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흑마법사들에게 해독제를 부탁해 바로 투입하려던 로빈의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하필이면 걸려도 그런 더러운 놈이……. 진짜 마가 낀 건가?
알버스도 대책이 없는 건 마찬가지인지 인상을 쓰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심부름 나갔던 흑마법사가 돌아오며 도리아와 실비아까지 연구실에 들어섰다.
“빅 테일이 나타난 거예요?”
“그렇다는군. 도리아, 뭐라도 좋으니 빅 테일의 독을 지연시킬 방법이 없겠나?”
“어쩌시려구요?”
“별수 있나. 빅 테일의 독을 해독하려면 놈의 쓸개가 필요한데 그게 없으니 최대한 지연시킨 다음에 놈을 잡아 그 쓸개로 해독하는 거지.”
“네? 그럼 지금 거기까지 직접 가시겠다고요?”
“스승님, 너무 위험합니다.”
흑마법사들이 그를 만류하자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찬 알버스는 호통을 치며 제자들을 꾸짖었다.
“이런 한심한 놈들 같으니라고. 내가 위험하냐? 아니면 기사들이 더 위험하냐? 생각들은 하고 사는 게야? 흑마법사가 제 몸뚱이 하나 간수하자고 환자를 방치하겠다니. 여기 앉아서 쓸개가 올 때까지 기다리면, 그때까지 기사들이 버텨는 준다더냐?”
빅 테일의 독은 중독 후 반나절이 지나기 전에 절명하는 것으로 이름 높았다. 그러니 여기서 기다려서는 해독제를 만들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해독제를 만드는 시간도 있고 여기서 남쪽 마을까지는 아무리 빨리 달려도 두 시간은 걸리는 거리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스승님.”
“됐다. 네놈들은 입 다물어라. 도리아, 어떤가? 가능하겠나? 영주의 말을 들어보니 시간이 촉박한 거 같은데.”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내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었다. 그러면 결국 기존에 있던 무언가를 이용해야 한다는 말인데.
제국에서 물질학으로는 손가락 안에 꼽히는 도리아였기 때문에 최대한 비슷한 효과를 가진 무언가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청한 것이었다.
“어르신, 실비가 최근에 만든 걸 기억하실 겁니다. 그러니까… 그 흥분제 같은 거요.”
어? 그게 여기서 왜 나와? 그거 미친 효과의 최음제 아니었어?
“그 흉악한 물건 말이냐? 그런데 그게 왜?”
“사실 그 물건이 사제 분들이 기사들을 치료하는 걸 보고 힌트를 얻어 만든 물건입니다.”
그러니까 실비가 만든 그 흥분제 같은 물건은 성적 자극을 통해 사람을 치료하는 사제들의 모습을 보고 영감을 얻은 그녀가 치료를 목적으로 만든 물건이었다. 하지만 치료 효과는 별로 없는 데 비해 사용자를 과하게 흥분시키는 바람에 실패작이 된 것이다.
다만 그 물건에 기대하지 않은 효과가 있었는데.
“그러니까 저항력이 순간 극대화된다는 거구나. 치료 효과는 부족하지만 그런 효과가 있었다고?”
“예. 사실 큰 쓸모는 없습니다. 저항력이란 게 순간적으로 올라간다고 무슨 큰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부작용이 워낙 강하니까요.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그리고 지금은 당장 그거 외에는 떠오르는 게 없습니다.”
“그래. 빅 테일의 독도 일반적인 독이 아니지. 저항력이 높아진다면… 버티는 시간이 좀 더 길어지겠어. 하지만 부작용이 그렇게 커서야…….”
아무리 대단한 전사들이라도 그런 엄청난 놈을 맞은 상황에서 상급 마수를 상대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러면 미리 저 약을 사용한 채 놈을 상대한다는 선택지가 사라질 수밖에 없는데.
“부작용을 줄일 순 있습니다. 효과는 최대한 보존하면서 부작용을 줄이는 방법이 있으니까요. 실비의 오리지널 작품이라 제가 굳이 손대지 않은 것이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야. 서둘러주게.”
“스승님, 저도 같이 가요. 제 약이니만큼 제가 가장 잘 알아요.”
“그러자꾸나, 실비.”
“그리고 전장에도 따라갈 거예요. 독 쪽도 제가 가장 자신 있는 부분이니까요.”
“뭐? 네가 따라간다고?”
옆에서 듣기만 하던 로빈도 실비아의 선언에는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상급 마수 때문에 위험한 전장에 굳이 실비아가 따라가겠다고 나섰으니 말이다.
하지만 세이라를 말렸던 것처럼 그녀를 말릴 순 없었다.
“…좋아. 그러자. 독에 대해선 네 녀석만 한 아이도 없지. 네놈들은 창피한 줄 알거라.”
