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그렇게 부단장인 르보른에게 몇 가지 당부 사항을 전달한 후 입을 삐죽 내민 린을 데리고 남쪽 마을로 출발했다.
“폴 경은 이제 어쩔 생각이세요?”
“우선 좀 쉬다가 다른 녀석들처럼 아이들을 가르쳐볼까 합니다. 교단의 아이 중에도 재능이 보이는 녀석들이 있더군요.”
“그래요?”
폴이 함께 교단으로 돌아가는 길에 슬쩍 물었는데 폴 역시 다른 은퇴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을 가르칠 모양이었다.
게다가 교단의 아이들을 가르치겠다니.
결국 앞으로도 교단에서 머물겠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하긴, 줄리에타 대사제, 아니 성녀가 교단을 떠나는 건 아무래도 무리겠지.
이제 앞으로 시간이 좀 지나면 제법 많은 교단의 아이들이 영지의 치안병으로 일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폴이 또 훈련하고 조련하는 쪽으로는 나름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럼 몸조리부터 잘하세요. 종종 뵈러 올게요.”
“하하, 네. 영주님. 저도 종종 저택에 들르겠습니다. 이제 카인 님이랑 낚시도 다니고 그래야죠.”
단장으로 일할 때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폴을 뒤로하고 로빈은 린과 함께 모야족 마을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기사단의 상태를 살펴보았으니 이제 전사들의 상황이 어떤지 눈으로 확인할 차례였으니 말이다.
백랑 이 양반, 내가 말도 하기 전에 사라졌는데 얼마나 잘하고 있나 매의 눈으로 한번 지켜봐야겠다.
* * *
“오, 영주님. 게다가 린까지. 웬일이야, 말도 없이?”
그 말을 하기도 전에 당신이 사라져버렸다고, 이 양반아.
놀라는 백랑의 모습에 헛웃음을 지은 로빈은 전사들의 상태가 어떤지 확인하러 왔다고 말한 후, 린이 새로운 기사단장이 되었다는 소식까지 전달했다.
“진짜? 하하. 역시 이 백랑의 딸이구나. 잘했다, 린.”
“응. 이제 주인을 지키는 건 나야!”
솔직히 여성 기사단장에게 보호받는 영주라는 사실에 좀 묘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린과 제필의 대련을 보니 보호받는 게 오히려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지간히 잘 싸워야지.
이제 진짜 우리 영지의 기사들이 황실 근위대랑도 맞짱 뜰 수 있는 게 아닐까?
“아가씨가!! 영지 기사단을!! 정복했다!!”
“이제!! 남은 건!! 영주님뿐이다!!”
“정!!복!!”
“아가씨를 2부인으로!!”
“가즈아!!”
역시 이 인간들, 이럴 줄 알았지.
린이 기사단장으로 취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들썩이는 모야족 마을.
게다가 이어지는 이야기는 정말…….
하지만 조금 생각해 봐야 하는 게 자신이 백작으로 승작하며 2부인이란 자리가 생겨나서 상황이 조금 이상하게 되었다. 린이나 실비아 중 하나를 2부인으로 삼아야 하는 순간이 올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누굴 2부인으로 삼고 누굴 첩으로 삼는단 말인가? 대체 무슨 기준으로.
자신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게 이쪽 사람들 사이에서는 제법 큰 문제인 거 같았다.
하지만 자신도 생각하지 않는 걸 벌써부터 생각하고 있었다니. 정말 계산이 빠른 사람들이었다.
원래 모야족이 이런 사람들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혹시 문명(?)이 이들을 망쳐놓은 건가?
로빈은 새어 나오는 한숨에 고개를 저으며 빨리 전사들의 상태부터 보고해 달라고 요청했다.
“전사들이야 언제나 만전이지. 다쳤던 녀석들도 다 회복했어. 마수를 제대로 상대한 것도 벌써 몇 년이나 지났잖아? 이제 웬만해서는 문제 될 것도 없을걸? 솔직히 이젠 상급 마수도 한 번쯤은 상대해 보고 싶을 정도야.”
자신감이 대단한데. 물론 지금까지 늘어난 전사의 수만 생각해도 저런 자신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가요? 물자도 충분하고요?”
“물자야, 뭐. 부족할 일이 없지. 우리야 원래 혼 래빗만 잡아먹어도 겨울을 날 수 있는 부족이잖아.”
그렇지. 이 육식 부족.
균형 잡힌 식사를 위해 일정량의 곡식을 섭취하고는 있지만 원래 숲에서 살 때는 지금처럼 곡식을 넉넉하게 구할 수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식성은 육식으로 굳혀졌고.
그러니 자신들이 운영하는 사육장에서 나오는 고기만으로도 겨울을 나기는 충분할 것이다.
