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로빈이 여신의 이름으로 언데드 창궐을 알리는 바람에 봉사의 교단도 덩달아 수혜를 입긴 했다.
당시에는 상대를 이해시키기 위해 그렇게 결정한 거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조금 억울하기도 했다.
아니지, 그래도 줄리에타 대사제가 자신을 희생해 폴 경을 살렸으니 그걸로 충분히 은혜를 입은 건가? 하지만 그것 역시 여신의 성물 때문에 그놈이 이쪽으로 기어 들어온 거잖아? 결국 병 주고 약 준 셈인가?
물론 그게 다른 곳으로 갔으면 절대 못 막았을 테니 차라리 이렇게 된 게 다행인 거 같기도 하고.
어쨌든 참 복잡했다.
“둔기 판 돈은 우선 킵해놓죠. 우리 쪽 둔기는 따로 모아서 새로 만들 걸 찾아보고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다른 곳 상황은 대충 어떤가요? 전체적으로 큰 피해 없이 막아낸 거죠?”
“동부 쪽은 피해가 거의 없는데 남부 쪽은 평야가 상당히 파손되었다는군요. 아무래도 언데드가 들판을 헤집고 다녀서요. 그 밖의 지방은 각자 알아서 잘 막긴 했는데 피해가 없진 않았죠.”
“그래요? 그 정도면 그럭저럭 잘 막았네요. 그럼 북부는요? 솔직히 다른 곳이야 저희가 신경 쓸 필요도 없는 거잖아요?”
사실 그렇다. 그거야 황태자나 황제가 신경 써야 할 부분이지 자신들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남부의 평야가 엉망이 되었으니 곡식 값은 좀 오르겠지만 동부가 건재하니 치명적일 정도는 아닐 것이다. 비축해 놓은 곡식도 상당해서 영지에는 전혀 피해가 없을 테고.
“다른 5대 방벽의 영지들은 의외의 부분에서 피해를 보았답니다. 마수 산맥에서 내려오는 건 대충 잘 막았는데 영지 자체에서 일어난 놈들이 말썽을 피웠다는군요. 아무래도 대부분의 병력이 마수 산맥에 집중되어 있는 바람에…….”
“아, 그래요? 저희는 그런 건 없었잖아요?”
“저희야 마을을 다 갈아엎어서 미리 다 제거했으니까요. 만약 에테 마을 쪽을 새로 짓지 않았으면 저희도 뒤통수를 맞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에테 마을은 예전에 물난리로 제법 많은 사람이 죽었었다. 로빈은 모르는 일이지만 에테 마을을 새로 짓고 농지를 개간하는 과정에서 제법 많은 뼈가 나와 그걸 따로 화장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마수 산맥과 대수림만 신경 쓰다가 로빈이 놓친 부분이었는데 이런 면으로는 조금 운이 따랐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군요. 솔직히 생각 못 했어요.”
“그런데 다른 영지에는 마지막에 공격했던 그 무장한 언데드가 나타나지 않았다는군요.”
“예? 그럼 그때 저희가 상대한 게 다였다고요? 성물 효과 진짜…….”
솔직히 다른 곳으로도 일부는 새어 나간 줄 알았는데 그게 자신의 영지에만 몰빵이었다니, 새삼 여신상의 위력에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몹몰이 효과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만약 게임에 저런 게 있으면 누구나 금방 만렙을 찍지 않았을까?
잠깐, 그럼 그 미스릴 갑주는 어떡하지? 그걸 우리 영지에서만 보냈다는 거잖아? 다른 기준이 없어서 황태자 형이 전공을 인정받기 힘들어진 거 아냐?
에이, 어차피 보낸 건데 제 밥그릇은 자기가 알아서 챙기겠지. 난 해줄 만큼 다 해줬으니 그걸로 됐다.
“어쨌든 그렇게 영지 내에서 언데드가 설치는 바람에 농지를 많이 망쳤답니다. 마침 추수 기간이라 피해가 컸고요. 아무래도 식량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렇네요. 물론 남의 영지라 참견할 일은 아니지만, 그쪽도 골치 아프긴 하겠어요. 이 기회에 혼 래빗 동맹이나 늘려볼까요? 솔직히 식량 늘리는 데에는 그거만 한 게 없잖아요? 이젠 우리 영지뿐만 아니라 자이트 영지에서도 창고 관리를 배울 수 있으니 일을 분담하면 크게 부담도 없고요. 이 기회에 배를 한 척 더 늘리는 것도 생각해 볼 만하네요.”
“그렇지 않아도 황실 쪽을 통해서 조율이 들어왔습니다. 혼 래빗 가죽을 수출품으로 지정할 테니 공급을 더 늘릴 생각 없냐고요. 갑옷 안감으로 혼 래빗 가죽을 선호하는 건 만국 공통인 모양입니다.”
“황실도 지금 전후 처리에 골머리를 앓고 있을 테니 북부에서 알아서 해결하면 좋기야 하겠네요. 그나저나 수출품 지정이라. 그렇게 되면 다섯 개 영지에서 생산하는 양을 모두 소화할 수 있겠는데요.”
