으로 안내해 달라고 한 거겠지만 로빈으로서는 좀 곤란하게 되었다.
아무도 모르면 상관없는데 황태자가 저걸 두 눈으로 확인한 바람에 전투의 경과를 정확히 보고하지 않으려던 자신의 계획에 차질이 생겨버렸으니 말이다.
좋아. 이렇게 된 이상, 행동 방향을 좀 바꿔야겠다.
황태자의 성격을 생각하면 여기서 공을 축소해 겸양을 떨어봤자 절대 통할 리 없다.
그럼 역으로 나가서 점수를 좀 떨어트리는 수밖에. 원래 사양하는 놈에게는 떡을 하나 더 주고 싶고, 떡을 더 달라고 하는 놈에게는 주기 싫은 법이니 말이다.
공과 사가 비교적 정확한 황태자지만 전생의 기억 때문인지 설치는 인사들에게는 좀 박한 편이었다.
“저 정도 규모의 적을 막아내다니, 그레이츠 자작령의 병력은 역시 강군이군.”
“네, 황태자 전하. 북부 최고의 강군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걸 떠나서 이건 좀 진심이었다. 자부심도 있었고.
우리 영지의 병사들이나 기사들이 강군이 아니면 대체 누가 강군이란 말인가? 어쩌면 황실 근위대에게도 명함을 내밀 수 있는……. 이건 좀 오버인가?
“그래?”
“이번 전투 때도 정말 대단했죠. 지금까지 상대한 적의 수만 해도 20만은 넘습니다. 게다가 거의 열흘 내내 피 말리는 전투가 이어지는데… 하하. 아마 다른 곳이었으면 벌써 함락되고도 남았을 겁니다.”
오? 통하나?
일부러 과장을 보태서 공을 부풀리니 역시 황태자의 표정이 좀 변했다. 원래부터 표정이 풍부한 사람은 아니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미간을 좀 찌푸린 거 같기도 하고.
그래, 이거지. 당신, 이런 거 엄청 싫어하잖아? 뭔가 짜증이 올라오지 않나?
“게다가 황태자 전하께서 신탁을 널리 알리셨을 때, 그 공문을 받자마자 가장 먼저 움직인 게 바로 그레이츠 영지일 겁니다. 저희야 항상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에게 충성하는 마음뿐이라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덕분에 이렇게 적을 막아냈으니 이것도 다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의 은덕 아니겠습니까?”
“허…….”
“정말 황태자 전하는 그야말로 신의 선택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거기서 어떻게 신탁이…….”
“…….”
“결국 이번 난리를 수습한 것도 황태자 전하시니, 제국의 안녕도 결국 황태자 전하께서 지키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거기다 이렇게 변방까지 직접 왕림하시다니, 정말… 영광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거기다 다소 노골적인 아부로 양념을 좀 쳤다.
이건 이번 일뿐만 아니라 훗날을 위한 작은 안배이기도 했는데, 황태자는 기본적으로 아부를 일삼는 자들을 절대 중용하지 않는다.
아부하는 자들도 어쨌든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니 배신하거나 큰 실책을 저지르지 않는 한 버리지는 않겠지만 요직에 앉히거나 큰일을 맡기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직접 독대할 기회를 잡았을 때 밑밥을 좀 뿌릴 필요가 있었다. 이러면 나중에도 자신을 부르거나 하진 않겠지.
황태자는 황도에, 그리고 자신은 영지에 있는 것이 서로에게 가장 좋은 포지션이었으니 말이다.
“그런가? 자네는 참 충성스럽군. 그럼 혹시… 이번 전공을 내가 직접 황제 폐하께 보고 드려도 되겠는가?”
오호, 그래. 이거지.
그냥 영지에서 직접 올리면 되는 전공 보고를 굳이 자신이 하겠다는 것.
그거야말로 어떻게든 한 수저 얹겠다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충성을 추켜세우는 저 뻔뻔한 반응이라니.
역시 이 양반도 한 번 죽고 다시 돌아오니 확실히 남을 이용할 줄 안다.
그래, 내 사람에게는 따듯해도 이용할 사람은 이렇게 이용하기도 해야 자리도 빨리 잡고 제국도 평안하게 운영할 수 있는 거지.
내가 통 크게 양보 한 번 할게. 힘내라!
황태자가 직접 보고를 올리게 되면 따로 조사관이 나오지 않고 바로 전공으로 인정된다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로 황태자가 보고하는 대로 전공이 확정되어 버리는 단점도 있었다.
즉, 황태자가 마음만 먹으면 상당한 전공을 가로챌 수 있다는 거다.
