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영지의 주 수입원은 군부 쪽으로 넘기는 가죽의 판매 대금이었다. 물론 혼 래빗의 신체 부위 중 일부를 귀족들에게 넘기는 것도 제법 돈이 되지만 군부 쪽에 문의를 넣는 것만으로도 대략의 사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원래라면 당연히 그런 정보가 공개되지 않겠지만 변경백 임명을 위한 조사라면 군부에서도 기꺼이 협조했을 것이다.
“그렇군요. 사실 영지에서 흑마법사와 마법 공학자를 고용하려고 합니다. 그분들이 좀 비싼 분들이라서요.”
[아, 그렇군. 흑마법사라. 혹시 알버스 원로의 제자들인가?]
“네, 잘 아시네요.”
로빈의 대답에 황태자도 고민되는지 잠시 아무런 말도 없었다.
[좋아. 그런 일이라면 기꺼이 협력해 주지. 그래서 원하는 건 게이트 건설인가? 설마 그냥 게이트를 만들어달라는 건 아닐 테고.]
“예. 그건 말도 안 되죠. 이번에 북부 쪽을 지원하면 그들에게 대가를 받을 생각입니다. 몇 년에 걸쳐 나눠 받을 테니 황실에서도 그렇게 해주셨으면 좋겠네요.”
[그래. 3년 상환으로 하지. 일은 바로 진행하겠네. 다른 용건은 없나?]
다른 용건이라……. 아, 이게 있었지.
예전에 황도로 올라갔을 때 황태자에게 마지막에 등장했던 그 이상한 괴물과 그걸 지켜보던 마수에 대하여 슬쩍 보고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갑자기 승작과 변경백의 더블 어택에 정신이 팔려 까맣게 잊고 말았다.
그래서 시기가 좀 늦긴 했지만 그건 불가항력(?)이었다. 좀 뒷북 같긴 해도 주인공이 뒤통수 맞은 후에 후회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렇게라도 미리 알리는 편이 나으리라.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도 혼자 정보를 안고 있다가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빈번했으니 말이다.
[그런 괴물이 있었나? 그런 놈을 대체 어떻게 처리한 거지?]
“성수의 힘을 빌렸습니다. 영지의 대사제님이 놈을 일컬어, 신의 뜻에 정면으로 반하는 끔찍한 창조물이라던가?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더군요. 성수가 놈에게 치명적일 거라면서요. 그리고 정말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원래 줄리에타를 만나러 갔을 때 이 일도 물어봤어야 했다. 하지만 줄리에타의 변신이 너무 충격적이라 머릿속이 하얘져서 그러지 못한 것이다.
정말 뭐 하나 원하는 대로 되는 게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자신이 아니라도 황태자에게 설명해 줄 사람들이 많다는 거였다.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꿈과 희망의 교단은 황태자의 일이라면 무조건 발 벗고 나서줄 것이다.
[성수란 말이지. 한번 알아봐야겠군. 그리고 그 마수 말인데 자네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건 정말 어쩔 수 없겠군. 멸망급으로 추정된다고?]
“네, 확실하진 않은데 느낌은 그랬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놈은 정말 끔찍했다.
하지만 황태자의 말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저 그런 놈과 엮이지 않게 조심하는 수밖에.
그나마 다행인 건 지금까지 어떤 기록을 찾아봐도 놈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거다. 그렇다는 건 놈이 인간이 사는 곳까지 내려온 적도 없고, 놈의 서식지 역시 터무니없이 먼 곳이란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말 운이 없는 게 아니라면 놈을 다시 만날 일도 없을 것이다.
[나도 기록을 한번 찾아보지. 아 참, 그런데 그때 이야기한 그 좋은 건 대체 언제 보내주는 건가?]
…아직도 그걸 기억하고 있었나? 그냥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그릭스 공자가 그러더군. 정말 좋은데 말로 표현하기는 힘들다나? 그러니 가능하면 빨리 보내게나. 내 기대하고 있지.]
혼 래빗 홍보대사가 이걸 또? 이상한 데서 혼 래빗 동맹이 탄생한 기분인데.
황태자 입장에서는 중립파인 그릭스랑 이런 식으로 친분을 쌓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그걸 자신이 보내줘야 한다니 기분이 좀 그랬다.
하지만 신세 진 것도 있으니 보내주긴 해야 할 거 같았다.
[아, 그리고 이번 일의 대가로 나중에 내 부탁 하나를 들어줘야겠네. 자네도 내 호의를 받는다는 게 그리 좋은 일은 아니라는 걸 잘 알 거야.]
“…네, 그건 그렇죠.”