실비아가 따라나서겠다고 선언하자 흑마법사들의 입장이 조금 난감해졌다. 물론 그들은 걱정하는 마음으로 알버스를 말린 거였지만 분위기가 이래서야.
“스승님, 저희들도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실비아가 선언한 이상 흑마법사들의 합류도 당연한 흐름일 뿐이었다.
그렇게 도리아가 실비아의 발정제를 손보는 가운데 알버스는 제자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해독제를 만들지 설명하고 있었다.
역시 대원로와 그 제자들은 대단했다. 이미 사람들 기억에서 잊힌 상급 마수의 독까지 정확히 꿰고 있다니.
“영주, 이렇게 됐는데. 빅 테일을 잡을 순 있겠지? 아니면 우리 다 개죽음하는 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세상에서 마수를 가장 잘 잡는 기사단이에요. 저희가 못 잡으면 아무도 못 잡아요.”
“그거 믿음직하구만.”
그렇게 한창 연구 중이던 그때.
로빈의 수정구가 거칠게 울려댔다.
[영주님, 놈이 갑자기 속도를 올렸습니다. 이제 곧 격돌합니다!]
예상보다 놈이 더 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금방 출발할 거예요. 최대한 시간을 끄세요. 중독만 피하시고요. 흑마법사들과 같이 내려갑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됐어요!”
그리고 그때, 약의 문제점을 손보던 도리아가 개선을 완료하고 뛰어나왔다.
생각보다 더 급박해진 상황.
일행은 서둘러 짐을 챙겨 남쪽 마을로 출발했다.
* * *
그 시각, 남쪽 마을 요새.
“영주님이 오신다는데요. 흑마법사하고요.”
“음… 아무래도 중독을 대비할 무언가를 찾아오시는 모양이군요. 가능하면 버티라고 하시는 걸 보니.”
“중독이라……. 그러니까 그놈이 독 때문에 성가시지만 신체 능력 자체는 상급 마수급은 아니라는 거네요.”
“그건 그렇군요. 하긴 그런 독에다가 신체 능력까지 가메라급이면 놈은 재앙급 마수겠죠.”
“물론 저도 주인 말대로 기다리고 싶긴 한데 저놈이 이쪽으로 붙어버리면 마을 사람들까지 위험해지는 거잖아요? 삼촌, 어떻게 생각해?”
“맞습니다, 아가씨.”
“흠, 하지만 역시 독은 까다롭단 말이야. 사제 언니들도 독은 안 된다고 하지?”
“예. 아무래도…….”
“에휴, 언니들도 답이 없다니 어쩔 수 없이 주인이 올 때까지 버텨야겠네. 부단장님, 마나를 잘 쓰면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다고요?”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기사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닌 거 같아요. 이제 금방이라도 그놈이 여기를 덮칠 거라고요. 삼촌, 우선 마나 좀 쓰는 전사들만 모아봐. 그리고 나머지는 전사라도 좀 빠져있어야 할 거 같은데.”
“아가씨, 전사들입니다. 빠지라니요.”
“아. 그렇지, 참.”
마을에서 가장 존경받고 온갖 특혜를 다 받는 게 전사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을에 큰일이 생기면 누구보다 앞장서야 하고,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면 무조건 전사부터라는 것.
그게 아버지 백랑의 가르침이었고 자신 역시 그게 당연하다고 믿었다. 많이 배운 건 아니지만 자신이 받는 만큼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아마 부족의 전사들 모두 자신과 같은 생각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전사들에게 위험하다는 이유로 빠지라고 했으니…….
이건 자신의 명백한 실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독을 버티지도 못하는 전사들을 위험에 내몰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의무나 용기와는 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해서였다.
“좋아. 전사들을 물리진 않을게. 하지만 배치는 좀 바꾸자.”
린은 놈이 혹시 마을에 접근할 때를 대비해 전사들을 요새 부근에 포진시켰다. 물론 대비한다는 건 솔직히 핑계였고, 전사들이 마음 상하지 않게 전투에서 배제한 것이다.
그리고 마나를 잘 다뤄서 놈의 독을 조금이나마 버틸 수 있는 기사들과, 정예 전사만 모아 놈을 상대할 채비를 갖추었다.
“우선 시간부터 좀 끌어보고. 할 만하면 놈의 목을 친다.”
린은 몇 년 전 이곳에서 가메라를 상대하던 폴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 자신이 존경하는 그 기사단장이 얼마나 멋있었으며, 그의 애병 에셋은 얼마나 위대했던가.
그리고 오늘은 자신이 그 자리에 섰다. 자신의 주인, 로빈이 자신에게 하사한 린지애를 들고 말이다.