그렇게 자신의 공으로 보고하고 이쪽으로는 자신이 황제가 되면 중용할 거처럼 언질을 줘 반발을 무마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어장의 물고기처럼 훗날 황태자가 자신을 불러주기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딱 좋네. 딱 좋아.
“그리고 저거. 황제 폐하께 보고할 증거물로 저것들을 좀 가져가고 싶군.”
황태자가 가리킨 것은 바로 해골 병사들이 입고 있던 갑옷과 검, 그 밖에 다양한 무기들이었다.
확실히 뒤늦게 북부의 공을 가져가려면 뭔가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긴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것들을 챙겨가겠다는 황태자의 태도는 확실히 칭찬할 만했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로 될까?
적어도 적 10만 정도를 해치운 전공을 가져가려는 건데 저거론 좀 부족해 보였다.
“전하, 저것도 그렇지만 다른 게 있습니다.”
로빈은 황태자에게 열 벌의 지휘관 갑주를 건네주었다. 딱 봐도 그냥 장식품이나 역사적 의미밖에 없어 보이는 저 화려한 갑주는 공을 떠넘기는 용도로는 아주 제격이었다.
개수도 딱 열 개. 한 개에 1만 마리로 생각하면 적어도 10만 마리 분의 공은 인정받지 않을까?
“허, 이런 게 있었다고?”
황태자도 이런 갑주의 존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상당히 놀란 기색이다.
어차피 다른 5대 방벽에서도 저런 비슷한 게 황실로 올라가긴 할 테니 굳이 아낄 것도 없었다.
우리 쪽으로 대충 10만 남짓이 넘어왔으면 다른 곳으로도 어느 정도는 넘어갔을 테고, 그러면 다른 곳에서도 저런 갑주 한두 벌 정도는 건질 수 있을 거다. 5대 방벽의 영주들은 저런 진상품을 뒤로 챙기는 사람들이 아니었고.
그러니 저건 그야말로 전공을 입증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증거인 것이다.
재질 자체는 미스릴이라 좀 아깝긴 하지만 이미 20벌이나 되는 갑주가 있는데다가 병사들이 입고 있던 것도 미스릴이 조금이라도 섞여있다면 그 양이 엄청나기 때문에 똥 같은 전공을 떠넘길 수만 있다면 저 정도는 던져줘도 손해는 아니리라.
“그렇군. 내 자네의 충심을 잊지 않겠네.”
“그럼. 전하, 잘 좀 부탁드립니다.”
로빈은 끝까지 같은 태도로 황태자를 배웅했다. 제법 짐이 늘어나 배편까지 제공해 황태자를 황도로 보낸 것이다.
“갑자기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당황했는데 이 정도면 생각보다 더 잘 풀린 건가?”
이제 황태자가 저 전공을 가져가기만 하면 남부와 동부, 그리고 북부의 전공까지 황태자 쪽으로 쏠리게 되고 황태자파는 크게 추진력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힘으로 정말 답 없는 녀석들을 몇 정도는…….
“어떻게 되려나? 소설에서는 힐데 후작이 가장 먼저 중앙에서 쫓겨났었는데. 그놈을 제때 처리하지 못해서 황태자가 고생을 좀 하긴 했지. 아, 그보다 빨리 보고서부터 보내야겠다.”
공은 황태자가 보고하기로 했지만 로빈도 완전히 손 놓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자세한 사항은 그가 알아서 하겠지만 황태자 전하 덕분에 영지가 무사할 수 있었다는 양념 정도는 쳐줘야 남부에 있었던 황태자가 뜬금없이 북부의 공을 가져가는 데 뒷말이 없을 거다.
“이걸로 됐다. 그런데 저 양반은 대체 왜 온 거지?”
일이 이상하게 되긴 했지만 황태자가 이곳을 방문한 진짜 이유는 알아내지 못했다. 정말 상황이 어떤지 확인하러 왔다기에는 너무 낭비가 심한 방문이었기 때문이다.
전공을 챙겼으니 손해는 아니지만,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왔을 리는 없었으니 말이다.
참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황태자는 그렇게 떠났고 북부 관문의 정리가 마무리되었다.
슬슬 영지가 정상 궤도로 돌아간 것인데.
로빈은 관문의 정리가 마무리되자마자 이번 위기를 잘 극복한 것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대대적인 축제를 선언했다.
축제를 여는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수많은 영지민이 손을 보태준 것에 대하여 감사를 전함과 동시에 많은 영지민이 움직인 이 기회를 이용해 영지민의 화합을 도모하는 것.
그리고 이번 재앙에서 영지를 위해 희생한 병사들과 기사들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서였다.
특히 병사들과 기사들의 희생을 기리는 추모 의식은 생각보다 중요했는데 예전 마수 범람 때는 영주였던 카인이 희생자의 유가족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감사 인사를 전했었다.