“너무 편식하는 건 아이들한테 안 좋거든요. 말린 과일이나 곡식도 꾸준히 섭취하세요.”
“아니, 무슨 월아 같은 잔소리를……. 영주님, 그렇게 깐깐하면 여자한테 인기 없다? 남자란 자고로 대범한 면이 있어야지.”
오호라, 이 양반이 한번 해보자는 건가?
영주의 진심 어린 충고를 한낱 잔소리로 치부한다고? 게다가 저 말투는 은근히 기분 나쁜데?
좋아. 그렇다면.
“뭐, 그래요. 그나저나 하얀 늑대 기사단은 요즘 어떤 거예요? 검은 곰 기사단이랑도 잘 지내는 거죠?”
“아니, 왜 또 굳이 그 명칭을…….”
중2병이 이렇게 해롭다. 시간이 지나도 부끄러움은 사라지지 않거든.
처음에 자신의 전사들을 하얀 늑대 기사단이라고 불러달라던 백랑은 곧 뭔가 느껴지는 게 있었는지 다시 원래대로 그냥 전사들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흑웅을 따르던 용병들이야 어차피 자신들의 용병단 이름이라 검은 곰 기사단이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았겠지만, 전사들에게는 하얀 늑대 기사단이란 호칭이 많이 생소했을 것이다.
거기다 족장이 독단으로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붙인 셈이니 전사들의 불만도 제법 뒤따르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아는 모야족 전사들이라면 백랑을 짠한 눈으로 바라봤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렇게 은근슬쩍 호칭을 수정한 걸 너그러운 마음으로 지적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뭐, 정식 명칭은 그거니까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끙.”
“때가 때이니만큼 하얀 늑대들의 관리에도 신경 써주세요. 단장님이 큰 늑대잖아요. 하얀 늑대라니까 좀 기네요. 음, 그냥 백랑 기사단이라고 할까요? 백랑 기사단의 기사단장 백랑. 나쁘지 않은데요.”
“…영주님, 미안. 이제 부디 그 낯 뜨거운 이름은 기억에서 지워 주겠어?”
훗, 이겼다.
“봐서요. 그런데 진짜 전사들은 문제없는 거죠?”
“언제나처럼 그렇지.”
백랑이 로빈을 안내한 곳은 바로 전사들이 훈련을 받는 곳이었다.
아니, 이걸 훈련이라고 할 수 있을까? 솔직히 훈련이라기보다는 그냥 치고받으며 싸움질을 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거 같았다.
실전처럼이 아니라 그냥 실제로 싸우던 전사들은 둘 중 하나가 쓰러지고 나서야 겨우 대결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쓰러진 전사는 들것에 실려 어딘가로 사라지는데.
“…저거 설마 시체를 버리는 건 아니죠?”
“응? 에이, 무슨 소리야. 당연히 신전으로 가는 거지.”
백랑의 말을 들어보니 저번 재앙과 마을 축제 이후 신전의 인기가 엄청 높아졌다고 한다. 남녀 모두에게 어필하며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그런 중요한 장소로 급부상한 것이다.
게다가 상처를 입어 사제에게 치료를 받았던 전사들은 그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저렇게 다칠 일을 만들어 치료부터 받으러 간다는데.
“응, 맞아. 사제 언니들은 정말 대단해. 나도 요즘은 여신님께 기도를 드린다니까. 그날도…….”
뭔가를 회상하며 얼굴을 붉히는 린.
그러고 보니 이 녀석도 저번에 탈진으로 앓아누웠고, 사제의 치료를 받았었다.
너, 설마. 그날 그랬던 거야? 정말 교단이 남녀를 가리지 않고 그렇게 치료하는 거라고?
로빈이 황당해하는 와중에도 설명은 이어졌다.
“그런데 전사들이 사제를 따르니까 마을 처녀들도 사제가 되고 싶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일부 처녀들이 지금 사제 교육을 받고 있어.”
그러니까 인기 있는 전사들을 겟할 목적으로 처녀들이 사제를 지망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런 불순(?)한 목적으로도 사제가 될 수 있는 건가? 물론 결혼을 막는 교단은 아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그런데.
“응? 사제님들은 엄청나게 반기시던데. 자매들이 늘어나는 건 무조건 축복받을 일이라나?”
그야말로 결혼을 목적으로 위장 취업(?)하는 셈인데도 이렇게 반겨준다니. 사제들의 반응을 보니 저게 교리상으로도 문제는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헛웃음을 짓던 로빈도 이어지는 백랑의 포부에는 기함하고 말았는데.
“그러니까 마을 처녀들을 다 사제로 만들어서 전사들이랑 결혼시키는 거야. 그럼 자연스럽게 전사 하나당 전속 사제가 생기는 거지. 그러면 이런 거친 훈련을 계속 받아도 안전하지 않겠어?”
