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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138화 (138/303)

138화

“자, 내가 원하는 건 그냥 자네가 북쪽에서 마수 산맥을 잘 관리하는 거야. 앞으로도 지금처럼 별문제 없이. 그곳은 생각보다 더 중요한 곳이고, 별일이 좀 많이 일어나는 곳이거든. 그러려면 변경백 정도의 직위는 있어야 했기에 이런 식으로 일을 좀 벌였네.”

“끙.”

“그러니 자네는 앞으로도 그쪽만 잘 관리해 주면 돼. 그럼 귀찮게 황도 인간들이랑 얽히지 않아도 되지. 아, 물론 때에 따라서는 도움을 좀 줘야 하겠지만 그럴 일은 많지 않을 거야. 내가 이번처럼 자네를 물고 늘어지는 일도 없을 거고.”

결국 나를 변경백으로 만들기 위해 이번에는 무리를 좀 했고, 앞으로는 이러지 않을 테니 맡은 일만 잘해달라는 말.

이제야 황태자의 생각이 대충 눈에 보인다. 진작에 이걸 알았으면 당황하지나 않는 건데.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좋아. 내 말을 이해했다니 다행이군. 북쪽을 잘 부탁하지.”

대충 자기 뜻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해서인지 본제를 마치고 소소한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로빈이 대화를 나누면서 느낀 건 생각보다 황태자가 자신을 편하게 생각한다는 거였다. 하지만 굳이 레니아 공녀와의 성생활을 자랑하는 건 좀.

내가 미성년인 건 알고나 하는 소리인가?

심사가 살짝 뒤틀려 상대할 여자가 한둘이 아닐 텐데 너무 무리하지 말고 힘들면 말하라고 했다. 혼 래빗 그게 참 좋으니 몇 개 보내주겠다고. 황궁으로 들어가는 건 생각보다 몇 개 안 되니 말이다.

이 양반쯤 되면 아마 마니아 수준으로 빠져들겠지? 이렇게 된 거 그릭스 대공자에 이어 새로운 큰손 고객이 하나 탄생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건네며 황태자의 반응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런데 알버스 원로는 잘 지내시나?”

“예, 뭐. 후진 양성에 집중하고 계시죠.”

“역시 그런가?”

우스갯소리가 오가는 가운데 조금 진지한 태도로 알버스에 관하여 묻는 황태자. 그러고 보니 알버스를 우리 영지로 보낸 게 바로 이 황태자였다.

“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아, 아니네. 잘 지내시나 궁금해서 물어봤네. 요즘 흑마법사 때문에 좀 시끄럽거든. 3황자파 쪽에서 자꾸 이 일을 흑마법사와 연관시키려고 해서 말이야. 네크로맨시 학파가 사라진 지가 언젠데 그런 소리를 하는 건지, 원.”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흑마법사 협회는 제법 신경 쓰이겠네요.”

만약 흑마법사가 이런 일을 일으킨 흑막이라면 내가 이 소설을 계속 읽지도 않았을 거다. 무조건 흑마법사 흑막설이 등장하는 순간 바로 손절해 버리기 때문이다.

솔직히 흑마법사가 핍박받는 세상도 아니고 외과 의사로 존경받는 세상에서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할까? 만약 흑마법사가 범인이라 해도 적어도 양지에 있는 흑마법사는 절대 아닐 것이다.

아무리 급해도 그런 식으로 끼워 맞추다니. 조셉 공작이 이번 일로 압박을 많이 받고 있긴 한 모양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마치고 로빈이 돌아갔다.

로빈이 돌아가자 방 한쪽 벽이 내려오며 젝트와 크라우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비밀 공간에 숨에 둘의 이야기를 같이 듣고 있었던 것이다.

“전하의 말씀대로 욕심은 전혀 없는 인물이군요.”

“그렇지. 그게 장점이자 단점인 녀석이니까.”

“그러면 차라리 황도로 불러들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믿고 쓸 만한 사람 같아 보이는군요.”

충신(?)이 될 만한 재목이면 차라리 곁에 두라는 크라우. 하지만 페리안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좀 아픈 손가락 같은 녀석이라 당장 그러고 싶진 않군. 영지에 남는 게 서로에게 좋을 거고. 우리가 황도를 주도하려면 외방이 든든해야 하네. 그걸 가장 잘해줄 수 있는 친구니, 지금은 밖에 두는 게 낫겠지.”

“그나저나, 전하가 완전 다른 사람같이 보이던데요. 누가 보면 한 10년은 같이 지낸 친구라고 하겠습니다.”

“그런가? 빈말 못 하는 친구라 좀 편해서 그런가 보군.”

“그러기엔 첫 만남이 너무 강렬하지 않았습니까?”

