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혼담을 거절하기로 한 가족들은 이제 로빈의 혼담을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대화는 밤늦게까지 이어지다 그렇게 회의(?)가 마무리되었는데.
“…그래서 결론은? 세이는 어떻게 할 거며, 제 혼담은 어쩌겠다는 건가요?”
뭔가 긴 회의가 진행된 거 같은데 결론은 없고 잡담만 나누다 끝난 상황.
밤이 늦어 즐거운 마음으로 해산하는 부모님과 할아버지의 모습에 로빈은 망연한 얼굴이 되었다.
윌리엄은 웃으며 그런 로빈의 머리를 쓰다듬는데.
“뭐, 괜찮지 않니? 이렇게 가족끼리 모두 모여 즐겁게 지냈으니까. 이런 일이 자주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건 그렇지만요.”
딴에는 새로운 가족이 생긴 이래 가족들에게 헌신한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영지다 뭐다 하면서 가족들과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처음이지 않은가.
물론 상황이 계속 그래서 어쩔 수 없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씩이라도 시간을 냈으면 좀 더 많은 시간을 가족들과 보내지 않았을까?
결국 영지가 바쁘다는 건 일에만 빠져 살며 가족을 소홀히 하는 어떤 가장의 흔한 핑계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가벼운 일상을 공유할 시간 정도는 있을 테니 말이다.
“원래 많은 걸 바라시는 분들도 아니고. 흠……. 좀 더 신경 써야겠네.”
아무런 결론도 내지 못한 허무한 회의였지만 그래도 뭔가 느껴지는 바가 있는 그런 시간이었다.
회의 이후 우리 망둥이는 조금 변했다. 예전보다 더 악착같이 훈련한다고 해야 할까?
아무래도 부모님의 반응을 봤을 때 자신이 전장에 나서려면 능력을 보여 확신을 줘야 한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적어도 기사급, 혹은 그 이상이 되지 않으면 아무도 허락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혼담 소식도 좀 충격적이었는지 남편감들을 모조리 썰어버릴 기세였다.
“듀발 오빠! 덤벼!!”
덕분에 세이라를 훈련시키던 듀발만 피곤해지고 있었다. 가뜩이나 성가신 비글이 과도한 열정과 절박함까지 품고 돌아왔으니 어찌 피곤하지 않을까?
“네가 고생이 많다.”
그런 듀발에게 로빈이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한마디의 위로뿐이었다. 린하고 세이라에게 시달리는 걸 보면 저 녀석도 전생에 지은 죄가 많은 거 같았다.
그게 아니면 혹시 나라라도 팔아먹었나?
* * *
시간은 순리대로 착실하게 흘렀고 영지의 일들은 순조롭게 잘 풀려 나갔다.
지방으로 파견 나간 주술사들은 여름이 될 무렵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고, 각 사육장은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리 혼 래빗을 늘려놓은 덕분에 바로 가죽과 고기를 생산할 수 있었다.
고기는 대부분 영지에서 자체적으로 소화했으며 가죽은 그대로 그레이츠 영지 쪽으로 보내졌는데 영지에 쌓이기 무섭게 바로바로 황도로 실어 나르고 있었다. 이 정도면 겨울이 오기 전에 상당한 이익을 얻을 수 있으리라.
[변경백, 고맙군. 앞으로 식량 걱정은 안 해도 될 거 같아. 하하하.]
그레이츠보다는 작황이 좋아서인지 혼 래빗이 추가되는 것만으로 식량 자급이 가능해진 영지들은 로빈에게 따로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어차피 서로 좋자고 하는 일이었고, 각 영지의 사정이 풀리면 빌려줬던 식량을 마음 편하게 돌려받을 수 있어서 로빈에게도 괜찮은 일이었다.
“올해는 정말 순탄하게 잘 흘러가는 거 같은데.”
황실에서 파견 나온 마법 공학자들이 워프 게이트를 완성하고 돌아간 게 바로 저번 달이었다.
물론 한 번 사용하는 데 1천 골드. 왕복 2천 골드의 돈을 그냥 허공에 날릴 순 없어 한 번도 사용하진 않았지만, 지금까지 게이트가 문제를 일으킨 일은 없다니 잘 운영될 거라고 믿을 수 있었다.
어쨌든 별 탈 없이 그렇게 게이트가 건설된 것이다.
히센도 빅 테일의 연구를 마치고 다시 본업으로 돌아가 가죽 갑옷과 무기의 인챈트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단순 인챈트 작업에는 좀 뚱하던 양반인데 왜 저렇게 열을 올리나 했더니 쌍둥이가 임신했단다.
무슨 분유 버프도 아니고 많이 일한다고 월급이 늘어나는 것도 아닌데다가 돈도 많은 분이 굳이 저럴 거 있나 했는데 마법적 재능이 뛰어난 아이를 기원하며 태교하는 거라나?