시절이 변하며 새로운 소재로 인정받던 혼 래빗 모피의 황도 판매량은 크게 줄어들었다. 고기는 부피만 크고 돈의 거의 안 되니 사실상 그것 정도만 의미가 있었고.
그러니 혼 래빗이 퍼져 나가도 팔 수 있는 건 기껏해야 가죽 정도일 것이다.
모피는 오히려 평균 기온이 낮은 북부나 중북부 쪽에서 사들이려 영지를 방문하곤 했으니 자체적으로 소비하거나 근처에 팔아넘기지 않을까?
그래도 다행히 가죽은 앞으로도 제법 전망이 밝은 모양이었다. 물론 로빈에게는 혼 래빗 그것이라는 또 다른 무기가 있긴 했지만 말이다.
“주노 님이 그러는데 이번에 크게 당한 남쪽 영주들도 군비 증강에 열을 올리고 있답니다. 물론 뒷북이긴 하지만 의미가 없는 건 아니죠.”
“남쪽의 군비 경쟁이라. 가죽의 수효도 확실히 늘어나긴 하겠군요.”
반란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남쪽이 자기 집을 지킬 수 있게 되는 건 바람직한 일이었다. 훗날 황태자가 제국을 지키는 데도 충분히 도움이 될 것이다.
소설에서는 남쪽의 기사들이 모두 언데드가 되면서 그들이 군사력을 키울 여력조차 없었는데 이번엔 황태자가 끝까지 그곳을 지키는 바람에 어느 정도 전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제국의 전력이 늘어나는 거니 바람직하긴 한데.
이게 3황자파의 전력이라 껄끄러운 점이 없진 않았다.
“하긴 동부 쪽의 전력도 보존했으니 전력 차이는 어차피 마찬가지인가?”
확실한 건 소설보다는 더 좋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거였다. 물론 이러다가 진짜 내전이라도 일어나면 말짱 꽝이지만 그 정도로 정신없진 않을 거라고 믿는다.
“지온, 혼 래빗 건은 지온이 알아서 마무리 지어주세요. 자이트 영지와 같은 조건이면 나쁘지 않을 거 같아요. 자이트 영지는 다른 영지를 도와주는 조건으로 받는 돈을 대신하면 되겠네요. 그 녀석들이 잘 먹고 잘 살아야 마수도 잘 막을 거 아니에요? 어차피 고기랑 모피는 자기네가 쓰고 가죽 정도나 팔 텐데 군부 쪽은 우리랑 독점 계약이니 별문제 없겠네요. 이 기회에 우리도 앉아서 돈 좀 벌어보죠. 만약 예전의 자이트 영지처럼 구멍이라도 나면 괜히 저희만 피곤해져요.”
“네, 그럼 그건 그렇게 하겠습니다.”
당장 직면한 문제들을 대충 해결한 로빈은 혼자서 콧노래를 부르고 있는 백랑과 심각한 표정의 루이를 불렀다. 겨울에 있을 습격을 대비해 영지 방어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는데 이번에는 북쪽에서 제법 큰 무리가 내려올 수 있으니 북쪽 방벽 쪽에 전력을 집중할 생각이었다.
“루이 경이 지금 기사들까지 관리하고 있죠? 다들 어때요?”
“대부분 회복해서 슬슬 몸을 풀고 있습니다. 이번에 병사들도 많이 각성해서 기사의 수가 제법 늘어났으니 아버님이 오시면 좋아하실 겁니다.”
“그래요? 어째 큰 전투가 있을수록 전력이 늘어나는 기분이네요.”
가끔 보면 이곳 사람들에게는 자신도 모르는 레벨업 시스템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꼭 저렇게 큰 전투를 치르면 병사들이 일부 각성해 기사가 되기 때문이다.
무슨 전직 시스템이라도 있는 건지 참 신기하기만 했다.
“그런데 이게 원래 이런 건가요? 예전에도 큰 전투를 마치면 병사들이 기사가 되었잖아요?”
“네,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거친 실전을 겪으면 마나의 활성화가 가속화되니 기사가 되는 거죠.”
이게 자연스럽다고? 그럼 이 북쪽은 온통 기사들 천지여야 하지 않나? 매년 그렇게 실전을 겪는데 왜 그거밖에 안 되는 거지? 영지마다 수백 명은 있어야 할 거 같은데.
“그럼 왜 다른 곳은 기사의 수가 그것밖에 안 돼요? 저희 영지만 해도 지금 기사급이 200명도 넘잖아요? 자이트 영지는 기사들이 100명도 안 되는 거로 알고 있는데요.”
로빈의 의문에 루이가 친절히 설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너무 단순하고 당연한 설명이라 로빈의 얼굴이 붉어질 정도였는데.
“그거야 당연히 그전에 죽기 때문이죠. 원래 병사들의 사망 비율은 기사들보다 월등히 높습니다. 아무래도 좋은 장비를 갖추기 힘드니까요. 전사자 비율이 높으니 기사로 성장하는 숫자도 자연히 줄어드는 거죠.”
“아, 전사요?”
