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아이고~ 어떻게 황도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이곳의 치안을 관리하는 근위병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요. 젝트 경, 괜찮으세요? 요즘 근위병을 맡으신 분이 ‘황태자’ 전하시라죠?”
“…네, 뭐. 그거야…….”
황태자의 계획이 다음 단계로 넘어갔음을 확신한 로빈은 젝트를 붙잡고 큰 소리로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움츠려 있던 주변 사람들도 여기저기서 수군대기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이곳을 관리하는 황태자의 관리 소홀에 대하여 성토하는 게 분명했다.
분명 작전을 세우고 일을 벌인 거지만 암살자 같은 이상한 놈들이 뛰어다닌 건 명백한 사실이라 뭐라고 할 말도 없을 것이다.
“저, 그레이츠 백작님. 말소리를 낮추시지요. 이래서야 황태자 전하의 체면이…….”
“아이고, 젝트 경은 참 마음도 넓으십니다. 이 와중에 또 황태자 전하의 체면까지 걱정하고 계시다니. 아무리 황태자 전하라도 잘못이 있으면 비난받아야지요.”
“그건…….”
이 일이 널리 퍼지면 황태자도 제법 성가실 것이다. 체면도 좀 깎일 거고.
게다가 그가 이곳 거리를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다는 건 저 젝트나 크라우 정도만 아는 일이라 갑자기 끼어들어 젝트를 구한 자신에게 뭐라고 항의할 수도 없었다.
물론 차후 자신이 아카데미에서 겪을 성가심을 생각하면 일을 확 망치고 싶지만 그렇게까지 하면 황태자의 큰 그림이 어그러질 수도 있어서 이 정도로 참은 것이다.
자기가 벌인 일에 비하면 이런 소소한 견제(?) 정도는, 뭐.
찝찝한 표정의 젝트를 뒤로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귀가하는 로빈.
단순히 젝트가 습격당한 정도가 아니라 귀족인 자신까지 공격받은 일이라 황태자도 골치 꽤나 아플 것이다. 3황자파가 미친 듯이 물어뜯을 테니 말이다.
특히 조셉 공작은 아마 입에 거품까지 물고 달려들 텐데, 자기가 보낸 암살자임에도 그런 반응을 보일 조셉 공작이 어이없긴 하지만, 원래 이 바닥이 그런 세상이니 어쩔 수 없었다.
* * *
그렇게 다시 시간이 지나 겨울이 되자 로빈도 아카데미 입학 준비에 제법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밖에 없었다.
3년간 수학하는 다른 귀족 자제와 달리 특수한 경우에만 인정되는 1년 수료 과정을 신청하려면 이런저런 절차를 거쳐야 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황태자가 꽤나 곤욕을 치르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직접 만난 자리에서 사과하는 황태자에게.
“아우, 이래서야 황도에서 안심하고 아카데미를 다닐 수나 있겠습니까? 암살자라니요. 꿈에 나올까 두렵군요.”
이런 소리를 지껄이며 속을 박박 긁어놓았기 때문에 기분은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카데미에서 수학하는 것 자체가 달가운 건 전혀 아니었는데.
“아카데미라……. 이게 무슨 소용이냐고.”
많은 소설에서 아카데미, 혹은 그에 준하는 여러 교육 시설이 등장하곤 한다.
아카데미, 용병 학교, 마탑, 헌터 교육원 등등.
그리고 이곳에서 주인공은 수많은 인재를 포섭하고, 인연을 만들며 어떤 경우에는 악연을 만들기도 한다.
그야말로 인재의 보고이자 만남의 장인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지. 이미 인재들은 황태자가 다 쓸어갔고, 다른 귀족 자제들을 만나봤자 피곤하기만 할 테니 말이야.”
그리고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수학할 동안 일어날 수많은 일들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픈데다가 아카데미에만 집중할 수 있는 다른 귀족 자제와 달리 자신은 영지의 일까지 꼼꼼히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이래서야 누구나 쌓는다는 그 흔한 인연, 혹은 정실부인이 되어줄 귀족 영애를 만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냐. 의무 교육인데. 어차피 1년만 버티면 되니까 적당히 비비다 돌아가자.”
그렇게 아카데미 입학 수속까지 마친 로빈은 다시 영지에 연락해서 영지 사정을 전해 듣고 있었다.
로빈이 황도로 떠나온 지 대략 반년 정도.
영지는 신기할 정도로 아무 일 없이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마치 로빈이 있어서 온갖 문제가 쏟아졌다는 듯 신기한 변화였는데 이제는 로빈조차 정말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마수 산맥 쪽은 조용합니다, 영주님.]
“그래요? 다른 영지도 괜찮고요?”
