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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137화 (137/303)

137화

게다가 레니아 공녀는 황태자의 첩들을 잘 다스리기로 유명했는데 저 아가씨가 무려 사디스트적 성향과 마조히스트적 성향, 게다가 바이 섹슈얼(양성애)까지 모두 장착해 황태자의 첩들을 후덜덜하게 길들이는 것이다.

아마 레니아 공녀가 없었다면 황태자가 그렇게 많은 첩을 안전(?)하게 거느릴 수 없었을 것이다. 로즈와 함께 황태자의 여자 중 인기 톱을 달리는 것도 그런 이유였고.

그러고 보니 황태자 저 인간은 어떻게 되어먹은 인간인데 첩을 그렇게 많이 들였지? 그게 가능이나 한가?

크라우 백작 자제는 뭐랄까, 정석적인 참모였는데 너무 꽉 막힌 스타일이라 소설에서는 인기가 별로 없었다.

소설을 보다 보면 저런 인물들이 융통성이 없어서 종종 사고를 치게 되는데 크라우 백작 자제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일종의 고구마 캐릭터라는 건데.

어쩌면 저 크라우야말로 진정한 봉구의 희생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사실 저런 애들이 무리수를 두지 않아서 밑에 두고 쓰기에는 정말 좋다. 시키는 건 누구보다 잘해서 일 잘하는 관리가 되기 때문이다. 충성심도 대단한 편이고.

물론 참모로 쓴다면 좀 생각해 봐야겠지만 어쨌든 괜찮은 사람이라는 거다.

황태자가 자신의 측근까지 소개하는 걸 보면 확실히 뭔가 좀 이상했다. 게다가 보상을 받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와서 소개한 것도 그렇고.

“하하, 전하. 저야 반가운 일이지만 이렇게 저한테 바로 다가오시면 다른 분들이 서운해하실 텐데요. 게다가 이렇게 내려오자마자 바로 이러시면…….”

빨리 꺼지라는 힐난을 살짝 섞어서 한번 떠봤다.

“다른 귀족들이야 연회가 마칠 때까지 자리를 지키겠지만 자네는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인사가 아닌가. 그러니 안면을 트려면 좀 빨리 움직여야지. 하하. 자네의 말대로 움직이긴 해야겠군. 그럼 나중에 다시 보세나.”

와. 이 양반, 진짜. 무슨 궁예세요?

하지만 오늘은 더러워서라도 끝까지 버텨야겠다.

하긴 상황이 상황이라 그럴 수밖에 없긴 하지만 자신의 행동을 강제해 버린 사람이 이렇게 말하니 기분이 영 껄끄럽다.

너님만 아니었으면 너님 말대로 벌써 집에 갔을 거라고.

황태자가 물러나자 주위를 살펴볼 여력이 생겼다.

주위를 한 번 쓱 훑어보니 저쪽에서 조셉 공작이 나를 한껏 째려보고 있었다. 내가 변경백이 되면서 중앙과는 멀어져도 저 양반 입장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게 분명했다.

하긴,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저 양반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지. 아마 5대 방벽이 모두 황태자 쪽으로 붙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3황자를 지지하지 않는 건 사실이라 이게 거짓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되도록 중립적인 척하면서 지켜보려고 했는데 영악한 인간 하나 때문에 이게 무슨 봉변인지.

그러고 보니 저 양반은 저번에 대수림으로 용병을 보내지 않았다. 그것만 봐도 5대 방벽과 마수의 무게감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는 건데.

아는 게 병이라고, 덕분에 머리가 더 아플 거 같았다.

5대 방벽의 정예 병력과 황태자와의 상관관계, 그리고 그게 황위 쟁탈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머리를 굴리고 있을 텐데, 이게 황태자의 독단이란 걸 알게 되면 무슨 생각을 하려나?

조셉 공작의 눈을 피해 몇몇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안면을 텄다.

황태자파와 3황자파를 구별하지 않고 인사를 나눈 건데 덕분에 두 파벌 모두 나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황태자를 등에 업고 뭘 하려는 애송이는 아니라는 걸 행동으로 보여주니 조금은 안심한 모양이다.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자괴감이 들었지만 이 정도 제스처로 훗날의 피곤함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으면 그리 손해는 아니었다.

* * *

몇몇의 귀족들과 인사를 나눈 로빈은 잠시 몸을 피해 휴식을 취했다. 저번에 할아버지 카인과 몸을 피해있던 바로 그곳이었다.

그리고 이곳에 이렇게 자리를 잡으니 문득 예전 생각이 나 실소가 터져 나왔다. 외모만은 레니아 공녀보다 더 도도해 보이는 그 레이디가 생각난 것이다.

그 아가씨는 또 어디 있으려나? 역시 단순한 승전 축하 연회라 불참한 건가?

어?

옛 생각에 잠시 주위를 둘러보는데 좀 익숙한 실루엣이 눈앞을 지나갔다.

