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응. 배신이야. 그러니까 얌전히 있어라. 지금 가족들도 다 내 편이거든.
기사들에게 끌려가며 세이라가 절규했지만 로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겨울이 지나가면 적당히 달래줘야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나 생각해 볼 일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작은어머니 세릴의 반응을 보니 세이라는 자신의 안위부터 걱정해야 할 거 같았다.
그리고 겨울이 시작되자 기다렸다는 듯 각 영지, 그리고 영지의 방어선 두 곳에서 마수들의 출현 소식이 시시각각 전해졌다.
물론 영지의 상황은 양호했다. 북쪽 방벽으로 출동한 린과 기사단, 그리고 남쪽을 방어하는 백랑 모두 피해 없이 마수를 막아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른 영지, 특히 로랜 영지는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았다.
[양쪽 모두에서 끈질기게 계속 튀어나오는군. 벌써 사망자만 수십이야.]
“정말 곤란하네요.”
[문제는 이제 시작이라는 거지. 변경백, 무슨 방법이 없겠나?]
“글쎄요. 상황이 참…….”
[하긴. 바로 옆 영지도 아니고 그게 가능할 리가 있나. 내가 너무 실없었군.]
“안 좋은 소식이라 죄송하지만 델루나 쪽도 상황이 좋지 않아요. 아무래도 지원군을 기대하긴 힘들 거 같은데요.”
[허, 그런가? 하긴… 어쩔 수 없지. 무조건 버텨보겠네.]
통신을 끊은 로빈은 한숨을 쉬며 지온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로랜 영지 쪽으로 마수가 몰리는 모양인데요. 어쩌죠?”
“곤란한 일이군요. 저번에 자이트 영지 쪽으로 놈들이 몰리던 것과 마찬가지인 겁니까?”
“아무래도요.”
마수로부터 제국을 지키는 다섯 영지.
하지만 놈들이 항상 비슷한 숫자로 습격하는 건 아니었다. 가끔 한쪽으로 많은 수가 몰려들곤 하는데 예전에 자이트 영지가 곤욕을 겪은 것도 그쪽으로 많은 수의 마수들이 한꺼번에 몰려나와서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로랜 영지의 차례인 모양이다.
하지만 로랜 영지는 자이트 영지와는 또 다른 면이 이었는데 마수 산맥 말고도 대수림까지 방어해야 한다는 거였다. 그리고 두 곳에서 몰려나오는 마수들을 모두 막는 건 로랜 영지의 전력으로는 사실상 무리였다.
“결국 이렇게 되네요. 이것만은 아니길 바랐는데 말이죠.”
한숨을 쉰 로빈은 바로 남쪽 요새의 백랑에게 통신을 걸었다. 아무래도 영지의 병력을 움직여야 할 거 같았기 때문이다.
“백랑, 그쪽은 어때요?”
[조용한데. 그냥 산발적으로 튀어나오는 놈들뿐이야. 예년 수준도 아니라고 할까?]
“그래요? 그건 이상하네요.”
로랜 영지를 중심으로 델루나까지 마수가 몰렸으면 당연히 대수림 쪽 출구로도 많은 마수가 몰려나왔을 것이다. 지금 로랜 영지가 대수림에서 튀어나오는 마수들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것도 당연히 그런 이유일 테고.
그런데 우리 영지 쪽만 한가하다니.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남쪽 요새의 방어 병력은 충분했고, 우리 쪽으로 모든 마수가 몰리는 게 아닌 이상 백랑이 별동대를 운영할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아무래도 백랑이 한 번 움직여줘야 할 거 같아요.”
이미 백랑과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상황에 따라 대수림을 넘어 다른 영지로 지원을 가야 할 수도 있는데 마수들이 설치는 겨울에도 가능하겠냐고 물어본 것이다.
백랑은 마수 범람 때 자신과 같이 대수림을 휘저었던 부족의 전사들이라면 충분하다고 자신했다. 이미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로빈도 이 부분에서만은 백랑을 완전히 믿을 수 있었다.
[그래? 로랜 영지?]
“네. 그쪽이요. 넘어가서 대수림 방면만 확실히 지켜주세요. 그러면 마수 산맥은 로랜 영주가 알아서 막아낼 거예요.”
[음, 좋아. 한번 가볼게.]
“너무 무리하시진 말고요. 가면서 상황 보고해 주세요. 여유분 수정구로요. 아시죠?”
[응. 걱정 마, 영주님.]
“좋아요! 백랑 기사단 출동!!”
[…그건 하지 말라고.]
이제 겨우 막 겨울이 시작되려는 시기.
그렇게 백랑과 40인의 전사단이 대수림을 넘어 로랜 영지를 구원하기 위해 출동했다.
백랑은 마지막까지 마을 주변을 수색해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로랜 영지로 출발했다. 로빈도 백랑이 마을을 떠나자 바로 로랜 영지에 연락해 지원군이 출발했음을 알렸는데.