“그 꼬맹이가 주인한테 소원권 세 장을 받았다지? 나도 이번에 무조건 세 장 받는 거야. 그러면 주인의 동정은 결국 내 것이란 말이지. 그 꼬맹이는 감히 그런 요구 못 하겠지만 난 이제 며칠만 있으면……. 흐흐.”
그렇게 의욕을 다지고 있을 때 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몸길이는 대략 8~9미터 정도로 예전에 봤던 그 가메라보다는 상당히 작았지만 거대한 몸집에서부터 위압감이 느껴지는 상급 마수였다.
“끔찍한데. 원래 너구리는 귀여운 놈들 아니야? 차라리 잘됐네. 모두 출동!”
린은 바로 기사단에게 명령을 내리고 성채에서 뛰어내렸다. 독을 가진 놈이라 가능하면 먼 곳에서 싸우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흑웅과 제필이 뒤따르고 있었다.
“제필 경, 준비됐죠? 삼촌, 조심해요.”
“예, 단장님.”
“알겠습니다, 아가씨.”
섣불리 접근하기 힘든 적을 상대해야 하므로 평소 같은 포메이션을 취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린과 제필, 흑웅처럼 마나 제어력이 뛰어난 기사들이 선두에서 시간을 끌면서 로빈을 기다릴 계획이었다.
주변에 포진한 기사들은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포석에 불과한 것이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기사들이 마법 사슬을 던져 놈의 움직임을 방해하거나 놈의 퇴로를 막을 생각이었다.
“핫!”
선두에서 린이 스텝을 밟아 거칠게 휘두르는 놈의 팔을 피한 후 몸으로 파고들어 대검을 찍어 넣었다.
“윽, 이게 독인가? 좀 찡한데.”
확실히 저번에 상대했던 그 뼈 괴물보다는 좀 느린 거 같았다. 하지만 놈에게 접근하자 왠지 모를 불쾌함이 뇌리를 지배했고, 몸이 좀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놈이 상급 마수인 이유가 바로 이 독 때문이라더니 생각보다 위력이 대단한가 보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일.
마나를 최대한 끌어올려 몸을 보호하며 놈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마나가 거칠게 움직이며 몸을 훑고 지나가자 몸이 가벼워지며 다시 예전처럼 움직일 수 있었다.
“이거, 이런 식이면 오래 못 버티겠는데. 주인은 참 어려운 걸 요구한단 말이야. 소원권 안 주기만 해봐라.”
린은 툴툴거리며 다시 놈에게 달려들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더 열심히 움직여 놈을 상대해야 갈 거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였다.
흑웅과 제필도 린과 같은 걸 느꼈는지 인상을 쓴 채 놈을 상대했다. 놈의 주변을 계속 맴돌며 신경을 분산시키고 틈이 보이면 바로 검을 휘둘러 타격을 주고 빠지는 형식으로 시간을 끄는 것이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놈을 상대하는 것이 한계에 봉착했는지 점점 움직임이 굼떠지더니 검끝이 떨려오고 있었다.
명백한 중독 증상이었다.
그리고 린보다 다른 두 사람의 증상이 더욱 심각했다.
“삼촌, 빠져. 제필 경도 우선 물러나요!”
린은 두 사람이 빠질 틈을 만들어주기 위해 더 거칠게 날뛰었다. 체력을 더 낭비하는 꼴이었지만 둘을 이렇게 잃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게 나았다.
그리고 그런 린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주변을 맴돌던 기사들이 마법 사슬을 던져 놈의 시야를 분산시켰다. 조금이라도 빈틈을 만들어주고 싶은 기사들의 발악이었다.
“크앙!”
귀찮은 사슬을 쳐내면서 린을 상대하던 놈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느꼈는지 크게 포효하며 성채 쪽으로 몸을 날렸다.
저기에 이 날파리 같은 놈들이 지키려는 존재가 자리 잡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만약 자신들의 본거지가 위협당하면 이놈들도 이런 하루살이 짓을 멈출 수밖에 없으리라.
“아… 안 돼!!”
놈이 발작하듯 몸을 튕겨 요새 쪽으로 달음질치자 린도 순간 놈의 움직임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요새 근처에서 동정을 살피던 전사들이 놈에게 달려들었는데.
“크악!”
“악!!”
“막아!!”
놈의 공격을 피하면서 어떻게든 시간을 끌던 전사들은 이내 놈에게 중독되어 하나둘씩 쓰러져가고 있었다.
중독되어 쓰러진 전사들, 움직임이 둔해져 놈의 팔이나 꼬리에 맞고 튕겨 나가버린 전사들까지.
린이 이곳까지 달려오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쓰러진 전사들의 수는 수십도 넘었다.
“이… 미친 짐승 새끼가!!”
죽은 듯 사방에 쓰러져 있는 전사들의 모습에 눈이 완전히 돌아가 버린 린.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