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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166화 (166/303)

166화

소문이란 게 원래 그렇지만 입에서 입으로 넘어간 소문은 점점 그 덩치를 불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린과 실비아가 소문을 접했을 때 앤은 이미 엄청난 외모에 우아한 태도, 심지어 경험도 많아 첩실들을 쥐락펴락할 정도의 수완가로 탈바꿈해 있었다.

그러니 아직 로빈을 겟하지 못한 실비아와 린이 이 소문을 듣고 긴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재수 없으면 정실의 치맛바람 때문에 완전히 뒤로 밀려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 그 약은 이미 마님이랑 작은 마님, 그리고 스승님까지 드신 거야. 나도 물론 먹었고. 그러니 너도 그런 걱정 하지 마. 유일한 부작용이 있다면… 성욕이 좀 늘어나는 거? 하지만 그건 상관없잖아?”

“그래? 그 정도라면…….”

이렇게 새로 등장한 강력한 라이벌 덕분에 투덕거리기만 하던 둘이 처음으로 뜻을 합치게 되었는데.

로빈으로서는 정말 불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 *

존이 황도에 도착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사흘 남짓.

“그래, 내가 무슨 천재도 아니고 뭔가 획기적인 계략을 세우는 건 무리지. 하지만 적어도 황태자를 자극하면서 힐데 후작에게 경각심을 가지게 만들 순 있어.”

대충 생각을 정리한 로빈은 그때까지 앤과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물론 그냥 놀기만 하는 게 아니라 3황자에게 뭉쳐있는 3황자파 귀족 자제들의 움직임도 살피며 겸사겸사 시간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일주일에 두 번뿐이지만 영지학 수업도 들어야 했기에 사실상 어쩔 수 없는 판단이기도 했다.

“이거, 좀 미안하네. 그래도 사귀는 건데 벌써 며칠 만이야? 사귀자마자 뺨을 맞아도 시원찮은 일이구만.”

수업이 한참 남은 시간에 만나 식사를 하고 수업에 들어가기로 한 로빈은 혼자 약속 장소를 향하고 있었다.

제 호위 기사인 듀발이나 다렌을 항상 앤에게 보내고 있었기에 이제는 혼자 아카데미를 다니는 것도 익숙한 일이 되었다.

물론 저는 거의 아카데미에 나오지 않고, 기숙사에서 지내는 앤은 저보다 많은 수업을 듣기 때문에 괜히 걱정되어 그런 거였지만 기사나 앤 모두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특히 오늘 앤을 호위하는 다렌은 정말 열광적으로 반기고 있었는데.

“애니? 앤의 시녀한테 반했다고? 하여간 이 녀석도 정말 금사빠라니까.”

그 이유가 앤의 시녀인 애니라는 여자 때문이라니 너무 다렌다워서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다렌이 주위를 살피는 가운데 앤이 고양이 한 마리를 괴롭히고(?) 있었다. 들고양이는 아니고 기숙사 앞에서 키우는 고양이인데 고양이 주제에 제법 잔망스러운 데가 있어서 인기가 많은 녀석이었다.

도도하게 생긴 주제에 귀염을 떠는 게, 마치 앤과 좀 비슷하다고 생각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저렇게 앉아있으면 보이는데. 설마 일부러 저러고 있는 건 아니겠지?”

단정한 블라우스에 몸에 밀착되는 짧은 스커트를 입은 앤.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패션이었지만 쪼그리고 앉아있어서 그런지 허벅지가 훤히 노출된데다가 그 사이에…….

물론 교묘하게 다리 사이로 잘 가려지고 있었지만, 자세히 보면 보일 수 있는 위태로운 자세였다. 그리고 로빈이 다가오자 반갑게 손을 흔들던 앤이 슬쩍 허벅지를 열어버린다.

“허.”

너무나 자연스러운 연출이라 무방비한 애인의 모습에 불만스럽던 로빈도 허탈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저런 속옷을 입고 저렇게 노골적으로 움직여버리면 저 의도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왠지 고개를 돌리면 꿀리는 거 같아 강한 척하면서 앤을 일으켜 세웠다.

“검은색이 잘 어울리네요. 가터벨트도 예쁘고요.”

“그렇죠? 헤헤. 자랑하고 싶어서요. 오늘은 힘 좀 내봤거든요, 후배님.”

자신의 뻔뻔한 태도와는 상관없이 예쁘다는 말에 더욱 환하게 웃으며 기뻐하는 앤.

이거야, 원. 정말……. 이쪽의 연애는 정말 종잡을 수가 없었다.

“로빈. 앞으로는 로빈이라고 부르세요.”

“네. 그럴게요, 로빈. 그럼 앞으로 앤이라고 불러주세요. 말도 놓으시고요.”

자신이 선배면서, 게다가 연상이면서 왜 나한테만 말을 놓으라는 거야?

