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다른 건 몰라도 그레이츠가 황도까지 직접 찾아온 건 룩센 대제에게도 생소한 경험이었다. 전대 영주 카인도 그렇고 이번 영주 로빈도 웬만한 일로는 황도까지 움직일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에 무슨 숨겨진 이유가 있음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물론 어떤 근거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느낌이 딱 그랬다.
“설마, 재무부나 재판부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이냐?”
조셉 공작의 표정이 구겨진 가운데 황태자의 설명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몇 가지 증거 서류까지 첨부하자 룩센 대제가 대로하기 시작하는데.
“내 치세에 들어온 이후, 항상 재판부의 청렴을 강조해 왔다. 그리고 법무관을 선발할 때도 인성과 성품을 가장 중요시해 왔고. 그런데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조셉 공작,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황공하옵니다, 폐하. 저도 최근에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황망함을 감출 수 없었나이다. 뒤늦은 일이지만 이미 그 상단주에게 죄를 물어 그 상단을 해산하였사오니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그렇사옵니다, 폐하. 상단주가 직접 뇌물을 바친 것도 아니고, 재무관이나 법무관들이 작은 편의를 봐준 것에 불과합니다.”
조셉 공작이 납작 엎드리자 3황자파 귀족들이 나서서 조셉 공작을 비호했다.
황제도 조셉 공작이 발 빠르게 상단까지 해산해 버리자 딱히 뭐라고 할 말은 없었다. 황태자도 표현은 안 했지만, 상대의 빠른 대응에 적지 않게 놀랐으니 말이다.
하지만 직접 뇌물을 바치지 않았더라도 이 정도 특혜를 받았으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듣기 싫다. 재무부에서 일부 상단에 약간의 특혜를 주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다. 하지만 법무관은 아니다. 법무관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적인 중립을 유지해야 하며, 그 잣대를 잃는 순간 그 가치 역시 잃게 되는 것이다. 이 일에 조금이라도 연루된 법무관은 모두 파직하도록 하라. 황태자에게 이 일을 맡기겠노라.”
“예, 폐하.”
“…명을 받들겠나이다, 폐하.”
“그리고 조셉 공작이 말한 그 상단주 역시 이대로 그냥 넘어갈 수는 없도다. 뇌물을 직접적으로 공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법무관에게 이 정도의 특혜를 받았다면 무슨 이유가 있었을 터. 페이드 상단의 상단주를 체포한 후 조사해 보도록 하라. 만약 증좌를 찾아낼 수 없으면 다시 석방하도록 하겠다.”
이렇게 이 일이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조셉 공작이 다시 나섰다. 그레이츠 영지에서 만든 진동 가죽 막대에 대놓고 태클을 걸기 시작한 것이다.
“저도 한마디 올리겠사옵니다. 지금 시중에 아주 저속한 물건이 떠돌고 있나이다.”
“저속한 물건이라…….”
“이걸 보시옵소서, 폐하.”
조셉 공작이 룩센 대제에게 바친 건 주노 상단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최신작.
흉악한 돌기로 온몸을 무장한 채 마나를 주입하면 단순히 진동하는 정도가 아니라 꿈틀거리며 용틀임하는 바로 그 물건이었다. 황태자조차 신기해하던 바로 그놈 말이다.
“음…….”
룩센 대제는 꿈틀거리는 가죽 막대의 현란한 움직임에 신음을 내뱉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
“모형 성기는 예전부터 귀부인들이 흔히 애용하던 물건입니다. 하지만 저 움직임은 지나치게 저속합니다. 저런 끔찍한 꿈틀거림이라니요. 미풍양속을 해하는 저런 물건은 황실 차원에서 금지해야 한다고 봅니다.”
“…움직임이 좀 그렇긴 하군. 누구라도 저걸 버텨내지는 못하겠어.”
“그러하옵니다, 폐하. 저런 걸 계속 쓰다가는 정상적인 성생활이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어찌 미풍양속을 해하지 않는다고 하겠습니까? 저는 이 일을 임시 회의에 상정해 표결에 부칠 생각입니다.”
상단은 해체했고 저 물건은 당연히 물 건너갔다. 페이드 상단은 이제 사라졌지만, 모형 성기를 생산하던 생산 시설은 그대로 남았으니 다른 상단을 통해 다시 물건을 팔면 된다.
하지만 그러려면 저 물건이 사라져야 했다. 이대로 두면 어차피 황태자에게 넘어갈 테니 그걸 두고 볼 이유가 없는 것이다.
“폐하, 말도 안 되옵니다. 모조 성기는 괜찮고 저건 미풍양속을 해친다니요. 지금까지 모조 성기를 팔아온 조셉 공작의 주장이라기에는 너무 뻔뻔하옵니다.”
