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기사단 중에서도 수위권의 무력을 자랑하고 성품이 성실해 인정받고 있는 기사.
이번 재앙 때 마지막 그 괴물을 같이 상대했던 10인의 특공대 인원이기도 했던 이 기사는 예전부터 루이와 함께 기사단의 차기 단장감으로 많은 지지를 받아왔다.
그리고 다음으론 역시 루이 경.
지금은 치안대를 맡고 있지만 원래 기사단이었고 폴 경의 뒤를 이어 기사단을 이어받을 만한 인재라고 평가되어 왔으니 적합한 인사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치안대를 잘 다뤄 온 것만 봐도 통솔력이 출중하다는 건 두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리라.
하지만 폴은 다른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루이는 지금 맡은 치안대가 딱 맞습니다. 사실 기사단은 치안대와는 달리 통솔력보다는 무력이 더 중요한 자리죠. 그리고 제필은……. 제법 대단한 기사긴 하지만 역시 단장감이라고 하기에는 좀 부족합니다.”
“음…….”
그래서 대체 누굴 생각하는 거지?
“그래서 린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
린나니를? 그 녀석이 단장감이라고?
왜 굳이 그런 짓을……. 그 녀석에게 통솔력이라는 게 존재하기나 한가? 돌격대장이라면 몰라도 기사단장이라니.
“하하, 영주님의 그런 표정은 정말 오랜만이군요. 사실 아직은 좀 부족하지만, 린 정도면 영지의 기사단장으로는 충분하죠. 사실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무력이니까요. 상급 마수 정도의 적을 상대할 때 단칼에 상대의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함. 이것만 있으면 기사단 관리 문제는 부단장이 알아서 보조해 줄 겁니다.”
“아, 르보른 경이요? 하긴…….”
사실 폴도 기사단의 실무보다는 기사들의 훈련에 주력하는 인물이었고 소소한 잡무는 부단장인 르보른이 맡아서 처리하고 있었다. 그러니 만약 단장이 바뀐다 해도 기사단 업무 자체에 문제가 생기는 일은 없으리라.
하지만 린이라니. 이건 좀 생각해 봐야 하는 부분이었다. 물론 폴도 생각을 많이 해보고 내린 결정이겠지만 다른 기사들도 이방인에 가까운 린을 기사단장으로 받아들일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단순한 해결책이 있으니까요.”
“그게 뭔데요?”
“당연히 대련 아니겠습니까? 가장 강한 기사가 단장이 되겠다는데, 누가 감히 불만을 보이겠습니까?”
폴 경에게도 이런 마초적인 성향이 있었나?
그렇게 쉽게 해결된다고?
하지만 저렇게 자신하는 걸 보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바로 기사단 연무장을 찾았다.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단장을 선출하고 체재를 정비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거동하실 수 있는데 왜 아직 신전에 계시는 거예요?”
“그야 당연히 줄리가 거기 있어서죠. 하하. 요즘은 줄리 없이 잠들기가 좀 힘들어서요.”
“음…….”
이래서 늦바람이 무서운 건가? 너무나 당당하게, 당연하다는 듯이 저렇게 말하니 오히려 내가 할 말이 없네.
게다가 저렇게 흡족한 표정이라니.
하긴 남들이 온갖 조언을 다 구할 정도로 이론에 빠삭한 줄리에타 대사제가 얼마나 또…….
이거, 폴 경에게도 그것이 필요하겠군.
줄리에타는 죽은 물건을 다시 세우는 방법도 수십 가지나 알고 있어서 책까지 낸 끔찍한 양반이었다. 심지어 40년간 지켜오던 처녀까지 바치면서 드디어 고기 맛을 알아버렸고, 이제 완전히 폭발시킬 테니 잘못하면 폴이 죽을지도 모른다.
* * *
로빈이 고민하는 사이 기사들의 수련장에 도착했다.
기사들은 오랜만에 이곳을 찾아온 폴을 큰 함성으로 반겨주었는데. 신전을 찾아 병문안을 오곤 했지만 그래도 수련장에서 나타난 폴의 모습이 많이 반가운 거 같았다.
그리고 수련장 구석에서는 세이라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상대는 바로 듀발.
이 녀석이 또 듀발을 귀찮게 하는 모양이었다.
이제 열한 살로 넘어가는 세이라는 아직 작았지만, 몸놀림만은 날렵하고 기민했다. 마나의 수발과 배분도 더 능숙해 보이는 게 남쪽 마을에서의 훈련이 제법 효과가 있었던 거 같다.
물론 아직도 근력이나 지구력 자체는 좀 부족해 보이지만 저것도 시간이 곧 해결해 줄 것이다.
“히힛~ 좋아, 좋아~”
“좀 더 강하게, 그리고 바로 연타로요. 좋습니다, 아가씨.”
쌍검을 신명 나게 휘두르는 세이라와 그녀의 검을 방패로 막으며 지도해 주는 듀발.