의아해하는 로빈의 마음을 읽었는지 앤이 덧붙였다. 물론 그마저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제가 섬기는 남성분이잖아요. 당연히 말을 높여야죠.”

이게… 어디서 들어본 말인 거 같은데. 뭐였지?

모야족? 아니지. 거기는 그냥 대놓고 주인님이라고 부르잖아?

하지만 로빈의 생각은 길게 이어질 수 없었다. 앤이 로빈의 팔을 살짝 잡아끌며 식당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식당으로 가요, 로빈.”

“가시죠. 아가씨. 영주님.”

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 우리를 식당으로 안내하는 다렌. 자신보다 앤을 더 보호하듯 걷는 게 누구의 기사인지 분간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앤을 안주인 모시듯 모시는 다렌의 모습이 그리 나쁘게 보이진 않았다. 그만큼 앤을 잘 지키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 바보 녀석이 접근하진 않았지?”

뭔가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눈치가 빠른 다렌이라 로빈의 말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네, 영주님. 다른 영식이 접근하려고 했지만 먼저 나서서 막았습니다.”

“음…….”

“사자의 분노를 맛보고 싶으면 알아서 하라고 했더니 짜증을 부리며 물러가더군요.”

“그래.”

원래 백작 정도로 그런 만용을 부리면 좀 곤란하지만 이번 시즌에는 이상하게 귀족 자제들의 가문이 신통치 않았다. 오히려 크라우 백작 영애와 크레톤 후작 영애가 가장 꼭대기에 있을 정도였으니까.

물론 공작가가 셋, 후작가가 다섯, 그리고 백작가가 열둘인 걸 생각하면 그 수가 적은 것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게다가 후작의 경우 대부분 영지 귀족이 아니라 관료 귀족이었기 때문에 변경백의 힘이 이보다 미약하다고 하기도 좀 애매했다.

그나마 로빈을 위협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3황자와 조셉 공작의 막내아들 정도인데, 그 둘이 앤에게 접근할 리는 없으니 저런 만용을 부릴 수 있는 것이다.

“고마워요, 로빈.”

“고맙긴. 당연한 거지.”

앤에게 접근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는 일.

진심으로 그녀를 가질 생각이었으니 이 정도는 당연했다. 덕분에 눈치만 보고 있던 쭉정이들이 앤에게서 떨어져 나간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었고.

사실 로빈이 계속 그녀와 같이 있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그건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식당은 역시 한산했다. 평민들이 쓰는 건물로 넘어간다면 말이 다르겠지만 이곳은 귀족 전용 식당이었으니 말이다.

아카데미는 귀족과 평민으로 나누어 가르치고 있었다. 배움에는 귀천이 없고, 학생의 신분으로 우린 평등하다는 말 따위가 제대로 지켜질 리 없다는 생각에 아예 구역을 나누어놓은 모양이다.

그래서 이쪽은 황실 귀족 아카데미, 그리고 저쪽은 황실 아카데미였다.

물론 다른 쪽으로 넘어갈 수 없는 건 아니었지만 교복 자체로도 서로를 구별할 수 있게 해놓아서 오히려 사고가 거의 없는 편이었다.

귀족과 같은 아카데미에서 수학하면서 평민이 얻는 이득은, 평민에 비해 수백 배가 넘는 수업료를 납부하는 귀족 덕분에 수업료가 저렴하다는 것과 지방 귀족과 접촉해 지방 영지에서 관리로 임관할 기회를 얻게 된다는 거였다.

아카데미 졸업자를 황도에서 모두 소화할 수 없기 때문에 지방 쪽으로 진출하는 것도 제법 중요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로빈도 앤을 발견하지 않았으면 관료 지망생들을 한번 살펴봤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다른 전문직 지망생들도 있지만, 그들은 따로 더 배워야 했다. 솔직히 여기서 인재를 뽑아간 황태자가 말도 안 되는 거였으니 말이다. 여기를 졸업하고 따로 더 연마해야 본격적으로 쓸 만해지는 건데 그걸 미리 채가다니.

실비아는 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런 애가 흔했으면 우린 이미 다른 세상에 살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관료만을 생각한다면 웬만한 녀석보다도 앤이 훨씬 나았다.

마누라 겸 영주 대리.

정말 환상적인 포지션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인구가 늘어나면서 하급 관료들도 좀 필요할 테니 훑어보긴 해야겠네. 제대로 된 인재들은 그 양반이 다 빼갔겠지만 무난한 애들은 아직도 남아있겠지. 혹시 황태자가 졸업한 2년 사이 무슨 대단한 녀석이 들어왔을지도 모르겠고.”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데 앤이 좀 뾰로통했다.

“로빈은 저랑 있을 때 자꾸 다른 생각을 하는 거 같아요. 제가 마음에 안 차세요?”

또 병이 도져 실수했네. 이걸 어쩌나.

