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이 모든 게 그릭스 대공자와 황태자가 쉴 새 없이 자신의 정신을 빼놓았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원래는 일을 마치고 여름이 다 지나기 전에 영지로 돌아가려 했으니 말이다.
생산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면 바로 자신을 찾아 쓸데없는 하소연을 늘어놓는 그릭스 대공자와 좀 쉴 만하면 자신을 호출하는 황태자의 콤비 플레이가 생각보다 더 강력했다.
“그릭스 대공자는 그래도 동업을 핑계 삼아 찾아오는 거지만 황태자 이 양반은 바쁜 양반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냥 불러대는 거잖아? 분명 또 뒤에서 뭔가 일을 벌이고 있겠구만.”
문제는 딱 봐도 자신을 어떻게든 붙잡아놓고 싶어 하는 두 사람의 마음이 너무나 강렬하게 느껴진다는 거였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무래도 자신을 이용해 조셉 공작의 신경을 계속 건드리려는 게 아닐까 싶다. 그릭스 대공자는 몰라도 황태자는 분명 그런 이유일 것이다.
지금쯤이면 황태자가 그가 규합한 중소 상단 연합을 이용해 조셉 공작을 전방위적으로 압박할 시기였다.
조셉 공작 입장에서는 그 부분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하는 상황인데 뜬금없이 나타난 자신이 계속 황태자 곁을 맴돌며 뭔가 있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고 있으니 찝찝해서라도 신경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종의 허장성세라고 할까?
거기다 그릭스 대공자까지 자신과 주기적으로 접촉하고 있으니 중립파와 황태자파가 자신을 중심으로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착각까지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조셉 공작의 신경을 분산시켜 놓은 황태자는 뒤에서 여러 상단의 힘을 한곳에 모아 그의 사업체를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음이 분명했다.
“황태자가 열일해 줘서 나에 대한 견제는 생각도 못 하고 있을 테니 이 정도 협력해 주는 건 손해도 아니지만 말이야. 그래도 기껏 황태자궁으로 불러놓고 황녀들과의 티타임은 또 뭐야? 그것도 자기는 바로 도망가 버렸단 말이지.”
치졸한 계략의 끝을 본 것이 바로 며칠 전.
황태자는 로빈을 불러놓고 그 시간에 맞춰 황녀들까지 불러서 티타임을 가지게 한 후 사라져버렸다. 덕분에 로빈은 황녀 둘과 황당한 만남을 가져야 했고.
물론 때깔부터 다른 본 투 비 레이디들과 잔잔한 대화를 나누는 것도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었지만 황당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아마 이 뜬금없는 만남을 전해 들은 조셉 공작은.
“엄청 당황하겠지. 나랑 2황녀랑 혼담이라도 나왔다가는 그쪽 파벌이 난리 날 거거든. 2황녀를 노리고 있는 귀족이 얼마나 많은데. 상식적으론 말도 안 되지만 황제 폐하라면 정치적인 이유로 약혼까지는 허락할 수도 있으니…….”
당연히 결혼까지 갈 일은 없겠지만 조셉 공작이 문제를 일으킬 기미를 보인다면 3황자의 힘을 꺾어버리기 위해서라도 약혼 정도는 공론화시킬 수 있었다.
2황녀를 이용해 몇몇 유력 가문을 저울질하고 있는 조셉 공작에게는 열불이 날 만한 일이었지만 황제의 뜻이 황태자 쪽으로 완전히 굳어진다면 당연히 그런 수순으로 일이 진행되는 것이다.
그러니 조셉 공작은 혹시 황태자가 황제의 명으로 그런 수순을 밟고 있는 게 아닌지 고민할 수밖에 없을 거다.
물론 황후도 모르게 황녀의 혼담을 진행한다는 건 말도 안 되지만, 황실에서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곤 한다.
그리고 조셉 공작은? 당연히 이 일을 알아보기 위해 또 심력을 낭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한미한 외가는 지방 구석에 처박혀 있고, 다른 피붙이 하나 남지 않은데다가 결혼까지 확정 지어 아무런 걸림돌이 없는 황태자만이 할 수 있는 과감한 미친 짓이었다. 그걸 말릴 수 있는 황제는 이 일을 재미있게 지켜보고 있을 테니 말릴 사람도 없는 거고.
황제가 아니라면 그나마 황후인데, 어차피 적인 황후의 말을 황태자가 들어먹을 리가 있나.
만약 조셉 공작이 이 일을 보복하려면 그 상대가 레니아 공녀 정도는 돼야 했다. 황태자가 2황녀를 걸고넘어졌고, 그녀와 버금가는 인물이 레니아 공녀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눈이 돌아가 버린 레오니스 공작이 조셉 공작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그 양반이 또 열 받으면 뒤를 안 보는 성격인데다가 은근히 딸 바보이기까지 했으니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레니아 공녀가 다치는 순간 이유 불문하고 당장 검을 빼들고 조셉 공작만 노릴 사람이 레오니스 공작이었으니 그와 정면에서 부딪치기에는 시기상조인 지금에는 레니아 공녀를 건드릴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조셉 공작만 답답할 수밖에.
