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하지만 이게 시간 내로 가능하려나 모르겠다. 만드는 건 어렵지 않지만, 가죽이 오고 가는 시간까지 계산하면…….
“네, 물론이죠. 모두 같은 조건으로 해 드릴게요. 하지만 오고 가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겨울까지 되려나 모르겠어요.”
“하, 망할 대수림. 정말……. 어쨌든 되는대로 해주게나. 내 부탁하겠네.”
“그래, 올해만 사는 것도 아니고 그런 장비를 갖추게 되면 내년부터는 더 쉽게 마수를 막을 수 있겠지.”
아무래도 마법 공학자를 미리 늘려놓길 잘한 거 같았다. 이걸 히센 혼자 만들게 시키려면 혼 래빗 그것 한두 개 정도로는 말도 못 붙였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마법 가죽 갑옷은 어떻게들 알게 되신 거죠? 이게 그렇게 알려질 만한 일은 아닌데요.”
영지를 지킬 뿐 외부 활동을 하지 않는 그레이츠 백작령의 기사들이 마법 가죽 갑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이 다른 영지에까지 퍼져 나간 건 확실히 신기한 일이었다. 종종 외부인이 방문하긴 하지만 대부분 상인이었고 그들은 당연히 기사들과의 접점이…….
있구나. 우버 마을의 신전을 모야족 전사들이 지키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정도로 소문이 퍼진다고? 예전에 용병들도 단순한 가죽 갑옷으로 오해하지 않았나?
그나마 영지와의 교류가 빈번해진 자이트 자작이라면 몰라도 다른 영지에서까지 이걸 알고 있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황도에 소문이 돌고 있더군. 북부의 용맹한 사자와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라나?”
“저도 들었습니다. 적의 도검을 막아내는 은은한 광택의 검은 가죽 갑옷이라길래 최소한 상급 마수의 가죽이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죠.”
로빈은 이 소문의 발상지가 황태자임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이 양반이 참 열일하네. 이런 식으로 마수 가죽 마법 갑옷의 이미지를 바꿔 나가시겠다?
하지만 대체 저 사자 타령은 언제까지 계속할 생각이지? 들을 때마다 손발이 아주…….
다른 건 몰라도 저 사자 어쩌고는 제발 빼달라고 요청해야 할 거 같았다.
게다가 이거, 초상권이라도 지불해야 하는 거 아냐?
어쨌든 황태자가 일부러 퍼트린 황도 쪽 소문을 듣고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난 직접 봤다네. 우리 영지로 혼 래빗을 들고 온 남자들이 신기한 갑옷을 입고 있길래 물었더니 가메라의 가죽으로 만든 갑옷이라더군. 그걸 보고 딱 저거다 싶었지.”
로랜 자작의 말에 로빈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혼 래빗을 들고 온 남자? 우리 영지에서 누가 갔나?
물론 가능하면 빨리 혼 래빗을 전달하라는 지시를 내리긴 했다. 주술 창고 문제는 결국 내년까지 밀리겠지만 번식이라도 미리 시켜놓으면 일이 좀 빨라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로랜 자작이 출발도 하기 전에 혼 래빗을 받았다고? 자신이 명령한 시기를 생각하면 산술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혹시, 까무잡잡하고 도끼를 든 남자들이었나요?”
“응? 아, 그랬지. 와서 사육장 짓는 방법이랑 혼 래빗을 키우는 노하우를 전해주고 갔다네. 창고에 대한 건 차차 전수해 줄 테니 우선 번식부터 시키라더군. 정말 고마웠지. 논의가 채 마무리되지도 않았는데 물건부터 보내준 셈이 아닌가.”
“예, 뭐…….”
아무래도 로랜 자작은 출발 시기를 가늠해 논의 도중 자신이 미리 명령했다고 착각하는 모양이다. 어쩐지 예상보다 더 우호적이다 싶더라니.
당연히 정상적인 루트로 로랜 자작령을 향했으면 그게 사실이겠지만 지금 분위기를 보니 모야족 전사들이 엉뚱한 짓을 벌인 거 같았다.
설마 이 인간들이 대수림을 타고 달렸나? 마수 산맥을 타고 달리진 않았을 테니 남은 경로는 그거 하나뿐인데.
이건 아무래도 백랑이랑 이야기를 좀 나눠 봐야겠다.
로랜 자작이 말을 꺼낸 덕분인지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혼 래빗 쪽으로 이어졌다.
“혼 래빗을 키우게 되면 식량 사정은 많이 나아지겠더군. 그런데 그 녀석이 그렇게 돈이 되나? 아무래도 좀 생소해서…….”
“가장 중요한 건 역시 가죽이죠. 고기도 잘 팔리긴 하는데 효율이 좀 떨어진다고 할까요? 하지만 가죽만 팔아도 충분히 이문을 남길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뿔이 좋은 지혈제이기도 하죠. 그건 영지에서 쓰기만 해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구만.”