[네. 작년에 그렇게 분탕질을 쳤으니 올해는 비교적 조용하지 않겠습니까? 식량 생산 사정도 많이 좋아졌으니 딱히 문제 될 것도 없죠.]
“그건 그렇네요. 영지에 다른 문제는 없고요?”
[별일 없는데 린 단장이… 영주님이 드디어 성인이 되었다며 황도로 출동하겠다는데, 이거 말려야 하는 거죠?]
“네, 당연히 그러셔야죠. 그리고 실비도 같이 말리세요. 혹시 린만 말릴 생각이신 건 아니죠?”
[…네, 그러겠습니다.]
와, 이 양반. 진짜 그러려고 했군.
하긴 린이야 기사단장이지만 실비는 아무것도 아니니 맘만 먹으면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행정관이 그렇게 딴맘을 먹으면 쓰나?
설마 이분도 먼저 잡아먹으면 2부인이라는 이상한 마인드를 가지고 계신 건 아니겠지?
그렇게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통신을 그냥 끊어야 할까 고민하는 찰나에 지온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저번에 보고할 때 빼먹었는데 드디어 남근상이 모두 완성되었습니다. 모두 세 개를 추가로 만들어 여신상 옆에 잘 배치했고요. 주민들이나 사제님들의 반응 역시 긍정적이군요.]
“그래요? 생각보다 많이 늦었네요.”
[그게… 장인들이 혼을 실어서 만들겠다고 하더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혼을 실을 게 따로 있지, 돌기 남근석에 그걸 실었다고? 참 값싼 영혼이다.
“…그렇군요. 그래서 여신상 쪽은 뭔가 달라진 게 있던가요?”
마수들이 조용한 가운데 결국 남근상을 세 개 더 추가해 네 방위에서 여신상을 보호하도록 설치했다는 이야기.
하지만 예전과 달리 반년 동안 그레이트 타입 A 때문에 그릭스 대공자에게 시달리다 보니 이제는 남근상이나 여신상 같은 일들은 좀 시들해진 상황이었다. 꿈틀거리는 돌기만 봐도 치가 떨릴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차피 설치한 거라 결과라도 확인해 보자는 심정으로 물어봤는데.
[줄리에타 성녀님이 말씀하시길 여신상의 효과가 더 강해졌고, 거기에 노화 방지 기능이 추가되었다고 하더군요. 주민들이 정말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흠… 그 정도면, 뭐.”
뭔가 기대감이 급격히 낮아지다 보니 이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은 것도 같았다. 특히 할아버지 카인은 이제 슬슬 노화를 걱정해야 할 시기였기 때문이다.
혈액 순환 개선, 피부 미용, 거기다 노화 방지면 참 여신님다운 트리플 크라운이라는 생각까지 들었으니 말이다.
[아, 그리고 영주님께도 축복이 내려졌다고 하시던데요?]
“축복이요? 대체 무슨 축복이지? 어, 그러고 보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이것저것 살펴보는데 여신님이 선물했다고 추측되는 여신의 보은(S)가 여신의 보은(S+)로 변해있었다.
그리고 설명을 살펴보니 여신을 섬기는 자를 상대(?)할 때 대상의 성적 쾌락을 대폭 증가시킨다는 기존 기능에 여신을 섬기는 자를 상대할 때 자신의 정력 수치를 대폭 증가시킨다는 기능이 추가된 것인데.
뭔가 대단한 거 같았지만 로빈은 그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자신을 대사제용 생체 바이브레이터로 사용하고자 하는 여신님의 흑심이 그대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러셔도 사제님들을 상대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요. 그냥 쪽쪽 빨릴 거 같아서 말이죠. 솔직히 그분들은 좀 무섭다니까요.”
혼자 중얼거린 로빈은 다시 한숨을 지으며 지온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물론 지온이 있기에 자신이 안심하고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다는 감사의 말을 덧붙인 후였다.
로빈이 아카데미나 영지를 생각하며 한숨짓고 있을 때 기사들 역시 자신들만의 주제로 토의가 한창이었다.
바로 아카데미에서 로빈을 수행할 시종 겸 호위를 누구로 정할까에 대한 논쟁이었는데, 모든 기사가 로빈을 따라 귀족 영애들이 득실대는 아카데미에 들어가고 싶어 했기 때문에 경쟁이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영주님을 모시는 거니 실력, 인성, 모두 생각해야 해. 영지를 대표하는 거라고.”
“흠, 아무래도 그건 그렇지. 하지만 여기에 실력과 인성 모두 갖추지 않은 기사가 누가 있나?”
“그래, 다른 건 몰라도 실력만은 다들 출중하지.”
“인성은?”