난처함을 느끼던 로빈은 이대로 그냥 지나칠 순 없어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여자를 달래본 적은 한 번도 없어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한 것이다.

“미안, 앤. 앞으로는 좀 더 집중할게.”

하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히 마음이 풀리는지 다시 웃음을 되찾은 앤.

확실히 저쪽 세상보다는 연애가 쉬운 느낌이었다. 물론 가진 것도 그때보다는 지금의 로빈이 훨씬 많았지만 말이다.

식당에 도착한 로빈은 구석에서 어떤 여성과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진 레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수로 벌써 저렇게 짝을 구했는지 신기하긴 하지만 굳이 아는 척하는 건 바보짓이라는 생각에 슬쩍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리려는데 눈 좋은 이 녀석이 그새 눈치채고는 큰 소리로 불러대고 있었다.

역시 도움이 안 되는 녀석이었다.

“로빈! 왜 이렇게 얼굴 보기 힘든 거야?”

레닌의 목소리가 제법 커서인지 다른 사람들까지 흘끔흘끔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특히 저쪽에 모여서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던 3황자와 귀족 자제들은 노골적으로 묘한 눈빛을 쏘아 보내는 중이었는데.

썩 달가운 일은 아니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고 레닌의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에게 말을 걸며 눈으로는 3황자와 그 무리를 슬쩍 훑어봤다.

“난 수업이 하나뿐이라서.”

“으악, 말도 안 돼! 기만자!”

평소보다 더 자신만만해하고 열정적인 3황자를 보니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게 분명해 보였다. 물론 저런 놈을 믿고 내막까지 모두 밝히지는 않았겠지만, 조만간 좋은 일이 있을 거란 정도의 언질이 있지 않았나 싶다.

적어도 조셉 공작이 원작처럼 뭔가 일을 꾸미는 것만은 확실한 거 같았다.

어쨌든 자기가 황제가 되려면 황태자를 쳐내야 하는 건데 그걸 그렇게까지 하고 싶을까? 아무리 능력이 없다 해도 그걸 모를 리는 없는데, 제 형을 죽여서라도 황제가 되고 싶다는 거지?

능력도 없는 놈이 욕심만 그냥, 이러니 황태자에게 친족 혐오가……. 응?

3황자의 모습에서 황태자의 친족 혐오까지 떠올린 로빈은 허탈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2황자와 1황녀를 구하는 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왜 그래, 로빈? 야! 아니야. 네 여자한테 눈독 들이는 거 아니거든. 오해는 하지 마라. 나도 라빗츠 영애가 좋은 분을 소개해 주셨다고!”

레닌이 앤을 격하게 반겨줄 때 한숨을 내쉬어서인지 이 녀석이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다.

그런데 저 농염한 영애를 앤이 소개해 준 거라고? 며칠 만에 그럴 수도 있는 건가?

이 여자 이거……. 은근히 계략녀 아냐?

다렌은 이미 자기편으로 만들었고 듀발도 은근히 앤을 반기는 분위기였다. 듀발이야 단지 린과 대적할 수 있을 거 같은 세 보이는 외모가 마음에 들어서인 거 같지만 말이다.

“호호. 자이트 영식이 생각보다 재미있는 분이더라고요. 루하사 영애랑 잘 어울린다고 할까요?”

레닌 옆의 저 농염한 누님 스타일의 영애는 루하사 남작 영애인데 밝히는 미청년이 취향이라고 한다.

그렇게 보면 딱 레닌하고 어울리는 짝이긴 했다. 무슨 이유에서 앤이 벌써 레닌과 안면을 튼 건지는 좀 의아했지만 말이다.

“자이트 영식께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 뭐예요. 영지에 로빈의 첩실이 둘이나 있다는 이야기도요. 엄청 예쁜 분들이라죠?”

설마 이런 목적으로? 게다가 이 녀석은 벌써 그걸 불었고? 물론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벌써 이래서야…….

하지만 앤의 표정을 보니 전혀 기분 나쁘거나 질투하는 거 같진 않았다. 너무 담백해서 오히려 김이 빠질 정도였으니까.

“그레이츠 백작, 팔자 좋구만. 형님이 큰일을 앞두고 계시는데 참 태평해. 형님을 지지하는 귀족들은 다 이 모양이니 정말 답답할 노릇이군. 하긴 그것도 결국 형님의 그릇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거지. 남작가의 피를 이은 주제에 황제가 되겠다니. 개도 웃을 일이 아닌가.”

그렇게 앤과 이야기하고 있는데 식당 밖으로 나가던 3황자가 이쪽으로 오더니 쓸데없이 속을 긁는다. 딱 삼류 악당 같은 표정인 것도 어이없었는데 마지막에 앤을 혐오스럽다는 듯이 그렇게 훑어보고 사라지는 건 정말 짜증 나는 일이었다.

진짜 황자만 아니면…….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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