“그리고요.”
로빈은 주변을 쓱쓱 둘러본 후, 조금 작은 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 녀석의 거시기가 요즘 핫하답니다. 황태자 전하까지 노리는 물건이거든요. 매물이 워낙 적어서 귀족들도 없어서 못 먹어요. 그게 남자한테 진짜 좋은 녀석이라는데, 혼 래빗 고기 자체도 그런 편이지만 그중에서 이놈은 정말…….”
“뭐… 뭣! 그게 정말인가?”
“그럴 수가…….”
특히 가장 연장자인 맥컬랜 자작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아니, 어르신은 나이를 좀 생각하셔야…….
“요즘 부쩍 기력이 떨어진 참인데 그게 사실이라면…….”
이제 장년을 넘어선 로랜 자작과 가장 어린 델루나 자작 역시 마찬가지의 반응이었다.
아무래도 남자들은 다 거기서 거기인 모양이다.
“끝내주는군요.”
“하하, 좋아. 정말 기대되는군.”
이거 왠지 완전 글러 먹은 거 같은데. 아무래도 이 사람들은 팔 생각보다 먹을 생각으로 가득한 거 같았다.
그리고 거기에 방점을 찍은 것이 바로 경험자 자이트 자작이었다.
“실제로도 끝내줍니다. 제 큰며느리가 이번에 임신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요즘 부인을 잡고 놔주지 않다 보니 하마터면 부인과 며느리가 동시에 임신할 뻔했지 뭡니까.”
“오오, 세상에. 정말 끝내주는군.”
…자이트 자작, 당신마저.
그렇게 한참이나 혼 래빗 그것에 대한 고찰이 이어지고 나서야 겨우 진정하고 다시 본제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어른들의 온갖 무용담(?)을 듣고 있자니 로빈도 급 피곤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팔려도 문제야. 황도까지 상행을 가야 하는데 그걸 어떻게 감당할지.”
“자이트 자작은 그레이츠 쪽에 물건을 맡기고 있겠지?”
“네, 이쪽이야 배로 운송하면 되니 육로를 통하는 것보다는 편하죠.”
“이러지 말고 그냥 물건을 그레이츠 쪽에 다 맡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우리야 거래처도 없고 직접 일을 처리하려면 피곤하기만 하지 않겠습니까?”
“오오, 그게 낫겠구만. 황도로 물건을 운송하는 것보다는 그레이츠 쪽으로 옮기는 게 훨씬 낫지.”
“예? 하지만…….”
“아아, 그냥 운송비랑 이것저것 다 제하고 알아서 나눠 주게나. 돈이 되긴 한다니 뭐라도 남을 게 아닌가. 사실 돈보다 물건이면 더 좋겠지만.”
“그게 좋겠군요. 황도에서 물건 사오는 것만 해도 지긋지긋하니까요.”
“적당히 벌려서 관문이나 제대로 손볼 수 있으면 좋을 거 같은데 말이야.”
이 사람들……. 무슨 계산이 이래?
확실히 이 지방 사람들은 기질이 남다른 건가? 그냥 나한테 지갑을 통째로 맡기겠다는 거잖아?
딱히 큰 욕심은 없어 보이지만 이제 곧 이게 황금 알을 낳는 거위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가죽이 제대로 생산되기 시작하면 저 사람들이 말하는 것들은 충분히 이루고도 남을 테니 말이다.
그나저나 이게 가능하긴 한가?
여전히 고기는 인기 품목이지만 마진이 별로 남지 않아서 물량을 점점 줄이는 추세고, 우리 영지에서 나오는 가죽이랑 자이트 영지의 물건까지 실어도 자리가 많이 남긴 했다.
게다가 우리가 직접 물건을 팔게 되면 생각보다 많은 이문을 남길 수 있으니 거절할 이유도 없어 보였다.
솔직히 어차피 가는 길이기도 하고 만약 물량이 늘어나도 운항 횟수를 늘리면 되니 별문제도 아니었다.
“그러세요. 본격적인 사업(?)은 내년부터 시작하죠. 겨울에 주민들을 파견하는 게 부담스러워서 그런 거니 너그러이 이해해 주세요.”
“그렇지. 겨울에 나다니는 건 아무래도 부담스럽지. 이 지방 사람이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야.”
식량은 바로 출발시킬 것.
마수 가죽으로 마법 갑옷을 만들어 가능하면 빠르게 보내줄 것.
혼 래빗 번식은 미리 시작하되 정식적인 사업은 내년에 시작할 것.
이와 관련해 사용되는 금액은 그레이츠 쪽에서 책임지되 매년 조금씩 상환할 것.
대충 이 정도를 합의한 후 첫 회의를 마쳤다.
회의장을 나서는 영주들의 손에는 통신 수정구가 하나씩 들려있었다. 앞으로 각 영지와 의견을 나눌 수 있게 로빈이 대여해 준 물건이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해 주세요. 서로 머리를 모아보면 좋은 방안이 떠오를 수도 있잖아요?”
