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상한 소설 속 로빈-153화 (153/303)

153화

사실 주노가 크레톤 후작이랑 독대할 수 있는 것만 해도 특혜라면 특혜지만 그걸 물고 늘어지면 3황자네 애들은 다 직위를 해제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긴 그랬으니 조셉 공작이 미리 말도 못 꺼내게 했겠지만.

어쨌든 상당히 불쾌한 일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알겠어요. 그건 좀 생각해 보죠. 알려줘서 고마워요, 주노. 그리고 봄이 되면 바로 다른 지역으로 파견 나가서 숙성 창고 지어줘야 하는 거 알죠? 백랑, 이거 준비했나요?”

“응. 영주님. 이제 바로 출발할 거야. 이번에는 그냥 주술사들만 보낼 생각인데 괜찮겠지? 저번에 가서 영주들 만나보니까 뒤에서 뭔가 할 거 같은 사람들은 아니더라고.”

“그래요? 뭐, 상관없죠. 그럼 그러세요.”

이번에는 자이트 영지 쪽에서 사육장을 관리할 사람들을 파견하고 로빈은 그저 숙성 창고만 관여하기로 했다. 그러니 주술사만 보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원래라면 안전 때문에라도 전사들을 같이 파견했겠지만 바로 작년에 백랑에게 신세를 진 영주들이 주술사에게 뭔가 해코지를 할 리는 없었다. 게다가 영주들 역시 담백한 사람들이기도 했고.

“영주님, 혼 래빗 가죽이 영지 쪽으로 모이면 하등품은 제가 좀 써도 될까요? 제가 이번에 시작하는 사업에 좀 필요해서요.”

“그러세요. 어차피 하등품은 팔리지도 않는 물건이잖아요?”

“하하, 감사합니다.”

각 영지에서 본격적으로 혼 래빗 사육을 시작하고, 가죽이 모두 영지로 모인다는 소식에 반색하는 주노.

아무래도 이번에 새로 시작하는 사업 때문인 모양이다.

로빈도 이제는 자신의 얕은 지식으로 영지 사업에 기여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있었다. 사실 영지의 근간이 되는 혼 래빗조차 백랑이 알아서 시작한 사업이지 않은가.

그래서 주노가 뭔가를 시작한다고 할 때도 그냥 알아서 하라고 맡겨놓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힐데 후작이라는 골칫거리가 북부에 자리 잡으면서 그것에 정신이 팔려 그런 사소한 일에는 신경 쓸 여력이 없기도 했다.

“영주님, 황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게이트 건설을 시작하겠다는군요.”

“그래요? 알았어요. 그건 지온이 책임지고 맡아서 처리하세요.”

“로빈, 이번에 잡은 빅 테일을 좀 연구해 보고 싶은데 괜찮을까? 독을 쓰는 마수라니, 연구할 게 무궁무진한데 말이야.”

겨우내 마법 갑옷과 무기에 인챈트하느라 쉬지도 못한 히센이 이번에 잡은 빅 테일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분명 일을 끝마칠 때는 무조건 쉬겠다는 사람이 빅 테일이 눈앞에 있으니 그게 또 안 되는 모양이다.

생각보다 빨리 다음 작업을 시작해도 되려나?

하지만 최후의 만찬 정도는 베풀어야 하니 좋은 마음으로 허락했다. 빅 테일을 조사해서 뭔가 얻는 게 있으면 그건 그거대로 좋은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요, 히센 님. 그러세요.”

그날의 회의는 린과 흑웅이 기사와 전사들의 훈련 상황과 장비 상태까지 보고한 후에야 마무리될 수 있었다.

* * *

다소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간 로빈.

하지만 집에서도 생각지도 못한 골치 아픈 문제가 로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겨우내 집에 연금당했던 세이라에 대한 성토와 자기반성의 시간이 이어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까지 집안일은 거의 마리아나가 알아서 처리했지만 이번 일은 생각보다 사안이 커 나이는 어리지만, 가주이자 영주인 로빈까지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이 일이 지금까지 밀려온 것도 영지 일로 너무 바쁜 자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이라를 가운데 앉혀놓고 가족들이 둘러앉아 앞날을 걱정하고 대책을 논의하는 회의.

당연히 나무람과 힐난이 난무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로빈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검술보다는 마법 공학 쪽으로 밀어붙일 걸 그랬어요.”

“세이는 실비처럼 그렇게 똑똑하지 않아서 그건 좀 무리였을걸.”

“하긴. 날 닮았으니 그건 그렇겠죠. 에휴~”

“사실 우리 가문에서 저 정도로 재능 있는 아이가 태어난 것만 해도 기적이야.”

“전 그저 내버려두면 로빈처럼 알아서 잘 클 줄 알았거든요. 그건 또 아닌가 봐요.”

“다 미리 잡아주지 못한 우리 잘못이란 거지.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래요. 누굴 탓하겠어요. 다 우리 잘못이죠.”