“아니, 그건 대체 어떻게 평가해? 성격이 지랄 같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이렇게 옥신각신하던 기사들도 어떤 의견이 튀어나오자 다들 입을 닫기 시작했는데.
“역시 문제는 외모야. 인성? 실력? 아카데미에서는 싸울 일도 없는데 무슨 실력이야? 그리고 어차피 우린 그냥 입 다물고 있는 거라 인성도 필요 없다고. 그러면 그냥 외모지. 산도둑 같은 얼굴로 영주님을 따라다니면 우리 영지를 얼마나 비웃겠어?”
“음…….”
“그럼 세 명 빼고는 다 아웃인가?”
“아니, 그래도 난 터프하게 생긴 거라고.”
“험상궂고 못생긴 놈들은 다 지들이 터프한 줄 알지.”
“아이씨. 그래, 인정한다. 그럼 결국 가능한 사람은 다렌, 듀발, 그리고 제필 경 정도인가?”
“다렌이라……. 저 녀석으로 괜찮을까? 그럭저럭 괜찮게 생긴 건 맞지만 워낙 뺀질뺀질해서.”
“내가 좀 그렇긴 한데. 생각해 보면 나 같은 놈이 더 나을지도 몰라.”
동료들이 걱정하자 다렌이 나서서 자신 있게 한마디 했다.
“뭐가? 더 낫다는 거야?”
“잘 들어봐. 영주님이 아카데미에서 꼭 해야 할 일이 뭐야?”
“공부하시는 거 아닌가?”
“무슨 소리. 당연히 정실부인을 구하시는 게 가장 급하지. 소문을 들어보니 영주님이 저번 연회 때 완전 망해버렸데. 그러니까 아카데미에서도 짝을 못 구하시면 완전 쫑나버릴 수도 있다고.”
어디서 들었는지 특급 정보를 들고 온 다렌.
기사들도 다렌의 폭탄선언에는 아연할 수밖에 없었는데. 영주님이 정실부인도 못 구할 거로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건이 좋은 영주님이 인기가 없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음……. 우리 영주님이 대체 왜 인기가 없지? 외모도 준수하고, 가문도 괜찮은데다가 능력도 있잖아? 인기 없을 이유가 없는데?”
“잘 들어. 내가 들은 정보에 의하면 지금 영주님은 게이로 의심받고 있어.”
“뭐?!”
점입가경. 자신의 영주가 동성애자로 의심받고 있다는 소리에는 다들 안색이 창백해질 지경이었다.
다렌의 설명에 의하면 연회 때 다양한 매력을 지닌 여성들이 로빈에게 접근했는데 모두 담백하게 거절한데다가 남성 특유의 성적 호기심을 내비치지도, 가벼운 음담패설조차 입에 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로빈의 행동 때문에 사람들이 이상한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는데.
“맙소사, 영주님이 그랬다고? 왜 그러셨지?”
“하지만 정말 그러셨다면 그런 의심을 할 만도 하지. 설마 영지로 혼담이 들어오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인가?”
아무리 괜찮은 신랑감이라도 동성애자라면 기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런 오해가 있다면 영지에 혼담이 들어오지 않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그저 예의를 다했을 뿐인 로빈이 알면 어이가 없어서 펄쩍 뛸 일이었지만 이곳 상황이 그랬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에티켓에 음담패설은 필수라고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잊어버린 로빈의 잘못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자자, 잘 들어. 어쨌든 지금 우리 영주님께서 위기 상황이야. 물론 본인은 전혀 모르고 계시지만 이러다가 제대로 결혼하지 못하실 수도 있다고. 그러면 어떻게 되는 지 알아? 정실부인도 없이 린 단장을 마님으로 모셔야 한단 말이야.”
다렌의 말에 기사들의 얼굴이 모두 흙빛으로 물들었다. 특히 듀발과 제필의 표정이 가장 안 좋았는데 아무래도 윗사람도 없이 고삐 풀린 린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 거 같았다.
“그건 안 돼. 고삐 풀린 린 단장이라니. 적어도 그걸 막아줄 윗사람이 필요하다고.”
“그래. 그래서 정실부인이 중요한 거지.”
“그래서 넌 어쩔 생각인데?”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말발에는 자신 있지. 그리고 여자 보는 눈도 괜찮다는 거 아니겠어?”
“솔직히 실력은 몰라도 오입질은 네놈이 최고였지. 경험도 많고.”
“그래. 바로 그거야. 그러니까 내가 들어가서 린 단장을 제압할 만한 기 센 여성을 영주님한테 착! 붙이겠단 말이지.”
꿈은 좋지만 아무래도 너무 큰 바람인 거 같아 기사들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호위 기사 주제에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벌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다렌은 자신 있어 보였다.
“이 사람들 참, 속고만 살았나.”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