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상한 소설 속 로빈-165화 (165/303)

165화

“아니야. 가슴까지만 갔다고. 키스하고 가슴. 아래까지 안 내려간 것만 해도 엄청 자제한 거거든.”

“…그거야 그렇네요. 아가씨 말고, 그분이요. 어떻게 거기서 끊었대요? 장난하냐고 뺨을 얻어맞으신 건 아니겠죠?”

“에이, 아니야. 내가 여기까지만 하자니까 그냥 알았다고 하더라. 역시 다른 남자들이랑은 좀 다르다니까.”

“게이는 아니라도 자제심은 정말 대단하네요. 그렇게 하기도 쉽지 않은데. 그래서 마음에 드셨다는 거죠?”

애니의 말에 앤은 처음 그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좀 신기하긴 했지만 정상적인 남자가 아닐 거라는 생각에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두 번째 만났을 때는 황녀들이랑 티타임을 가지면서 차만 딱 마시고 바로 사라지는 게 정말 신선해서 웃음이 터졌고. 자신은 그렇다 쳐도 많은 남자가 노리던 2황녀까지 있던 자리였기에 그런 행동이 더욱 신선하게 느껴진 것이다.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딱 만났을 때는 왠지 운명적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에스코트까지 부탁했고.

그렇게 파트너가 되어 몇 번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었지만 너무 편하고 마음에 드는 상대였다. 마치 아카데미에서의 마지막을 미련 없이 마무리 지으라고 하늘이 내려준 최후의 만찬 같은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네. 외모도 수준급에, 전도유망하고, 다른 남자들하고는 느낌 자체가 달랐으니까. 그래서 키스까지 했는데…….”

“했는데?”

“손이 슥, 하고 올라와 가슴께로 파고들더라고.”

“그래서요?”

그때가 다시 떠오르는지 얼굴까지 살짝 붉어진 앤.

그리고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그때 자신이 느낀 걸 솔직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경험자인 애니의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갑자기 하복부 아래에서 뜨거운 게 확 치밀어 오르는 거야. 완전 축축해진 거 있지.”

“예? 정말요? 혹시… 갔어요?”

“그러니까. 이게 말이 안 되잖아. 그냥 단순한 애무였다고.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유두를 살살 돌리는 평범한 페팅. 그런데 그런 거로도 갈 수 있는 거야? 그 자리에서 바로 해달라고 조를 뻔했다니까.”

“와~ 그레이츠 백작……. 설마 꾼인 거 아니에요?”

“글쎄. 전혀 그렇게 안 보였는데. 오히려 나보다 더 숙맥 같더라고.”

앤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애니. 숙맥의 손길에 바로 가버렸다는 걸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였다.

“어쩌면 진짜 고수일 수도 있어요. 솔직히 그 자제심조차도 보통이 아니잖아요? 원래 진짜 고수는 티가 안 난대요. 백작님이 아가씨를 잡아먹으려고 제대로 노리고 있는 거죠.”

“글쎄. 그럴까?”

앤은 그냥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지만 애니의 반응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앤의 상황을 생각했을 때 백작이랑 결혼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너무 빠져들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랬다가는 그녀만 괴로울 뿐이었으니 말이다.

“조심하세요. 바로 잡아먹힌다니까요. 그런 남자한테 잘못 길들여지면 인생 망치는 거예요. 백작님하고 결혼하실 것도 아니잖아요?”

“못 하는 거지. 안 하는 게 아니라. 하지만… 그래도 처음 정도는 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이랑 하고 싶다고. 나도 그 정도는 욕심내도 되잖아?”

“아가씨…….”

“앤으로서의 마지막 1년이야. 좋은 추억 가지고 가라는 여신님의 배려 아닐까? 그냥 그렇게 생각하려고.”

애니는 쓸쓸하게 웃는 자신의 주인을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욕심도 없고, 바라는 것도 많지 않은 주인인데 왜 행복할 수 없는지 답답해서였다.

정말 여신님이 우리를 굽어살펴보고 있다면 저래서는 안 되었다.

* * *

황태자를 만나고 온 로빈은 깊게 심호흡하며 고개를 저었다.

“음, 나도 물론 그렇게 생각하네. 지금 상황에서 조셉 공작이 가만히 보고만 있진 않겠지. 그래서 호위를 줄인 걸세. 그래야 놈이 제대로 이빨을 드러낼 게 아닌가?”

역시 황태자는 이 기회에 궁지에 몰린 조셉 공작이 숨겨진 한 수를 드러내길 바라는 것이다. 저번 젝트의 건으로 몇몇 암살 길드를 쳐낼 수 있었지만 그게 조셉 공작의 전력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빈은 좀 회의적이었다.

