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사실 생산 규모를 늘려 전국적으로 유통할 수 있는 곳이 리아넨 공작가 하나만은 아니었다. 지금쯤이면 중소 상단을 규합해 제대로 활동하기 시작할 황태자 역시 가능하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황태자가 아닌 리아넨 공작가를 선택한 이유는…….
“글쎄요. 왜일까요? 흠……. 그냥 약간의 화풀이? 이 정도로만 알고 계시면 될 거 같은데요.”
자꾸 사람을 장기 말로 쓰려는 황태자에게 조금 심통이 나서였다. 물론 그것만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지만 그런 감정적인 이유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는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 인간은 분명 나랑 교섭해서 조셉 공작을 밀어내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걸 그냥 황태자에게 고스란히 넘기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음…….”
“어쨌든 리아넨 공작가가 가장 좋은 파트너임은 확실하죠. 마법 물품 덕분에 웬만한 큰 도시에는 점포를 가지고 계시잖아요? 물건 팔기에도 딱 좋네요.”
“그건 분명하군.”
“우리 쪽 물건이 훨씬 좋다니 상대를 밀어내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면 그 상단이 우리 물건을 베껴 쓸 이유도 없었겠죠. 역시 문제는 물량인데 그건 리아넨 공작가가 합류하면 간단한 일이죠. 리아넨 공작가의 이익과도 직결된 문제니 충분히 만족할 만한 거래일 겁니다.”
“좋아. 마음에 드는군. 조셉 공작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것도 마음에 들고. 제법 돈이 될 거 같아서 더 마음에 들어. 하지만 우리 쪽으로도 혼 래빗 가죽을 공급해야 할 텐데, 가능하겠나?”
“네. 북부에 혼 래빗 사육장이 대거 늘었습니다. 아마 기존 물량보다 두 배 이상 생산될 테니 충분할 겁니다.”
“그래. 그렇게 하지. 내 수하 하나를 주노 상단에 보내겠네.”
“그래주시면 감사하죠.”
대담은 되도록 짧게 끝내고 나왔다. 지켜보는 자가 있을 수도 있는데 너무 오래 머물다 보면 이 거래의 존재를 상대가 파악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런다고 뭔가 달라지진 않겠지만 웬만하면 이 일을 서프라이즈로 남겼으면 했기 때문이다.
“그래야 더 열 받겠지. 판 깨기조차 못하게 되면 조셉 공작도 제법 짜증 날 거야.”
리아넨 공작가에 알게 모르게 신세 진 것도 갚고, 황태자에게는 앙탈도 좀 부리고, 조셉 공작에게는 짜증과 빅 엿을 먹이게 되었지만 뭔가 심란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에휴, 진짜 저질렀네. 앞으로는 좀 더 피곤해지겠어. 그나저나 리아넨 공작가는 나한테 절이라도 해야 하는 건데. 알게 모르게 신세 진 게 있어서 그냥 두고 볼 수가 있어야지. 이번에 앞으로 질 신세까지 모조리 갚았으니 당분간은 잘 부탁합니다.”
리아넨 공작가는 제국에서 가장 큰 마나석 광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재정의 상당 부분을 마나석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마법 물품을 만들어서 팔곤 있지만, 이것조차 마나석을 과점하고 있어서 경쟁력이 있는 거였다.
하지만 이제 곧 마나석이 쏟아져 나오는 시기가 도래한다. 그렇게 되면 리아넨 공작가의 사업은 자연적으로 도태되고 말 것이다.
실제로 소설에서도 그런 이유로 무너졌으니 아마 이번에도 크게 다르진 않을 거다.
그러나 지금처럼 수많은 하급 마법 공학자들을 선점해 놓으면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마법 공학자와 대량 생산 시스템만 미리 확보해 놓으면 그런 상황이 오히려 득이 될 테니 말이다.
로빈이 리아넨 공작가에 신세를 갚았다는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어쨌든 내가 할 일은 다 했고. 이제 황태자가 얼마나 잘해주느냐에 달렸군. 하긴, 진작부터 벼르고 벼른 일이니 알아서 잘하겠지. 미리 해결할 수 있는 걸 굳이 크게 키워서 날 귀찮게 했으니 그 정도는 알아서 해주겠지?”
장기 말이 자신이라는 사실에 뒷맛이 좀 안 좋았지만 황태자의 능력만은 믿을 만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알아서 잘 해결할 것이다.
* * *
자신의 집무실에서 여러 가지 모조 성기를 살펴보던 황태자는 그레이츠 영지에서 만들었다는 돌기 달린 가죽 막대에 마나를 주입했다.
그리고 맥동하며 꿈틀대는 가죽 막대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는데.
“뭐가 그리 재미있으십니까?”
