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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161화 (161/303)

161화

그리고 이어지는 부연 설명.

아카데미에서 촌스럽게 귀족 자제가 바로 영애에게 접근하는 경우는 드물단다. 그러니까 호위 기사나 시녀를 통해 물밑 접촉이 일어나고 서로 같은 마음이면 따로 만날 시간을 정해 만나게 된다는 것.

그러니 호위 기사의 입지가 생각보다 대단하다는 거였다.

“전혀 몰랐군. 대체 그런 정보는 어디서 얻은 거지?”

“후후. 푸시 캣츠의 아가씨들은 모르는 게 없다는 말씀.”

정보원을 상대로 역정보를 캐내는 대단한 업적을 이룬 다렌. 만약 로빈이 알았으면 다렌을 다시 볼 만한 일이었지만 불행히도 로빈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렌이 가장 낫겠어.”

“흠,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나?”

모든 기사가 넘어간 가운데 가장 선임이면서 정상적인 제필이 이 상황을 정리하고 나섰다.

“확실히 일리는 있는 말이다. 하지만 저번에 브릴리언트 캣 앞에서 사고가 있었고, 그 일이 귀족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니 영주님이 동성애자라는 오해는 많이 희석되었을 거야.”

“그건 그렇군요. 동성애자가 그곳에 갈 리는 없으니…….”

“그러니 여자 보는 안목이 가장 뛰어난 다렌과 실질적으로 가장 도움 되는 듀발이 번갈아가며 영주님을 보필한다. 사실 주변의 영애들을 살피는 건 하루 이틀이면 될 일이니, 듀발이 주로 영주님을 보필하고 다렌이 보조하는 거지.”

“…듀발이라면 좋습니다. 반듯하게 생겨서 영애들에게도 좋은 이미지를 줄 수 있을 거 같으니…….”

“확실히 다렌이라면 이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을 거 같군요. 제발 저주받은 린 단장을 찍어 누를 수 있는 정실부인감을 꼭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로빈의 호위는 듀발과 다렌으로 결정 났다. 물론 로빈은 이 부분에 대해선 전혀 신경도 쓰고 있지 않았지만 말이다.

* * *

드디어 아카데미에 첫발을 내딛는 그날이 오고 말았다.

로빈은 듀발을 대동한 채 아카데미를 향하고 있었는데. 처음으로 아카데미를 방문하는 귀족 자제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아카데미 입학을 축하하네, 백작. 분명 좋은 일만 있을 거라 믿네.”

마지막에 만났을 때 분명 뭔가 알고 있는 듯해 보이는 황태자의 오묘한 웃음이 계속 거슬려서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인데.

“하, 그 인간이 분명 뭔가 알고 있는데. 내가 깽판 친 거 때문에 마음 상해서 이러는 거야? 아니지. 원래 음흉한 인간이었어. 에이, 모르겠다. 사실 별일 있을 것도 없잖아?”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는 법.

로빈은 아카데미에서 뭔가 얻어갈 마음이 1%도 없었기 때문에 절대 실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아카데미에 첫발을 내디뎠는데.

한쪽에서 들려오는 투덕거리는 소리에 그만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하, 선배. 빼는 것도 적당히 하자고. 그냥 나한테 오라니까? 선배 입장에서 나 정도면 과분하지 않아? 내가 거기에 물 마를 새도 없을 정도로 뜨겁게 안아준다잖아.”

저거 혹시 구애인가?

하긴 저 정도면 양호하다고 할 수 있겠지. 가장 흔한 따먹고 싶다는 표현이나, 맛있어 보인다는 지분거림도 없으니, 뭐.

단순한 애정 놀음이면 굳이 참견할 생각은 없었다. 원래 싫다는 여자를 귀찮게 하는 그런 세계는 아니라고 했으니 말이다. 여자들이 좋으면서도 빼는 경우는 없어서 적당히 알아 처먹고 포기하는 게 보통이라고 했는데…….

“전 싫다고요, 데리안 영식. 왜 자꾸 귀찮게 하세요? 전 분명 싫다고 말씀드렸어요.”

“아이 씨, 진짜 이럴 거야?”

그렇지 않은 망종이 있긴 한가 보다.

게다가 싫다는 여성을 끌고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기까지.

하지만 이때까지도 로빈은 나설 생각이 없었다. 멍청한 놈이 강간하다 걸려서 좆이 잘리건 사형을 당하건, 그가 알 바는 아니었기 때문인데.

하지만 상대 여성을 확인하고 나서는 도저히 그냥 돌아설 수가 없었다.

이 여자가 여기에 왜 있어?

흔한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로 위장하고 있었지만, 로빈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 불과 얼마 전에 그와 티타임을 가졌던, 다이앤 1황녀였으니 말이다.

솔직히 색이 좀 바뀐다고 해도 저 미친 몸매와 여신급 외모는 결코 숨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떻게 이 여자가 아카데미에 있지?

