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그리고 그때 로빈과 일행이 남쪽 요새에 막 도착했다.
흉측하게 생긴 대형 너구리가 거친 숨을 내뿜고 있고, 사방에는 전사들이 널브러져 있는 상황.
그리고 린이 눈에 보일 정도로 마나가 일렁이는 대검을 치켜든 모습까지 확인한 로빈은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단박에 눈치챌 수 있었다.
거기다 린마저 중독되었는지 평소보다 더 거무죽죽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모야족 특유의 건강미 넘치는 구릿빛 피부는 저런 것이 아니었다.
“린! 기다려! 이거부터 받으라고!”
로빈은 우선 린에게 이 약부터 전해줘야 한다는 생각에 크게 외쳤지만, 그녀는 전혀 들리지 않는지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마수 놈만 노려보고 있었다.
하, 눈이 돌아갔구만.
이래서야 린이 놈을 해치워도 독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독에 노출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치명적인 타격이 계속 누적되기 때문이었다.
무슨 자신감일까? 로빈은 지체 없이 린의 머리를 향해 약병을 던져버렸다.
“챙~”
스… 스트라이크?
여신님이 굽어살피셨는지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마음으로 던진 약병은 린의 머리에 정확하게 명중했고, 약병이 깨져 나가면서 흘러내린 물약은 린의 얼굴부터 몸까지 천천히 스며들어갔다.
마시는 것 외에 바르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다는 예전의 대화가 생각나 발악해 본 건데 멋지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 냄새는……. 아씨, 이거 꼬맹이의 미친 물약이잖아?! 싸우는 데 이딴 걸 던지면 어떡해?”
물약에 얻어맞고 잠깐 정신이 들었는지 투덜거리며 로빈을 노려보는 린.
“그거 아니야. 좀 다른 거야. 야! 저기!!”
린의 기세에 잠시 주춤하던 놈은 그녀가 시선을 돌리자 바로 린에게 파고들었지만, 린은 마치 놈을 지켜보고 있었던 거처럼 가볍게 피한 후 오히려 놈에게 파고들어 가슴에 일격을 먹였다.
가슴 깊숙이 박혀버린 린의 대검.
단순한 공격과 마나가 일렁이는 공격은 위력부터가 다른지 놈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땅에 나뒹굴었다. 처음으로 실질적인 타격을 입힌 것이다.
“와… X나 세네. 어?”
로빈이 멍하니 린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상태창에 이상한 타이틀이 하나 추가된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붉은 학살자(L, 임시 활성화)
아마 저 각성 상태가 저걸 말하는 모양인데, 임시 활성화인 걸 보니 아직 제 뜻대로 저걸 사용할 수는 없는 거 같았다.
하지만 저런 위력이라니.
예전에 해골 덩어리를 상대할 때도 느꼈지만 저건 정말 미쳤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주인공이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겨우 배울 수 있는 비기 같은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씨. 주인, 딱 기다려. 저 새끼 썰어버리고 나면 주인도 먹어버릴 거야!”
거칠게 외치고 놈에게 달려드는 린의 모습을 보니 왠지 등골이 오싹한 기분이었다.
“미쳤네, 저거. 무슨 흑화라도 한 거야? 나 지금 도망쳐야 하는 거지?”
두려움에 몸을 떠는 로빈의 상황과는 관계없이 린은 정말 강했다.
놈이 휘두르는 앞발을 가볍게 피한 후 순간적으로 몸을 비틀어 대검으로 놈의 앞발을 날려버리고.
“이 짐승 새끼야!”
바로 다시 파고들어 복부에 대검을 박아 넣은 후.
“왜! 여기까지!”
고통에 울부짖으며 발악하듯 휘두르는 꼬리를 피해 몸을 날려서.
“기어 나오고 지랄이야!”
떨어지는 힘을 이용해 놈의 목젖에 대검을 찍어 넣었다.
그리고 놈이 쓰러지자 유유히 뒤로 돌아 일행 쪽으로 다가오는데.
“…기사단이고 뭐고 저거 하나면 다 해결되는 거 아냐? 뭐 저런 OP가…….”
“주인!!”
그리고 눈이 뒤집혀서 로빈에게 달려드는 린.
아무리 개선했어도 특제 발정제의 가공할 효과는 무시할 수 없는 모양인지 그녀의 두 눈이 색욕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로빈이 당황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움찔거리는 그때, 린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바로 실비아였다.
“멍청아! 너 지금 독투성이거든. 영주님을 죽일 셈이야?”
“엌! 꼬맹이…….”
“너 지금 영주님한테 달려들면 영주님 죽어.”
로빈이 죽는다는 말에 주춤한 린은 입술을 강하게 깨물며 정신을 차린 후 바로 갑옷부터 벗었다.
한 4초 걸렸나?
미친 듯한 속도로 갑옷을 벗은 린은 바로 요새 쪽으로 날듯이 뛰어가 버렸는데.
