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알았어요. 그럼 나머지 소원은 그때 말할게요.”
심지어 소원까지 뒤로 미뤄 버렸는데.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 소원을 미룬 것만 봐도 이 요망한 것이 무슨 발칙한 소원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 만했다.
“좋아. 단, 삽입. 섹스. 사정. 임신. 이런 건 안 된다. 설마 소원 따위로 우리의 숭고한(?) 사랑을 더럽힐 생각은 아니겠지?”
“…헉.”
어떠냐?! 후후.
로빈이 선수를 치자 눈을 동그랗게 뜬 실비아.
그 모습에 한 방 먹였다고 생각하던 로빈은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망연자실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것도 되는 거였어요? 그냥 데이트나 한 번 해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계획을 좀 수정해야겠네요. 영주님, 고마워요!”
…장난하냐?
단순한 데이트인데 대체 왜 미뤄? 와, 이거 진짜…….
워낙 영악해진 녀석이라 저게 진심인지, 아니면 날 놀리려고 수를 쓰는 건지 정확히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왠지 녀석이 소원을 말할 때가 되면 큰 풍파가 일어날 거 같아 불안해졌다.
에휴, 모르겠다. 백랑이나 불러야지.
일하자, 일!!
“영주님. 무슨 일이야?”
로빈이 호출하자 바로 등장하는 백랑.
이분은 요즘 영주 성에서 아주 살고 있는 거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빨리 나타날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설마 이 양반, 새로운 애인이라도 생긴 건가? 영지 내에서 최초로 세 다리를?
“영주 성에 계셨어요?”
“어? 아아, 그렇지. 요즘 마을 처녀들이 사제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있잖아? 그걸 월아도 하고 있거든. 그래서 겸사겸사 신전에 들르고 있어. 내가 월아 없이는 통 잠을 못 자서 말이야.”
아, 그게 있었지. 역시 그 정도는 아니었군.
세 다리라니. 아무리 백랑이라도 그건 좀 무리지.
하지만 월아까지 신전에서 교육을 받고 있다는 건 조금 충격이었다. 생각보다 본격적으로 달려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백랑의 저 말은 그러니까 신성한 신전에서……. 흠흠.
내가 간섭할 일은 아니지만, 너무 절제를 모르는 거 아닌가? 저래서 사제가 될 수나 있겠냐고.
아니지, 오히려 그래서 더 좋은 건가?
뭔가 혼란스러웠지만 깊이 생각하면 자신만 손해인 거 같아 단순히 주의만 주고 넘어가기로 했다. 사제와 관련된 일들은 교단에서 알아서 해결할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요? 하지만 마을도 신경 써주세요. 곧 겨울이잖아요.”
“마을이야 흑웅이 알아서 잘하고 있지. 솔직히 어떤 면에서는 나보다 훨씬 낫다니까.”
그러니까 능력 있는 처남을 부려 먹고 있는 거군.
능력 있는 처남이라. 나도 세이라한테 괜찮은 놈을 붙인 다음에 영주 직을 넘겨줘 버릴까? 지금은 좀 그렇지만 나중에는 상관없잖아? 황족은 그게 안 되지만 귀족은 가능하니까.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귀찮은 업무 따위는 안녕이고 아버지를 따라 낚시나 다니면서…….
“그래서 무슨 일이야, 영주님. …영주님?”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로빈은 백랑의 부름에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 죄송해요. 흠흠, 물어볼 게 하나 있어서 불렀어요.”
“뭔데?”
“로랜 영지에 혼 래빗을 전해주셨던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전달하신 거예요?”
“아, 그거? 영주님이 서두르라기에 대수림을 탔지. 대수림하고 마수 산맥의 경계를 타고 쭉 올라가면 바로 로랜 영지잖아? 마수들이 좀 있긴 한데 전사들을 보내면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니야. 거긴 상급 마수의 영역이 아니거든.”
“그래요? 흠…….”
상급 마수의 영역이 아니라는 말에 솔깃해졌다. 어쩌면 생각보다 편하게 물자를 나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곳을 어떻게 할 순 없을까?
“길이 많이 나쁜가요?”
“글쎄, 딱히 나쁘다, 좋다 할 건 아닌 거 같은데. 중급 마수도 종종 나오고 하급 마수는 빈번한 편이지. 하지만 경사는 심하지 않고 너비도 나쁘진 않아.”
“그러니까요. 만약 그쪽으로 길을 낸다면 어떨까요?”
로빈의 말이 예상외였는지 백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길? 음……. 그건 좀 힘들 거 같은데. 상급 마수는 없지만, 하급 마수가 너무 많아서. 그걸 다 해치워도 또 다른 마수가 나타나면 별 의미가 없잖아. 혹시 그쪽으로 길을 낼 생각이야?”