“요즘 이게 귀부인들 사이에서는 필수품이잖아. 레니아도 몇 개 샀다는군. 그때 레니아의 표정이 정말……. 어쩌면 지금도 둘째나 셋째가 곤욕을 치르고 있을지도 모르겠어.”
“페이드 상단에서 파는 그 미친 사치품보다는 차라리 저게 낫습니다. 상아로 만든 모형 좆이라니요. 사치도 정도껏이지, 그딴 걸 만든 상단주의 머리를 열어보고 싶군요.”
물론 이 가죽 막대도 그렇게 저렴한 건 아니지만 기능성을 따지면 단순한 모형 성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마법 물품이라는 것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대체 저런 걸 왜 사는 걸까요? 저런 장난감보다 실물이 훨씬 낫지 않습니까?”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지 고개를 젓는 크라우.
“남편의 X지가 시원찮은가 보죠. 아니면 허리가 시원찮든지요. 어쨌든 살 만하니까 사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레니아 공녀님처럼 첩실들을 교육할 때 쓸 수도 있고요.”
적나라한 젝트의 말에 헛웃음을 터트리던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혼 래빗 거시기가 널리 유통된다면 세상이 평화로워질 텐데 말이야. 물량이 없으니, 뭐. 그건 그렇다 치고, 확인해 봤나?”
“예. 황제 폐하께서도 소문을 접하셨습니다. 주노 상단은 정식으로 재판을 요청했고요. 그리고 그레이츠 백작이 황도에 저택을 구입했더군요.”
젝트의 보고에 시기가 무르익었음을 느낀 황태자는 즉시 다음 단계로 넘어가라고 지시했다.
“좋아. 로빈까지 왔으니 바로 시작하지. 페이드 상단과 알게 모르게 컨택하고 있던 법무관들, 그리고 재무관들의 명단하고 관련 사건들 다 조사해 놨지?”
“예. 전하.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하, 그래. 황제 폐하께서 물으시면 바로 보고한다. 이 정도까지 소문이 퍼졌으니 이제 슬슬 물어보실 때가 됐지. 내가 나서서 이 일을 처리하면 업무 간섭에 외압이라고 물어뜯겠지만 폐하께서 하문하시면 그런 것도 의미 없는 거지.”
“왠지 즐거워 보이시는데요?”
“나쁘지 않아. 사실 이 녀석이 황도에 오는 게 가장 고비였거든. 그런데 무거운 엉덩이를 뗐으니 일은 이미 끝난 거나 다름없어.”
황태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는지 젝트와 크라우 모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둘은 당연히 로빈이 이곳까지 달려올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정도로 이권을 침해당했는데 어떤 귀족이 가만있겠는가?
“내가 가장 걱정한 건 귀찮다는 이유로 이 녀석이 그냥 조셉 공작한테 특허를 팔아버리거나, 아니면 그쪽이랑 거래하는 거였어. 그런데 이렇게 바로 달려온 걸 보면 뭔가 역린이라도 건드린 모양인데……. 어쨌든 나쁘지 않군.”
“아무리 그래도 조셉 공작이랑 거래를 하겠습니까? 3황자파의 거두인데요.”
“못 할 것도 없지. 오히려 지금까지 그런 것도 못 막고 뭐 했냐고 나한테 따질 수도 있겠군. 녀석은 자기 할 바를 다하고 있으니 그러면 내가 할 말도 없어.”
“그레이츠 백작은 그럼 황태자파가 아닌 겁니까?”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좀 복잡한데, 뭐랄까. 지금쯤이면 내가 황제가 되길 바라긴 하지만 절박하지 않은? 대충 그 정도가 아닐까?”
“뭡니까, 그 애매하면서도 이상하게 구체적인 설명은?”
“그런 게 있어. 어쨌든 그레이츠 백작이 완전히 내 쪽 사람이 되는 건 적어도 아카데미에 들어간 이후야. 그렇게만 알고 있어.”
황태자의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젝트는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하긴 예전에 계시와 관련된 그 일도 이해할 수 없었던 건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주군이 반드시 그렇다고 하는 건 그냥 믿고 보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
“아, 그리고 이거 말이야. 이건 우리가 받았으면 하는데. 젝트, 자네가 가서 교섭해 보겠나? 어차피 그레이츠 쪽 인력으로는 전국으로 영역을 확장할 수도 없으니 거절하진 않을 거야. 이 기회에 조셉 공작 쪽 상단 하나 정도는 자르고 가자고.”
황태자가 부르르 떨면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진동 막대를 흔들며 이렇게 말했지만 젝트는 그저 시큰둥할 뿐이었다.
“음, 글쎄요.”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무래도 이번에는 전하께서 늦으신 거 같은데요. 그레이츠 백작이 황도에 도착하자마자 리아넨 공작가를 들렀습니다. 고작 차 한 잔 마실 시간밖에 머물지 않았지만, 그레이츠 백작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냥 인사하려고 찾아간 건 아닐 테죠.”
