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원래 황자면 신분을 숨기는 게 정상 아닌가? 황족이 굳이 아카데미에서 수학하는 것도 그런 목적에서잖아?”
“그거야 그런데.”
“3황자는 그냥 대놓고 다니네. 최소한 염색 정도는 해줘야 하는 거 아냐?”
레닌도 생각은 있는지 저 3황자가 정상이 아니란 건 느끼고 있나 보다.
그런데 진짜 조셉 공작은 뭐 하는 거지? 황태자고 뭐고, 우선 자기 조카부터 인간 만들어야 하는 거 아냐?
하긴 그게 안 되니까 결국 황태자를 없애버릴 수밖에 없는 거지만 참 황당하긴 했다. 잘못된 가정 교육의 폐해를 그대로 목격한 기분이었으니 말이다.
다행히 앤은 그리 충격받은 거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속이 쓰릴 수밖에 없었는데.
저런 게 익숙해질 정도로 한결같은 대우를 받아왔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사실 티타임 때도 2황녀가 1황녀를 없는 사람 취급했었다.
그것도 결국 황후의 문제이리라. 그녀가 자신의 자식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가르쳤을 테니까.
조셉 공작조차 자기 여동생인 황후에게 뭐라고 하지 못한다니 그녀의 성정이 어떨지 알 만했다. 덕분에 그 끔찍한 곳에서 하루빨리 앤을 빼와야겠다는 생각만 강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지나고 남은 강의까지 마친 후 잠시 앤과의 데이트를 즐긴 로빈.
그때 슬쩍 첩실에 관하여 물어봤는데 앤은 오히려 그게 뭐가 문제냐고 그에게 되묻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그런 면에서는 또 지극히 귀족 여성스러운가 보다. 황족이라서 뭔가 다른 프라이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은근히 걱정했는데 전혀 아니라고 할까?
어쨌든 그렇게 존이 오기 전까지 며칠 동안은 앤과 시간을 보냈다.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이상하게 타이밍이 안 나와 가슴 이상의 진도를 빼지 못한 거랄까?
마치 퀘스트를 완료하기 전까지는 먹을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거 같아서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한다. 벤치에서 키스 후 가슴 그리고 팬티 안쪽까지 스트레이트로 달리려는 순간 갑자기 눈인지, 비인지 모를 무언가 쏟아지는 건 그냥 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비 오는 벤치에서 폭풍 섹스를 즐기는 것도 대단히 자극적인 일이지만 여름도 아니고 지금 그랬다가는 쓸데없이 몸만 축나게 될 것이다.
“그래도 그 미친 탄력과 그립(?)감은 계속 즐기고 있으니 이 정도로 만족해야지. 탱글탱글한 게 진짜…….”
* * *
며칠 후 드디어 존이 로빈의 저택을 찾아왔다. 사전에 논의한 대로 최대한 정체를 숨긴 채 식료품 상인으로 위장해 들어온 것이다.
“영주님. 하하. 이젠 어른이네요. 몇 년 사이에 이렇게까지 크신 겁니까?”
“그때가 성장기잖아요. 잘 왔어요, 존. 별문제는 없죠?”
존은 우버 마을에 자리 잡고 마을에서 가장 큰 여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외지인이 가장 많이 들르는 곳이었고 신전에서 즐기고 난 후에도 이쪽 여관을 찾는데다가 가끔은 신관들이 여관으로 출장(?) 나오기도 해서 외지인들의 동정을 살피기에 가장 좋은 곳이었다. 물론 여관에서 나오는 수익도 만만치 않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렇게 안정적으로 정착한 지도 벌써 몇 년이나 지났는데 힐데 후작이란 말을 듣고 와서인지 눈빛만은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음의 응어리란 게 그리 쉽게 풀어지는 게 아닌 모양이다.
“네, 마을이야 항상 그렇죠. 딱히 사고를 치는 외지인도 거의 없고요. 가끔 술 먹고 개가 되는 인간들이 있긴 한데, 그거야 뭐… 일상이죠.”
“그래요, 존. 제가 부탁할 게 하나 있어서 불렀어요. 물론 부탁이니까 거절해도 괜찮아요. 생각보다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이거든요.”
“말씀하십시오, 영주님.”
로빈이 그동안 세운 계획을 대충 설명하자 표정이 점점 심각해지는 존.
아무래도 위험성 여부와 실현 가능성을 계산해 보는 거 같았다. 아무리 복수도 좋지만, 처자식이 있는 몸이니 자신의 안전을 도외시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당연히 그런 건 로빈 쪽에서도 사양하고 싶었다.
하지만 일이 일이다 보니 무조건 안전하다고 장담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선택권을 존에게 넘긴 건데.