다이앤 트와이드 1황녀.

잠시 스쳐 지나간 것뿐이지만 깊은 인상을 남겼던 바로 그녀였다.

로빈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지나가는 그녀를 붙잡고 말았다.

“…무례하시네요. 제정신이신가요?”

“아, 죄송합니다. 로빈 그레이츠라고 합니다.”

지나가는 레이디를 허락도 없이 붙잡은 건 대단한 실례가 맞았다. 평소의 로빈이었으면 절대 범하지 않았을 무례한 행동.

솔직히 로빈도 자신이 왜 이러는지 몰라 좀 당황스러웠다.

지나가다 봉변을 당한 다이앤은 로빈을 노려보며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자신이 황녀라는 사실을 망각한 망나니 하나가 또 수작을 부린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지분거릴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자신을 붙잡은 상대가 오히려 더 당황하고 있자 자신도 모르게 실소가 새어 나왔다. 이건 또 무슨 새로운 접근 방법인지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사과하는 상대의 태도와 말투를 보니 무슨 나쁜 마음을 먹은 거 같지는 않았다. 자신을 한번 어떻게 해보려는 수많은 남자랑은 태도가 조금 달랐으니 말이다.

물론 지금까지 자신에게 쓸데없는 짓을 벌인 어떤 남자보다 훨씬 멋있다는 것도 마음이 조금 편해진 이유 중의 하나였다.

“다이앤이에요. 무슨 일이시죠?”

어쨌든 사과를 전하자 상대의 태도가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런데 생각 없이 잡은 거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물론 이런 말 많이 들어보셨겠지만, 아름다우시네요.”

“네, 뭐. 많이 들어봤죠. 물론 그것보다 맛있어 보인다는 말을 더 많이 들었지만요. 어쨌든 고마워요.”

그렇지. 원래 그런 거였지. 하긴, 그런 말을 많이 들었을 거 같긴 하다. 불과 1년 반 남짓 지났는데 성년을 넘기면서 신체 비율 자체가 달라졌으니 말이다.

원래 미인이었는데 이젠 몸매까지 미친 미인이 되었다고 해야 하나?

신분은 고귀한데 외모는 정말 끝장나고, 외가가 한미해 영양가는 별로 없는 여성.

정말 제대로 된 녀석이 붙기 힘든 조건이었다.

그나마 황태자파에 속한 머저리가 신분 상승을 위해 노리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저 음심이나 정복욕이 들어찬 양아치 정도나 접근해 왔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에게 지분대는 놈들에게 신물이 나 저런 날카로운 반응이 나온 걸 테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연애결혼이면 몰라도 정략혼이라면 결국 그런 놈 중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한 놈에게 시집갈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그 결과가 결국 타국행.

하긴, 황족에게 연애결혼이 웬 말이냐? 귀족도 힘든 판국에.

사실 룩센 대제도 대단한 황제일지언정 그리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다. 보통의 자상한 아버지였다면 2황자가 밖으로 나돌고 있을 리가.

로빈은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머리를 저으며 다시 그녀가 가던 길 갈 수 있게 옆으로 비켜줬다. 오히려 그런 모습이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한 모양이지만.

“재미있네요. 로빈 그레이츠라고 했던가요?”

“예, 1황녀 저하.”

로빈이 슬쩍 목례하자 피식 웃으며 다시 지나가는 다이앤.

로빈은 아직도 자신이 왜 갑자기 이런 짓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냥 예쁘다고 한마디 할 거면 대체 왜 잡은 거야? 환장하겠네.

하지만 이미 버스는 떠나갔고 묘한 자괴감만 남았다.

“하긴 어차피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훗날 2황자가 죽은 후 저쪽 일가가 더 떨어져 나가고 엄한 곳으로 시집가게 되는 1황녀를 생각하니 좀 씁쓸하긴 하지만 워낙 이것저것 많이 얽힌 일이라 어떻게 하기도 힘들었다. 그럴 의리나 애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하긴 좀 예쁘다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에는……. 나도 이제 가진 것이 제법 많지. 책임질 것도 많고.”

아무래도 오늘 너무 충격적인 일을 당하는 바람에 잠시 정신을 놓은 모양이었다.

어쨌든 연회가 마무리될 때까지 자리를 지켰고 덕분에 이런저런 많은 귀족 영애들을 만날 수 있었다.

대부분 상당히 예쁜 외모를 자랑하는 귀족 영애들. 저거야말로 철저한 관리의 산물일 것이다.

승전 축하연에 참석하는 것 자체는 귀족들의 자유였고, 누구나 참석할 수 있다 보니 딸자식을 가진 하급 귀족들이 딸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연회가 일명 딸 장사의 메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방 귀족이지만 이제 고위 귀족이 되었고 제법 돈을 만진다고 소문난 자신 역시 좋은 먹잇감 중 하나일 것이다.

