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가는 길이야 당연히 기사들과 동행할 테니 안전할 거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자신도 그런 만용을 부리진 못했을 테니까.
다만 아직 성인도 아닌 자신이 유흥업소에 가겠다는데 위험하다는 이유로만 말리는 건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게 특별히 문제가 될 일은 없는가 보다.
“아마 괜찮을 거예요. 대신 가는 길은 부탁드릴게요. 웬만한 공격이야, 아시다시피 ‘사자 왕의 포옹’이 있잖아요. 그러면 그나마 위험한 게 독인데, 독도 뭐……. 결국 다칠 일도 없다는 거죠.”
“그거야…….”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따르겠습니다.”
물론 로빈도 황태자만 믿고 있는 건 아니었다.
가장 믿는 건 역시 빅 테일 고기를 듬뿍 섭취해 부쩍 향상된 독 저항력. 그리고 영지에서 보내준 미스릴 내갑 ‘사자 왕의 포옹’이었다.
영지의 사업 문제로 정쟁에 휘말렸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영지 식구들은 로빈의 안위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무력적인 부분에서는 문제가 많은 로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준비한 것이 바로 이 미스릴 내갑이었는데.
아직 미스릴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는 건 아니라 거추장스러운 부분을 잘라내고 가슴 보호대 형식으로 변형시킨 것에 불과하지만 마나를 완벽하게 제어하지 못하는 로빈에게는 이 이상 효율적인 물건이 없었다.
[밖으로 외출할 때는 꼭 안에 받쳐 입도록 하게. 마법을 부여하지 못하니 기사들에게는 그리 유용한 물건이 아니지만 마나를 섬세하게 다루지 못하는 영주에게는 차라리 그게 나을 거야.]
“확실히 그렇네요. 그런데……. 이 문양은 대체 뭐죠?”
[그건 실비아가 특별히 신경 써서 제작한 안료로 모야족 주술사들이 정성껏 새긴 보호 문양일세. 영주가 북부의 사자라고 불린다니 포효하는 사자 문양을 새긴 거지.]
“끙, 왜 하필 이건가요? 그냥 평범한 것도 많은데…….”
[멋있잖은가. 아, 그래서 그 갑주의 이름을 ‘사자 왕의 포옹’이라고 지었다네. 실비아가 낸 의견이니 웬만하면 영주도 따르는 게 좋을 거야. 그 뭐라던가? 소원권이라던가?]
“…그래요. 잘 쓸게요.”
처음, 이 물건이 도착해 히센과 통신을 나눌 때가 생각나 헛웃음이 났다.
영지에서 자신이 사자라는 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킨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이건 성인이 되는 시기에 교묘하게 도망가 버린 자신에 대한 실비아의 화풀이가 분명했다.
굳이 소원권까지 써가면서 그런 닭살 돋는 이름을 붙인 것만 봐도 실비아가 지금 얼마나 짜증 났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미 성인이 된 린은 실비아보다 더 깊은 울분을 느끼며 자신에게 벼르고 있겠지. 이 문양을 새긴 모야족 주술사들은 어쩌면 린의 사주를 받고 더욱 화려한 사자 그림을 그려 넣었을지도 모르겠다.
“이거… 영지로 돌아가면 왠지 살아남기 힘든 상황인 거 같은데. 요망 실비와 린나니의 쌍두마차가 날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린다는 거잖아?”
“네?”
“아, 아니에요. 어쨌든 이 정도면 크게 위험할 일은 없잖아요? 최악의 경우라도 죽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되는 곳이 이 황도니까요.”
“네, 그렇긴 합니다.”
“좋아요. 그럼 한번 가보죠. 황도 최고의 유흥업소라는 그 브릴리언트 캣에.”
* * *
황도 환락가 가운데 떡 버티고 있는 브릴리언트 캣은 두 채의 큰 건물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었다. 평민들이 출입하는 푸시 캣츠(Pussy Cats)는 술집의 형태를 기본으로 아가씨들의 봉사를 받을 수 있는 곳이며, 귀족들이 자주 출입하는 브릴리언트 로열은 카지노 스타일의 도박장과 아가씨들과 쾌락을 나누는 테마 룸을 완비한 종합 유흥업소였다.
평민과 귀족이 서로에게 신경 쓰지 않고 즐길 수 있도록 구역을 나누어놓은 것도 재미있었지만 가장 인상적인 건 캐시 카우로서, 최고의 효율을 자랑하는 도박장을 귀족들이 모이는 곳에만 설치해 놓은 거였다.
“귀족들은 골수까지 뽑아 먹어도 평민들이 가산을 탕진하는 건 못 봐주겠다는 거군. 그 양반답다고 해야 하나.”