물론 로빈이 알고 있는 그의 능력이라면 그렇게 위험하진 않을 것이다.
“브릴리언트 캣이… 황태자 전하의 정보통이란 거군요.”
“그래요. 그래서 거기서 작업하면 황태자 전하께 넘어가게 돼요.”
“음.”
“물론 그렇다고 당장 무슨 성과가 나진 않을 거예요. 너무 과하게 작업을 치면 전하께서 믿을 리가 없잖아요? 오히려 의심만 사겠죠.”
“그렇군요.”
“하지만 적어도 경각심을 깨울 순 있을 테고, 그렇게 되면 힐데 후작이 앞으로 하는 일에 제동이 걸리는 것만은 분명해요.”
“어쨌든 한 방 먹여줄 순 있다는 거군요. 그런데, 이걸 황태자 전하께서 믿겠습니까? 그저 서신 한 장에 불과하잖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위험한 내용을 뜨내기한테 들려 보내는 것도 좀…….”
로빈도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저도 물론 그렇게 생각해요. 일반적인 상황이면 당연히 의심부터 하겠죠. 그런데 지금은 시기가 아주 좋아요. 요즘 황도의 검문 수준이 엄청나거든요.”
요즘 황도를 나가는 성문은 물론 거리에서까지 대대적인 검문이 계속 진행 중이었다.
황도 내에 숨어있는 암살자들을 모조리 색출하기 위해서인데, 특히 검을 조금이라도 다룬 흔적이 있으면 여지없이 검문을 당하게 된다. 그나마 검문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신분이 확실한 귀족이나 기사, 그리고 검을 전혀 익히지 않은 무지렁이들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서신을 자신의 기사에게 맡긴 순 없겠죠. 조셉 공작의 기사가 황도를 나서는 순간 당연히 꼬리가 붙을 테니까요. 최대한 비밀리에 서신을 보내는 게 목적이라면 오히려 전혀 예상하기 힘든 무지렁이가 맞지 않을까요?”
“그래서 하인을…….”
“그리고 서신을 제대로 밀봉해서 상대가 의심하지 못하게 할 거예요. 그 있잖아요? 마법 패턴을 넣어서 억지로 열려고 하면 불타버리는 거요. 그걸 쓰면 이게 가짜라는 생각은 쉽게 하지 못하겠죠.”
“…그런 걸 쓰면 너무 열기 어려워서 오히려 손해가 아닐까요? 그쪽에서 이 서신을 확인하지 못할 수도 있잖습니까? 그것도 하루, 아니 밤사이에 열어야 의미가 있는 건데.”
“아아, 그건 걱정 마세요. 그쪽 수장이 생각보다 더 능력자라서 문제없을 거예요. 그것도 못 열면 황태자의 정보통이란 타이틀을 떼버려야죠.”
로빈의 설명을 들고 보니 제법 그럴싸해서 존도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가 아직 남아있었다.
“결국 처음으로 돌아왔네요. 황태자 전하께서 과연 이걸 진짜 믿을 것인가? 그분이 꽤 영민한 분이라던데 이런 허술한 서신을 믿으실지…….”
“그렇죠. 저도 그걸 가장 신경 썼으니까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저만의 무기가 하나 있긴 하더라고요.”
“무기요?”
“네. 이거면 황태자도 믿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로빈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존은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자신이 이 일을 맡겠다고 나섰다.
“저도 한을 풀긴 해야죠. 언제까지 가슴속에 분노를 안고 살 순 없으니까요. 이 일이 어떻게 진행되든 이번 일로 힐데 후작에 대한 원한은 잊으려고 합니다.”
“그러세요. 물론 쉽지 않겠지만 잊고 잘 사는 게 가장 좋은 복수라고들 하잖아요.”
“네, 영주님.”
“그래요. 그리고 상대가 만만치 않으니까 절대 정체를 들키면 안 돼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도주 생활만 10년이나 겪은 접니다. 몰래 도망치는 데에는 이골이 났으니까요.”
확실히 도주와 위장으로는 존을 따라갈 사람이 많지 않았다. 둘 중 한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 모두를 수준급으로 구사하는 사람을 찾으려면 더 어려울 거고.
그래서 이쪽 방면으로는 존을 믿을 수 있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고. 황태자 전하께서 어떻게 행동하냐가 문제겠군. 적어도 며칠은 있어야 할 테니 진득하게 기다려보실까?”
* * *
그렇게 로빈이 마음을 가다듬고 있던 다음 날.
주노가 찾아와 자신이 조사한 자료를 내밀었다. 예전에 로빈이 부탁한 2황자와 1황녀에 대한 자료였다.