일명 1전사 1사제 프로젝트. 머리 하나당 메딕이 하나씩 붙은 격이었다.
당연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백랑도 아무 생각 없이 이런 의견을 낸 것은 아니었다.
“들어보니까 결혼하면 남편에게 봉사하는 거로 의무를 다할 수 있다던데? 여신님에 대한 존중과 신앙을 버리지만 않으면 신성력은 유지된다니까. 그러니 안 될 것도 없지.”
이거 진짜냐? 결혼해도 신성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어쩐지 사제들이 신붓감으로도 은근히 인기가 있다 했더니 이런 비밀이 숨어있었군.
이놈의 교단은 대체 까도까도 계속 새로운 정보가…….
잘 생각해 보니 줄리에타 성녀도 폴과 결혼한 것과 마찬가지인데 신성력을 잃지 않았다. 애당초 결혼 목적으로 사제가 되겠다는데도 반가워하는 교단이었고.
이건 도대체 무슨 포용력이냐?
여신님, 당신은 정말…….
“우선 해보세요. 어떻게 되나 한번 보죠.”
모야족이 나서서 직접 시도해 본다니 말릴 생각은 없었다. 자신도 이게 되나 결과가 좀 궁금하긴 했으니까.
아무래도 신전과의 관계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할 모양이다.
잠시 신전 문제로 정신을 놓았지만, 눈은 계속 전사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축제 때는 잠시 즐기며 휴식을 취했지만, 꾸준히 단련하며 실전 감각을 잃지 않은 전사들.
방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는 백랑의 말은 사실이었다. 뭔가 꼬투리라도 잡으려 해도 이렇게 열심히 훈련하고 있으면 그냥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몇 명은 거친 실전 끝에 바로 신전으로 실려가지 않았던가.
전사들의 장비 상태와 비축해 놓은 식량의 양, 그리고 요새의 방비 상태까지 모두 확인했지만 아무런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고, 로빈은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마을 밖에서는 모야족 주민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로빈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영주 성으로 돌아가는 자신을 배웅하려는 모양이었다.
“영주님! 다음에 방문할 때는 세 명이요!”
“아가씨는 이제 성인입니다!”
응, 내가 아직 아니야. 아직 1년도 더 남았거든.
하여간 이 사람들도 참 한결같다니까.
주민들의 격한 환호에 헛웃음을 지은 로빈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준 후 바로 영주 성으로 출발했다. 남쪽 요새의 방비 상태도 확인하고 생각지도 못한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었으니 제법 의미 있는 방문이었다.
* * *
“예? 그분이요? 의외네요. 알았어요.”
남쪽 마을을 살펴보고 돌아오니 예상치 못한 일이 로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흑마법사 원로이자, 실비아의 스승인 알버스가 로빈과 만나길 원한다는 이야기였다.
원래 실비아를 가르치는 것 외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신 분인데 갑자기 자신을 찾는다니 로빈도 의아함을 느끼며 접견을 허락했다.
혹시 실비아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알버스의 용건은 실비아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
아니, 전혀 상관없는 건 아니려나?
“이번에 마법 공학자들을 더 모집한다고 들었네.”
“예, 아무래도 일이 계속 늘어나는데 히센 님 하나로는 좀 부족해 보여서요.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흠흠, 이거 참…….”
머뭇거리면서 겨우 이야기를 이어 나가는 알버스의 표정이 상당히 착잡해 보였다.
“내 영주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 이렇게 보자고 했네. 영주는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남쪽에서 말이야…….”
알버스의 말에 따르면 이번에 제법 인명 피해를 낸 남쪽에서는 흑마법사에 대해 좋지 않은 이야기들이 떠돌고 있단다.
원래는 영주나 지도층이 나서서 이런 말도 안 되는 낭설이 퍼지는 걸 막아야 하지만 대부분 방조하는 분위기였고, 심지어 은근히 부추기는 자들도 있어서 흑마법사들이 제법 곤란한 지경에 처한 것이다.
“아마 사람들도 흑마법사 때문이 아니란 건 알 거야. 하지만 그냥 답답하고 억울하니까 원망할 대상을 찾는 건데 거기에 흑마법사가 걸려든 거지. 하지만 우리들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밖에.”
특히 중간에서 중재하고 민심을 수습해야 할 영주들도 은근히 자신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니 신물이 나 도저히 남쪽에서 버틸 수가 없었단다.
“그래서 남쪽에서 일하던 흑마법사들이 대부분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었지.”
흑마법사에 대한 안 좋은 소문들이 떠돈다는 이야기는 이미 황태자에게 들은 바가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이 일의 책임을 흑마법사 쪽으로 돌려 물을 흐리려는 3황자파가 있다는 이야기까지 말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