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그러니 북부를 황태자의 새로운 거점으로 넘겨줄 바에는 그냥 황태자가 일등 공신이 되는 게 차라리 나았다.
“20만이라니요. 당치도 않은 소리입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남부에 계속 계셨는데 어떻게 적들의 군세를 확인할 수 있으셨단 말입니까? 게다가 무장한 언데드라니 난생처음 듣는 이야깁니다. 혹시 군공에 눈이 먼 모리배의 간언에 눈이 어두워지신 게 아닐는지요.”
조셉 공작이 바로 반박하고 나섰지만 황태자는 묘한 웃음을 보일 뿐이었다.
“하하, 조셉 공작.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제가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입니다. 북부에서 난이 마무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지 않아 제가 그레이츠 영지까지 직접 다녀왔지 않습니까? 북쪽 관문 앞이 아주 뼛조각으로 난리가 났더군요. 게다가 저런 장비들도 산처럼 쌓여있었어요. 만약 적이 입고 온 것이 아니라면 저런 걸 대체 어디서 구했단 말입니까? 제가 그곳에 가겠다고 미리 연락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하지만…….”
황태자의 설명에도 조셉 공작은 전혀 수긍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조셉 공작께서 인정하지 못하시는 거 같군요.”
황태자는 열 벌의 지휘관 갑주를 가리키며 설명을 덧붙였다.
저것이 고대 히라세이 왕국의 군단장 갑주이며 군단장 하나당 2만의 병력을 지휘했기 때문에 적의 수를 20만으로 추산할 수 있다는 이야기.
하지만 천 년도 넘은 고대 왕국의 이야기가 나온 순간부터 귀족들은 그저 아연해할 뿐이었다.
“황태자 전하, 그럼 더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 시절 유물이 저리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도 말이 안 되는데, 하물며 그 당시 죽은 병사가 언데드로 변해 날뛰었다니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혹시 저것도 그저 비슷하게 만든 가품인 것이 아닐는지요?”
“허허, 진품을 가져와도 가품이라 하시니… 이걸 어떻게 입증할 수도 없고.”
너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네가 속은 게 아니냐는 말에 황태자는 짐짓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조셉 공작의 말이 옳다. 어찌 모양만으로 그 시대의 물건이라 단정 지을 수 있겠는가.”
“어찌 제가 귀족 회의에서 허언을 올리겠나이까? 이건 히라세이 시절의 지휘관 갑주가 분명합니다.”
“짐은 황태자의 말을 믿노라. 하지만 황태자의 말만 믿고 결정하기에는 사안이 너무 무겁구나. 그러니 당연히 검증을 거쳐 사실 여부부터 확인함이 옳다.”
“하지만 폐하, 황태자인 제가 분명하다 하는데 굳이 검증까지 한다는 건 제 체면이 너무 상하는 일이옵니다. 그러니 이 갑주가 정말 히라세이 시절의 물건이 틀림없다면, 제 청대로 그레이츠 자작을 일등 공신으로 인정해 주십시오.”
“만약 저 갑주가 정말 그 시절의 유물이라면, 그레이츠 자작이 적 군단장 열 명을 처치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전공을 계산할 때도 군단장 하나가 하나의 군단과 같으니 그레이츠 자작의 공은 황태자의 말대로 열 개 군단, 즉 적 20만을 처치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황태자의 말이 사실로 판명되면 그 뜻대로 그레이츠 자작에게 일등 공신의 위를 내리겠노라.”
자신이 뭐라고 끼어들기도 전에 황제가 이렇게 결론 내리자 조셉 공작은 순간 아차 싶었다.
사실 그레이츠 자작이 20만을 해치운 것과 일등 공신이 되는 건 또 다른 이야기인데 두 이야기를 한데 뭉뚱그려 같은 이야기로 만들어버렸고, 이제 갑주의 진위에 따라 황태자의 뜻대로 흘러가게 생겼으니 말이다.
순간 고대 왕국이 튀어나오면서 분위기가 어수선한 틈을 타 기습 공격을 날린 셈이었다.
그리고 황실의 역사 연구원이 들어서 갑주를 살펴보는 동안에도 담담한 황태자의 얼굴에서 저 갑주에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애당초 그것부터 설명하지 않고 의뭉을 떤 것 자체가 논의를 이런 식으로 끌고 가려는 황태자의 의도임이 분명했다.
자작 따위에게 일등 공신을 넘겨주겠다고 하면 들고일어날 다른 귀족들의 반발까지 무마하기 위해 수를 쓴 것이리라.
그리고 그 대상에는 자신 같은 3황자파 외에 같이 공을 세운 황태자파의 귀족들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사실 머릿수로 따지면 동부 방면을 방어한 레오니스 공작이 더 많은 수의 적을 막아내지 않았던가.
