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야, 그건 무슨 소리야? 내가 나서면 저 녀석이 왜 죽어?”
“예? 영주님이 다치시면 바로 영지전이잖습니까. 그 마녀가 설치기 시작하면 저런 녀석 정도야……. 사위 사랑 장인이라고, 백랑 님도 날뛰시겠네요.”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게 거기까지 갔어?
게다가 사위 웬수 장인이지, 무슨 사위 사랑 장인이냐? 원래 자기 딸 훔쳐가려는 사위가 찾아오면 샷건이나 망치부터 꺼내드는 게 정상이라고.
뭔가 불만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결투도 끝났기 때문에 다시 제 갈 길 가려는데 로빈의 소매를 잡아끄는 손길이 있었다.
“인사가 늦었네요. 라빗츠 남작가의 앤이라고 합니다, 후배님. 아카데미 3년 차고요.”
이 여자가 나한테까지 뻔한 거짓말을……. 그런데 진짜 다른 사람들은 못 알아보고 있는 건가? 그래서 이렇게 당당하게 소개하는 거고?
“네, 선배. 로빈 그레이츠입니다.”
비록 순 개뻥이지만 상대가 자신을 소개했기 때문에 로빈도 떨떠름한 얼굴로 이름을 밝혔다. 마치 오늘 처음 만나는 것처럼 그렇게 말이다.
“감사했습니다, 후배님. 제법 곤란한 상황이었는데 덕분에 살았어요.”
살긴 살았지. 당신 말고 그놈이.
아무리 관심 밖의 황족이라도 황족이 아카데미를 다니는데 뒤따르는 눈이 없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정말 일이 벌어졌다면 그놈은 도륙 나고, 가문까지 박살 났겠지.
그러니 자신이 그놈을 위해 움직였다는 말도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물론 그것보다 결국 눈앞의 이 여자가 신경 쓰여서 움직인 거지만 말이다.
“그저 당연한 일을 한 겁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시길.”
뭔가 신분을 숨기고 아카데미 생활을 만끽하고 싶어 하는 모양이니 굳이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냥 떠나가려는데 그녀가 다시 소매를 잡았다.
이 여자가 안 어울리게 왜 이래? 연회장이나 티타임 때는 세상 도도하게 굴더니.
“무슨 일이신가요, 선배?”
뭔가 묘하게 거북했지만 그걸 입 밖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황녀님이란 단어가 입 밖으로 튀어 나갈 거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는 로빈도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는데.
“작년 한 해 동안 데리안 영식 때문에 아카데미 연회에 참석할 수 없었어요. 아무도 저랑 파트너가 되어주지 않았거든요. 데리안 영식이 제 파트너로 나서는 남성분들께 무조건 결투를 신청했거든요.”
미치겠네. 무슨 결투 마니아냐?
그 녀석이 생각보다 더 중증 스토커였던 모양이다. 게다가 민폐력 또한 대단했고.
저 정도면 솔직히 황후가 1황녀의 야합을 막기 위해 파견한 파수견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하지만 황태자파인 그 녀석이 황후에게 그런 밀명을 받았을 리는 없었다.
“그러니 오늘 입학 연회에서 저를 에스코트해 주시겠어요?”
얼굴을 붉힌 채 에스코트를 요청하는 앤.
이거 뭐야. 왜 갑자기 이렇게 적극적이야? 에스코트라니.
황실 귀족 아카데미는 일반적인 아카데미처럼 입학식이니 하는 그런 행사는 없었다.
그저 개인적인 면담 후에 학과를 정하고, 자신이 들을 수업을 정한 후, 저녁쯤에 연회장에서 입학 연회를 개최해 서로 간의 친교를 다지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앤의 가면을 쓰고 있는 다이앤은 그 입학 연회에 로빈을 파트너로 삼고 싶다는 말이었다.
여성이 직접 나서서 상대에게 에스코트를 청하는 일.
이건 책으로 연애를 배운 로빈도 바로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인 구애 행위였다. 물론 상대에게 관심이 있다는 우회적인 표현이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여차저차하다 다음 날 같은 침대에서 일어나게 되는 곳이 바로 이쪽 세계였으니 말이다.
아무리 내가 자신을 몰라본다고 생각해도 그렇지. 그녀 쪽은 분명 나를 인지하고 있을 텐데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황녀님, 우리 이런 사이 아니잖아요?
“…좋습니다. 그러죠.”
“헤헤. 제 기숙사는 2층 7호예요. 그럼 그때 봬요.”
하지만 내 의지를 배반하고 입이 먼저 방정을 떨어버렸다. 그리고 승낙의 말에 배시시 웃음 지으며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정치적 입장이나 처지, 정략적 문제들 같은 복잡한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가슴은 거세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 느껴졌던 그 공허함이나 두 번째, 세 번째 만났을 때 보여준 그 황족다운 도도함보다 지금 눈앞에서 보여준 이 순수한 미소가 훨씬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와! 로빈!”
