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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152화 (152/303)

152화

하지만 문제는 힐데 후작은 그럴 생각이 없다는 거였다.

“같이 물고 늘어지면 됩니다. 재무부 수장은 뇌물을 먹은 정황이 있잖습니까? 뇌물 공여자(준 사람)가 그레이츠 백작, 황태자의 최측근입니다. 이걸로 맞불을 놓으면 황태자도 포기할 수밖에 없어요.”

“이보게, 힐데 후작. 크레톤 후작이 그 상인 놈이랑 같이 지낸 게 벌써 근 10년이야. 그러니까 거의 10년 전에 그 그림을 받았고, 그 뒤로도 혼 래빗 고기나 모피, 고환 같은 걸 종종 받아왔지.”

“그렇죠. 당연히 뇌물 아닙니까?”

힐데 후작은 핏대를 올렸지만 조셉 공작은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 상인 놈은 대체 뭘 받았나?”

“…그건.”

“뭔가 받긴 했지. 뭐라더라? 해상 거래 허가증을 발급해 주고 혼 래빗 가죽을 군부에 소개해 줬다던가?”

“그것도 특혜라면 특혜 아닙니까?”

“그럴 리가 있나. 혼 래빗 가죽은 최근 10년간 군부에서 성사시킨 거래 중 가장 이문이 많이 남는 거래라고 호평이 자자하지. 그때 당시라면 몰라도 지금은 물어뜯을 거리도 못 된다는 거야. 그리고 해상 거래 허가증? 그건 원래 재무부에서 마음 내키면 언제든 끊어줄 수 있는 거고.”

“하지만…….”

“자네도 잘 알지 않나. 특혜가 없었으면 그건 그냥 선물이 되는 거야.”

“수만 골드짜리 그림인데 그게 선물이라고요?”

“값어치가 문제가 아니라 대가성이 문제야. 알 만한 사람이 왜 이렇게 답답한가?”

“하~”

“그리고 이런 일로 황제의 측근인 크레톤 후작까지 끌어들이자는 거야? 그러다가 황제까지 나서면 그 뒷감당은 누가 하고?”

할 말이 없는지 잠시 입을 다문 힐데 후작.

그는 조셉 공작의 마음이 달라졌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우선, 지방에서 잠시 쉬게. 얼마 안 걸릴 거야.”

“그렇습니까?”

한숨을 쉰 힐데 후작은 조셉 공작에게 슬쩍 고개를 숙였다.

“네, 그러도록 하죠.”

“그래. 힐데 후작, 그간 수고가 많았어. 정국이 안정되면 다시 부르지. 어차피 소소한 죄가 겹쳤을 뿐이니 금방 다시 불려 올라올 거야. 날 믿게나.”

대화를 마무리하고 떠나는 조셉 공작.

그리고 힐데 후작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를 갈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버리시겠다는 거군. 내가 얼마나 헌신했는데…….”

조셉 공작도 혀를 차긴 마찬가지였다.

“말귀도 못 알아먹는 놈 같으니라고. 중앙에서 변경백을 물어뜯어서 어쩌겠다는 거야. 그놈들은 괜히 건드리지 말고 집 지키는 개로 잘 써먹는 게 최고란 걸 모르는 건가? 게다가 크레톤 후작이라니, 아무리 제 살기에 급급하다지만 제정신인지 모르겠군. 저놈도 갈 데까지 갔어.”

둘의 대담이 있고 난 뒤, 힐데 후작의 처분은 순식간에 결정되었다. 조셉 공작 쪽에서 더 이상 힐데 후작을 보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힐데 후작은 지방의 작은 영지를 받고 중앙에서 퇴출당한다. 그나마 작은 영지라도 하나 받을 수 있었던 게 지금까지 조셉 공작에게 헌신한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뭔가 찔리는 게 있던 귀족들은 황태자가 감찰권을 발동해 힐데 후작만을 타깃으로 잡은 것에 오히려 안도하고 있었다. 3황자파니, 귀족파니 해도 결국 자신의 안위가 가장 중요한 집단이었으니 말이다.

“내가 이대로 물러날 거 같아? 조셉 공작. 황태자. 사람 잘못 봤어.”

오직 쫓겨난 힐데 후작만 이를 갈며 훗날을 기약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시각 황태자궁에서는 페리안과 젝트, 그리고 크라우까지 모여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고 있었다.

“어쨌든 힐데 후작을 실각시키긴 했군요.”

“그렇지.”

“그냥 얌전히 물러날 인사는 아닌 거 같은데 어쩌시렵니까?”

“글쎄. 그렇긴 한데 당장은 어쩔 수 있나. 그리고 조셉 공작이 실각하면 저런 놈이 할 수 있는 것도 없어. 당장은 조셉 공작부터 신경 쓰자고.”

“예. 황태자 전하.”

“젝트는 황후 쪽을 주시해. 내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그쪽도 가만히 있진 않겠지. 어쩌면 조셉 공작보다 황후 쪽이 더 난감할 수 있어.”