“그놈이 바보도 아닌데 암살자 몇 놈 잡는다고 증거가 나올까?”

조셉 공작의 숨겨진 비수를 쳐낼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걸 조셉 공작과 연관시킬 수는 없을 거로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걸 뻔히 알면서도 조셉 공작의 전력을 깎아 먹겠다고 위험을 자초하는 황태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하. 어차피 놈들이 무슨 수를 써도 날 어쩌지 못해. 이번에는 조셉 공작도 그걸 제대로 느끼겠군.”

저러는 건 솔직히 로빈도 어쩔 수 없었다. 소설 속 황태자가 지금쯤 어떤 수준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쪽 황태자가 그것보다 못 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웬만하면 건드릴 수 없는 준괴물 수준이랄까?

조셉 공작이라고 해도 대군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니라 기껏해야 암살자와 소규모 정예 기사들을 동원할 수 있을 뿐이니 저런 자신감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소설 속에서는 독이었지. 단순한 독이 아니라 마나를 갉아먹는 특별한 독. 대체 그런 게 어떻게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해독제를 미리 만드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같은 증상을 일으키는 재료가 한두 가지인 경우라면 몰라도 마나와 관련된 약초의 경우에는 그 종류만 해도 여덟 가지였고, 어떤 놈을 어떻게 배합해서 만들었는지 모르면 해독제를 만들 수조차 없었다.

상대가 독을 썼다는 걸 알면서도 미리 해독제를 만들지 못한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사전에 빅 테일 고기를 바친 덕분에 황태자의 저항력이 더욱 올라갔다는 거다.

실제로 소설에서도 황태자의 높은 저항력 때문에 독을 쓰는 데 애로 사항이 많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보다 더 높아졌으니 소설에서보다 좀 더 좋은 조건인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왠지 이번에는 또 무슨 획기적인 짓을 벌일 거 같은데.”

우선 참모들까지 있는 자리에서 상대가 독을 쓰거나 이상한 짓을 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당연히 참모들도 이 점을 걱정해 호위 병력을 늘리길 원했고.

하지만 이 부분에서는 황태자도 요지부동이었다.

“내가 막지 못하는 건 기사들도 막지 못해. 그러면 괜히 인력만 낭비하는 꼴이지. 그런데 굳이 그럴 이유가 있나? 지금도 기사들은 황도 내에 숨어있는 암살자들을 색출하느라 여념이 없어. 나의 안위도 중요하지만 조셉 공작의 그림자들을 빨리 처리하는 것도 그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야.”

아무래도 황태자 자신 쪽으로 조셉 공작의 시선을 돌리고 뒤로는 암살자들을 완벽하게 정리할 생각인 거 같았다. 뒷일을 생각하면 잘못된 판단이라고 볼 수도 없었으니, 아무래도 그 자신의 저항력과 실력을 믿고 이런 식으로 일을 추진하는 모양이었다.

“그래, 할 말은 그게 다인가? 갑자기 찾아와서 기대감만 올려놓고 이게 무슨 일인지……. 어쨌든 그 건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백작은 아카데미에 집중하게나.”

게다가 이런 식으로 엉뚱한 소리를 내뱉으며 사람만 혼란시키고 있었다. 마치 로빈이 와서 무슨 대단한 소리라도 할 거라고 기대한 사람처럼 말이다.

“좋아. 그럴 수도 있지. 원래 이런 쪽으로는 또 발암 주인공이었으니까. 그럼 강제로라도 경각심을 올려줘야지.”

이대로 그냥 두고 보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로빈은 바로 영지로 연락해 존과 일당들을 몰래 황도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존을 말입니까? 음……. 알겠습니다.]

“존에게 해묵은 일을 해결하자고 하시면 알아들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하죠. 그리고 연구소에서 만든 새로운 물약이 지금 시험 단계에 들어갔습니다. 확인하지 않으셔도 괜찮겠습니까?]

“벌써요? 생각보다 너무 빠른데요. 제가 요구한 걸 지켰으면 뭐가 나왔어도 만족스럽겠죠. 제가 지금 다른 일 때문에 좀 바빠요. 완성되면 그때 이야기해요. 연구소에는 잘 부탁한다고 전해주시고 지원도 아끼지 마시고요. 아시다시피 저희가 언제까지 엉뚱한 것만 팔아 먹고살 순 없잖아요? 요즘 인구도 계속 늘어나서 일자리도 아슬아슬하니까요.”

[네, 영주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분명 잘 돌아가는 영지였다. 지금도 혼 래빗과 여성 용품으로 상당한 이익을 얻고 있었고.

하지만 영지의 인구가 너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일자리가 부족해진 것이다.