그때 로빈의 상념을 깨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아 누군지 바로 알 수 있는 목소리.
“와와. 방금 그 선배 뭐야? 미쳤어! 사람이야? 여신 아냐? 넌 대체…….”
예쁜 여자만 보면 사람이 달라지는 자이트 자작의 셋째 아들 레닌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도 자신과 동갑이라 올해 아카데미에서 수학하게 되었다. 짤 없이 3년 동안 수학해야 한다는 건 자신과 다르지만 적어도 1년은 같이 교육받게 된 것이다.
물론 같은 교과가 몇 개나 있을지가 문제였지만 말이다. 웬만하면 하나도 없었으면 좋겠지만 그건 까봐야 알았다.
“저 선배, 앤 라빗츠 선배지? 3년 차. 아카데미 3대 미녀 중 수좌! 남작 영애라 우리 같은 쩌리들도 꺾을 수 있는 유일한 손 안의 꽃! 하지만 아직까지 연애 경험 0 의 순수한 처녀! 노리는 영식들이 수두룩하지만, 격침 횟수 0. 그래서 처녀! 작년부터 파수견 데리안 영식이 지키고 있어서 난공불락이 되어버렸다는…….”
뭐가 이렇게 자세해? 이 녀석의 미녀 레이더는 이곳에서도 건재한가?
하지만 오늘 입학했는데 저 정도까지 알아내다니 이런 쪽으로는 정말 명불허전이었다.
다만 그것과 상관없이 이런 녀석이 세이라를 넘봤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물론 성인이 되어 예전의 꼬맹이도 아닌데다가 외모만은 제법 준수하지만 절대 세이라를 넘겨줄 수는 없었다.
“로빈, 넌 진짜 너무하다. 영지에 미녀를 둘이나 거느리고 있으면서 앤 선배한테까지 마수를 뻗는 거야? 이런 걸 보고 있는 놈이 더하다고 하는 건가?”
“됐어, 인마. 마수는 무슨 마수. 넌 너희 동네 마수나 좀 신경 써라.”
“그거… 유머는 아니겠지? 도대체 린과 실비아는 왜 로빈을 좋아하는 거야?”
글쎄, 그건 나도 가끔 궁금하긴 한데.
“하, 몰라. 난 그럼 면담하러 간다. 연회에서나 보자.”
이 녀석을 상대하고 있으면 머리가 더 복잡해질 거 같아 서둘러 자리를 떴다. 빨리 면담하고 조용한 곳에서 머리나 좀 식혀야 할 거 같아서였다.
그리고 녀석은 떠나는 로빈을 바라보며 아직도 투덜거리고 있었는데.
“자이트 영식. 미녀 둘이 아니라, 미녀 하나와 마녀 하나입니다. 정확히 표현해 주시길.”
그리고 그 와중에 그걸 또 수정하고 뛰어오는 듀발.
이 녀석은 대체 린을 얼마나 미워하는 건지.
이거나 저거나 모두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 * *
아카데미에 도착하자마자 당연하다는 듯이 위험에 빠진 미녀 구출 이벤트를 겪은 로빈은 면담을 통해 자신이 들을 수업을 결정하고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아카데미 구석에 자리 잡은 벤치에 앉아 머리를 식히고 있었는데…….
자신에게 호감을 표현하는 황녀의 진의를 이해할 수 없어서였다. 게다가 그런 황녀의 요청을 받아들인 자신의 마음조차 잘 모르겠다.
자신은 지금도 영지에 문제가 생기면 바로 워프 게이트를 타야 하며, 황태자가 각 영지를 순회할 때 어떻게 행동할지도 정하지 못했고, 앞으로 다가올 두 번째 재앙도 걱정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런 주제에 한가하게 아카데미에서 연애 놀음이라도 즐길 생각인 걸까? 심지어 황녀는 혼례 대상으로도 부적합한 상대라 애초에 아웃이었다.
“미치겠네, 진짜.”
혼자 중얼거린 로빈은 자신의 옆에서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주변을 경계하는 듀발에게 나지막하게 지시했다.
“듀발, 돌아가면 상단에 연락해서 다이앤 1황녀 전하에 대한 정보를 모두 긁어모아.”
“네? 앤 라빗츠 영애가 아니라 다이앤 1황녀 전하요?”
“그래. 이유는 묻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미심쩍은 표정이긴 하지만 역시 군말 없이 지시에 따르는 듀발.
하지만 라빗츠 영애와 좋은 분위기를 풍기던 자신의 영주가 갑자기 1황녀에 대한 정보를 요구하자 제법 혼란한 기색이었다.
그리고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 입학 연회가 시작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기다렸나요, 후배님?”