“네, 가능하면요. 만약 그렇게만 되면 저쪽에 위치한 영지 세 곳과도 편하게 거래할 수 있을 거 같아서요.”
로빈의 말에 다시 고민하는 백랑. 하지만 결국 고개를 저으며 안 될 거 같다고 대답했다.
“글쎄. 만약 길을 내도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수십 번씩 싸우면 돌아서 가는 것보다 더 빠를 거 같진 않은데. 오히려 위험하기만 하지. 전사들만 따로 다닐 때는 도망 다닐 수 있지만, 물자를 싣고 가면 무조건 싸워야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결국 아무나 지나다닐 순 없고 전사 정도나 돼야 통행할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혹시나 했던 로빈도 백랑의 말에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좀 편하게 갈 수 있나 했는데 역시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사들이라도 통행할 수 있다는 건 제법 의미가 있었다. 정말 급한 경우에는 전사들을 투입할 수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사들한테 마법 갑옷을 운반시키고 싶은데, 그건 가능할까요?”
“마법 갑옷? 등에 한두 개씩 지고 가면 무리는 아니지. 갑옷을 날라야 해?”
“네, 겨울이 오기 전에 갖다 주는 게 나을 거 같아서요. 그쪽 무장 상태가 영 별로네요.”
“흠……. 그래? 그럼 전사들한테 준비시켜 놓을게.”
“그래주시겠어요?”
그나마 갑옷 정도는 빨리 전해줄 수 있을 거 같아 다행이었다. 그쪽을 통행로로 쓰는 건 생각 좀 해봐야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대충 논의를 마무리 지었는데 백랑이 꽤 의미 있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말이야. 마수 산맥이 원래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잖아? 그런데 대수림 사이에 우리 관문 있지? 그런 지형이 있더라고. 아무래도 예전에 마수들이 그쪽을 통해 대수림으로 내려온 모양이야.”
“그래요? 몇 군데나요?”
“영지하고 로랜 영지 사이에 딱 한 군데 있더라고.”
결국 마수 산맥으로 들어가는 길목은 총 여섯 군데고, 다섯 곳은 인간이 영지를 세워 막았지만 한 군데는 대수림 안에 위치해 있어 방치되었는데 그곳을 통해 마수들이 영역을 넓혔을 거라는 예측이었다.
그 말은 결국 그곳만 막아낸 후, 대수림의 마수들을 모조리 제거하면 마수들의 영역을 줄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대수림을 정리한다라……. 이게 가능할까?”
국가 규모의 전력이 투입되면 불가능은 아니었다. 물론 예전에 백랑이 이야기했던 재앙급 마수까지 생각한다면 엄청난 피해가 뒤따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두 곳을 막을 전력이 계속 숲에 상주해야 하는 것까지 생각하면 바로 고개가 가로저어졌다.
이걸 나중에 황태자에게 알리긴 하겠지만 인접 지역까지 세력을 넓히겠다고 그런 미친 짓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할 정도로 번거롭고 성가신데다가 위험하기까지 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그런 대규모 개척이나 토벌은 주인공이나 하는 거지. 소설에서 보면 주인공들이 그런 곳에 들어가서 마을도 만들고 그랬으니까. 설마 그걸 나한테 맡기진 않겠지? 만약 나한테 그런 걸 시키면 진짜 반란을 일으키든지, 아니면 탈제국해 버릴 거야.”
혼자 생각을 정리한 로빈은 백랑에게 전사들을 준비해 달라고 당부한 후 바로 다음 목적지인 대장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드디어 로빈이 주문했던 그 물건이 완성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 * *
공방은 아직도 무기 생산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이 대장간은 비교적 한가한 편이었다. 기껏해야 사람들이 맡기는 농기구 정도를 수리하는 것이 업무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로빈의 주문에 기뻐하며 온 힘을 기울여 역작을 만들어냈다.
“오, 저건가요? 생각보다 더 흉악… 아니, 멋지네요. 수고 많으셨어요.”
로빈이 원하는 디자인 그대로 만들어진 강철 남근상.
강렬하게 우뚝 선 그 위용도 정말 대단했지만, 특히 끝부분에 오돌토돌하게 솟아오른 흉악한 돌기들은 그의 마음을 완벽하게 사로잡았다. 실제로 사용하면 누구라도 요단강(?) 너머로 보내버릴 거 같은 굉장한 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여신님께 바치는 진상품이니 이 정도는 돼야지. 아주 좋아.”
이걸로 여신님을 그냥… 슉슉슉 해버리면.
단순히 상상하는 것뿐이지만 왠지 지금까지 쌓인 스트레스가 조금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이걸 바로 신전에 바치세요.”
로빈은 당연히 이 흉악한 모습을 보고 경악에 차있을 사제들의 모습을 기대했지만.