특히 로빈과 비슷한 또래의 모야족 청년들을 시작으로, 혼 래빗을 보급하면서 부쩍 출생률이 높아진 시기에 태어난 일명 ‘혼 래빗 키즈’가 몇 년만 있으면 다들 성인이 된다.

그건 한창 때 청년들이 갑자기 늘어나게 된다는 의미였고,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로 변할 수 있었다.

물론 상당수는 치안대나 옷감 공장에서 일하거나 에테 마을로 넘어가 새로운 경작지를 조성하고, 손재주가 좋은 사람들은 에보니 마을에서 가죽 세공 장인이 되겠지만 이제 그 정도로 소화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간 것이다.

당장은 큰 문제가 없지만 이제 한두 해가 지나기 전에 실질적인 문제로 떠오르게 될 텐데 얼마 전 지온이 이를 미리 발견해 로빈에게 보고했었다.

그때 로빈은 예전부터 구상했던 의학 단지를 이야기하며 괜찮은 물건을 발명하기만 한다면 상당히 많은 청년을 이쪽으로 넘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물건을 제대로 만들어 팔려면 재료의 수급부터, 용기의 생산, 심지어 수송까지 수많은 인력이 필요하니 이 정도만 해도 작은 영지의 청년들을 모두 흡수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을 미리 계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시기는 절묘하게 잘 맞아떨어졌다.

“그래, 뭔가 필요할 거 같았어. 일하고 싶어도 못 하는 게 얼마나 엿 같은 건데. 전생에서도 베이비 붐 세대 때문에 이래저래 정말 끔찍했지. 자리는 한정되어 있는데 사람은 많으니, 원. 단순 노동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런 걸 많이 따지는 곳은 아니니, 괜찮을 거야.”

물론 기사나 마법 공학자처럼 거의 타고나는 업종을 제외하고는 직업의 귀천이 그리 심하지 않은 이곳 세계였기에 생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빠르네. 실비도 각 잡고 만드니 뭔가 대단한 게 나오는 건가? 하긴 그 녀석도 천재긴 하니까. 좋아. 영지 일은 어차피 지온이 잘해주고 있으니, 나는 우선 존을 기다리면서 앞으로의 계획이나 점검하고 있어야겠군.”

* * *

로빈이 황태자와 힐데 후작에게 정신이 팔린 그 시점.

영지에서는 새로 만든 약품의 임상 시험(?)이 한창이었다.

“멍청아, 이거 진짜 좋은 거라고.”

“뭐? 이 꼬맹이가……. 또 무슨 이상한 걸 가져온 건 아니겠지?”

갑작스럽게 나타나 이상한 물약을 내밀어서인지 의심스러운 눈으로 실비아를 노려보는 린.

하지만 실비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약품의 성능을 설명할 뿐이었다.

“뭐? 진짜? 그런 약이라고? 이게 말이나 돼?”

“그래, 그러니까 빨리 먹어. 네 체질에 맞춰서 영구적으로 효과를 보는 거니까 굳이 계속 복용할 필요도 없어.”

“와……. 미친 꼬맹이. 체질에 맞춘 영구적인 거라고? 너, 진짜 천재가 맞긴 하구나? 그런데 나한테 이런 걸 줘도 되는 거야? 우리가 이런 사이가 아닐 텐데. 무슨 부작용이라도 숨어있는 건 아니겠지?”

린의 의심은 합당했지만, 실비아는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바보냐? 그래봤자 나만 영주님한테 미움받는 거지. 그리고 너도 들었을 거 아냐? 이번에 영주님이 찾아낸 정실감이 만만치 않다는 거.”

“…그래. 인정하긴 싫지만 나보다 예쁘다더라. 그래도 외모에는 자신 있었는데 기운 빠졌어.”

로빈은 모르고 있었지만 다렌은 사실상 첩자나 다름없었다. 마리아나와 은밀히 내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빈의 근황이 궁금할 수밖에 없던 마리아나가 미리 말 잘 듣는 다렌을 로빈의 옆에 붙여놓은 것이다. 그리고 마리아나의 권력 남용은 린은 물론 제필조차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물론 다렌도 무슨 의도가 있어서 마리아나를 따르는 건 아니었다. 영주의 어머니이기도 하고 그녀가 아직은 영지의 안주인이었기 때문에 영주의 일을 당연히 알아야 한다고 단순하게 생각한 것이었다.

입 싼 다렌은 앤의 존재를 확인하자마자 쾌재를 부르며 영지에 연락을 넣었다. 그리고 연락을 받은 마리아나 역시 그리 입이 무거운 사람은 못 되었고.

덕분에 입에서 입을 타고 퍼진 소문은 불과 며칠 만에 영지를 달구기 시작했는데.

물론 자신들의 영주에게 관심이 많은 그레이츠 백작령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