“딱 기다려!! 당장 씻고 온다!!”
아니, 그렇다고 그렇게 알몸으로 뛰어가면…….
아, 독 때문에 그렇구나.
괜히 딴 곳에 피해줄까 봐.
그 와중에도 미친 뒤태를 자랑하는 린.
특히 탐스러운 엉덩이는 정말 일품이었다. 갑옷을 벗는 중에 언뜻 보였던 그 매혹적인 허벅지와 복근도…….
아씨, 이게 아니지.
로빈은 고개를 저으며 빠르게 수습을 명했다. 저기 피를 철철 흘리며 뒤집어져 있는 마수도 그렇고 중독된 사람들도 치료해야 하니 말이다.
요새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모야족 예비 전사들은 빠르게 달려와 도리아에게 독을 지연시킬 약을 전달받고 전사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요새 앞에 큰 장판을 깔고 그 위에 전사들을 눕혔는데.
“…꼭 저렇게 해야 하는 건가요?”
“어쩔 수 없지. 몸에 열이 오르지 않게 우선 갑옷이랑 옷부터 벗겨야 하네.”
맞는 것에 이골이 나 본능적으로 충격을 줄인데다가 갑옷이 워낙 고성능이라 즉사하거나 큰 중상을 당하지는 않은 전사들.
전사들의 피해는 다행히 심각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적이 독은 강하지만 신체 능력 자체는 상급 마수보다 부족한 빅 테일이라 그런 거 같았다.
다만 알몸의 남자들이 나란히 누워 발정제를 맞은 채 자존심을 우뚝 세우고 있는 건 생각보다 보기 괴로운 장면이었다. 게다가 사제들까지 모두 나와 조금의 도움이라도 주기 위해 손으로…….
진짜 가관이네. 야동에서도 저런 짓은 안 할 거다.
이게 나름 심각한 상황이라는 건 아는데 왠지 한숨만 터져 나왔다.
그리고 빅 테일 시체 옆에선 흑마법사들이 해독약을 만들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에이, 안 되겠어요. 아저씨들은 이거 받아들고 빨리 가서 치료나 하세요.”
“허허.”
하지만 조심스럽게 치료제를 만들던 흑마법사들은 실비아의 등쌀에 떠밀려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는데.
아무래도 실비아의 약품 제조 능력이 생각보다 더 대단해서 그런 모양이다. 흑마법사들은 조심조심 비율을 맞춰 가며 만드는 걸 실비아는 바로바로 손대중으로 측량해서 월등한 속도로 만들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대충 만드는 거 같으면서도 측량이 얼마나 정확한지, 그녀의 약이 흑마법사들이 만드는 것보다 영롱한 빛깔을 자랑하고 있었다.
딱 봐도 이게 더 잘 만든 약이라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허, 저 녀석. 손끝이 진짜 야무지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흑마법사들은 투덜거리면서도 실비아의 말대로 약을 들고 전사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모두 다 같이 약을 만드는 것보다 만드는 건 실비아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치료를 시작하는 게 더 현명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흑마법사들이 본격적으로 치료를 시작하자 쓰려졌던 전사들의 안색은 금방 회복되었다. 그리고 골절이나 타박상이 심한 전사들은 거기를 우뚝 세운 채 들것에 실려 신전으로 옮겨졌다.
저 자존심이 가라앉을 때가 되면 아마 웬만한 골절 정도는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 * *
전사들이 하나둘씩 정상으로 돌아온 후 신전으로 실려가는 모습에 로빈도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어쨌든 무사히 위기를 넘긴 거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로빈은 널브러져 있는 빅 테일의 사체 쪽으로 다가갔다.
앞발이 한쪽 잘린데다 배에는 큰 구멍이 뚫려있고, 쓸개는 적출당했으며 목이 절반 이상 잘려버린 놈의 사체는 처참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물론 불쌍함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그저 독까지 있는 이놈을 어떻게 처리할지가 고민될 뿐이지.
그리고 이런 흔적을 남긴 린이 새삼 전율스럽다고 해야 하나?
끝까지 놈을 상대하다 중독된 후, 간신히 몸을 피한 제필과 흑웅 역시 로빈과 같은 생각인지 놈을 바라보며 한숨짓고 있었다.
“정말 괴물이 되어버렸군. 우리 단장 말이야.”
“그래. 솔직히 믿기지 않을 정도야. 그때는 너무 경황없는 와중이라 생각할 겨를도 없었는데 오늘은…….”
“그러게요. 어디까지 성장할 생각인지, 참…….”
“영주님.”
대화하는 둘에게 슬쩍 다가가자 놀란 둘은 로빈에게 군례를 올렸다.
괜히 끼어들었나? 그냥 궁금한 게 있어서 다가온 건데 생각보다 반응이 영.
“죄송합니다, 영주님. 저희가 단장을 지켰어야 했는데.”
“오히려 아가씨의 보호를 받아버렸군요.”
아, 그래서 저런 반응이었나?