“오, 이런 것까지 구해놨나. 우리가 변경백 하나는 정말 잘 뒀구만. 하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변경백.”
“네, 저도 잘 부탁드려요.”
“아, 출발하기 전에 수정구를 좀 빌리지. 황도를 통해 영지에 소식을 전해야겠네. 가능하면 빨리 가죽부터 보내라고 해야겠어.”
“그건 그렇네요. 하루라도 빨리 출발해야 완성도 빨라질 테니까요.”
영주들이 모두 떠나자 로빈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우호적인 분위기로 회의가 마무리되어 한시름 놓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들도 제법 괜찮아 보였다. 그나마 계산이 빠른 자이트 자작을 빼고 나머지 세 명은 천생 기사 같았으니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물욕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물욕이 없으니 욕심도 없고, 크게 사고 칠 일도 없는 것이다.
변경백을 맡은 입장에서는 정말 괜찮은 멤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상황이 안 좋네.”
하지만 각 영지의 방비 상태가 그리 안전해 보이지는 않았다. 특히 계속된 재정 악화와 잦은 전투로 장비의 상태가 악화된 게 치명적이었다.
이러니 계속 병사들이 죽어 나가고 발전이 없지. 게다가 분명 그레이츠 영지보다는 농사가 잘되는 거로 아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다.
“아무래도 갑옷의 보급을 서둘러야겠네. 남는 병사용 갑옷도 보급할 수 있으면 많은 도움이 될 텐데. 무기들도 그렇고.”
로빈은 무기에 대한 이야기를 굳이 지금 꺼내들지는 않았다. 아직 자신의 영지에도 완벽하게 보급된 것은 아니라 다른 영지에까지 보급하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겨울만 넘긴다면 이제 남은 인력으로 무기를 만들어 팔 수 있을 것이다. 대금은 가죽 판 돈에서 제하면 되니 돈 떼먹힐 걱정 없는 아주 좋은 거래처인 셈이었다.
백랑을 찾아 어떻게 그렇게 빨리 혼 래빗을 전해줄 수 있었는지 물어보려던 로빈은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실비아를 만나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 녀석이 웬일로 여기까지? 게다가 웬 기합이 저렇게 들어가 있어?
“영주님! 첫 번째 소원을 정했어요!”
역시 그거냐?
후, 그래.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얕은 수였지만 자신이 당할 수밖에 없던 그날 이후.
실비아는 바로 소원을 빌지 않고 시간을 달라고 했다. 아무래도 뭔가 더 효율적이고 흉악한 수작을 부리기 위해 연구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제야 나타나 소원을 공개하는 건데.
“…그래. 뭘 부탁할 생각이야?”
“후후. 제 첫 번째 소원은 영주님의 침실을 완전히 공개하라는 거예요. 앞으로는 절대 문을 잠그시거나 출입하는 사람을 막으시면 안 되는 거죠!”
…그러니까 내 침실을 공공재로 이용하겠다?
맨날 그 요망한 잠옷을 입고 대놓고 내 방에서 자겠다는 거네?
“그런데 출입하는 사람을 막지 말라는 건, 너 말고 다른 사람도 막지 말라는 거야?”
“네. 그럼요!”
그러니까 자신 하나로는 모자라서 린까지 동원하겠다는 거고.
너, 린나니한테 뭘 받은 거냐?
정말 이 녀석이랑 린나니는 대체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실비, 그렇게 되면 넌 린이랑도 승부해야 할 텐데. 자신 있어?”
“싸움은 정정당당해야죠. 제가 아직 피지컬(?)에서는 한 수 아래지만 테크닉으로 승부하겠어요.”
승작 이후 린과 실비아 사이에 흉흉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원인은 아무래도 2부인. 둘 다 첩으로 확정되었다가 한 명이 2부인으로 승격할 가능성이 생겼으니 서로 견제하는 모양이다.
원래 서로를 꼬맹이, 멍청이로 부르며 아웅다웅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 단계마저 넘어선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정정당당을 따지고 있으니 로빈이 기가 막힐 수밖에.
“뭐, 좋아.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성인식 이후부터 방을 개방하지. 이의는 받지 않겠어.”
이 녀석도 예전의 실비가 아니다. 하루가 다르게 볼륨감이 업그레이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만약 지금 저 녀석이 그때 그걸 입고 막 비벼대면 솔직히 버틸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거기에 린이 추가되면? 아마 부처님이 아닌 다음에야 그걸 버틸 수 있을까?
물론 린은 실비처럼 말도 안 되는 무기를 장착하고 공격해 오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녀석은 숨 쉬는 것 자체만으로도 파괴력이 대단한 살상 무기였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힝.”
실비 역시 로빈의 항변이 타당하다고 여겼는지 입을 삐죽 내밀 뿐 불만을 토하진 않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