“아무래도 황족에 대한 자료라 최대한 조심스럽게 모았습니다. 특별한 건 너무 위험해서 손대지 않았고 사람들이 어느 정도 알 만한 자료들을 모아온 거라 도움이 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2황자의 행적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올리겠습니다. 아직 정리 중이라서요.”
“그래요? 잘하셨어요. 괜히 다른 사람들을 자극할 수도 있으니 이게 차라리 나아요.”
소설에서 2황자와 1황녀의 비중은 깃털보다 가벼운 수준이었다. 모함을 당한 2황자가 자결하고, 1황녀는 팔려 나가듯 남부 연합국으로 시집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1회 차 황태자의 어린 시절도 그저 몇 줄로 요약되어 있었기 때문에 로빈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알 방법이 없었다.
원래라면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라 흐르는 대로 내버려두려고 했지만, 이제는 앤이 걸려있으니 제대로 접근해 볼 생각이었다.
주노가 떠나고 난 후, 바로 자료를 펼쳤다.
“2황자인데… 황태자보다 나이가 많네? 응? 게다가 가장 먼저 황제와 이어진 게 평민인 1황비라고? 전 황후가 아니라?”
황실의 가정사가 생각보다 복잡했다.
룩센 대제가 젊을 때 암행을 나갔다가 만난 게 지금의 1황비이자 2황자와 1황녀의 어머니인 소피아. 그리고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 그날 바로 거사를 치르고 황비로 삼았다.
“뭐야? 둘은 연애결혼이라고?”
가족에게까지 의무와 권위를 강조하는 룩센 대제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1황비 소피아라는 이야기에는 로빈도 당황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설명에는 귀족들의 성화로 결국 황후를 들이긴 했는데 애정보다는 정략에 묶인 사이라 그리 다정하지는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사실 귀족들의 기를 꺾으려고 일부러 한미한 가문의 여성을 고르고 골라 황후로 삼은 거라 더욱 그랬을 것이다. 확실한 목적이 있는 결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황태자를 낳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망.
결국 다시 황후를 들일 때는 귀족들의 요청을 꺾지 못하고 고위 귀족인 조셉 공작의 여동생을 새로운 황후로 맞이하게 된다.
“…이거 생각보다 콩가루인데.”
그냥 낭설이라고 적혀있지만, 왠지 사실처럼 느껴지는 주석에는 황후의 자리를 노리는 조셉 공작 쪽에서 전 황후를 독살했을 수도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미치겠군. 그러니까 힘 있는 황제가 그걸 그냥 넘어갔다는 거잖아? 분명 파고 파면 어느 정도 증거는 찾을 수 있었을 텐데, 황후보다 정국의 안정을 선택한 거네. 그리고 황태자 역시 지금은 그걸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고.”
게다가 가장 어이없는 건 그 와중에도 황비만은 안전했다는 거다.
현 황후의 성정을 생각하면 자신보다 더 사랑받는 황비가 눈엣가시일 텐데 아직까지 무탈하다는 건 그만큼 황제가 신경 쓰고 있다는 의미였다.
물론 황비 소생인 2황자는 사실상 황위 계승권이 없기 때문에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런 거치고는 또 2황자나 1황녀에 대한 대우가 너무 별로인데. 황비와는 별개라는 건가? 황비와 그렇게 각별하다니 둘을 가볍게 여기고 있진 않을 텐데.”
그리고 자료의 나머지 부분에는 황자나 황녀들이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는지 기록되어 있었다. 그 당시 궁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보고 느낀 거 정도였는데 몇 가지 인상적인 부분이 있었다.
황태자를 키운 게 현 황후가 아니라 1황비였다는 것. 그리고 그 상황에서도 황태자는 꾸준히 암살 위협을 받았다는 거였다.
대놓고 암살 위협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진 않았지만 일련의 사건들을 살펴보면 솔직히 암살 위협을 받은 거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게다가 더 악질적인 건 황자가 정말 죽게 되면 아무리 조셉 공작가라도 멸문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죽지 않을 정도로만 괴롭힌 것이다. 그나마 황제의 힘이 대단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1황비는 어쨌든 황태자를 극진히 보살폈다. 위협은 못 막아주면서 따듯하게 보살피긴 했다라. 이건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려나. 게다가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 아버지라.”
솔직히 지금까지는 그리 관심 없었던 황실의 이야기를 보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참 더럽게 꼬인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는 단순히 온갖 위협 속에서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거절할 줄 모르는 좋은 사람이었다고 적혀있었지만, 이건 솔직히…….
“그냥 자기 보호 아니야? 자신을 보호해 줄 사람 하나 없으니 더 좋은 아이인 척한 거지. 그런데 아비란 놈이 그것도 모르고 황제가 되려면 독심을 키워야 한다면서 그걸 방치했으니.”
물론 황태자가 그 당시에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다음 화에서 계속)