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고개를 갸웃거리는 백랑에게 직관적으로 설명하는 지온. 지온의 설명을 들은 후에는 그도 대충 상황이 이해가 가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직접적으로 지켜주는 건 아니지만 이쪽 방면의 문제를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는 거네. 그리고 이쪽 지역의 문제라고 해봤자…….”
“그렇죠. 대부분 마수에 관한 것이죠.”
“마수라…….”
“지온, 다른 영지랑 혼 래빗에 관련된 논의는 대충 마무리 지었나요?”
“네. 몇 가지 약속을 받고 이미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을 보니 당장 식량이 문제더군요.”
“그래요? 올겨울을 지낼 여력이 없나 보네요. 이 일을 어쩐다. 원래라면 이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지만, 지금은 좀 달라졌네요.”
다른 영지의 구원은 당연히 황실의 일이었고 직접적인 요청이 들어온다면 한 번 생각해 볼 일이었지 이렇게 먼저 나서서 행동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의 책임자가 된 이상 일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먼저 움직이는 게 차라리 나았다. 아마 황태자도 이런 걸 기대한 거겠지.
“다행히 영지의 수확 사정은 아주 좋습니다. 굳이 창고의 물건들을 꺼낼 필요도 없는 상황이죠.”
“에테 마을 쪽에서는 언데드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으니까요. 아무래도 창고의 식량은 다른 영지 쪽으로 돌려야 할 거 같아요.”
“네, 올겨울만 나면 내년부터는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남부는 제법 상했지만, 동부는 건재해 식량 수급 사정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돈만 있으면 식량을 충분히 살 수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작황을 완전히 망쳐버린 북부의 영지들은 그 많은 식량을 구입할 여력이 없었다. 하물며 남부의 평야가 많이 망가지며 곡식의 가격까지 제법 올라버렸으니 올해는 제법 혹독한 겨울을 보낼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그 문제에 한몫한 것이…….
“아무래도 둔기를 파는 게 아니었나 봐요. 분명 좋은 뜻으로 한 건데 일이 좀.”
“그래도 그것들을 공짜로 넘길 순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건 그렇지만요.”
로빈이 저렴하게 판 둔기들이었다.
언데드를 편하게 상대하기 위해 둔기를 사면서 예비 자금까지 상당히 써버려서 사정이 더 안 좋아진 것이다.
덕분에 언데드를 상대하는 건 좀 더 편했지만, 이제는 그 많은 둔기를 따로 처리할 방법이 없어 애물단지로만 남았는데. 그런 쇳덩어리는 쉽게 팔리는 물건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황실에서 지원금이 나오긴 했습니다.”
“그래봤자죠. 이번에 피해를 본 곳이 한두 곳도 아닌데 얼마나 지원을 받았겠어요? 이제 곧 겨울인데 이런 상황이라면…….”
이제 겨울이고 마수들이 다시 뛰쳐나올 것이다. 그런데 영주가 식량 구하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있으면 생각 이상의 피해를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먹을 것도 없는 상황에서 마수 산맥 쪽으로만 집중하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좋아요. 다른 네 곳의 영주들을 이곳으로 모아야겠어요. 무조건 빠른 시일 안에요. 변경백 회의를 열겠다고 전하세요.”
“네,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지온 다음으로는 히센의 차례였다.
“히센 님, 마법 공학자들을 좀 더 고용하고 싶은데 괜찮은 사람이 있을까요? 저희 영지에 어울리는 사람으로요.”
“마법 공학자라……. 이놈들이 기본적으로 순 돈만 밝히는 놈들이라. 아, 전에 남쪽 요새를 지을 때 왔던 내 친구들이 있는데 그놈들이면 어떠냐?”
“그때 그분들이요? 같이 마수학을 공부하시던 분들이라고 했죠?”
“그래, 내 동기들이지. 마법 갑옷 쪽은 나랑 비슷한 수준이긴 해. 괴짜들이라서 사람들이 좀 꺼려하긴 하지만 그렇게 나쁜 놈들은 아니야.”
“…괴짜요?”
이제 괴짜들은 좀 사양하고 싶은데. 좀 정상적인 사람으로 안 되나?
“하지만 그 녀석들 말고 이런 외진 곳에 올 녀석들이 있을까? 돈이 문제가 아니라 여기가 좀… 그리 편안한 곳은 아니잖느냐.”
“하긴 그렇죠. 마수도 많고요. 아무래도 위험해 보일 테니 제대로 된 마법 공학자라면 꺼릴 만도 하죠.”
“그래. 그게 문제야.”
“그런데 그분들은 괜찮은 거예요? 이곳에 오셔도?”
“놈들은 좋아할걸? 저번에도 여기 눌러앉고 싶다고 했었는데……. 그놈들이 사실 말이야. 흠흠.”