“예.”

“그리고 크라우는 황태자파 귀족들을 살펴봐. 무슨 말인지 알지?”

“예. 전하.”

“조셉 공작은 분명 새로운 자금책을 찾을 거야. 그리고 일을 시작할 때가 가장 허점이 많은 시기고. 미끼만 잘 물면 확실히 치명타를 먹일 수 있지.”

이미 조셉 공작이 자금책으로 쓸 만한 귀족들을 미리 선별한 후 포섭해 둔 지 오래였다. 전생에서도 조셉 공작의 자금 상황을 여러 번 파봤기 때문에 그가 대충 어떤 인물을 자금책으로 삼을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오히려 수월한 작업이었다.

조셉 공작만 처리할 수 있으면 황후와 3황자까지 줄줄이 엮어 찍어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단순한 비리로는 황후와 3황자를 깔끔하게 처치할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그래. 그 정도로 만족해야지. 상대도 이 정도로 만족해 줬으면 좋겠는데. 아니지. 오히려 달려들어 주는 게 더 좋은 건가?”

참모들이 나가고 홀로 남은 페리안은 전생을 곱씹으며 앞으로의 일을 계산하고 있었다.

* * *

로빈이 황도의 소식을 전해 들은 건 긴 겨울이 거의 마무리되고 봄이 기지개를 켤 무렵이었다.

상급 마수를 처치하자 다시 예전과 비슷한 빈도까지 습격이 늘어났고, 영지를 지키면서 다른 영지의 상황까지 점검하느라 다른 문제를 신경 쓸 여력이 없어서였다.

영지의 사업을 확장하는 것도 그냥 주노에게 완전히 맡겨버린 상황이었으니 로빈이 얼마나 바쁘게 움직였는지 알 만한 일이었다.

그렇게 노력한 보람이 있었는지 생각보다 큰 피해 없이 고난의 겨울을 버텨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성과의 중심에는 로랜 영지로 출동한 백랑과 전사들의 노고가 숨어있었다.

그들은 로랜 영지에서 대수림 방면을 수비하다 습격이 잦아든 후에는 바로 델루나 영지로 출동. 마수들에게 큰 피해를 보기 직전에 난입해 관문을 사수하고 영지 방어에 큰 공을 세웠다.

그 결과 그레이츠 영지의 저력과 백랑 기사단의 이름이 5대 방벽의 다른 영주들에게 확실하게 각인되었는데.

“역시 백랑은 진정한 양민 학살자야. 상급 마수만 아니면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마수를 처치할 수 있는 남자라니까.”

이렇게 감탄하던 로빈도 백랑 기사단의 이름이 다른 영지에서 회자된다는 이야기에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백랑의 태도를 생각했을 때 그 이름을 다시 입에 올릴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와, 어떤 놈인지 찾을 수가 없어. 다들 발뺌하고만 있거든. 전투 중이라서 어느 놈 목소리인지 분간도 안 되고. 진짜 잡히기만 하면 요절을 내버릴 거야.”

훗날 백랑이 돌아왔을 때 궁금해서 이걸 물어봤는데 백랑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로랜 영지에서 대규모 마수들을 처리하는 중에 어떤 전사가 뜬금없이 ‘백랑 기사단은 무적이다!!’ 이렇게 외치면서 마수를 처리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로랜 영지의 병사들이 다 같이 복명복창하면서 마수들을 썰었다나?

덕분에 백랑과 전사들의 호칭은 백랑 기사단으로 확정. 아무리 아니라고 부인해도 사방으로 퍼져버린 입소문을 막을 수는 없었단다.

모든 전사들이 백랑이 그 이름을 싫어하는 걸 아는 상황이니 분명 그를 엿 먹이기 위해 외친 건데, 누군지 몰라서 화풀이도 못 하고 있다니 로빈으로서도 기가 막혀 웃음이 나올 만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백랑의 폭거(?)가 불만스러웠던 전사 하나가 장난으로 일을 저지른 모양인데 그 전사도 일이 저렇게 커질 줄은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지금 그 이름이 다섯 영지 전역에 퍼져 나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백랑이 밖에서 고생하고 있을 때 영지도 마냥 손 놓고 있기만 한 건 아니었다. 막판에 상급 마수가 용틀임했는지 자이트 영지 쪽으로 마수가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쪽 방면은 린이 자청해 전사들을 이끌고 가 모두 썰어버렸다.

“아씨, 은근슬쩍 따먹을 수 있었는데. 짜증 나!”

그날 실신해 버리는 바람에 호기를 놓친 린의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북쪽 방벽이 계속 조용했기 때문에 마땅히 화를 풀 곳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지원 요청이 들어왔으니 반색하며 그쪽으로 달려간 것이다.