그게 말이 되나 싶었지만 어쨌든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 굳이 말리진 않았다. 쌍둥이까지 앉혀놓고 일하는 덕분에 작업량도 엄청나게 늘어나서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빅 테일.
이놈이 생각보다 쓸 만한 놈이었다.
로빈의 알아서 보관하라는 말에 숙성 창고로 직행한 빅 테일은 잘 숙성되어 먹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녀석을 조사하던 히센이 이걸 놓칠 리가 없고 철저히 분석한 결과 놈의 고기가 독에 대한 저항력을 높여준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번식력이 대단한 혼 래빗은 정력, 맹독을 품은 빅 테일은 독 저항력이라……. 이거 우연일까요?”
“글쎄, 우연이라면 참 기가 막힌 우연이겠지?”
“아우, 이럴 줄 알았으면 예전에 잡은 상급 마수의 고기도 남겨두는 건데.”
조사 결과를 전해주던 히센 역시 이게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확실히 무슨 연관이 있는 건 분명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예전의 그놈들을 아쉬워하는 백랑은 좀 어이없을 뿐이었다. 그때는 마을이고 뭐고 없었고 당연히 숙성 창고도 없었는데 그걸 어떻게 보관한단 말인가?
물론 로빈도 전혀 아쉽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저 고기가 진짜 필요한 사람들은 황도 사람들 아냐?
황태자는 몰라도 레니아 공녀나 참모들은 항상 암살의 위험을 안고 살 텐데.
빅 테일이 워낙 커서 어느 정도 보내줘도 우리가 먹을 건 충분하니 이 기회에 황태자한테 힐데 후작 놈을 어떻게 할 건지나 좀 물어봐야겠다. 지금 당장 영지에 위험 요소인 건 그 녀석뿐이었으니 말이다.
겸사겸사 황태자에게 다시 면담을 요청했다. 워프 게이트가 완성된 것에 대한 감사 인사도 전하고, 빅 테일 고기를 미끼로 황태자의 의중도 한번 떠보기 위해서였다.
[오, 충신 그레이츠 백작 아닌가? 오늘은 또 무슨 일이지?]
응? 이 양반은 또 왜 이런 반응이야?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
“몇 가지 보고할 게 있어서요.”
로빈의 보고를 전해 들은 황태자는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워프 게이트야 원래 그렇게 해주기로 한 거니 고마워할 것도 없지. 그리고 빅 테일? 독에 대한 저항력을 올려준다니 고맙게 받겠네. 이 자리가 그리 녹록한 자리는 아니라서 말이야. 그나저나, 상급 마수를 또 잡았군. 그건 왜 보고하지 않았나?]
“그걸 뭐 하러 보고합니까? 황실에서 따로 해줄 수 있는 것도 없는데요.”
[허허. 이 사람. 공적이 올라가지 않나, 공적이.]
이 양반 보소. 이 와중에 또 공적을 올리라고?
“공적은 됐습니다, 전하. 얼마나 더 피곤해지려고 공적을 또 올리겠습니까?”
[뭐, 상관없네. 자네가 보고한 스미스 제련법과 이번에 진상한 상급 마수로 만든 검. 그리고 빅 테일의 고기까지 내 알아서 기록해 놓겠네. 마수의 뼈로 무기를 만드는 방법까지 미리 연구해 놓다니. 자네는 정말 충신이야.]
뭐? 스미스 제련법이 공적에 들어간다고? 그게 왜 공적에 들어가? 와, 저 인간이 또 사기를…….
에휴, 됐다. 알아서 해라.
다음 승작까지는 무려 2,000포인트인데 그건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아마 별일 없을 거다.
그나저나 왜 저렇게 텐션이 올라갔나 했더니 스미스 제련법 때문이었군. 하긴 소설에서도 제법 피곤한 과정을 거쳤는데 그걸 그냥 건너뛰었으니 기분 좋을 만하지.
물론 내 입장에서야 황태자가 알아서 제련법을 널리 퍼트릴 테니 쓸데없는 수고를 던 셈이고.
게다가 저 제련법이 널리 퍼지면 훗날에는 중급 마수의 뼈도 수요가 늘어날 거라 영지 입장에서도 이익이었다. 자신의 영지뿐만 아니라 다섯 개 영지가 모두 수혜를 입는다고 할까?
어차피 그 무기를 모두 만들어 팔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뼈라도 사서 알아서 무기를 만들어주면 그것도 좋은 일이었다.
[게다가 자네가 황도에서 하는 그 사업. 정말 마음에 들어. 하하하.]
…이건 또 뭐야? 뭔가 또 있어?
사업이라면 주노가 뭔가 한다는 것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황태자가 실없는 사람도 아닌데 이미 수년 동안 이어온 혼 래빗을 말하는 건 아닐 테니 말이다.
이게 황태자가 좋아할 만한 뭔가가 있다는 건가? 원래 힐데 후작의 일을 물어보려 연락한 건데 자신만 두들겨 맞는 기분이었다.