“아뇨. 저도 방금 왔습니다, 선배.”
아카데미의 연회는 귀족 영애들에게 유일하게 사복이 허락되는 시간이었다.
물론 교복 자체도 네 가지 상의와 다섯 가지 하의를 조합해 자신만의 스타일로 치장할 수 있지만, 제한이 많은 건 사실이었기에 오늘 같은 날이야말로 영애들의 여자력이 폭발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앤 역시 매혹적인 옆트임을 자랑하는 슬림한 원피스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깊게 파인 옆트임 사이로 언뜻언뜻 모습을 드러내는 매혹적인 허벅지와 딱 달라붙는 허리선이 그녀의 고혹적인 자태를 더욱 강조하고 있었는데.
로빈은 자신의 눈이 자꾸 그녀의 허벅지 깊은 곳으로 향하는 걸 느끼며 억지로 시선을 바로잡았다.
“아…름다우시네요.”
“네? 풋, 그래요. 고마워요, 후배님.”
아름답다는 로빈의 칭찬에 웃음이 터져 나오는지 부채로 입을 가리던 앤은 이내 손끝으로 로빈의 팔을 잡은 채 연회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연회장에 도착하자 많은 눈이 이쪽으로 모여들었는데.
“허, 라빗츠 영애네. 진짜 외모 하나는…….”
“데리안 영식을 떨궜다더니. 그래서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낸 건가?”
“출신이 아쉽지. 남작가라니. 자작가만 돼도 후작 부인까지 노려볼 만한 외모이거늘.”
“그래서 우리한테도 기회가 있다는 거지.”
“상대가 북부의 사자인데 그게 되겠어? 괜히 송장 치지 말고 잠자코 있는 게 나을걸. 그 사나운 데리안 영식도 호위 기사한테 나가떨어졌어.”
“하지만 이제 세를 펼치기 시작한 그레이츠 백작가가 남작 영애 정도로 만족할 리가 있나.”
“적당히 가지고 놀다 버릴 때를 기다리겠다?”
“안 될 게 뭐 있어? 저 정도로 만족스러운 여자가 어디 있다고. 저 몸매만 봐도 후끈 달아오를 지경인데.”
남의 속도 모르고 참, 지들 멋대로 지껄이고 있구만. 이래서 아카데미가 거지 같다는 거지.
뭐,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거지 같은 애들이 참 많거든.
귀족 자제들의 수군거림을 들었을 텐데 앤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아마 2년이나 이곳에서 생활하다 보니 저 정도 이야기는 이골이 났기 때문이리라. 황실 연회에서도 분명 비슷한 이야기를 계속 들었을 테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을 거고.
하지만 움직임이 살짝 굳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그리고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는 건 바로 옆에서 에스코트하고 있는 로빈뿐이었다.
“어머! 라빗츠 영애. 너무 예뻐요.”
“그 멍청한 데리안 영식 때문에 이 예쁜 모습을 1년이나 못 보다니.”
“호호, 고마워요. 크라우 영애, 크레톤 영애. 영애들도 예뻐요.”
그리고 그때, 앤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귀여운 영애 둘이 다가와 방긋 웃으며 그녀를 반겨주었다. 게다가 다른 영애들도 선망에 찬 눈길로 세 영애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설마 이게 레닌이 말했던 3대 미녀인가?
물론 두 영애도 상당한 미인이긴 하지만 앤이나 린은 물론 실비아나 세이라에 비해서도 조금 부족한 거 같은데.
하긴, 그 녀석들이 외모 수준만큼은 대단하긴 하니까.
하지만 예쁜 여자를 시기하기보다 선망하고 가까워지길 원하는 건 저쪽 세상이랑은 조금 다른 거 같았다. 남자들이 대체로 음탕한 욕심을 품는 것과는 또 다른 양상이었으니 말이다.
“엇? 그레이츠 백작님이…….”
“헉, 이게 진짜 사랑의 힘인가요?”
자기네들끼리 재잘거리며 서로를 칭찬하던 세 영애, 정확히는 앤에게 돌진해 폭풍 칭찬을 건네던 두 여인은 이제야 로빈을 발견했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로빈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는지 또 자신들끼리 수군대기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로빈이 앤을 에스코트해 들어온 것이 의외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두 여인 덕분에 남자들의 수군거림으로 살짝 굳었던 앤의 안색이 다시 화사하게 피었다. 그리고 로빈은 그저 작게 웃으며 그녀들의 수다를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솔직히 미녀 3인방이 재잘거리는 모습만 봐도 제법 그림이 예뻐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3황자 전하다. 그레이츠 백작에게 다가가는 건가?”
한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오더니, 페루 트와이드 3황자가 등장해 로빈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로빈으로서는 초면인 3황자가 심각한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으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예의를 차려 인사를 건넸는데.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