기사들과 흑웅이 이끄는 전사들은 모두 내버려둔 채 예비 전사들과 신입 전사들만 이끌고 가 개인의 역량으로 모두 쓸어버린 거라 로빈도 린의 발전 속도에는 뭐라고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아마 빅 테일과의 전투에서 또 한 단계 경지가 올라간 모양이었다.

“솔직히 출동한다고 했을 때 기사단을 데려갈 줄 알았지, 그런 애들만 데려갈지 누가 알았겠어? 출동 인원은 자기가 선발한다고 했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하여간 제멋대로라니까.”

이제 영지에서 린나니를 제압할 만한 인물이 없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그나마 폴이나 아버지인 백랑의 말은 잘 들으니 다행이지만 저 녀석에게 고삐를 채울 만한 사람이 하나쯤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는데 생각보다 린의 성장이 더 빨랐으니 말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강한 기사단장이 영지에 버티고 있는 거니 든든하고 좋은 일이긴 했다.

어쨌든 그렇게 식량과 무기, 그리고 지원군까지 보내주며 북부를 지킨 로빈은 이곳 영주들에게 압도적인 지지와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모든 것이 다른 영지의 일로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따른다는 게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힐데 후작이 지방 영지로 쫓겨났다고요?”

그렇게 무사히 겨울을 난 로빈이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지금까지 한쪽으로 미뤄 놓았던 황도의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이다.

“네. 중부 끝 쪽에 자리 잡은 작은 영지랍니다. 거의 북부라 할 수 있죠. 저번 언데드 난리 때 영주 일가를 잃은 곳이라더군요. 피해가 제법 많은 곳이라 힐데 후작도 꽤나 고생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역시 황태자의 타깃은 힐데 후작이었나?

자세한 진행 과정을 알 순 없었지만 저렇게 힐데 후작이 실각한 걸 보면 소설에서처럼 조셉 공작이 힐데 후작을 끝까지 지켜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힐데 후작이 이때부터 이를 갈면서 힘을 모아 지방 군벌로 성장하던가? 잠깐, 어디라고? 북부? 그놈이 왜 이쪽으로 와?

“주노, 힐데 후작이 북부로 왔다고요? 동부가 아니라요?”

“예? 동부 쪽에는 영주를 잃은 곳이 없어서…….”

“아.”

소설에서 조셉 공작에게 버림받은 힐데 후작은 동부 쪽 빈 영지로 내려가 서서히 지배력을 늘려간다. 양아치답게 조셉 공작을 뒷받침하면서도 자기 주머니를 따로 차놓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훗날 여러 영지를 사실상 지배하며 동부의 패자인 레오니스 공작을 상당히 귀찮게 만든다.

그때는 다시 대등한 입장에서 조셉 공작과 손을 잡던가?

물론 그사이에 상당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에는 다시 황태자랑 대립하는 인물이라는 거다.

사실 저놈을 그냥 내버려두고 조셉 공작이랑만 드잡이질한 황태자의 실책도 실책이지만 그사이에 워낙 많은 일이 벌어지다 보니 힐데 후작한테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기도 했다.

“짜증 나네. 그놈이 북쪽에 자리 잡았다고? 거리는 제법 떨어져 있지만 결국 날 귀찮게 할 수도 있단 거잖아?”

소설과는 달리 동부 쪽의 방비가 완벽해서 거의 피해가 없었고, 그래서 자리가 난 곳을 찾다 결국 이쪽으로까지 기어들어 왔나 본데, 레오니스 공작도 귀찮게 만든 놈이니 자신에게도 귀찮게 굴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상대가 자신보다 고위 귀족인 후작이었으니 상대하기 좀 껄끄럽기도 했다.

어쨌든 이래저래 짜증 나는 일이었는데.

“아니지. 그래도 예전에 마수 사냥 건으로 그렇게 사이가 나쁜 건 아니잖아? 적당히 놔두면 별문제 없지 않을까? 그래도 난 변경백인데 설마 이쪽까지 건드리겠어?”

이렇게 생각하며 그냥 모른 척 넘어갈까도 했지만.

“슬쩍 들리는 소문인데 힐데 후작이 크레톤 후작을 걸고넘어지려고 했답니다.”

“그분을요? 그분을 왜요?”

“예전에 제가 선물한 그 그림이 뇌물이라며 물고 늘어지려고 했다는데, 이게 공론화됐으면 아무래도 좀 껄끄러울 뻔했습니다.”

“…그게 왜 뇌물이에요? 엄연한 선물이지. 허. 이 사람, 안 되겠네. 나처럼 제국에 헌신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런 모함을…….”

진심으로 억울해하는 로빈.

주노는 분해하는 로빈의 모습에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영주님. 안 보던 사이에 좀 뻔뻔해지셨습니다?”

응? 진심인데. 내 본의는 아니라지만 어쨌든 제국에 큰 보탬이 되고 있는 건 사실이잖아?

게다가 그 그림 덕분에 티 안 나게 혜택을 받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그게 뇌물은 아니었지.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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