이런 식으로 자기반성만 계속 이어지며 회의가 전혀 진행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게 또 효과가 대단해서 자책하는 어른들의 모습에 세이라만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는데.

…이건 신개념 훈육인가?

죄인(?)을 가운데 앉혀놓고 자기반성만 늘어놓으면서 자책감을 불러일으키려는?

저 망둥이의 반응을 보니 효과가 나쁘진 않은걸.

하지만 이래서는 쉽게 끝날 거 같지 않았다.

“이래서 무슨 결론이 나겠어요? 뭔가 대책이 나와야죠.”

조금 답답했던 로빈이 나서서 채근하자 한탄하며 자책하던 어른들도 정신이 드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장 큰 어른인 카인이 나서서 이야기를 진행했는데.

“흠, 그건 그렇군. 그래서 너희들은 세이라를 어떻게 하고 싶은 게냐? 세릴부터 말해보거라.”

“세이가 좋은 데 시집갔으면 좋겠어요. 검술도 좋지만 레이디로서의 소양도 익혀야 귀족 자제에게 시집갈 수 있지 않겠어요?”

“레이디로서의 소양이라…….”

“윽. 엄마, 그건 진짜 아니야. 레이디라니. 난 그런 거 못 한다고.”

극구 반대하는 세이라. 하지만 세릴의 마음은 이미 정해진 거 같았다. 이대로 세이라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가르치고 아카데미에서 귀족 자제를 겟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엄마도 그런 거 모르면서 잘 살잖아! 그런데 왜 나한테는 그런 걸 배우라고 해?”

그래서인지 세이라의 팩트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고 있었다.

천생 밝기만 하던 세릴의 생소한 모습에 로빈도 조금 놀랄 지경이었다.

세이라의 나이 이제 열한 살. 조금 늦긴 했지만 아주 늦은 건 아니었다.

지금부터라도 잘 배우면 세릴의 말대로 열다섯 살 때 아카데미에 들어가서 적당한 귀족 자제를 만나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란 뜻이었다.

물론 그럴 거면 지금까지 그냥 방임하지 말아야 했지만 이미 지난 일은 따져봐야 아무 소용없었다.

“글쎄요. 솔직히 세이라에게 레이디 교육을 하기에는 이미 늦은 거 같은데요.”

“네? 도련님, 왜요?”

놀라는 세릴에게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어릴 때부터 린나니랑 오랜 시간 같이 지내며 이미 망나니화되어 버려서 불가능하다고 설명하자니 너무 창피했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의 첩(?)이 시누이인 세이라를 잘못 물들인 꼴이 아닌가.

그리고 세이라의 재능만 생각하며 그녀가 다른 가문에 시집가는 건 생각하지도 않은 자신의 잘못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로빈도 할 말은 있었는데 그의 두 모친 역시 그런 거 없이 결혼해서 잘만 살고 있었다. 평민인 세릴은 물론이거니와 마리아나 역시 제법 고상하긴 하지만 귀족 영애의 소양을 따로 교육받았을 거 같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시집이라. 그렇군. 세릴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나.”

“하지만 세릴, 꼭 그래야 할까? 그러면 세이가 다른 곳으로 시집가야 하잖니.”

“그래, 세릴. 차라리 세이는 영지에 사는 건실한 청년이랑 결혼해서 이곳에서 사는 게 나을 거 같아.”

“하지만…….”

마리아나와 윌리엄까지 진지하게 반대하자 작은어머니 세릴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이렇게 진지하게 세이라의 앞날을 이야기하는 건 처음인지 세 부모의 의견 대립이 생각보다 팽팽하게 이어지기도 했고.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세릴은 제 뜻을 접은 듯 한숨을 내쉬며 쓸쓸한 웃음을 내비쳤다.

“그렇네요. 제가 너무 제 욕심만 냈나 봐요. 세이도 저렇게 싫어하는데 레이디 교육이라니. 평민 주제에 제 분수도 모르고 너무 욕심만 앞섰어요.”

“그런 뜻이 아니야, 세릴. 단지 어떤 게 세이의 행복을 위한 것인지만 생각하자는 말이었어.”

오늘은 세릴이 새로운 모습을 제법 많이 보여준다.

이 세계에서 귀족이란 게 생각보다 큰 의미가 있는지 세릴의 자격지심이 생각보다 커 보였다. 따지고 보면 우리 가족 모두 그렇게 귀족적으로 살고 있는 건 아니라 별 의미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그게 그렇지는 않은가 보다.

까놓고 말하면 웬만한 상인만 해도 우리보다는 사치스럽게 살지 않나? 지금 두 어머니가 입고 있는 옷만 해도 적당히 질 좋고 평민들도 즐겨 입는 단순한 원피스였다.

자조하는 세릴과 그녀를 달래주는 윌리엄과 마리아나.

서로 위로해 주고 달래주는 건 참 보기 좋은데… 그래서 세이는 어쩌자는 겁니까, 부모님들?