대부분 황족은 1년만 다니고 그냥 졸업하는 거로 아는데 열일곱 살이나 된 1황녀가 아카데미에 남아있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이미 졸업할 나이가 지났으니 말이다.

가능성이 있다면 황족임을 숨기고 일반 귀족 전형이나 평민 전형으로 입학한 경우였다.

황자들은 자질을 키우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게 일반적인 법도지만 황녀인 그녀가 왜 굳이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한 건지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저 모습은 또 뭐야? 무슨 막장 드라마도 아니고 눈동자와 머리 색만 바꾼 건데 그걸 못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리가…….

“앤, 좋은 말로 할 때 듣지 그랬어? 시골 남작가의 여식 주제에 왜 이렇게 비싼 척이야?”

있네. 저기 있어, 그걸 못 알아보는 게 눈깔이.

게다가 저 녀석은 연애를 책으로도 못 배운 모양이다. 책으로 연애를 배운 로빈도 아는 걸 저놈 혼자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

여자가 아니라고 하면 진짜 아닌 거라고 느그 어머니가 안 가르쳐주시디?

“데리안 백작의 둘째 아들 바텐 데리안입니다. 기사학부 2년 차. 학부에서 손꼽히는 인재라는군요.”

로빈이 혀를 차고 있자 바로 다가와 작은 소리로 알려주는 듀발. 시종 겸 호위를 자처하더니 아카데미에 수학 중인 귀족 자제에 대한 조사까지 이미 마친 모양이었다.

어차피 귀족 자제라 봤자 다 해서 기백도 안 되는 숫자였고 대부분이 남작가 자제였기 때문에 로빈이 따로 알아야 할 자제들의 수는 얼마 안 돼서 그리 어려운 작업도 아니었을 거다.

지금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자제들만 따지면 그 수가 다시 엄청나게 줄어들 테고.

어쨌든 상대의 정체를 알게 되자 더 기가 막혔다.

데리안 백작이라면 황태자파의 중견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첫째 아들 루텐 데리안은 상단 쪽 관련된 업무로 황태자를 돕는 인물이었고.

루텐은 소설에서도 그 모습을 몇 번 드러낸 적이 있어 기억 속에 남아있었다. 그런데 백작가의 둘째라는 녀석이 황녀도 몰라보고 저러고 있으니.

설마 일부러 모르는 척하면서 저러는 건가? 자기 걸로 만들기만 하면 장땡이니까?

물론 첫째도 아닌 이상 황녀를 건지기만 하면 데리안 백작가도 손해는 아니긴 한데. 하지만 그런 고난이도 작전을 구사하기에는 저 녀석이 너무 멍청해 보였다.

“선배? 레이디께서 싫어하시는 거 같은데요. 그 정도만 하시죠?”

“응? 넌 뭔……. 사자백 그레이츠…….”

더 이상 일이 꼬이기 전에 나섰는데 놀랍게도 놈은 로빈을 알아보고 있었다. 완전히 게 눈깔인 건 아닌 모양인데, 그럴 바에는 진작에 황녀부터 알아봤으면 얼마나 좋았냐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러면 적어도 저런 식으로 나오진 않았겠지.

그런데 사자백은 또 뭐야? 또 어디서 이상한 게 붙어버렸냐? 그놈의 사자는 정말…….

“아무리 백작님이라도 남의 연애 사정에 간섭할 권리는 없으십니다.”

응. 나도 남의 연애 사정에 간섭하고 싶진 않지.

그렇다고 멀쩡한 백작가 하나가 황실 모독죄로 찍혀 나가는 걸 두고 볼 순 없잖냐. 느그 형이 아무리 잘나가도 황녀를 강간하면 멸문이야.

몰랐다고 발뺌한다고 우쭈쭈 그랬어요? 하실 황제 폐하가 아니시라고.

저 여자가 진짜 쩌는 여자라서 아까워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 널 위해서라니까.

“연애 사정이면 그런데……. 지금 선배는 범죄를 저지를 거 같아서요.”

“…무례하십니다.”

“그건 선배가 저 레이디에게 하고 있는 거고요.”

역시 반한 여성 앞에서 센 척하고 싶어 하는 건 남자들의 종특인지 이를 악다문 채 로빈을 노려보는 바텐 데리안.

저 둘의 호칭을 봤을 땐 적어도 1년 이상은 따라다녔던 모양인데 이렇게 쉽게 포기한다면 그게 더 웃기긴 했다.

그렇게 잠시 인상을 쓰던 바텐은 뭔가 마음먹은 듯 흉흉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는데.

“결투를 신청합니다, 그레이츠 백작. 제가 승리한다면 사과하고 이 일에서 손 떼시죠.”

로빈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먼저 나선 건 다이앤 1황녀였다.

“영식이 패배한다면 영식께서도 절 포기하세요.”

“그런 조건이면 곤란하지. 만약 내가 승리했을 때 선배가 내 것이 된다면 생각해 보지.”