“아, 그때 그거? 모르는 사람이면 몰라도 뻔히 알고 있는데 그러니 웃겨서 참느라 고생했지. 원래 저 녀석이 충성이나 그런 입에 발린 소리는 질색인 놈인데 그때처럼 제 필요할 때만 잠깐 그러거든. 그게 너무 뻔해서 참…….”

젝트가 지적한 건 황태자의 태도였다. 자신도 그렇게 풀어진 황태자의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취급도 좀……. 거치신 거 같고.”

“그건 그렇지. 하지만 이 정도도 죄어놓지 않으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녀석이라…….”

자신이 한 짓을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온 황태자는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이제 북방 쪽은 로빈에게 완전히 맡겨놓으면 되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위험한 인물이 아니라는 건 느꼈을 거야. 그러니 북쪽은 그레이츠에게 맡기고 필요하면 충분히 지원해 줘.”

“네, 전하.”

* * *

황태자가 자신을 비웃고(?) 있는 줄은 짐작도 못 한 로빈은 돌아가는 배에 올라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오늘의 만남으로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진짜 너무한 거 아냐? 이렇게 다 변해버리면 소설 독자란 게 대체 무슨 이득이 있냐고? 그리고 1회 차 로빈. 넌 대체 무슨 짓을 했는데 황태자가 저렇게…….”

하긴 애초에 1회 차에 자신이 존재했다는 걸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부터가 문제였다.

왜 그런 단순한 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만약 원래는 없던 제 존재가 갑자기 생겨났으면 황태자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데 그것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이 소리 소문도 없이 얌전히 지낸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진짜 너무하네.”

지금 상황을 생각하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소설 독자가 어떤 소설에 빙의하거나 그와 비슷한 세상으로 들어가는 경우, 혹은 회귀자가 다시 인생을 사는 경우 얻게 되는 어드밴티지.

그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미리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지식을 바탕으로 일어날 사건을 미리 막거나 예방하고 악역을 제거하며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사실 아는 게 별로 없지. 애초에 모르는 게 너무 많은 세계였으니까.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건 중심 스토리 라인을 알고 있다는 희망 덕분이었는데, 이젠 그것도 안녕이냐? 주인공이 완전히 달라졌는데 스토리가 똑같이 흘러갈 리가 없잖아?”

그런데 더 웃긴 건 이렇게 변한 이유가 아무래도 1회 차의 자신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는 거였다. 이건 대체 어디 가서 호소해야 하는 건지.

“이놈은 대체 뭘, 어떻게 한 걸까? 황태자가 나에 대해서 저 정도로 알고 있는 걸 보면 생각보다 친분이 돈독했던 모양인데.”

황태자는 자신의 퉁명스러운 태도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고, 여자가 많은데 밤일은 평안하시냐는 저질 농담에도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다.

이건 단순한 군신 간의 관계보다는 더 친밀한 사이였다는 의미였다. 그게 아니면 조금이라도 불쾌감을 보이거나 뭐라도 다른 반응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이상했다.

“이해가 안 되네. 분명 황태자가 노답이란 걸 깨달은 순간 바로 탈제국을 계획했을 텐데.”

자기를 가장 잘 아는 건 역시 그 자신이다.

자신의 성향을 생각해 보면 1회 차 황태자와 뭔가를 같이했을 리가 없었다. 영지에서 자기 앞마당만 지키거나, 아니면 어떻게든 다른 곳으로 도망갈 생각만 했겠지.

중앙에서 황태자와 고군분투하는 자신이라니.

만약 자신이 소설의 등장인물이라면 설정 파괴라고 욕이나 진탕 얻어먹을 일이었다.

“하, 됐다. 어차피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생각보다 괜찮은 점도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황태자가 생각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아니 확실히 큐브 포털의 존재까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북부를 저렇게 신경 쓸 이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황태자가 아는 게 많을수록 자신이 할 일이 점점 줄어든다.

“게다가 이쪽만 신경 쓰면 된다는 것도 마음에 들어. 아마 내가 가장 반발하지 않을 만한 걸 선택한 거겠지?”

스토리 라인은 완전히 엉켜서 의미 있는 건 몇 가지 큰 사건과 등장인물들의 성격 정도였고, 남은 건 성향 창과 타이틀 창 그리고 사람 엿 먹이는 퀘스트 창뿐인 상황.

이제는 자신이 아는 소설과 뭔가 좀 비슷한 어떤 다른 소설이 되어버린 셈이지만 앞으로도 어떻게든 해볼 생각이다. 운이 좀 따른다면 생각보다 황태자에게 잘 묻어갈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그렇게만 된다면 적(?)의 정체를 몰라 뒤통수를 한 번 얻어맞은 것 정도는 웃으며 넘어가줄 수 있었다.