하긴 저 사람들이면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지.
하지만 각성(로빈 명명) 린 모드는 그런 범주를 넘어간 거 아닌가?
솔직히 눈깔에서 씨앗 터진 키X 야마토나 초X이어인으로 변한 손X공 같은 건데, 뭐 어쩌겠어?
붉은 학살자가 진짜 엄청나긴 하네.
급해서 자세히는 못 봤지만, 잠재 능력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신체 능력이 향상되는데다가 마나 블레이드? 이런 걸 쓸 수 있다고 했지?
봉구가 분명 오러 블레이드는 없는 소설이라고 했는데 이런 게 또 숨어있었네. 이성을 대부분 잃는다고 적혀있었지만, 오늘은 또 그렇지도 않았고.
그 발정제 때문에 성욕이 너무 강해져서 정신이 돌아온 건가? 참, 까도까도 이상한 게 계속 나온다니까.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원래 쟤가 좀 이상한 애거든요. 악역 꿈나무라서.
로빈이 속 쓰린 둘을 달래주려는데 르보른 부단장이 다가왔다. 아무래도 전장의 정리가 대충 마무리된 모양이었다.
“빅 테일의 사체는 어쩌시겠습니까?”
“그러게요. 저 독 덩어리를 어쩌면 좋을까요?”
“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독은 이제 하루 이틀이면 다 사라질 테니까요. 좋은 마수는 죽은 마수뿐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그거… 참 익숙한 말이네요.”
그건 그래도 기쁜 일이었다. 그 말은 저놈의 가죽과 뼈까지 모조리 우리가 쓸 수 있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이제 슬슬 상급 마수의 가죽과 뼈가 다 떨어져가는데 때맞추어 득템한 기분이랄까?
“우선 하루 이틀 정도 저기 내버려두면 마수들이 접근하진 않겠네요. 그러면 전사들도 대충 다 회복되겠죠? 그 뒤에 저놈을 창고에 보관하면 되겠어요. 처리는 겨울이 끝나면 그때 해도 늦지 않죠.”
“그럼 그렇게 지시하겠습니다.”
이번에 저놈을 잡았으니 뼈로 무기를 하나 만들어 황실에 진상해야겠다. 이 기회에 스미스 제련법도 특허를 받아놓고.
물론 거의 공짜로 제작법을 뿌릴 거지만 남들이 몰래 베끼면 그건 또 은근히 기분 나빴으니 말이다.
황태자 그 양반이 마수 갑옷도 그렇지만 마수의 뼈로 무기를 만드는 것도 연구할 텐데 혼자만 알고 있다가 쓸데없이 돈 낭비만 하면 그건 또 씁쓸해지지. 앞으로 돈 쓸 데도 많을 텐데 굳이 그럴 거까지야.
이렇게 미리 다 준비해 놓다니. 이런 게 진정한 충성심(?) 아니겠어?
그런데 뭔가 좀 허전한 기분인데.
뭔가 잊고 있는 게……. 아!
“부단장, 그런데 린은 어디 갔나요? 씻으러 간 녀석이 보이질 않네요.”
“아, 단장님은 욕실에서 실신해서 신전으로 실려갔습니다. 지금은 회복 중이시겠군요.”
“하~ 그래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저렇게 한바탕 설친 다음에 실신했었지? 하긴 저 정도로 힘을 쥐어짰는데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뭔가 안심되면서도 기분이 좀……. 뭐지, 이 기분은?
로빈은 방금 자신이 내뱉은 한숨이 안도의 한숨인지, 아니면 아쉬움의 한숨이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뛰어가는 린의 엉덩이만은 머릿속에 뚜렷이 남았다는 거다. 정말 잊기 힘든 절경이었으니 말이다.
* * *
로빈과 북부의 영지들이 마수들과 실랑이하고 있을 때 황도는 황태자와 조셉 공작의 정치 공작으로 살얼음판을 걷고 있었다.
드디어 황태자가 칼을 빼들어 조셉 공작의 수족이라는 힐데 후작을 정식으로 고발했기 때문이다.
비록 뇌물이나 탈세, 사기 같은 중범죄의 증좌를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관리 소홀이나 업무 방기처럼 소소한 죄들이 쌓여 관직을 박탈하고 낙향시키기에는 충분한 증거가 모인 후였다.
지금까지 이 정도 문제는 조셉 공작의 손에서 알아서 해결할 수 있었으나 이번에는 황태자가 직접 증거를 찾아 고발한 것이라 아무렇게나 처리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완강히 부인하던 조셉 공작도 일이 계속 늘어지자 차라리 힐데 후작을 지방으로 내려보내고 새로운 인물을 자신의 자금책으로 쓰겠다고 마음 굳힌 상태였다.
이렇게 계속 질질 끌면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되면 결국 자신의 위명 역시 더럽혀지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자신도 그렇지만 황후나 3황자의 이미지까지 덩달아 실추될 수도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