말을 흐리는 꼴이 좀 이상했다. 하긴 그때 그분들이 요새를 지은 후에도 며칠 더 머물다 가셨지.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
“왜요?”
“하하. 그놈들이 좀 밝혀서 말이야. 이런 말 하긴 부끄럽지만, 여자를 좀…….”
“아, 그래요?”
“그래도 나름 정도를 아는 녀석들이거든. 그런 놈들이니 차라리 우리 영지가 낫지.”
“모르긴 몰라도 모야족 마을에서 뿌리내리려고 할 거 같네요. 뭐, 좋아요. 우선 요청해 보시겠어요? 수준 낮은 마법 공학자는 의미가 없고 적어도 히센 님이 만드는 마법 갑옷을 수리할 수 있어야 하거든요.”
“그래. 수준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 정도는 아니지만, 마법 갑옷을 만지기에는 충분하지.”
“그리고 오실 때 마법 통신구도 좀 사오라고 하세요. 지인 할인으로요. 네 쌍이면 되겠네요. 부탁드릴게요.”
“흠흠, 알았다. 대신 공짜는 아닌 거 알지?”
“네네. 그럼요. 걱정 마세요.”
히센이 화색을 띤 채 밖으로 나서자 백랑이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와. 저 양반, 이제 완전 중독이야. 큭큭.”
“그런데 그게 효과가 그렇게 좋아요?”
아직 한 번도 써보지 못한 로빈은 그것에 집착하는 히센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용자이면서 나름 말이 잘 통하는 백랑에게 물은 건데.
백랑은 아무런 말없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뿐이었다.
하지만 저 손 모양과 백랑의 표정을 보니 대충 짐작하고도 남았다.
“끝내주나 보네요. 설마 백랑도 족장의 이름으로 그걸 부당하게 받아 드시는 건 아니죠?”
“으…응? 하하. 그럴 리가 있나.”
“표정을 보니 딱 그럴 리가 있어 보이네요. 뭐, 좋아요. 사육장 관리를 모야족이 하는데 그런 일이 없을 수가 없겠죠. 너무 과하게만 하지 마세요.”
“하하. 걱정 마.”
로빈은 모르고 있었지만 백랑이 공급받는 그것의 일부는 영주 저택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목적지는 바로 윌리엄과 카인.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조율하는 존재가 바로 저택의 실세 마리아나였다. 그야말로 등잔 밑이 어두운 꼴이었는데.
이래서 측근 비리가 무섭다는 것일까? 로빈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기본적인 논의가 얼추 마무리되어 갈 무렵.
지온이 새로운 안건을 꺼내들었다. 영지 재정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일이라 지온이 관여하지 않을 수 없는 사안이었다.
“영주님, 그럼 게이트는 어쩌시겠습니까?”
“그게 남았죠? 어쩔까요? 어차피 당장은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변경백이 되면서 그레이츠 영지에 워프 게이트를 설치할 수 있는 자격이 생겼다. 물론 대단한 특혜였지만 조금 미묘한 면도 있었는데 자신의 돈으로 게이트를 올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게 생각보다 돈이 엄청 많이 든다.
드는 돈도 돈이지만 시기를 생각해도 당장 게이트를 건설하는 건 득보다 실이 많았다. 어차피 비싸서 사용하지도 못할 게이트를 서둘러 만들 이유가 없는 것이다.
훗날 마나석이 많이 풀리면 그때는 좀 여유롭게 사용할 수 있을 테니 그때를 기점으로 건설하는 게 오히려 나으리라.
“당연히 그렇습니다만, 변경백이라 면세 대상이시니 생각보다 부담이 덜할 수도 있습니다.”
“아, 그랬죠.”
면세. 이 얼마나 아름다운 울림인가. 세상에서 가장 기분 좋은 건 역시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이었다.
그나마 변경백이 할 만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면세 때문이었다. 물론 그 이상으로 돈을 쓰게 될 테지만 그건 적당히 조절할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꼭 돈 때문에 게이트를 짓지 않겠다는 건 아니에요. 왠지 대단하신 전하께서 게이트가 있으면 자꾸 절 찾으실 거 같거든요. 그런데 굳이 빨리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싶네요.”
분명 황태자는 나에게 북방의 일만 신경 쓰면 된다고 했었다.
하지만 진짜 그럴까? 황도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나를 찾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황태자가 직접 나서서 나를 영웅으로 만들어놨으니 민심 쪽으로 들어가면 은근히 써먹을 곳도 많을 것이다.
원래 한입으로 두말하는 양반은 아닌데 이번에 보니 은근히 뻔뻔한 게 나에게는 한입으로 세말도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물론 나도 이곳 일로 바쁜데 설마 그럴까 싶긴 하지만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보다는 불가능한 것이 더 마음 편했다.