브릴리언트 로열로 들어서 주변을 한 번 쓱 훑어본 로빈은 대충 분위기가 어떤지 파악한 후 바로 푸시 캣츠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호, 생각보다 더 수준이 높네요.”
브릴리언트 로열처럼 돈을 처바른 수준은 아니었지만, 푸시 캣츠 역시 상당한 수준이었다.
고풍스러운 인테리어나 고급스러운 장식품, 그리고 제법 운치 있는 분위기까지.
이곳을 단순히 유흥 주점 정도로만 생각했던 로빈은 기대 이상으로 세련된 푸시 캣츠의 모습에 감탄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가씨들의 수준 역시 대단했다. 과연 황도의 에이스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색골인 다렌 경이 감탄할 만하네요.”
“…그렇다고 색골이라고 하실 거까지야.”
재미있는 건 이곳에서 일하는 아가씨들하고 브릴리언트 로열에서 일하는 아가씨들 사이에 별반 차이가 없다는 거였다. 두 매장의 가격 차이를 생각하면 응당 아가씨들의 수준 역시 차이가 나는 게 당연함에도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 양반도 참 이상한 데서 공평한 양반일세. 나 미만은 다 잡. 뭐 이런 마인드는 아니겠지? 자자. 어서 앉아서 한잔하고 가죠. 따로 황홀한 밤을 보장해 드리진 못하지만요.”
“예? 하지만…….”
“그럼 그냥 여기에 서 계시려고 했어요? 많이는 안 되지만, 분위기만 맞춰 주세요.”
로빈의 이상한 주문에 떨떠름해하면서도 자리에 동석한 기사들.
그리고 다렌이 익숙하게 이것저것 주문하자 바로 술과 적당한 안주, 그리고 귀여운 아가씨들이 달라붙었다.
“그러니까~ 그 유명하신 북방의 사자, 로빈 님을 섬기는 기사 분들이시라고요?”
“그렇다니까. 우리 영주님이 정말 대단하신 분이지. 북부에서는 우리 영주님보다 끗발 날리는 분이 없다는 거 아니겠어?”
“어머~ 너무 멋있어요~”
“그러면 북부의 귀인들이시네요. 영광이에요~”
제 일인 양 신나게 로빈을 추켜세우는 다렌.
그리고 아가씨들이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엉겨 붙자 다른 기사들 역시 슬슬 긴장을 풀고 입을 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근엄하게 무게를 잡다 서서히 흐물흐물해지는 기사들의 모습에 기가 막힌 로빈은 헛웃음을 지으며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는데.
“이번에 2황자께서 드디어 환궁하신다는군.”
“그래요? 2황자님도 멋지시겠죠? 황족 분들은 다 화려하게 빛나신다고 하잖아요?”
“그렇겠지. 헌앙하시기로는 황태자 전하 못지않으신 분이라고 하니…….”
“어머~”
“2황자께서 환궁하신다니 소피아 황비께서 겨우 웃음을 되찾으시겠구만.”
“하긴, 너무 길었지. 벌써 몇 년이나 변방에서 복무하시지 않았는가.”
“예전에 있었던 해적 토벌도 사실은 2황자님의 공이라더군. 귀족들이 군공을 가로챈 거지.”
“에~ 정말요? 너무해~”
옆 테이블을 보니 그곳 역시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창관에서 정보를 얻는다는 말을 듣고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아무래도 이곳 남자들은 여자들이 들러붙으면 입이 가벼워지는 패시브를 장착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저렇게 별별 이야기들을 다 떠벌리고 있을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수십만의 언데드가 달려드는 데 우리 기사들이 다 착착~ 해치웠다는 거지.”
“우리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란 말이야. 후후.”
“너무 멋있어요~”
그리고 그건 우리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우리 영지의 안보 의식. 이대로 괜찮은 걸까?
나중에 린에게 말해서 술집에 오면 입을 봉할 수 있게 특별 교육이라도 시켜야겠다.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런데 2황자가 황도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평민들까지 알고 있다는 건 확실히 인상적이었다. 사람들이 2황자의 행보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걸 보면 평민 출신인 소피아 황비와 2황자가 평민들 사이에서는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고 있는가 보다.
물론 지금처럼 어수선할 때 환궁하는 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닌 거 같았지만 어차피 다음 근무지를 배정받기 위해서라도 한 번은 궁에 들러야 했다.
설마 또 무슨 풍파가 일어나는 건 아니겠지?
소설에서는 그냥 언급도 없이 넘어가는 이벤트였지만 왠지 좀 불안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곳저곳 살펴보다 보니 대충 이곳이 어떤 식으로 운영되는지 알 만했다.
남자들을 부추기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는 미녀 군단이 남자들에게 들러붙어 아양을 떨고 정보를 긁어모은 다음에 그걸 종합해 황태자에게 전달하는 거였다.