“어머, 남근상이야! 크고 아름다워!”
예전에 언뜻 들어본 감탄사가 사방에서 튀어나오기도 하고.
“역시 영주님이야! 저 귀두 부분을 봐! 저기에 여신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듬뿍 담으셨어!”
이런 이해 못 할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으며.
“하~ 실제로도 저런 게 있을까? 너무 매혹적이야!”
이렇게 탐내는 사제들도 있었단다.
그렇게 사제들의 총평은 결국 아주 마음에 든다는 거였다.
게다가 단순히 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니라 또 다른 남근상을 요구하기까지 했으니.
“저게 마음에 든다고요? 게다가 가능하면 하나 더 만들어달라고 했다는 거죠?”
“예, 영주님.”
놀라 경악하는 모습을 기대하던 로빈에게는 그야말로 맥 빠지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단순한 남근상이 아니라 흉측한 대형 딜도를 만들어 보냈는데도 저렇게 좋아한다고? 내가 그 인간들을 너무 무시했네. 겨우 그 정도로 놀랄 인간들이 아닌데 말이야. 아니, 남근상 자체가 원래 그런 물건이라 충격이 없는 건가? 그나저나, 하나 더라고? 이 일을 어쩐다. 그래, 이왕에 인심 쓴 거 한번 끝까지 가보자.”
기운은 빠졌지만 줄리에타의 전언에 의하면 남근상 덕분에 성물의 기운이 좀 더 강해졌다고 한다. 생각 같아서는 그냥 때려치우고 싶지만 이런 게 좀 더 있으면 성물의 효과가 한 단계 성장할 수도 있다니 좀 더 노력해 보기로 한 것이다.
로빈은 어쩔 수 없이 각 영지에 연락해 자신이 예전에 팔았던 둔기들을 고스란히 다시 회수했다. 줄리에타 성녀의 말대로 여신상의 효과를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서는 부정한 것들을 직접 처리한 둔기들이 남근상의 재료로 가장 적당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둔기들이 다시 영지로 돌아와 새로운 남근상으로 변할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했는데 효과가 시원찮기만 해봐. 내가 남근상을 확 불 싸질러버릴 테니까. 설마 그것도 불타는 남근상이라고 더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결과를 지켜보려면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거 같았다.
* * *
영주들이 각자 영지로 돌아간 후 제법 시간이 흐르고 영주들이 가지고 있던 마수 가죽들이 속속 로빈에게 배달되었다.
그리고 로빈은 그 가죽을 바로 히센이 일하는 공방으로 보내버렸는데.
새로운 일감이 또 도착하자 자이트 자작이 들고 온 가죽으로 마법 갑옷을 인챈트하던 히센의 친구들은 히센에게 볼멘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이 친구야, 이거 말이 좀 다른데. 이렇게 바쁜 영지였어?”
“그래, 이 나쁜 놈아. 분명 한가한 곳이라고 했잖아? 적당히 놀면서 슬슬 일하면 된다며? 그런데 오자마자 이게 뭐야?”
“이놈이 분명 우리한테 사기 친 거야. 썩을 놈.”
“끙.”
평소에는 이 정도로 바쁘지 않았는데 갑자기 일감이 늘어난 상황이라 히센도 사실 당황하고 있었다. 이 정도로 일했던 건 처음 이곳에 와 기사들에게 갑옷을 만들어줄 때뿐이었으니까.
그나마 또 있다면 전사들에게 마법 갑옷을 만들어줄 때 정도?
하지만 지금은 병사들에게 만들어줄 무기를 인챈트하는 일까지 겹쳐버려 업무량은 그야말로 곱절로 늘어버린 상황이었다. 만약 옆에서 투덜거리는 저 친구들마저 없었으면 밤잠도 설쳐가며 그 모든 일을 혼자 해야 했을 것이다.
히센이 평소처럼 성질도 부리지 못하고 아무런 말도 못 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자신과 비교해도 만만치 않은 성깔의 저 녀석들이 홧김에 위약금을 내버리고 황도로 도망가면 그야말로 자신만 새 되는 꼴이었으니 말이다.
지금은 무조건 잘 달래서 일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저놈들은 도망가도 자신은 무조건 영지에 남아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 내가 진짜 쌍둥이 때문에 참는다. 후.”
“뭐?”
“아니, 아니. 아닐세. 허허. 일이 좀 그렇게 됐네. 평소에는 이렇게 바쁘지 않아. 아마 겨울이 되면 한가해질 게야.”
“에잉, 나쁜 놈.”
“그러지 말고 좀만 버텨보게나. 이번 일만 마치면 내 한턱 크게 내지. 쌍둥이한테 말해서 모야족 처녀들도 같이 말이야. 어떤가?”
“호, 그래?”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