“그보다 힐데 후작이 북부로 왔던데요. 이건 어쩌실 생각이신지?”
[힐데 후작? 아아, 어차피 끈 떨어진 인사라서 말이야. 조셉 공작만 아니면 그런 소인배가 뭘 할 수 있겠나?]
역시나인가? 이건 생각을 좀 해봐야겠네.
“소인배라서 더 위험한 겁니다, 전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으니까요.”
[흠……. 내 기억은 해두겠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놈한테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어. 그놈이 무슨 짓을 저지른다면 또 모르지만.]
“그렇군요.”
이런 건 또 원작대로 가는 건가? 참 종잡을 수 없단 말이야.
하지만 황태자의 의중을 대충 알았으니 제법 성과가 있었다. 그리고 저 사업 이야기도 은근히 신경 쓰이고.
[어쨌든 자네 상단이 지금 애매한 상황이야. 나중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나를 찾게나.]
황태자와의 연락을 끊은 로빈은 바로 주노부터 찾았다.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데 황태자가 저러나 싶어서였다.
[엇, 영주님. 어쩐 일이십니까?]
“황도에서의 사업은 잘돼가나요? 대체 뭘 하는 거예요?”
[아, 예. 그거요. 하하. 구체적인 성과가 나오면 보고 드리려고 했는데 상황이 좀 이상해졌습니다.]
지금 주노가 진행하고 있는 사업은 무려 성인 용품, 특히 진동 가죽 막대를 주축으로 한 여성 용품 사업이었다.
물론 지금까지도 모형 성기는 여러 종류가 있었지만 이렇게 획기적인 물건은 없었단다. 특히 로빈이 고안(?)한 그 돌기가 달린 진동 딜도는 정말 선풍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데.
하지만 로빈은 그저 아연할 뿐이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자신의 평판은 이대로 괜찮은 걸까? 혼 래빗 푸줏간이라는 악명 아닌 악명에 이어 진동 딜도의 창시자이자 아버지가 되어버렸는데?
아무리 자신이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도 이 정도면…….
게다가 이게 먹힌다고?
영지에서 그 진동 막대가 제법 인기 있다는 건 진작 알았지만, 황도에서까지 이게 먹힌다니 기가 막힌 일이었다.
[그 늠름한 돌기 패턴도 이미 특허로 들어갔습니다. 물론 진동 막대도 예전에 특허를 냈죠. 그 둘이 합쳐져서 지금 엄청난 시너지를 내고 있는데…….]
애당초 마을 처녀들과 사제들이 신전의 남근상을 보고 감탄한 것이 이 사업을 마음먹게 된 계기였단다.
설마 이것도 자업자득이냐?
하지만 그런 것도 특허로 받아주다니. 진짜 재무부 관리들한테 뇌물이라도 뿌린 거 아냐? 여기나 저기나 공무원이란 정말…….
하지만 이게 대체 황태자랑 무슨 상관이지?
[저, 영주님. 그런데 문제가 좀 있습니다. 원래 이거 때문에 연락을 드려야 하나 고민했는데요.]
“무슨 일인데요?”
특허까지 받고 날개를 펴기 시작한 주노의 사업.
하지만 최근에 문제가 발생했다는데.
이미 황도에서 자리를 잡고 있던 성인 용품 상단이 자신들의 물건에 주노가 특허 낸 돌기 패턴과 비슷하게 돌기를 추가해 팔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처음에는 돌기만 베껴 팔던 그 상단이 이제는 시중에 풀린 혼 래빗 가죽으로 진동 막대까지 만들어 대놓고 팔고 있단다.
그리고 그 상단 뒤에는…….
“조셉 공작이요? 그러니까 그 상단의 주인이 조셉 공작이라고요?”
[네. 물론 운영은 다른 상인이 하지만 실소유주는 그렇답니다. 그래서 좀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돌기까지는 그럭저럭 버틸 만했는데 완전히 똑같은 물건을 만들어 팔기 시작해서요. 분명 그 진동 막대도 예전에 특허로 등록해 놓은 건데…….]
무슨 공작씩이나 되어서 그런 사업을 하고 있어? 이게 그 정도로 큰 이권이 달린 사업인가?
주노의 말에 따르면 상대가 교묘하게 다른 모양의 돌기를 추가해 판매하고 있단다. 진동 막대도 다른 모양으로 만들어 팔고 있었고.
결국 특허를 우회해 자신의 실속을 차리고 있다는 건데.
상대가 워낙 거물이다 보니 마땅히 대처할 방법이 없어서 곤란한 상황이란다.
“이거였군. 황태자가 말한 게.”
힐데 후작이 사라진 상황에서 조셉 공작의 자금줄을 집요하게 노리고 있는 황태자.
그런데 때마침 조셉 공작의 사업을 압박하는 뉴 페이스가 등장했으니 그게 바로 주노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