답이 없다고 생각하던 로랜 영주가 로빈의 마음 씀씀이에 깊이 감사한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후, 차라리 전사들을 미리 로랜 영지로 보낼 걸 그랬나요?”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 놈들이 어디에서 쏟아져 나올지 모르는데요.”
“그건 그렇죠?”
로랜 영지의 방비가 미흡하다는 건 미리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전사들을 그곳에 미리 투입해 놓을 순 없었다. 로랜 영지가 아닌 다른 곳, 그레이츠나 자이트 쪽으로 마수들이 몰려나왔으면 그런 행동이 오히려 독이 되기 때문이었다.
로빈으로서는 다른 곳이 조금 위험해지더라도 자신의 영지가 가장 안전한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나마 이렇게 영지의 안전이 확보된 상황에서 병력을 보내주는 것이 로빈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 정도면 황실에서 바라는 변경백으로서의 의무는 다했다고 할 수 있으리라.
* * *
그렇게 며칠이 지나는 동안 영지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북쪽 방벽은 여느 때보다 제법 많은 마수가 공격해 왔지만 린과 기사들이 굳건하게 지켜냈고 남쪽은 예년보다 한가한 가운데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솔직히 남쪽의 상황은 너무 조용해서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영주님, 도착했어! 바로 토벌 시작할게!]
“네, 백랑. 수고하세요.”
[아, 그런데 이쪽으로 오는 길에도 마수는 별로 없더라고. 로랜 영지 근처에는 마수들이 많던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
“그래요? 알았어요. 저도 한번 알아볼게요.”
백랑의 보고가 다시 한 번 경각심을 자극했다. 특이 현상에는 반드시 원인이 존재했으니 말이다.
만약 하급 마수들이 이곳을 피해 굳이 로랜 영지 쪽으로만 뛰쳐나간다는 건 분명…….
“어쩐지 불안하더라니. 대체 왜 불길한 예감은 이렇게 틀리지를 않냐?”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쉰 로빈은 바로 남쪽 요새 쪽에 연락을 넣어 수색 범위를 넓혀 대수림을 꼼꼼히 살펴보라고 명령했다.
백랑과 수위급 전사들이 많이 빠졌지만 자기 집 앞마당을 수색하는 것 정도는 큰 문제도 아니었다. 백랑에 묻혀있어서 그렇지, 흑웅과 검은 곰 기사단만 해도 이제 대수림에 이골이 난 전사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연락을 넣은 로빈은 다시 통신을 열고 북쪽 방벽에 있는 린을 불렀다.
“린, 거기는 어때?”
[응, 주인. 안심해. 아직까지 중상자 하나 없이 잘 막아내고 있어. 바보 같은 놈이 너무 긴장해서 발을 헛디뎌 다치긴 했는데 경상이야. 발톱에 긁힌 녀석 둘은 마을에 있는 신전으로 옮겼고. 나머지는 모두 무사해.]
“응. 잘하고 있네. 놈들의 동태는?”
[깊이까지 정찰할 순 없지만 이제 슬슬 잦아드는 거 같아. 정체기? 부단장님이 그렇게 말하던데. 근처에 있는 놈들은 다 튀어나온 게 아닐까?]
“그렇단 말이지.”
하급 마수들이 그레이츠 영지 쪽을 꺼리는 건 아무래도 상급 마수 때문인 거 같았다. 새로운 상급 마수가 그 근처에 나타나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존에 있던 놈과 자연스럽게 영역 다툼이 시작된다. 상급 마수는 상당히 넓은 지역을 자신의 영역으로 삼기 때문에 한 놈이 마수 산맥에서 기어 내려왔다면 기존에 있던 놈이랑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불행히도 그 대결이 영지와 멀지 않은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둘이 싸우다 하나가 나자빠지고 한 놈이 영역을 확정 지으면 큰 문제는 없겠지만 한 놈이 불리함을 느끼고 이쪽으로 도망치기라도 한다면 영지 입장에서는 제법 피곤해질 수 있었다.
왜냐하면…….
[영주님, 흑웅입니다. 갑자기 마수들이 늘어났습니다. 영지에서 몇 시간 거리에 중급 마수가 낀 무리가 접근하고 있답니다.]
이렇게 멀쩡한 놈이 도망치기 시작하면 주변에 마수들이 자극당해 덩달아 날뛰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한 번쯤은 겪고 넘어가야 할 일이기도 했고.
“침착하세요, 흑웅. 우선 접근하는 놈들을 다 제거하고요. 중요한 건 뒤에 있을 상급 마수를 확인하는 겁니다. 놈의 정체를 확인해야 해요. 위험하지만 좀 더 깊숙이 들어가 어떤 놈인지 확인해 보세요.”
[네. 영주님.]
[주인! 무슨 일이야?]
그래, 린이랑 통신 중이었지.