그리고 직접 눈으로 본 건 아니지만 소설에서 짤막하게 묘사된 부분에서는 뜨거운 쾌락에 녹초가 되어 잠이 든 남자의 품에서 서신을 꺼내 위조하거나 복제하는 장면까지 있었으니 저 위쪽 객실조차 용호 혈담일 것이 분명했다.
물론 어차피 이 거리 전체가 황태자의 앞마당이니 그런 전문가들이 즐비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대충 분위기를 읽은 후 자리를 파하고 귀갓길에 나섰다.
아가씨들은 젊고 몸 좋은데다가 용모까지 제법 준수한 기사들이 뜨거운 밤도 보내지 않고 그냥 돌아가는 것에 못내 아쉬움을 내비쳤다.
꾸민 거라기에는 너무나 리얼한 반응이라서 어느 정도 진심인 거 같긴 한데 저들도 웬만한 전문가들은 아니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물론 우리 기사들은 철석같이 믿고 있었지만 말이다.
“어? 저건 뭐예요?”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복면을 쓴 무리에 쫓겨 도망가는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냥 무시할까도 싶었지만, 그 남자가 이쪽으로 맹렬히 뛰어오는 바람에 그럴 수도 없었는데.
“아무래도 이쪽 거리에서 세력 다툼이라도 일어난 모양입니다. 아직 몇 개의 세력이 미친 듯이 싸우고 있어서 귀족들도 혀를 내두르고 있다더군요. 황실이 관리하는 곳이라 무력으로 개입하지도 못하니까요.”
아하, 그렇게 꾸미고 계신다?
이곳이 일통된 게 알려진다면 당연히 그 주인이 누군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그건 황태자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고.
그래서 아직 싸우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곳을 지배한 지가 벌써 2년은 된 거 같은데 아직도 그렇게 알려져 있다니 참 뻔뻔하기도 했다.
“어? 저 사람……. 젝트잖아?”
남자와 점점 가까워지면서 상대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로빈과도 안면이 있는 황태자의 책사 젝트였기 때문이다.
저 녀석이 왜 쫓기고 있어? 저 복면 쓴 놈들은 뭐고?
아아, 그런가? 아무래도 화가 풀리지 않은 조셉 공작이 젝트를 타깃으로 삼은 모양이었다.
레오니스 공작을 자극할 수 있는 레니아 공녀와 남서부 변경백인 크라우 백작의 원한을 사게 될 크라우 영식을 제외하고 나니 남는 게 저 녀석뿐이었나 보다.
하지만 기사도 아닌 젝트가 저렇게 무사히 도망치고 있다는 것도 황당한 일인데다가 황태자의 앞마당인 이곳에서 저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어이없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저건 결국.
“이 양반이 또 수를 쓰는구만. 조셉 공작도 그렇고 황태자도 그렇고, 참 열일하는 분들이라니까. 아니지. 이거 잘하면 우리 전하한테 한 소리 할 수 있겠는데.”
거리가 가까워지자 젝트도 로빈을 발견하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가 왜 여기 있냐는 듯한 그런 반응이었다.
“감히 ‘황실’에서 관리하는 곳에서 이게 무슨 짓이냐?!”
로빈이 중간에 끼어들어 크게 외치자 당황한 복면인들은 자신들끼리 눈짓으로 신호를 주고받더니 로빈까지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는지 바로 달려들었다.
“영주님을 보호하라!”
로빈의 명이 떨어지기도 전에 번개같이 튀어 나가는 기사들. 맥주를 한두 잔 정도 걸쳤지만 강건한 그레이츠의 기사들을 저런 암살자 따위가 당해낼 리는 없었다.
그렇게 몇 명은 제압하고 몇 명은 도망가는 가운데 떨떠름한 표정의 젝트와 마주하게 되었는데.
“황태자 전하께서 부하들을 참 험하게 다루신단 말이에요. 사람 귀한 줄을 몰라요, 그분이.”
“그게……. 허허, 참. 오랜만입니다, 백작님.”
“네, 젝트 경. 어쩌다가 이렇게 쫓기고 계신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기사들이 암살자를 모조리 물리쳐버리자 당황한 젝트는 난처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을 암중에 보호하던 인물들이 놈들을 잘 따라갔나 확인해 보려는 거 같았다.
그리고 이내 황태자가 보낸 게 거의 확실한 근위병들까지 나타나 붙잡은 놈들을 연행해 가기 시작했는데.
다른 건 몰라도 보는 눈과 감 하나는 확실한 로빈의 느낌상 젝트를 보호하고 있던 거로 여겨지던 인물들이 대부분 사라진 걸 보니 따로 도망친 놈들을 추격하기 시작한 것만은 확실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