어쨌든 황제가 건재한 상황에서는 이런 식으로 서로의 세력을 깎아 먹는 소모전이 당분간 이어진다. 그리고 그 소모전에서 승기를 잡는 사람이 바로 황태자였고.
사실 로빈이 과감하게 조셉 공작을 자극하는 것도 그가 최종 악역이 아니라 단순히 거쳐가는 악역에 불과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좀 더 빨리 퇴장시키기 위해 황태자의 뻔한 수작에 넘어가주는 거였는데.
“하지만 이건 좀 곤란하지. 단순히 조셉 공작뿐만 아니라 다른 귀족들까지 날 귀찮게 할 수 있는 일이거든. 황태자 전하께서 아직 정신을 못 차리신 건가? 솔직히 그 인간이 주인공만 아니었으면 조셉 공작에게 붙는다고 협박이라도 해볼 텐데, 그건 씨알도 안 먹히겠지? 이걸 어쩐다.”
진짜 저 말이 쑥 들어가게 평범한 영애 하나를 잡아다가 혼담을 넣어버릴까? 그러면 황태자가 조금 곤란하긴 할 텐데.
하지만 혼인이 장난도 아니고 그렇게 하는 건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더 열 받는 건 이 일을 따지기 위해 황태자를 찾아갔더니 이 양반이 딴소리만 하는 게 아닌가.
“이제 아카데미에 들어가면 페루 녀석도 만나보겠군.”
말은 저렇지만, 눈빛으로는 그 녀석을 한번 만나봐야 그래도 내가 괜찮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이렇게 말하고 있었는데 자신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알고 그러는 거 같아서 엄청 얄미웠다. 진짜 황태자만 아니면 명치를 확.
“에이씨, 더러운 세상.”
하지만 로빈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으니 어쩌겠는가.
“영주님, 황녀님이 그렇게 예쁜가요? 2황녀가 절세 미녀라던데요?”
“설마 진짜로 혼담 들어오는 겁니까?”
황태자가 이미 소문까지 냈는지 저택의 기사들까지 이 소식을 알고 있었다.
이 인간들까지 아는 걸 보니 황도 사람들은 다 안다는 거겠지?
그런데 왜 다 2황녀 이야기뿐이냐? 걔는 아직 다 크지도 않았다고.
게다가 절세미인은 개뿔, 대체 누가 그렇게까지 과장한 거야? 그냥 좀 예쁘장한 수준이지 절세미인은 무슨.
황비가 평민 출신이라 존재감이 없어서 그렇지 예쁘긴 1황녀가 더 예쁘더라.
“무슨 혼담이요? 그냥 차만 한 잔 마시고 온 거예요.”
“오오~ 레이디랑 티타임을…….”
“우리 영지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군.”
“그야 우리 영지에는 레이디가 없으니까.”
아무래도 영지가 영지이다 보니 레이디랑 티타임이란 단어 자체가 자극적으로 다가온 모양이다. 물론 시골 영지지만 어머니나 작은어머니도 티타임 정도는 가지는데 너무하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마녀 단장이 티타임이라니, 생각만 해도 두드러기가 올라올 거 같아.”
“사실 실비아 아가씨도 귀엽긴 하지만 우아함이랑은 또 거리가 멀지.”
하지만 로빈도 저 부분에서는 키득거리는 기사들과 함께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린에게 자주 두들겨 맞는지 몸을 부르르 떠는 기사의 모습은 엄청 익살스러웠는데 자신 역시도 린과의 티타임을 상상하니 왠지 두드러기가 날 거 같았기 때문이다.
다만 가만 생각해 보면 고상한 태도로 차를 마시던 황녀들보다는 오히려 영지의 린나니가 훨씬 보기 좋았다. 적어도 린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니 말이다.
“뭐, 황녀님들이니 당연히 우아하긴 하죠. 그래도 제 눈에는 차라리 린이 더 나은 거 같더라고요.”
“하긴 린 단장이 껍데기는 정말 대단하긴 하죠.”
“솔직히 몸매랑 얼굴은 맨날 보면서도 깜짝깜짝 놀란다니까.”
“그러면 뭐 해. 껍데기는 놀랍지만, 알맹이는 기절할 정도인데. 그 성격에 영주님 아니면 대체 누가 데려가겠어?”
“그건 그렇지. 껍데기 100에 알맹이 0보다는 껍데기 60에 알맹이 50이 나으니까.”
“야, 솔직히 모야족 처녀 누굴 잡아놔도 최소 껍데기 70에 알맹이 70이야. 린 단장이 이상한 거라니까.”