그런데 로빈은 아예 공개적으로 감사제를 지내면서 그들의 넋과 가족들의 슬픔을 달래주기로 한 것이다.
물론 그들 가족의 생계를 끝까지 책임지는 것은 영지의 당연한 의무이기도 했다.
* * *
그렇게 축제 일정까지 발표한 그레이츠 영지.
주민들은 며칠 앞으로 다가온 축제 덕분에 모두 한껏 들뜬 분위기였다. 지금까지 영지에서 축제가 벌어진 건 까마득한 옛날에 몇 번 있었을 뿐, 수백 년 만에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가 이렇게 흥겨운 이때, 혼자 유독 심각한 남자가 있었으니.
그건 의외로 축제를 선언한 그레이츠 자작령의 영주 로빈이었다.
한 번의 큰 고비를 넘겼지만, 다시 겨울이 오면 마수들과도 드잡이질해야 하는 상황이라 영지민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축제를 계획한 것은 바로 로빈이었다.
게다가 지온의 눈총을 꿋꿋이 버텨가면서 황도에 있는 주노에게 연락해 서커스단이나 공연 팀까지 섭외.
덕분에 제법 많은 돈이 나가겠지만 영지민들은 생각 이상으로 볼거리가 많은 마을 축제를 즐길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순조로울 거 같던 마을 축제에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있었으니 그건 영지민들이 직접 꾸미는 장기 자랑과 스스로 준비한 이벤트였다.
솔직히 로빈도 이걸 공지하면서 많은 주민이 참여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물론 소정의 상금이 있긴 하지만 굳이 이런 귀찮은 짓을 누가 하겠냐고 생각한 것이다.
학창 시절 수학여행 때 장기 자랑을 한다고 하면 서로 미루다가 엉망이 된 기억밖에 없어서 가볍게 생각했던 것인데.
“장기 자랑 신청 접수만 수십 건에다가 자체적으로 뭔가를 하고 싶어 하는 것도 몇 가지는 되네. 대체 왜 이렇게 협조적이야? 이게 공고한 지 하루 만에 들어온 거라고?”
만약 이대로 신청이 쇄도하면 예선전을 따로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
로빈에게도 이 정도까지 신청이 폭주하는 건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내 경험이 이상한 거였나? 물론 남중, 남고 최악의 고추밭이라 객관성은 좀 떨어지지만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원래 이런 걸 하면 서로 미루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장기 자랑이야 상금도 있고 개인이 참여하는 거니 막을 수 없겠다고 생각한 로빈은 자신들이 계획한 이벤트 및 공연을 허락해 달라는 신전의 요청서와 간략한 설명이 기재된 계획서를 집어들었다.
“공연이라……. 대체 뭘 할 생각이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세히 계획서를 살펴보는 로빈.
계획서를 읽다 말고 앓는 소리를 내더니 눈을 감은 채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부여잡고 호흡을 가다듬는데.
“진짜 이 사람들이……. 축제에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이런 쓸데없는 걸 준비할 시간이 있으면 폴 경을 돌보는 데 더 집중해야 하는 거 아냐?”
마지막 전투에서 다친 병사들과 기사들은 이제 거의 회복되었다. 하지만 나쁜 기운에 노출된 폴만은 아직 정화 의식이 남았다는 이유로 교단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외부에 노출되면 치료가 지연된다는 이유로 만날 수도 없으니 로빈도 좀 답답한 상황이었다. 설명을 들어보니 목숨은 이미 건졌다는데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이런 상황이니 신전에서 올라온 엉뚱한 계획서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밖에.
게다가 근래에 쌓인 여신님에 대한 울분까지 끓어올라 진정하기 힘들 정도였다.
“이 여신님은 정말…….”
황태자가 돌아가고 남은 적을 모두 처리하자 퀘스트 완료 창이 올라왔다.
[완료!]
영지를 공격하는 대규모 언데드 군단으로부터 사랑과 봉사의 여신의 성물을 보호하세요.
(당신의 아름다운 희생정신에 여신님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보상: 타이틀 창 업데이트. 타이틀, 여신의 보은(S)
페널티: 제국 북부의 황폐화
기한: 제국 북부의 모든 언데드 소멸, 성물의 파괴
그렇다. 보상을 무려 두 가지나 받은 것이다.
이번에 보상으로 받은 타이틀 창 업데이트는 생각보다 의미가 있었다. 타이틀의 대략적인 설명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예전부터 짐작만 했던 타이틀의 등급도 이젠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흔한 커먼(C), 언커먼(UC), 레어(R), 슈퍼레어(SR), 유니크(U), 스페셜(S), 레전드(L), 오리지널(O)의 형태를 따르고 있었으니 이해하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