“솔직히 저희도 히센 님이 오셔서 갑옷을 봐주시기 전에는 치안대의 사망 비율이 높았습니다. 사망한 대원들의 가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기도 빠듯한 입장이었죠. 그러고 보면 참 많이 좋아졌습니다.”
로빈으로선 자신이 영주가 되고 좋아졌다는 말은 아무래도 기분이 좋은 이야기였다. 병사들의 무장에 집착하는 자신의 행동이 그래도 좋은 결과를 내고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조금 머쓱해진 로빈은 빠르게 고개를 돌려 백랑을 찾았다.
“백랑, 이번에는 아무래도 북쪽을 더 신경 써야 할 거 같으니 전사들을 좀 보내주셔야겠어요. 웬만하면 좀 괜찮은 궁수들도요.”
마수를 상대로는 궁수들도 상당한 효율을 자랑한다. 먼 곳에서 상대를 먼저 타격하는 건 언제나 옳은 일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루터카우 각궁으로 무장한 모야족 여궁수들의 파괴력은 이미 남쪽 요새에서 그 진가를 인정받은 지 오래였다. 오죽하면 지금도 루터카우의 뿔을 열심히 뽑아대고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 쪽도 신경 써야 하는 건 마찬가지야. 언데드가 휘젓고 다닌 건 마수 산맥만은 아니거든.”
로빈의 요청에 난색을 표하는 백랑.
큰 전투로 전력이 상승한 북쪽 방벽과는 달리 전사들만 전장에 투입한 모야족의 경우에는 전력이 늘어나진 않았다. 그나마 사제들 덕분에 부상자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그렇게 전력은 보존했지만, 겨울에 전사들을 북쪽으로 보내는 건 역시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겨울철이 되면 언제 대수림이 요동칠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거야 그렇죠. 그럼 어쩌나……. 우선 유기적으로 가죠. 우선 전사는 제외하고 궁수들 일부만 북쪽으로 지원하는 거로요. 나중에 상황 봐서 서로 병력을 더하고 뺄 순 있잖아요?”
“괜찮은 생각이군요. 당장 북쪽도 기사가 좀 늘어나서 웬만한 공격은 막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래, 그럼 이렇게 해. 우선 궁수 200을 보낼게. 이 정도면 괜찮지, 영주님?”
지금 정예라고 할 수 있는 모야족의 여궁수들의 숫자는 대략 500 정도였다. 그럼 그중에 40%를 보내는 셈이었으니 당장 지원으로 충분한 숫자이긴 했다.
물론 시간이 지나서 북쪽 방벽에 마수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면 백랑도 알아서 전사들을 파견할 것이다.
그나저나 대수림이라. 이쪽도 제법 시끄러우려나? 숲이 난장판이 되었으면 그렇긴 하겠지?
어쨌든 상급 마수나 좀 조용히 지냈으면 좋을 거 같았다. 지금 영지의 전력이면 상급 마수도 어느 정도 상대할 만하지만 굳이 그럴 이유는 없었으니 말이다.
병력 상황까지 조율한 로빈은 회의를 마무리하며 백랑에게 넌지시 물었다.
“원래 축제 문제로 무슨 할 말이 있었던 거잖아요? 대체 무슨 일이에요?”
“아, 맞아. 우리도 풀장에서 무슨 행사를 진행할까 해서 말이야.”
모야족 풀장에서 행사라. 또 무슨 이상한 걸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런데 이제 겨울인데 그게 가능하려나?
“혹시 수영복 벗기기 같은 이상한 걸 하려는 건 아니죠?”
“오, 그거 괜찮은데. 그거나 한번 해볼까?”
자신의 말을 받아 좋은 생각이라고 맞장구치는 백랑을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던 로빈은 절대 그딴 건 생각하지도 말라고 핀잔을 줬다.
“제발 좀 제대로 된 것 좀 하죠. 그냥 평범한 수영이나 수구 같은 게 아니면 허가할 수 없어요.”
“아, 그래? 아깝네. 그럼 평범하게 수영으로 가지, 뭐. 그 정도는 괜찮지?”
“그래요. 그런데 이제 곧 겨울인데 괜찮겠어요? 아무리 모야족이라도 그건 좀 무리일 거 같은데요.”
“후후. 충분하지. 부족의 용맹함을 영지민들에게 알릴 기회니까.”
“그게 뭐라고 저렇게까지……. 나중에 감기에 걸려서 문제나 만들지 마세요.”
이제 겨울인데 수영 시합이라니. 대체 누가 그 대회에 참가할까 싶었다.
아무도 없으면 결국 모야족 자체 단합 대회가 될 테니 그건 그거대로 재미있으려나?
* * *
“윽, 뭐가 이렇게…….”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난 로빈은 자신의 몸 위를 누르는 묵직한 무언가에 깜짝 놀랐다가 그게 실비임을 알아채고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요망한 녀석이 또. 대체 문은 어떻게 열고 들어오는 거야?”
북쪽 관문에서의 전투 이후, 실비아는 이런 식으로 야간 침투(?)를 감행하고 있었다.
첫날에는 정말 얼마나 놀랐던지.
하지만 이제는 몇 번의 경험으로 비교적 익숙해져 첫날처럼 벌떡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