모야족 처녀 누굴 잡아놔도 껍데기 70에 알맹이 70이라는 비교적 정확한 평가에는 로빈도 빵 터지고 말았는데 정말 누가 들어도 공감 가는 수치였기 때문이다.
한창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웃던 로빈은 기사들에게 황도 생활이 어떤지 물어보았다. 이 기사들 역시 자신과 함께 이곳에서 1년 이상 지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만약 문제가 있으면 영지에 있는 다른 기사랑 교대해야 하니 사소한 문제라도 미리 확인해 보는 게 나았다.
“나쁘지 않습니다. 영지보다는 좀 부산한 느낌이지만, 어차피 저희야 저택에서 별로 안 나가니까요.”
“정원이 하도 넓어서 훈련하기도 나쁘지 않습니다.”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다 영지 사람이고 하니, 별로 다를 바를 못 느끼겠어요.”
“황도라고 세련된 여자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영지 여자들이 더 예쁘더라고요. 아, 물론 그 브릴리언트 캣? 거기 여자들은 정말 끝내주지만요.”
대부분의 기사가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특히 듀발은 무엇 때문인지 얼굴까지 확 피어있었는데 아무래도 린나니나 세이라에게 시달리지 않아서 그런 거 같았다.
하지만 마지막에 어떤 녀석이 특별한 의견을 꺼내며 분위기가 좀 미묘해졌다. 아무래도 저 녀석은 그새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많이도 알아본 모양이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저 기사는…….
“혹시 다렌 경이에요?”
“헉, 저를 기억하고 계셨습니까?”
어떻게 이 녀석을 잊을까?
예전에는 모야족 처녀들과 맞선을 넣어달라고 하더니, 해골을 100마리 해치우겠다고 달려들다가 떡실신하고, 심지어 자신이 죽을 뻔했을 때 눈앞에서 실신한 기사도 이 녀석이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녀석도 황도에 따라왔나?
제필 경한테 기사들을 선발하라고 했더니 엉뚱한 녀석이 하나 끼어 들어온 느낌이었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나름 대단한 인연이었는데.
“저번에 영주님이 살려주신 덕분에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정말 열심히 단련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태도와 분위기는 좀 진중하게 변했고 이곳까지 따라온 걸 보니 실력도 제법 괜찮아진 모양인데, 본성은 그대로인지 벌써 브릴리언트 캣까지 다녀온 거 같았다.
“브릴리언트 캣이 대단하긴 하죠. 아마 봉사의 교단과 대적할 만한 상대는 거기뿐일걸요.”
“다른 곳이랑은 테크닉부터… 아우, 수준이 다르다니까요.”
다렌을 욕할 일도 아니었다. 딱 보니 기사들 대부분이 이미 다녀온 모양이었으니 말이다.
하긴, 자신을 경호하는 시간 외에는 적당히 돌아다니면서 황도 저잣거리에 떠도는 소문이나 듣고 오라고 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소문이 가장 많이 떠도는 곳이 바로 그런 곳이었으니까.
물론 목적은 소문 확인과 욕구 발산, 두 가지 모두였겠지만 이쪽 세계라면 그 정도는 당연하겠지.
그나저나 브릴리언트 캣이라.
거기는 완전 황태자의 앞마당이잖아?
로즈를 앞세운 황태자는 이미 황도 유흥가를 점령한 지 오래였고, 그곳을 통해 벌어들인 돈은 황태자의 주머니로 들어가 이런저런 작업 비용으로 사용되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곳에 모여드는 수많은 정보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나하나 떨어져 있으면 별 볼 일 없는 하찮은 이야기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정리하면 의외로 대단한 정보가 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그 정보들이 고스란히 황태자에게 전달되고 있을 것이다.
물론 북방의 사자나, 2황녀의 혼담 같은 쓸데없는 낭설을 사방에 퍼트리는 데도 일조하고 있을 거고.
“음… 한 번쯤은 가봐야겠는데.”
글로만 봐온 브릴리언트 캣을 한 번쯤은 가볼 필요가 있을 거 같았다. 도대체 어떤 구조로 되어있고, 어떤 식으로 운영되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오, 한번 가보시겠습니까?”
역시 다렌 녀석이 가장 먼저 반색하고 나섰다. 이 녀석은 아직까지 뼈가 삭지 않은 게 이상할 지경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는데.
“하지만 위험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조셉 공작은 음흉한 작자라고 하던데요.”
“영주님이 그런 곳에 가는 건 아무래도 위험합니다. 거기서는 기사들이 지켜 드릴 수도 없잖습니까?”
하지만 제정신인 기사들이 더 많아서인지 여기저기서 반대 의견이 나왔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의견이었고.
하지만 사실 그 브릴리언트 캣 내부는 황태자의 소굴 같은 곳이라 조셉 공작도 무슨 짓을 할 수 없는 곳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