황태자의 부탁을 들어주면 이번 일이 황태자의 호의가 아니라 서로 간의 거래가 된다. 그렇게 하면 이상한 잡음이 끼는 걸 줄일 수 있지만, 그가 무얼 요구할지 알 수 없어 왠지 불안하기만 했다.
[그건 나중에 다시 얘기하지. 달아놓게나. 그럼 다음에 보지.]
“엇?”
찝찝하게 달아놓으라고 말한 후 연락을 끊어버린 황태자.
로빈은 뭔가 당했다는 생각에 고개를 저으며 지온을 바라봤다. 지온은 황태자와의 내화 내용이 놀라운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생각보다 황태자 전하와 사이가 좋으시군요.”
“…좋죠.”
아주 끔찍하다고 해야 하나?
저 양반이 은근히 내 스토커나 마찬가지더라고. 아주 모르는 게 없어. 질척질척한 건 딱 질식인데 말이야.
“어쨌든, 일은 잘 해결되었군요. 축하드립니다, 영주님.”
황태자에게 빚을 하나 달아둔 게 잘 해결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게이트를 올릴 수 있게 됐다.
“네, 뭐. 그래요. 그럼 게이트 건은 이렇게 하고. 다른 영주들이 방문했을 때 바로 보내버리게 식량부터 준비해 주시겠어요? 그들이 방문하자마자 바로 출발해야 겨울 전에 도착하겠네요.”
“네, 차질 없이 준비하겠습니다.”
어쨌든 게이트 건을 해결했으니 이제 물자를 정리하는 건 지온의 몫이었다.
* * *
그렇게 다른 영주들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일 때 마법 공학자와 흑마법사들이 영지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영주 저택으로 들이닥쳤는데.
“여긴가? 백작의 저택이라고 들었는데 너무 협소한 거 아냐?”
“여기 스승님이 계신다고?”
“흥, 이런 작은 곳 따위는…….”
“말조심하게나, 변경백령이라네.”
“여기 도리아까지 있다던데.”
“뭐, 그 마녀가?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야?”
“스승님이 가르치는 그 아이가 마녀의 제자라더군. 그리고 소문에 의하면 마녀가 이쪽에 아예 뿌리내렸다던데? 그 전대 영주님인가? 그분이랑 사귄다면서.”
“맙소사, 미쳤군. 그분은 보살인가? 대체 왜 그런 마녀랑…….”
“외모만은 멀쩡하잖아. 속으신 게지.”
영주 저 현관을 점거한 열세 명의 남자.
히센의 친구들이 넷이라고 했으니 흑마법사들은 아홉 명인 모양인데 알버스가 언급한 열 명보다는 한 명이 적었다. 게다가 열세 명이 사이좋게 만담을 나누는 걸 보니 두 패거리임에도 사이가 제법 좋아 보였고.
하지만 도리아 여사에게 마녀라니.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 천생 여성스러운 분이시거늘.
듀발도 린을 마녀라고 불렀던 거 같은데, 웬 마녀가 이렇게 많은 거야?
다만 이야기하는 폼을 보니 알버스의 말과는 달리 뼛속까지 거만하거나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아닌 거 같았다. 전생에서 갑질하는 놈들을 하도 많이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체득한 안목이랄까? 거만하다기보다는 오히려 허세가 느껴지는 태도였으니 말이다.
“왔군. 이쪽은 영주님이네.”
“흠흠.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영주님.”
“알버스 님의 제자 분들이라죠? 환영해요.”
먼저 다가가서 인사라도 해야 하나 고민스러웠는데 때마침 알버스가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안면을 틀 수 있었다. 그리고 성격 급한 사람들답게 바로 테스트부터 하자고 졸라대기 시작했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 제자부터 보죠.”
“얼마나 대단한 제자인지 확인부터 해야겠습니다.”
“그게 무슨 무례인가. 일에는 다 순서가 있는 법이거늘.”
하지만 알버스는 능숙하게 말을 돌리며 결국 내기까지 이끌어냈다.
어르고 달래고 팩트로 후려치며 내기까지 확정 짓는 알버스의 모습은 그야말로 믿음직하기 그지없었다. 역시 늙은 생강이 맵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가 보다.
어쩌다 보니 테스트가 내기로까지 이어지고 당당한 알버스의 모습이 은근히 불안했던 제자들은 실비아가 등장하자 헛웃음을 지으며 기세등등해졌다.
“허, 저… 꼬, 아니 아가씨가 스승님의 제자라고요?”
“저 여린 손으로 수술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의학이 쉬운 학문도 아닌데 저런 아이가…….”
“자자, 말이 너무 길군. 그럼 테스트를 시작해 보지.”
제자들의 무시에도 알버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테스트를 시작하려는데.