어쨌든 듀발은 참 성실한 녀석이었다. 세이라를 저렇게 꾸준히 관리해 주니 말이다. 실력도 이제 제법 준수한 수준이었고.
나도 저 정도만 되면 좋겠는데 말이야.
영주 업무를 보는 틈틈이 로빈도 자신의 몸을 단련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근육이 잘 붙는 몸도 아닌데다가 저번처럼 실전에 맞닥뜨리면 당황해 발이 굳어버리는 수준에 불과했다.
심지어 마나를 이용해 몸을 제어하는 것도 어색하기만 하고 좀처럼 늘지 않았다.
이게 재능의 한계란 말인가?
자신의 몸 정도는 보호할 수 있길 바랐는데 아무래도 그건 힘들 거 같았다. 정말 다시 태어나기라도 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린이 기사들과 어울리고 있었는데 확실히 녀석은 군계일학이었다. 폴이 아무런 이유 없이 린을 기사단장으로 추천한 게 아닌 것이다. 생각보다 기사들과 잘 어울리기도 했고.
“자! 그만. 모두 모여라!”
폴이 소리치자 모든 기사가 일사불란하게 모여들었다.
그리고 바로 본론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했는데.
기사들은 진지한 얼굴로 폴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차기 단장으로 린을 이야기하자 기사들이 조금씩 술렁이기 시작했다.
“기사단이 언제부터 말이 앞서는 곳이었나. 린을 차기 단장으로 모실 수 없다는 기사들은 모두 앞으로 나서라. 단장 자격 검증을 시작한다!”
이런 게 있었어?
린의 단장 자격을 의심하는 기사들의 수는 대략 60여 명. 지금 이곳에 있는 기사들의 반수 정도였다.
이 기사들을 차례차례 쓰러트려서 단장의 자격을 인정받는 모양이다.
그렇다는 건 나머지 반은 린을 단장으로 인정하겠다는 건가? 린에 대한 평가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데?
“헤~ 싸우는 거야? 좋아! 오늘은 주인도 지켜보고 있겠다, 좋은 모습을 보여야겠어!”
기사가 수십 명이나 나선 상황이지만 린은 이미 린나니 모드로 들어간 상태였다. 기합이 잔뜩 들어갔다고나 할까?
그리고 한 명 한 명 차례로 상대하는데.
“룬드 아저씨, 다리가 비었는데? 어제 너무 무리한 거 아냐? 후덜덜해?”
“핀핀 경은 언제나 가드가 허술하네? 이러면 마수한테 죽을 텐데? 주애 언니를 과부로 만들 작정이야?”
“카자이스, 허리가 왜 이래? 이렇게 허리를 못 쓰니 유유 사제님이 널 안 받아주는 거야.”
“로피드, 넌 진짜……. 맨날 술만 마시러 다니지 말고 훈련 좀 제대로 받자. 기사단이 장난이냐?”
차례대로 린에게 격퇴당하면서 정신적 대미지까지 받는 기사들의 모습이 좀 짠할 지경이었다.
린이……. 진짜 강하긴 하구나.
린은 정말 강했다.
애초에 린의 타이틀인 흉포한 검은 야수는 민첩성과 근력, 탄력과 유연성까지 모두 수준 이상에 이르렀을 때만 획득할 수 있는 대단한 타이틀이었다. 게다가 마나의 사랑의 받는 자는 정말 두말할 필요도 없는 사기적인 타이틀이었고.
심지어 저 린은 폴에게 대검 쓰는 걸 배운 후, 모야족 마을에서 꾸준한 대련 경험을 통해 대인전까지 마스터했다. 수많은 마수를 상대한 것은 덤이었고 말이다.
그러니 저렇게 강할 수밖에.
그렇게 차례차례 기사들을 쓰러트린 린은 드디어 호적수라 할 수 있는 제필을 상대하게 되었다. 린도 제필을 상대할 때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짝 긴장한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
제필도 준수하게 단련된 육체에 대검을 능숙하게 다루는 능력 있는 기사였다. 차기 에이스란 소리를 괜히 듣는 건 아닐 테니 린도 지금까지처럼 만만하게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린 양의 자격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미련은 남아서 말이야. 한번 제대로 붙어보자고.”
“좋죠, 제필 경. 경이라면 저도 최선을 다할 수 있겠어요.”
응? 저 녀석이 존댓말도 할 줄 알았나?
폴 경한테만 존댓말을 쓰는 줄 알았는데 딱 보니 자신이 존중할 만한 강자에게는 저 녀석도 존댓말을 쓰는 모양이다.
그런데 나한테는 왜 주인이라고 부르면서도 반말이야?
이거이거. 한번 혼내줘야 하나?
끙, 아니다. 괜히 나대다가 오히려 역관광당할라. 우선 저 녀석의 약점을 파악하기 전에는 얌전히 지켜만 봐야겠다.