원래 귀족들의 기본적인 마인드가 그런 식이라 특별히 욕할 일도 아니었는데 적당히 좋은 곳에 시집보내고 상당한 대가를 받는 것이 가문에도 좋았고 시집가는 딸에게도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그러니 영애 본인들도 신경 써서 귀족 자제들을 살피는 거겠지.

하지만 아직 성인도 아닌데 나에게까지 접근하는 건 좀 너무했다.

하긴, 아카데미와 이런 연회장에서 대부분의 커플이 탄생하는 세상이니 뭐라고 할 일도 아닌가?

어쨌든 제법 많은 여성을 만나보긴 했지만, 특별히 마음에 드는 영애를 찾을 순 없었다.

그렇게 하루를 끝까지 버틴 로빈은 다음 날 바로 영지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생각할 것도 많고 영지의 인사들과 빨리 이 상황을 논의할 필요가 있는데다가 그냥 단순히 상을 받을 생각으로 호위 병력도 전혀 거느리지 않았기에 혹시나 하는 생각까지 들어서였다.

이곳은 어쨌든 중앙 귀족들의 홈그라운드였고 수틀린 조셉 공작이 뒤에서 무슨 수작을 부릴지 알 수 없었으니 말이다. 예전에는 그릭스 대공자에게까지 암살자를 보낸 사람이니 안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황태자가 초청장을 던지는 바람에 출발을 좀 미뤘다. 분명 다시 보자고는 했지만 그게 다음 날일 줄은 몰랐는데 이 인간이 끝까지 말썽이었다.

내키진 않지만 거절할 수 없는 초대라 황태자궁에 잠시 들른 로빈.

오늘은 무려 황태자와 독대하게 되었다.

게다가 차 시중을 드는 레니아 공녀라니. 그녀가 따라주는 차를 마시려니 목이 콱 막힐 거 같았다.

이건 설마 새로운 방식의 암살 시도인가?

로빈을 당황하게 한 채 차만 따라준 레니아 공녀가 밖으로 나가자 황태자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피차 길게 말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본론만 가자고.”

허허, 이 양반이 진짜.

“많이 당황했을 거라고 믿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일이 흘러가지 않았으면 자네가 순순히 변경백을 맡을 리가 없지. 안 그런가?”

변경백 임명은 기본적으로 강제성이 없었다.

애당초 권리보다 의무의 성격이 강한데다가 중앙 정치와는 적당히 거리를 벌려야 하는 변경백.

이런 걸 강제로 임명하는 건 그야말로 전횡이었다.

그러니 만약 자신이 단순히 백작으로 승작한 상황에서 변경백을 제안받았다면 황태자의 말대로 거부했을 가능성이 컸다. 백작보다 변경백에게 더 귀찮은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단순 명료하게 팩트만 보면 백작이 귀찮은 건 역시 귀족 회의 때문이었다. 영지에 머무르게 되면 임시 회의 정도는 여러 가지 이유로 회피할 수 있지만, 분기마다 열리는 정기 회의에는 무조건 참석해야 했으니 말이다.

영지에서 이곳으로 이동해 귀족 회의에 참석하는 것도 귀찮은 일이지만 더욱 귀찮은 건 덕분에 황도에 계속 들르면서 다른 귀족들과 끊임없이 접촉할 수밖에 없다는 거였다.

그리고 자신을 끌어들이려는 여러 귀족들의 귀찮은 접촉을 좋게 웃으며 자연스럽게 넘겨야 했다.

변경백은 이런 아귀다툼에서 멀어지는 대신에 한 지역을 책임져야 한다. 게다가 얻는 것은 쥐뿔도 없다. 기껏해야 개도 안 물어가는 명예 정도?

심지어 문제가 생기면 귀족 회의에 호출당할 수도 있으니 번거로움과 수고로움으로 따지면 단순한 백작보다 한 단계 위인 것이다.

귀족 회의에 참여하는 건 그냥 입만 잘 다물고 사람들만 잘 피하면 잠시의 귀찮음으로 끝나는 일이지만 변경백은 실제로 책임이 뒤따르니, 사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변경백을 거절하는 걸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이유.

그건 자신이 변경백을 거절하면 단순한 백작이 되는 게 아니라 황태자의 총애를 등에 업은, 세간에서는 영웅이라고 알려진 백작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건 단순히 자신이 입 다물고 있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견제와 질시, 그리고 포섭이 뒤따를지 생각만 해도 아찔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결국 황태자가 자신을 총애하는 척 쇼를 벌인데다가 자신을 영웅으로 만들어버리는 바람에 선택권이 사라진 것이다.

“아니라고 말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럴 리가 있나. 믿을 걸 믿어야지.”

“그럼 왜 물어보셨는지요?”

“그냥 요식 행위네, 요식 행위.”

일부러 조금 퉁명스럽게 대꾸했지만 황태자는 그냥 웃어넘겨버린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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