이 회의, 오늘 안에 끝나기는 하는 걸까요?

이럴 때 답답한 걸 보면 왠지 자신만 삭막한 사람인 거 같아 조금 우울해진다.

“결혼이라. 그러고 보니 세이라에게 중매가 하나 들어오긴 했지.”

그리고 카인의 폭탄선언을 기점으로 회의의 양상이 전혀 다른 곳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누굽니까, 열한 살짜리한테 혼담을 넣은 그 망종은?”

“제정신인 걸까요?”

“일러도 너무 이른데요. 대체 누가…….”

“혼담은 로빈이 더 급한데.”

“그러게요. 왜 로빈이 아니라 세이라한테…….”

“이건 이거대로 문제네요. 물론 아직 성인이 된 건 아니지만…….”

순식간에 태세를 전환해 상대를 성토하기 시작한 부모님들.

이럴 때는 또 한마음 한뜻이었다.

게다가 세이라로부터 시작한 이야기가 돌고 돌아 자신에게까지 이어지는 이 자연스러움이란.

부모님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지만 사실 귀족 사회에서 미리 혼약을 나누고 성년이 되자마자 결혼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그러니 지금쯤 세이라에게 혼담이 들어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오히려 아직까지 혼담이 들어오지 않는 로빈 쪽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네. 왜 나한테는 혼담이 안 들어오지? 나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당장 급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또 기분이 영 별로인데.

“흠, 진정들 해. 우선 상대는 자이트 영지의 3남 레닌 자이트야. 저번에 우리 영지를 방문했던.”

“음.”

“레닌이라면…….”

“그 붙임성 있고 성격 좋은 자이트 영식이요?”

상대가 레닌이라는 이야기에 부모님들의 분위기가 다시 반전되었다. 그 녀석은 저번에 방문했을 때 제법 점수를 따놓았기 때문이다. 내용물은 어떻든 간에 껍데기만은 상당히 괜찮기도 했고.

아니, 다른 사람들하고 잘 어울리는 성격이니 내용물도 그럭저럭 괜찮다고 해야 하나?

다만 아무 여자한테나 치근덕대는 그 성향이 좀 문제였는데.

“안 돼!! 난 나보다 강한 남자한테 시집갈 거야!”

“…네가 무슨 모야족이냐?”

부모님의 긍정적인 기류를 읽었는지 세이라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고, 로빈은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이 녀석이 어릴 때 몇 년이나 남쪽 마을에 내려가 있더니 가서 이상한 것만 배워 왔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이 녀석이 모야족 여성처럼 순종적인 것도 아니었으니 자기한테 좋은 것만 배워 온 셈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레닌이라면 자신도 반대였다. 3남이라지만 귀족 자제고, 성격도 괜찮으며 외모도 그럭저럭 반질반질하지만, 여자를 너무 밝히기 때문이다.

세이라에게는 그런 기생오라비 같은 녀석보다는 좀 듬직하고 믿음직한 남자가 어울리지 않을까? 저 망둥이를 꽉 쥐고 흔들 수 있는 그런 뚝심 있는 남자 말이다.

세이라에게 가장 어울리는 남편감을 찾아주시오.

보상은 두 사람 궁합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차등 지급됩니다.

보상: ???

페널티: ???

기한: 없음

엥? 오랜만에 퀘스트가 나왔는데 고작 이런 거야?

아니, 차라리 그게 나은가?

최소한 5년은 묵혀둬야 할 거 같은 퀘스트가 등장했는데 괜찮은 건지 모르겠다. 기한도 없으니 죽기 전까지 마무리하면 될 것 같긴 하지만.

게다가 왠지 페널티는 광폭화한 세이라일 거 같았다. 노처녀 히스테리는 생각보다 더 무서우니 말이다.

그런데 저게 중요도 B라니. 세이라는 대체 무슨 짓을 할 생각인 거지? 정말 기가 막힌 일이었다.

“저도 레닌은 반대예요. 물론 나쁜 녀석은 아니지만, 너무 가벼워서요. 세이라에게는 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요?”

세이라에 이어 로빈까지 반대하자 부모님들도 마음을 고쳐먹었다.

“세이가 싫다면 안 되는 거지.”

“그래, 세이가 당사자인데 본인이 싫다니.”

“그래도 귀족 자제인데 아쉽긴 해요.”

자이트 영지의 3남 정도면 정략적으로도 괜찮은 상대이고, 심지어 잘만 조율하면 데릴사위로 들일 수 있는 좋은 조건임에도 세이라가 거부한다는 이유로 마음을 접으시는 부모님들.

확실히 저런 점은 부모님다웠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실비아와 린을 모두 받아들이라고 압박했던 거 같은데. 뭔가 취급이 좀 다른 거 아닌가?

내 자업자득인 면도 있었지만 좀 미묘하긴 하다.

(다음 화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