황태자가 나섰지만 황제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조셉 공작을 위시한 귀족들은 이 사안을 표결에 부치는 걸 인정하는가?”
조셉 공작을 따르는 귀족들의 수만 해도 충분히 임시 회의에 안건을 제시할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가 그렇게 하고자 마음만 먹으면 주장이 뻔뻔하고, 아니고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이 안건을 찬성하는 귀족의 수가 더 많으면 저 흉측한 물건의 사용이 법적으로 금지되는데.
물론 황제도 자신의 권한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지금은 무슨 생각인지 애매한 표정만 지은 채 아무런 의견도 내지 않았다.
결국 조셉 공작의 뜻대로 이 안건이 임시 귀족 회의에 상정되고 바로 표결까지 올라가게 된 것이다.
조셉 공작이 마음먹고 황제도 제지하지 않은 상황이라 일의 진행은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
“그렇다면 바로 표결에 들어가겠다. 이 물건의 금지 여부에 대하여 소신껏 투표해 주길 바란다.”
표결을 앞두고 조셉 공작은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중립파가 중립을 지키면 자신을 따르는 3황자파가 황태자파보다 많기 때문에 당연히 통과되리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개표 결과 반대가 압도적으로 많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는데.
“아니, 이게 대체… 설마 중립파를?”
조셉 공작은 대화를 나누는 리아넨 공작과 황태자의 모습에서 상황을 뒤늦게 파악할 수 있었다. 황태자가 리아넨 공작과 이권을 나눴다는 걸 이제야 눈치챈 것이다.
하지만 이게 두 세력이 서로 나눠 먹을 정도로 큰 이권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을 예상하지도, 이 상황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냐, 황태자. 이권을 리아넨에게 그냥 넘겨준 것이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런 짓을…….”
그리고 혼란스러운 조셉 공작에게 룩센 대제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황후도 저 물건을 쓰고 있는데 자네는 몰랐나? 만약 이게 금지됐으면 황후도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텐데, 아쉽군 그래. 완전 애용하고 있거든.”
기가 막힌 조셉 공작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다른 귀족들의 수군거림에는 뒷목을 잡을 수밖에 없었는데.
“물론 각하의 뜻대로 찬성표를 던지긴 했는데 저게 금지됐으면 제법 피곤했을 거야. 우리 집 부인도 저걸 사용하거든.”
“저 프리미엄 제품은 없어서 못 파는 물건 아닌가.”
“이런 식으로 그레이츠에 태클을 걸어버렸으니. 이제 앞으로 그건 다 먹었군.”
“그러게 말이야. 나도 이번에 예약을 거부당했지. 말로는 물건이 없어서라는데 뻔한 일이지.”
“아마 앞으로 3황자파는 절대 그걸 구경할 수 없을 거야.”
“이번에 북쪽 다른 영지에서도 사육을 시작했대서 아예 냉동 마차까지 보낼 생각이었는데 완전 터버렸군. 나머지 네 영지 중 그레이츠의 뜻을 거역할 수 있는 영지는 없다고 하니…….”
“일이 이렇게 됐으니 우리 몫까지 황태자파가 처먹겠군.”
“먹는 거 가지고 치사하게 말이야.”
“그러길래 왜 가만있는 변경백을 건드리나. 우리한테 무슨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다른 건 몰라도 이건 각하의 실책이 맞는 거 같아.”
남성과 여성 모두를 사로잡아버린 그레이츠의 마성(?)은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심지어 귀족들의 태도가 너무 진지해서 순간적으로 조셉 공작은 자신이 정말 잘못한 게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그레이츠가 생각했던 것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닌 모양이었다.
페이드 상단이 해산되었기 때문에 그 책임은 고스란히 조셉 공작의 몫이 되었다. 조셉 공작이 잘못을 스스로 인정했기 때문에 재판도 없이 모든 배상금을 감당하게 된 것이다.
물론 황제의 질책을 면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예상보다 훨씬 큰 배상금 규모에는 아무리 조셉 공작이라도 손끝이 떨릴 수밖에 없었다.
* * *
일이 일사천리로 해결되고 배상금까지 두둑하게 챙긴 주노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에게 삐딱하게 나왔던 재판부 관리들도 대거 옷을 벗고 낙향했다니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게다가 재무부 관리들은 앞다투어 찾아와 직접 사과까지 하고 돌아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음, 적당히 잘 해결된 거죠. 주노는 앞으로 가죽 일부를 리아넨 공작가로 보내시고요. 황도에서는 예전처럼 물건을 팔면 돼요.”