다만 문제는 대체 왜 저렇게까지 무리수를 두느냐는 거였다. 저렇게 억지로 판을 깔아 그놈을 일등 공신으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뭐냐는 건데.
“이건……. 히라세이 시절의 군단장 갑주가 확실합니다.”
“허, 그런가? 절대 틀림이 없으렷다? 이게 그 시절 유물이라고?”
“네, 폐하. 확실합니다. 이 갑주는 미스릴로 만든 것이 옵니다. 현시대에서 존재하지 않는 물질이라 절대 가품으로 만들 수 없는 물건이고, 이 형태와 문양이 기록으로 남은 것과 한 치의 다름도 없습니다.”
“그렇군. 미스릴이라……. 그건 이미 전설 속으로 사라진 금속이 아니더냐?”
“예, 폐하. 지금 제국, 아니 대륙 어디에도 미스릴은 남아있지 않사옵니다.”
“결국, 이 물건이 유물이라는 건 확실해졌군. 조셉 공작, 더 이상 할 말이 남았는가?”
미스릴이 대체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륙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는 말에 조셉 공작은 그저 할 말을 잃었다.
저 어린 너구리 놈이 미리 다 알고 이런 식으로 판을 깐 건 눈치챘지만 저런 게 있었다니. 그야말로 대단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그걸 그대로 황실에 바친 그레이츠 자작은…….
“이건 단순히 전리품으로 받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구나. 기록관, 그레이츠 자작의 공에 적 20만 처치와 이 갑주 열 벌을 따로 추가하라. 이 두 가지를 각기 다른 공으로 계산하겠다.”
저렇게 추가 공적을 인정받게 된다. 도대체 한 번에 얼마나 많은 공훈 포인트를…….
설마, 황태자 저놈이 이걸 노리고?
“폐하, 만약 그렇게 되면 그레이츠 자작은…….”
기록관이 다가가 뭐라고 속삭이자 헛웃음을 지은 황제는 모든 것은 정해진 규정대로 처리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레이츠 자작을 일등 공신으로 치하하겠다. 그리고 그 뒤의 일들은 모든 걸 규정과 절차대로 처리할 것이다. 제국법이 정한 규정을 그대로 지키는 것이니 그 누구도 이론을 제기할 수 없다.”
“예, 폐하! 명을 따르겠나이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가운데 황태자가 가장 먼저 고개를 숙였고, 그 뒤로 황태자파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황당한 표정의 조셉 공작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이며 황제의 명을 받았는데.
고개 숙인 조셉 공작의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황태자가 지금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아주 이상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페리안, 굳이 이럴 필요가 있겠느냐?”
“스승님, 제가 일등 공신이 되는 것보다 이게 저에게 훨씬 이익입니다.”
“그래. 너의 뜻이 그렇다면야 나야 받아들이겠지만 다른 귀족들은 불만이 많겠구나. 그레이츠 자작은 엄밀히 따지면 중립파인데 그쪽으로 쓸데없이 공을 밀어줬다고 말이다.”
황태자는 언제나 지나친 귀족들의 욕심에 헛웃음이 났지만 애써 참으며 레오니스 공작을 안심시켰다.
“5대 방벽이야 확실히 중립파이긴 하죠. 하지만 제가 황제가 되면 제게 충성할 중립파 아닙니까?”
“그거야 그렇다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귀족들은 제가 알아서 단속하겠습니다.”
레오니스 공작이 물러가고 나니 바로 황태자의 참모인 크라우와 젝트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어떤가?”
“대충 예상했던 반응이지 않습니까?”
“확실히 파란이 일긴 하겠군요.”
두 참모의 반응을 보니 분위기가 어땠을지 대충 짐작할 만했다. 공을 엉뚱한 곳에 넘긴다고 성토하는 분위기였겠지. 다 그런 건 아닐 테니 아마 반 정도?
“파란이 일어야지. 그래야 뭔가가 변할 테니까. 귀족들을 잘 관찰해라. 젝트, 황태자파라고 모두 나의 충신인 건 아니야. 이번에 큰 피해를 본 3황자파의 귀족들도 잘 살펴보고. 특히 조셉 공작에게 불만이 많은 귀족부터 찾아봐.”
“네, 전하.”
“크라우, 넌 교단 쪽을 부탁하지. 모든 교단과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해야 해. 이번에 입을 잘못 놀렸다가 고생하고 있는 곳이 법과 규율, 행운, 그리고 절제와 관용이던가? 그쪽은 더 신경 써서 돌봐줘.”
“네, 전하.”
“그리고 이번 논공행상에서 감찰권을 취득한다. 준비는 다 됐겠지?”