“제대로 못 하기만 해봐. 아주 그냥…….”

영지로 돌아온 로빈은 오랜만에 편한 마음으로 휴식을 취했다. 갈 때는 마음이 불편했고, 올 때는 생각이 복잡해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이미 주노에게 훈장 수여 소식과 승작 소식, 그리고 변경백 임명 소식까지 전해 들었는지 가족들의 반응은 정말 극적이었다.

“정말 기쁜 일이지만 변경백 지위를 반려하지 않은 게 마음에 걸리는구나. 생각보다 책임감이 무거운 자리니 말이다.”

“상황이 좀 그랬어요. 저도 웬만하면 반려하고 싶었거든요.”

“그래, 네가 알아서 잘하리라 믿는다. 지금까지도 그랬으니…….”

변경백이 주는 무게감 때문인지 걱정스러워하시는 할아버지 카인과.

“어머, 백작이라니. 우리 가문이… 이건 기적이야!”

마냥 기뻐하시는 어머니.

“게다가 황금 독수리 훈장이라니……. 내 아들이 황금 독수리다!!”

감격하시는 아버지.

“도련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진심으로 감사해하시는 둘째어머니 세릴 여사.

작은어머니 세릴이 저렇게 감사해하는 건 로빈이 백작이 되면서 가족 관계가 조금 변했기 때문이다.

제국의 고위 귀족인 백작이 되면 정실부인 외에 두 번째 부인을 둘 수 있었다. 그리고 로빈의 직계 존속인 윌리엄까지 그런 혜택을 받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로빈의 부모는 아버지 윌리엄과 정실부인 마리아나, 그리고 첩인 세릴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로빈이 백작이 되면서 아버지 윌리엄과 정실부인 마리아나, 그리고 두 번째 부인 세릴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변화 덕분에 세릴의 딸 세이라가 정식으로 귀족 자제로 인정받으며 황도에 있는 귀족 아카데미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실 세이라가 황도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한지 실감할 수 없었지만, 자신의 승작으로 저리 기뻐하시니 그건 그거대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황도 아카데미에 가야 귀족 분과 결혼하죠. 아무래도 영지에서는 다른 귀족 자제 분을 만날 가능성이…….”

아, 결혼 때문에?

하지만 이미 반쯤은 린나니화되어 버린 세이라가 과연 황도에 간다고 귀족 자제를 겟할 수 있을까? 이 부분에선 좀 회의적이었다.

그리고 괜히 다른 데 가서 고생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영지에서 그냥 사는 게 나을 거 같았는데, 세이라 본인도 결혼보다는 기사가 되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세이, 요 녀석이 은근히 작은어머니랑은 소통을 안 하는 건가?

하지만 촌스럽게 그걸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저분이 저러다가 나중에 뒤로 넘어가지나 않았으면 좋으련만.

* * *

가족들과 승작의 기쁨을 누린 로빈은 다음 날 바로 회의를 소집했다.

주제는 당연히 승작과 변경백에 대한 논의였다.

“하, 영주님. 진짜 대단했어. 영주님도 그걸 봤어야 했는데.”

“엉덩이를 튕길 때마다 치마 앞쪽이 슥~ 하고 갈라지는데 아주 절경이었습니다.”

“캬~ 진짜 사제님들이 역시 대단하다니까. 어떻게 그런 춤을…….”

“정말 대단했네. 그날은 그것도 필요 없었다니까. 얼마나 솟구치던지.”

하지만 이 인간들, 특히 백랑이 오자마자 축제 때 있었던 일들을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은 역시 사제들의 놀라운 스트립 댄스였다.

백랑이 운을 떼자 다른 사람들까지 감탄을 내뱉는 걸 보니 확실히 대단하긴 대단했나 보다.

하, 나도 진짜 보고 싶었는데.

“그래요. 뭐, 모두 즐거웠다니… 으득, 다행이네요. 전 황도에서 으득, 스트레스만 잔뜩 받고 왔는데요.”

“하하. 영주님, 너무 그렇게 이를 갈면 좀 무서운데. 흠흠.”

“어서 일 이야기를 하죠.”

로빈이 이를 갈자 슬슬 눈치를 보는 백랑.

그리고 지온은 서둘러 화제를 돌려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할 수 있게 주위를 환기했다.

“그래요. 상황은 다 들으셨을 거라 믿어요.”

“네, 영주님. 승작하시면서 변경백으로 임명되셨다고요.”

“맞아요. 그래서 좀 복잡해졌어요.”

“변병백이라…….”

“그럼 영주님이 이 근처 영지까지 지켜야 한다는 거야? 그러면 일이 너무 커지는데.”

백랑에게는 변경백이라는 개념이 좀 생소한 모양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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