로빈의 능청스러운 반응에 신음을 흘린 주노는 정확한 내막을 파악하기 위해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뭔가 일이 좀 이상하게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끙, 이 일을 황태자 전하께서 주관하셨다는데……. 혹시 우리 영지가 황태자파입니까?”
“그러게요. 원래 티 안 나게 뒤에 있으려고 했는데 우리 전하께서 하도 설레발을 치셔서 다 들통난 모양이에요.”
“그럼 조셉 공작의 견제가 들어온 것도 그거 때문이고요?”
“그건 확실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게 중요한가요? 어차피 일은 다 벌어졌는데요.”
“그런데 이 사업을 왜 리아넨 쪽과 함께하시는 겁니까? 그럴 바에는 황태자 전하와 함께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에이, 주노도 들었잖아요. 조셉 공작이 저희 물건을 귀족 회의를 통해 금지하려고 했다고요. 황태자 전하와 손잡았으면 이걸 막지 못했을걸요?”
로빈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 주노.
하지만 주노 역시 귀족 회의를 통해 금지하려고 했다는 말에는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 자신도 모형 성기를 팔아먹던 주제에 너무 뻔뻔하다고 생각해서였다.
“역시 그랬군요. 조셉 공작 때문에 기분 나빠서 그쪽 예약은 다 빼버렸는데 차라리 잘되었습니다.”
“빼요? 뭘요?”
“그것의 예약 말입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앞으로는 황태자파 쪽에 집중하겠습니다.”
“오호, 그러셨어요? 뭔가 좀 치사한 거 같지만…….”
“생각보다 반응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없어서 못 팔겠다는 데 어쩌겠습니까? 물론 앞으로도 계속 없을 예정이지만요.”
역시 먹는 거 가지고 뭐라고 하는 게 가장 치사한 법이었다. 게다가 그게 효과 좋은 천연 정력제라면 더욱 그러겠지.
3황자파의 원성을 사긴 하겠지만 반대로 황태자파 쪽의 지지는 확보할 수 있으니 이제 자신도 태도를 분명히 밝히는 게 나았다. 어차피 조셉 공작이랑은 상종할 생각이 없으니 선택의 여지도 없었지만 말이다.
“이제 3황자파랑은 같이 못 가게 되었으니 그렇게 해주세요. 먹는 거 가지고 그러는 건 좀 치사하지만 뭐 어쩌겠어요. 이제라도 확실히 노선을 정해야죠.”
“그럼 그렇게 알고 처리하겠습니다.”
어쨌든 리아넨을 끌어들여서 조셉 공작을 이 사업에서 퇴출했고, 황태자에게는 자신이 기분 나빴음을 제대로 표현한데다, 조셉 공작이 밥그릇을 깨버리는 것까지 막았으나 뭔가 허무한 기분이었다.
“위이이~잉.”
꿈틀거리는 진동 막대를 보고 있자니 더욱 그랬다. 겨우 이것 때문에 그 난리를 피웠나 싶어 현자 타임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어지는 주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는데.
“아 참, 영주님. 이번 신제품을 영주님께 헌상하는 마음으로 그레이트 로빈이라고…….”
“됐어요!”
로빈의 격렬한 반대 끝에 신제품의 이름은 그레이트로 결정되었다.
신제품 그레이트 타입 A.
고위 귀족들 간의 특허권 분쟁으로 재판까지 갈 뻔했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며 인기가 더욱 폭발한 이 신제품은 제국 성인 용품의 역사를 새로 쓰게 된다. 지금까지 단순히 모양과 재질만을 따지던 귀부인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 것인데.
그리고 이 놀라운 제품에 영주의 이름을 붙이지 못한 주노는 계속 아쉬워하게 된다.
“아, 영주님의 이름을 제국에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였는데……. 내가 끝까지 밀어붙여야 했어.”
하지만 로빈에게는 그저 쓸데없는 충성일 뿐이었다.
“미친. 하마터면 바이브레이터의 아버지가 될 뻔했어. 진짜 소름 돋는다. 아후.”
그나마 그거라도 막을 수 있어서 천만 다행이었다.
* * *
황도에서의 일은 대충 마무리되었지만 로빈은 돌아가지 않고 황도에 남았다.
리아넨 공작가와 몇 가지 사항을 조율하고 거래를 마무리 지은 후, 본격적으로 물건을 생산하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니 어느새 여름은 훌쩍 지나가 버린 지 오래요, 가을의 끝자락이 자신을 반겨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겨울이라고 할 수 있는 1월부터는 어쨌든 아카데미에서 수학해야 했으니 영지만 찍고 다시 돌아오느니 그냥 이곳에서 마음을 추스르는 게 더 나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