북쪽 방벽이 정체기에 들어갔다니 차라리 잘되었다. 린을 중심으로 뭉친 기사단이 과연 상급 마수를 상대할 수 있을지를 확인해 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린, 잘 들어. 대상급 마수 전담 팀을 남쪽으로 파견해야 할 거 같아.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응. 상급 마수가 기어 나온 거야?]
“확실한 건 아닌데 아무래도 그런 거 같아. 그쪽은 지금 여유가 있으니까 상급한테 비빌 수 있는 기사들만 추려서 바로 남쪽으로 출발해 줘.”
[바로 출발할게.]
양쪽 모두와 통신을 끊은 로빈은 한숨을 쉬며 생각을 정리했다.
상급 마수를 상대할 때 자신이 그곳에 있는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없는 게 심적으로는 더 안정적일 테니 말이다.
백랑이 없지만 흑웅의 부족 장악력이 여전하고, 심지어 린은 부족의 전사들이 가장 아끼는 존재였다. 둘만 있으면 모야족의 사기가 꺾일 일은 없는 것이다.
문제는 폴이 했던 것처럼 린이 상급 마수를 처치할 수 있느냐였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백랑과 그 친위대의 존재는 큰 의미가 없었다. 상급 마수가 의심스러운 상황임에도 백랑을 파견할 수 있었던 건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린, 믿는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이젠 네가 그걸 해내야 해.”
* * *
밤새 남쪽의 소식을 기다리던 로빈은 생각보다 좋지 않은 소식에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러니까 너구리같이 생겼는데 꼬리가 크게 부푼 녀석이란 거죠? 영지 쪽으로 향하던가요?”
[네. 하급 마수들을 잡아먹으면서 마을 쪽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대략… 서너 시간 있으면 마을에 도착할 거 같습니다.]
“놈의 상태는요?”
[상처가 있지만 심하진 않습니다. 아마 적당히 상대하다가 바로 빠진 게 아닐지.]
“재수 없게도 영악한 놈인가 보네요. 그럼 더 상대하기가 피곤할 텐데.”
확실히 좋지 않았다. 차라리 예전의 그 가메라처럼 무식하게 달려드는 놈이면 오히려 상대하기 편할 텐데 상처를 입자마자 도망치는 그런 영악한 놈이라니.
게다가 생김새를 보니 특별한 독을 품고 있는 거대 맹독 너구리 빅 테일이 분명한 거 같았다. 그놈은 독 때문에라도 상대하기가 아주 껄끄러운 편이었다.
“놈이 빅 테일이란 건 알고 계시죠?”
[네, 린 아가씨와 르보른 부단장이 도착했는데 부단장이 바로 빅 테일이라고 하더군요. 날렵하고 영악해서 성가시다고요. 게다가 독도…….]
“그래요. 우선 상급 마수의 사냥은 르보른 부단장과 상의해서 진행하도록 하세요.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걸 할게요.”
[네. 영주님.]
흑웅과의 연락을 끊은 로빈은 자리를 박차고 바로 흑마법사들이 연구하고 있는 연구실로 달려갔다. 아직 그들이 일어날 시간도 아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두들겨 패서라도 깨울 생각이었다.
“알버스 님, 큰일 났어요. 빅 테일의 독을 무력화시킬 게 필요해요.”
“응? 영주? 이른 아침부터 무슨. 게다가 빅 테일이라니, 그놈은…….”
로빈이 연구실(?)에 쳐들어가 한껏 소란을 피우자 모든 사람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시간은 새벽 5시. 확실히 한창 꿈나라에 빠져있을 시간이었다. 그나마 밤잠이 없는 알버스가 멀쩡한 상태로 로빈을 맞아주고 있었는데.
로빈도 이런 무례를 범하고 싶진 않았지만, 상대가 특별한 놈이라서 어쩔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야? 빅 테일이라니?”
로빈은 흑마법사들이 모두 모이자 서둘러 상황부터 설명했다.
흑마법사들은 영지 남쪽에 빅 테일이 나타날 거란 로빈의 말에 아연한 얼굴로 당황하고 있었다. 그나마 정신이 멀쩡한 알버스가 도리아를 빨리 불러오라고 흑마법사 하나를 보냈는데.
“빅 테일이라니. 그놈의 해독제를 대체 어떻게 만들어?”
“이게 북부로군. 빅 테일이라니. 상상도 못 했어. 이런 놈이 진짜 나타난다고?”
남은 흑마법사들은 아직도 당황스러운지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정신 차려! 어떻게든 대책을 만들어야 할 거 아냐?”
“하지만 스승님, 빅 테일의 해독제는 놈의 쓸개를 이용해 만들 수밖에 없는데 대체 어쩌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이건 답이 없습니다.”
빅 테일의 해독제가 놈의 쓸개라는 사실까지는 몰랐던 로빈은 절망스러운 현실에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어떤 방법을 써도 놈을 잡기 전에는 독을 예방할 수 없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