이제 황태자가 감찰권을 등에 업고 부패한 귀족 누군가를 타깃으로 잡을 것이다. 물론 소설에서는 힐데 후작이 그 대상인데, 지금은 워낙 많은 것이 변해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누군가가 조셉 공작과 밀접한 인물임은 분명했고, 당연히 황도는 다시 개싸움의 장으로 변해갈 것이다. 자신의 수족을 자르겠다는 데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 말이다.
물론 최후에는 황태자가 승기를 잡겠지만 굳이 거기에 한 발 담그고 싶지는 않았다.
“당분간은 영지 일만 신경 쓰고 싶네요. 변경백 일이랑요. 변수는 최대한 줄여야죠.”
“옳은 말씀이지만 1년 안에 게이트를 올리는 경우에는 황실에서 50%를 지원해 주니 이것 때문에라도 좀 서두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그런 게 있었군요. 그런데 지금 영지 사정으로 게이트 건설이 가능하긴 해요?”
이건 또 몰랐다. 나처럼 꾸물(?)대는 사람이 있을까 봐 지을 거면 빨리 지으라는 나름의 대비책이 아닐까?
그런데 50%라도 제법 많은 돈인데 지금 상황에서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
“그?”
“만약 영주의 사적 자금까지 꺼내 쓴다면 가능하긴 합니다. 훗날의 소비를 줄일 수 있는 일이니, 가능하면 빠른 시일 안에 착공하는 게 나을 거 같군요.”
“엥? 그런 게 있어요?”
영주의 사적 자금? 무슨 비자금인가?
이런 게 대체 왜……. 아아, 그렇구나.
그러니까 지온은 영주의 품위 유지비나 영주 일가의 생활비처럼 영주가 개인적으로 쓰는 돈을 말하는 거였다.
이건 순전히 영주 개인의 돈이라 영지 자금 목록에 올라오지 않아 기억 속에서도 지워진 상태였다. 원래 영지 수익에서 몇 퍼센트 정도를 지정해 놓으면 그 비율만큼 영주의 주머니로 들어오는 건데.
“그런데 이걸 안 쓰고 있었어요? 지금까지 몇 번이나 허리띠를 졸라맸잖아요? 당연히 이것부터 줄인 줄 알았는데요.”
“영주님의 개인 재산인데 그걸 어떻게 건드리겠습니까?”
이거… 아무래도 나만 나쁜 놈 된 거 같은데. 결국 영지 차원에서 허리띠를 졸라맬 때도 내 허리띠는 빵빵했다는 거잖아?
뭐, 그때도 다들 먹고살 만은 했지만, 왠지 기분이 영.
“그래요?”
“지금까지 쌓아놓기만 해서 좀 그랬는데 이 기회에 그걸 좀 푸시는 게 어떨까요? 게이트야말로 영주들의 진정한 워너비 아니겠습니까?”
확실히 지온의 말이 맞긴 하다. 게이트라면 과시용으로도 공장보다 한 단계 위였으니 말이다.
공작령이나 변경백, 혹은 가장 위험한 군사 요충지 정도에만 설치를 허락했으니 돈이 있다고 설치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명예로운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게 이 게이트라고 할 수 있으리라. 물론 그 가격 때문에 변경백들은 머리를 싸매곤 하지만 어쨌든 설치하기만 하면 제법 으스댈 수 있는 종결급 아이템이었다.
“그 돈은 제 맘대로 그렇게 쓸 수는 없을 거 같네요. 우선 집에 가서 가족들에게 물어볼게요.”
사실 그 돈은 결국 가족들의 생활비였다. 그게 쌓인 이유는 당연히 가족들이 돈을 거의 쓰지 않았기 때문이고.
황도의 귀족들처럼 드레스나 액세서리를 장만하고 파티에 놀러 다녔으면 당연히 그 돈으로도 부족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 돈은 가문의 안주인인 자신의 어머니와도 상의해야 하는 돈이었다.
“그럼 게이트 건설은 좀 뒤로 미뤄 두겠습니다.”
“그러세요.”
회의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백랑이 로빈을 찾았다. 따로 무슨 할 말이 있나 싶어 대화를 나눠 보니 신전에 있는 폴의 이야기였다.
“아 참, 영주님. 폴 경이 깨어난 건 알지?”
“예. 그렇지 않아도 회의 마치면 바로 찾아가볼 생각이에요. 아직 신전에 계신다죠?”
“그렇지. 꼭 한번 가봐. 가서 너무 놀라지는 말고.”
“백랑이 그러니까 뭔가 불안하네요. 아직도 거동이 불편하신가요?”
“음……. 좀? 그런데 우선 가봐. 이게 설명하기가 좀 그러네.”
뭔가 웃음을 참는 듯한 백랑.
저 양반이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사람 불안하게.
“아, 그렇지. 백랑, 폴 경을 만난 후에 점검 차 기사단하고 전사들을 찾아갈 거예요! 준비하……. 와, 벌써 갔어? 뭐야, 이 속도.”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