“예. 하지만 이게 쉬울지 모르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재판으로 가게 될 거야. 제법 시간이 걸리겠지. 어차피 목표는 실각이다. 지금 가진 거로도 그 정도는 충분하니 걱정할 필요 없어. 감찰은 그저 요식 행위에 불과해. 너무 대놓고 뒷조사한 티를 내면 그건 그거대로 곤란하니까.”
“네, 네. 어느 정도 공명정대한 황태자로 남아 계셔야 하니까요.”
“황태자 전하는 원래 공명정대하신 분이다. 말을 조심하도록.”
“하, 이래서 이 양반이랑 같이 있으면 안 되는데.”
“무례한 건 네 녀석이다. 전하께도 예의를 갖추도록 해. 군신 관계의 시작은 예의라고 내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나?”
개와 고양이 같은 두 참모의 모습에 한숨이 난 페리안은 손짓으로 둘을 내보냈다.
더 넓은 시각에서 일을 처리하고자 하는 마음에 두 명의 참모를 뒀는데 둘이 사이가 저렇게 안 좋아서야.
하긴 원래 성격부터가 상극이긴 했지만 요즘 들어 더한 기분이다.
“남부에서 좀 친해졌을까 싶었는데 괜한 기대였군. 사이만 더 안 좋아졌으니……. 역시 둘을 붙여놓은 게 실수였나?”
어쩌면 저 둘 중 하나는 다른 곳으로 보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래도 일적인 부분에서는 사감을 드러내지 않으니 좀 더 지켜봐야 하려나?
“만약 로빈이었으면 젝트랑 죽이 맞아 잘 지냈겠지. 하긴, 그 녀석도 크라우랑은 좀…….”
문득 로빈이 생각난 페리안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 논공행상에서 녀석이 어떤 표정일지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이번 논공행상은 어쨌든 볼만하겠군.”
왠지 이번 논공행상이 점점 더 기대되는 페리안이었다.
* * *
쏜살같이 지나간 일주일.
영지는 다가오는 축제 덕분에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고 있었다.
장기 자랑 및 공연 준비로 한창 시끌벅적하더니 로빈이 황도에서 상을 받는다는 소식까지 전해지자 영지가 폭발해 버린 것이다. 심지어 각 마을마다 크게 가판을 열어 자신들이 준비한 음식을 나눠 먹으며 축하하기로 했다.
특히 모야족은 이번 축제 때 루터카우를 이용한 다양한 음식을 소개한단다. 이 사람들이 토끼 하나로는 만족 못 하는지 소까지 팔아먹을 기세였는데.
이에 질세라 영주 성에서 준비하고 있는 건 유서 깊은 전통 요리인 치킨이었다. 원래 호불호가 거의 없는 놈인데다가 오히려 닭을 더 찾기 힘든 그레이츠 영지이다 보니 엄청난 인기를 누릴 것이 분명한 절대적인 무기였다.
결국 그날은 정말 모두에게 즐거운 잔치가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로빈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로빈에겐 모든 것이 그림의 떡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러 공연단이 영지에 도착하는 그날이 밝았다. 로빈이 배를 타고 황도로 출발할 시간이 된 것이다.
항구에서 배를 기다리던 로빈은 그레이츠 호에서 내리는 배우들의 모습에 탄성과 탄식을 번갈아 터트렸다.
생각보다 더 예쁘고 끝내주는 여배우들의 모습에 탄성이 절로 났고, 저 배우들의 공연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자기도 모르게 탄식이 새어 나온 것이다.
“하하. 영주님, 가족 분들과는 충분히 인사를 나누셨습니까?”
배우들을 안내한 후 이쪽으로 다가온 주노.
그러고 보면 주노도 자신처럼 황도로 떠나야 하는 불쌍한 동지였다.
확실히 이 양반도 짠하긴 하네. 이럴 때 이런 일이 생겼으니. 원래 황도의 일을 모두 다 보고 온 후 영지에서 당분간 휴가를 보낼 계획이었는데 이래서야.
자신 덕분에 다시 황도로 끌려가는 불쌍한 사람이랄까?
그나저나, 가족들이라…….
자신이 황도로 간다는 말에 가족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특히 마리아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고.
“어머! 로빈! 정말 가문의 영광이잖니! 내가 가만히 있을 수야 없지!”
이번 영주 성에서 따로 준비한 치킨의 반 이상이 마리아나가 개인적으로 구입한 것이니 그 기쁨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흠흠. 로빈, 수고가 많았구나.”
할아버지 카인도 은근히 감동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도 이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뻔히 알고 있으면서 너무 기뻐하기만 하니 왠지 좀 심통이 났다.
적어도 할아버지는 아시잖아요? 같이 좀 슬퍼해 주시죠?
하긴 이제 와서 이게 무슨 소용일까? 빨리 가서 상만 받고 후딱 돌아와야겠다.
“뭐, 인사는 나누고 왔죠. 그런데 진짜 바로 가야 하는 건가요?”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