“그 조건, 받겠어요. 만약 영식이 승리하면 오늘이라도 당장 절 가지셔도 좋아요.”

“좋아, 반드시 승리해서 널 차지해 주지. 대신 많이 거칠 거야. 네가 너무 앙탈 부리는 바람에 화가 좀 났거든.”

“어떻게 따먹든 그건 마음대로 하세요, 영식. 물론 결투에서 이겼을 때의 일이지만요.”

난 가만히 있는데 왜 자기들끼리 티키타카야?

그래서 내가 이겼을 때 난 뭘 얻을 수 있는데?

하, 됐다. 이런 논쟁은 피곤하기만 하니까.

로빈은 귀찮은 듯 듀발을 바라보았다.

듀발도 귀찮은 건 마찬가지인지 쓴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그가 쳐다보자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아침부터 시답잖은 일에 휘말려 결투가 시작되었는데.

아카데미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찾게 된 곳이 결투장이라는 건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아카데미가 자랑하는 수준 높은 식당이나, 역사와 전통의 대도서관처럼 바람직하고 건설적인 다른 장소가 얼마든지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런 일이 종종 벌어지는지 어떻게 알고 학생들까지 몰려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무료한 아카데미 일상에서 이런 소소한 이벤트가 유일한 활력소인가 보다.

“로빈 그레이츠와 바텐 데리안의 결투. 바텐 승리 시 앤 라빗츠에 대한 절대적인 권리 획득. 로빈 승리 시 바텐 데리안은 앤 라빗츠에게 접근 금지. 조건은 이게 맞나?”

게다가 이게 뭔지 심판까지 있었다.

생각보다 본격적이라 어이없긴 했지만 로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텐까지 조건을 확인하자 바로 결투가 시작되었는데.

바텐은 로빈이 아니라 듀발이 앞으로 나서며 등 뒤에서 방패를 꺼내자 얼굴을 붉히며 거칠게 외쳤다.

“익! 대리 기사라니. 무슨 생각입니까! 기사로서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아니, 무슨 생각이고 뭐고. 난 기사도 뭣도 아니라고.

우선 기사학부도 아니잖아. 기사도 아닌 나한테 결투를 신청한 네가 오히려 부끄러워해야지.

로빈이 나서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듀발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물론 로빈으로서는 기가 막힌 한마디였지만 말이다.

“영주님께서 나서면 당신은 죽습니다. 검을 드시지요. 기사라면 실력으로 증명하는 겁니다.”

저 녀석이……. 이게 무슨 착각계냐? 왜 또 이상한 짓을 하고 있어?

하지만 장난이 아니라 듀발은 진지하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 같았다. 대체 무슨 뜻으로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듀발의 말이 상대를 제대로 도발하고 있었고.

“건방진… 방패나 쓰는 하급 기사 주제에. 좋다. 네놈을 처단하고 네 주인에게 그 죄를 묻겠다.”

저게 이 상황에서 맞는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상대가 달려들며 전투가 시작되었다.

바텐이 기사학부의 인재라는 말은 거짓이 아닌 거 같았다. 우선 검격이 묵직하고 빨랐으며 중심 이동이 자유로운 게 제법 단련했다는 느낌이 들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상대인 듀발이었다.

“제법이긴 하지만……. 느려. 세이라 아가씨도 당신보다는 빠를 겁니다.”

“익… 이놈이!”

순간 가속 능력만은 기사들보다 우월한 세이라의 검속에 익숙한데다 그보다 더 괴물인 린을 상대하던 듀발에게 바텐의 검은 그저 연습용 손장난에 불과했다. 그리고 몇 합이 지나기도 전에 결국.

“챙~!”

내려치는 검을 방패로 튕겨내 저 멀리 날려버렸다.

“…로빈 그레이츠. 승.”

“익!!”

뭔가 할 말이 가득해 보이던 바텐도 승패 자체에는 이의가 없는지 이를 악물고 돌아가 버렸다. 물론 떠나기 전에 로빈을 쏘아보는 건 덤이었지만.

로빈으로서는 멸문(?)의 위기에서 구해주고도 인정받지 못하는 이 더러운 세상이 그저 한스러울 뿐이었다.

“역시 북방의 맹주. 하급 기사도 저런 실력이라니.”

“사자백이 검을 뽑아들면 바텐이 죽는다는 것도 거짓이 아니겠지? 무시무시해.”

“정말 대단하군. 조셉 공작 각하조차 함부로 손댈 수 없을 정도라더니.”

게다가 뭔가 이상한 오해만 점점 증폭되는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듀발이 방패를 쓴다는 이유로 하급 기사 취급받으며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거 같은데 이걸 나서서 뭐라고 하기도 그렇고 참 애매했다.

그리고 이미 학생들은 결투가 끝나자마자 자기네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며 돌아가 버렸으니 뭐라고 변명할 만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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