“로빈이 리아넨 공작가에……. 아, 그런가? 허, 기분이 정말 많이 나빴나 보군.”
“무슨 일인 겁니까?”
젝트의 보고에도 고개를 갸웃거리는 크라우를 위해 황태자가 설명을 덧붙였다.
“기분 나쁘니까 이번 밥그릇은 넘보지 말라는 거야. 나 원 참. 하긴 일부러 일을 키운 감도 있긴 하니 어쩔 수 없나? 어쨌든 리아넨과 손을 잡았으니 조셉 공작의 상단 하나 정도는 정리할 수 있겠군. 이번에는 이 정도로 만족하자고.”
황태자는 입맛을 다시며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물론 이권이 좀 아쉽긴 하지만 자신이 한 짓도 있고 하니 이 정도로 기분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이 기회에 로빈과 협상해 이권까지 잡아먹으려던 황태자로서는 로빈의 일탈이 조금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 * *
“그래서, 재판이 들어왔다고?”
“예. 공작 각하.”
주노 상단에서 정식으로 재판을 신청하자 그 소식이 조셉 공작에게까지 흘러 들어갔다.
“그 상단이……. 그레이츠 백작가에서 운영하는 상단이고, 그래서 그레이츠 백작이 황도에 도착했다고?”
“…예.”
“그래서 어쩔 셈인가?”
“평소처럼 재판을 받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변경백이라지만 어차피 지방 영주에 불과합니다. 법무관이 저희의 손을 들어줄 게 뻔하니 이 기회에 그 사업체를 모조리 인수할 생각입니다.”
“이거야, 원.”
생각이 짧은 상단주를 보고 있자니 조셉 공작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됐어. 그 사업, 접어라. 사업체 정리하고 근신하고 있어.”
“예? 만약 재판에서 져도 다른 지방에서 충분히 만회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접으라니요.”
“설명하기도 짜증 나니 그냥 접으라면 접어. 그레이츠 백작 뒤에 황태자가 있는데 그렇게 우리 뜻대로 진행될 거 같은가?”
힐데 후작이 사라지면서 여러 자금줄을 관리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렇게 사람을 물색하고 있었지만 적당한 인재를 찾지 못해 예상보다 바빠졌고, 각 상단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예상치 못한 일격을 맞은 것인데.
자신이 직접 상단을 관리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정말 아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후회하기에는 이미 많이 늦어버렸다. 꼴을 보니 이 이야기가 황제의 귓가에까지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였으니 말이다.
조셉 공작의 호통에 움찔하며 고개를 숙인 채 집무실을 나서는 상단주.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공작은 그저 한숨만 새어 나올 뿐이었다.
상단주가 이 사업을 접으면 다른 상인에게 이 사업을 넘겨줄 거란 말은 하지 않았다. 때에 따라서는 체포될 수 있다는 말 역시 하지 않았고.
그게 저 상단주에게 내리는 그의 벌이었으니 말이다.
“하, 예전에는 그래도 제법 영민했던 거 같은데 이제는 배부른 돼지가 되어버렸군. 아무래도 이렇게 보고만 있을 순 없겠군. 이걸 그대로 황태자에게 안겨줄 순 없지.”
자신이 못 먹는 떡을 황태자에게 넘겨줄 생각은 전혀 없는 조셉 공작이었다.
* * *
로빈이 황도에 도착하고 며칠 후.
대전 회의에서 룩센 대제가 이 일을 거론하고 나섰다.
“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네. 지금 황도에 북부 변경백이 머물고 있다지?”
“예, 폐하. 상단의 문제 때문에 머물고 있다 들었습니다.”
“상단에 문제가 있다면 재무부나 재판부에 일을 맡기면 될 일이지, 변경백이 굳이 이곳에 머물 이유가 있는가?”
“몇 번 문의를 넣었으나 결과가 신통치 않은 모양입니다.”
“신통치 않다라…….”
룩센 대제가 인상을 찡그리자 황태자가 나섰다. 그리고 작년 겨울 북부로 밀어닥친 마수들을 제압하기 위해 로빈이 얼마나 고생했으며 어떤 공을 세웠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는데.
따지고 보면 이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였지만 상급 마수를 피해 없이 처리하고 각 영지를 물심양면으로 도와 방어를 굳건히 했다는 이야기에는 룩센 대제도 흐뭇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나? 하지만 공훈 보고서가 올라오지 않았더구나.”
“원래 변경백이 자신의 공을 떠벌리는 그런 인물은 아니죠.”
“하긴. 그쪽 가문의 성품이 원래 좀 그런 면이 있지. 그런데 그 그레이츠 백작이 지금 황도에 와있다고? 신년 행사에 초대해도 항상 고사하는 그레이츠 가문에서?”
“예, 폐하. 그런 변경백인데 얼마나 억울했으면 직접 행차했겠습니까?”
“음…….”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