실비아는 알버스의 말에 집중하지 않고 뚱한 표정으로 로빈을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이게 무슨 일이냐는 듯 마음에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설마 어르신께 이야기를 미리 듣지 않은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하지만 저 표정은…….
한껏 귀찮다는 표정의 실비아를 보니 왠지 불안해졌다. 정말 만약의 일이지만 저 녀석이 태업(?)이라도 하면 내기는 어그러지고 저들을 염가로 고용할 방법도 요원해진다.
순간 로빈을 빤히 보며 손바닥을 쫙 펴는 실비아.
와, 저 요망한 것이 설마……. 여기서 나랑 딜을 하자고?
저건 나한테 다섯 가지 부탁을 들어달라는 건가? 일명 소원권 다섯 개?
괘씸한 생각이 들었지만, 왠지 이번 일의 공은 실비아에게 넘어간 거 같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손가락 한 개를 펴 보이며 제 뜻을 밝혔지만 실비아는 픽, 하고 웃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마치 협상 결렬이라고 말하는 듯한 실비아의 행동에 로빈은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이런 상도덕도 없는 녀석을 봤나. 바로 협상 결렬이라고?
로빈은 꾹 참으며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하지만 실비아는 요지부동.
이윽고 남자들의 질문이 시작되었지만, 실비아는 대답하지 않고 로빈만 멀뚱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 내가 졌다.
저 상황에서 이런 배짱이라니. 실비아는 생각보다 더 대범한 녀석이었다.
로빈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손가락 세 개를 폈다. 그리고 이게 마지막이며 더 이상 기어오르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인상을 쓰자 그녀도 로빈의 생각을 알아들었는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요망한 녀석, 진짜…….
로빈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을 때, 그녀의 입이 열리고 명쾌한 해답이 튀어나왔다. 이제 본격적으로 내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내기의 결과는 명백했다. 어떤 것을 물어봐도 실비아가 모조리 대답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남자들의 심각한 표정을 보니 아주 정확하게 대답한 모양이다.
한동안 질문을 퍼붓다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는지 아무 말도 못 하는 남자들.
내기의 승패를 굳이 따질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남자들은 순순히 자신들의 패배를 인정했다.
“말도 안 돼. 진짜 천재라고? 이게 말이 되나?”
“그렇다고 내가 바… 바퀴벌레라는 건 아니지만 대단하긴 하군.”
“스승님이 이런 곳에서 썩고 계신 이유가 있었어.”
…거, 이런 곳은 그렇다 치지만 썩고 있다는 말은 좀 그렇지 않나?
아니다. 어차피 저 사람들도 이제 여기서 썩어야 하니 뭐, 상관없으려나?
순수한 일면이 남아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자들은 쿨하게 내기의 결과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앞으로 잘 부탁한다며 인사를 남겼는데.
물론 최선의 결과였지만 로빈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실비아가 대체 어떤 소원을 말할지 예상할 수 없어서였다.
실비아의 능력을 알게 된 남자들은 그녀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당분간 알버스와 함께 실비아를 가르치다가 훗날 그녀가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하면 그 연구를 돕기로 했다.
게다가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제자들을 찾아보겠다나?
원래의 계획과는 조금 달라졌지만, 영지에서 제자를 구하겠다니 오히려 이게 좀 더 나았다. 그런데 실비아 같은 인재를 또 찾을 수 있으려나?
어쨌든, 실비아에게 자신의 아버지뻘인 동기가 아홉 명이나 생긴 셈이었다.
실비아가 저들을 데리고 뭐라도 제대로 해줬으면 좋겠다. 생각보다 유지비가 많이 들어갈 거 같았으니 말이다.
흑마법사들과 마법 공학자들이 늘어나자 그들을 모두 영주 저에서 머물게 할 수는 없었다. 한두 명이면 몰라도 숙소보다 연구 시설이나 연구실, 그리고 공방이 필요한 사람들이었으니 따로 건물을 짓는 게 불가피한 것이다.
그래서 영주 저택 가까운 곳에 그들의 보금자리와 연구실이 포함된 일종의 연구 단지(?)를 새로 마련했다.
“자주 놀러 오너라, 실비아.”
“후, 이렇게 떠나게 되니 서운하구나.”
“내, 잊지 않을 거다.”
이 양반들 보소. 누가 보면 아주 먼 길 떠나는 줄 알겠네.
“주책 부리지 말고 어서 꺼져. 걸어가도 5분밖에 안 되는 거리잖아?”
누가 자신이 할 말을 대신하나 봤더니 도리아 여사였다. 어쩐지 마녀라고 부르더니 과거에 무슨 사건이 있긴 한 모양이다.
하긴 그게 아니라면 저렇게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짓고 계시지는 않겠지.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