로빈이 툴툴대는 사이 드디어 두 기사가 거칠게 충돌했다.
“핫!!”
선공은 제필이었다.
짧은 기합과 함께 빠른 스텝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줄이더니 바로 기습적인 강격을 날린 것.
하지만 린은 기다렸다는 듯 날아드는 대검을 빗겨낸 후 바로 그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제필 역시 만만치 않았다.
즉시 몸을 반 바퀴 돌리며 린의 대검을 쳐낸 그는 린의 힘을 추진력 삼아 반대로 몸을 돌려 린의 허점을 노리고 들어간 것이다.
상대의 반응에 몸을 웅크려 대검을 피한 린은 다시 기습적인 찌르기로 응수하는데.
그야말로 물 흐르듯이 부드럽고 흑표범처럼 기민한 몸놀림이 아닐 수 없었다.
“진짜 대단하네. 저런 공방이라니.”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박한 공방에 로빈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고, 다른 기사들도 로빈과 마찬가지인지 진지한 얼굴로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힘은 분명 린이 부족하네. 아무리 단련했다고 해도 10년은 더 수련한 수위급 기사를 압도할 수 없는 거지. 하지만…….”
힘만 보면 분명 린이 좀 부족했지만, 유연성이나 날렵함, 그리고 힘의 완급 조절에서는 제필을 압도하고 있었다.
계속되는 공방으로 강공 일변도인 제필의 움직임은 조금 무뎌진 데 비해 린의 움직임은 시작했을 때와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저 날렵한 몸놀림 속에 가려진 미묘한 타이밍의 엇박자 공격은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저건 아마 백랑이나 모야족 전사들에게서 배워 온 전투 감각이겠지? 그 양반들이 도끼를 저런 식으로 다루니까.
하지만 저 큰 대검을 들고도 몸과 무기를 저 정도까지 제어할 수 있다니. 이대로 가다가는 결국 린이 제필을 넘어설 것이 분명했다.
정말 격세지감이군.
예전에 모야족 마을에서는 린이 공격 일변도로 강공을 쏟아붓다가 듀발의 방패에 무너지고 말았는데 이젠 린이 저런 섬세한 움직임을 보이다니.
“어? 그런데 난 이런 걸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설마 몸은 못 따라오지만 보는 재능만은 대단하다는 거냐? 그건 솔직히 너무 안습이잖아?
예상치 못한 자신의 재능을 깨닫고 기가 막힌 로빈이 한숨을 내쉴 때 그의 예상대로 린의 검이 지친 제필의 대검을 후려쳐 밖으로 날려버렸다. 강약을 조절하다 순간적으로 마나를 집중해 제필이 예상할 수 없는 힘으로 한꺼번에 몰아친 것이다.
그야말로 발군의 마나 제어력이었다.
자신의 무기가 날아가 버리자 당황한 제필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한참 헛웃음을 지었다. 하긴 10년을 넘게 무기를 다뤄 왔겠지만 저런 식으로 허무하게 목숨과 같은 병기를 놓쳐본 것은 아마 처음일 것이다.
그리고 이내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린에게 다가가 군례를 올렸는데. 그야말로 린을 자신의 기사단장으로 인정한다는 제스처였다.
군례를 받은 린도 웃으며 제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역시 북부 기사다운 뒤끝 없고 담백한 태도라 로빈도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무슨 청춘 만화의 한 장면 같군. 좀 오그라드는 느낌이지만 대충 린이 기사단장으로 인정받는 분위기인가?”
로빈의 예상대로 제필까지 린을 인정하자 다른 기사들도 점점 순응하는 분위기였다. 폴의 예상대로 대련을 통하니 순리대로 그렇게 흘러간 것이다. 역시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다운 판단력이었다.
그나저나 모야족 여성인 린이 차기 기사단장이라. 마을의 전사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단순히 그냥 자랑스러워하는 수준에서 끝나지는 않을 거 같은데.
이제 곧 모야족 마을에 들러야 하니 가보면 알게 될 것이다.
“르보른 경, 이렇게 린이 기사단장이 되었는데요. 지금까지처럼 잘 부탁드릴게요. 아시다시피 저 녀석이 좀 못 미더워서요.”
“아니, 주인. 내가 왜?!”
그걸 몰라서 묻냐?
네가 그걸 모르고 있다는 거 자체가 가장 큰 문제다.
어찌 보면 새로운 단장이 취임하자마자 영주가 디스한 꼴이지만 린과 로빈의 관계를 잘 알고 있던 부단장 르보른은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하하. 네. 영주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제 겨울이 되면 방비를 철저히 해야 하는 거 아시죠? 아까 보니까 린이 대련을 통해 기사들을 훈련하는 건 그럭저럭 괜찮은 거 같은데 물자 정비나 이런 일은 완전 엉망일 거예요. 그러니 경만 믿겠습니다.”
“원래 그런 일은 제 몫이었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길.”
“그래요.”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